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낯선 일이다. 이성을 보고 불현듯 가슴이 설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그 사람을 계속 떠올리며 히죽거리고, 만나면 자주 ‘정줄’을 놓게 되고,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여름에도 찰싹 붙어 다니는 이 기이한 현상들... 지금도 주변을 둘러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전국에서는 주말마다 남남이었던 수백 쌍의 커플이 결혼을 한다. 결혼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그 기저에 '므흣한' 스킨십과 섹스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그것이 이전에 가능했다 해도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즐거움이 분명 존재한다. 뭐랄까, 이제는 부모에게 쉬쉬하지 않아도 되는 쾌락이라는 점에서 결혼이라는 굴레가 더 은밀한 자유를 허락하는 역설적인 묘미가 있는 셈이다.
사실 이번 글은 쓰면서도 도대체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지금도 쓸 말보다는 쓰지 않을 말들에 대한 머릿속 계산 속도가 더 빠르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부터 나는 여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그건 마치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의 확신'처럼 내겐 자명한 진리 같았다. 나는 부드러운 남자고 여자들과 말도 잘 통하고 이성교제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으니, 이 결혼이 아내에겐 참 '남는 장사'일 거라는 황당한 자기확신 같은 게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기대와는 달리 우리 부부는 여전히 육체적으로 친밀하지 않다. 오히려 대화로 더 즐거움을 얻는 편이다. 결혼을 하고 나면 청년시절에 꿈꾸던 '나쁜 짓'을 대놓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그 '나쁜 짓'이라는 게 삶의 다른 일상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사이의 온갖 정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불행히도 남성으로서의 내 문제도 발견했다. 성관계를 몸의 대화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아내와의 기나긴 대화 끝에 갖는 ‘스트레스 해소’의 시간으로 여겼다. 그래서였을까. 아내와 몸으로‘도’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내겐 피곤하면서도 일정 부분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그 무엇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결혼 직후에는 야릇한 긴장감을 즐기며 섬세하게 배려하고자 노력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적 본능 사이에서 나는 심한 내적 분열을 경험했다.
솔직히 나는 부부관계에서 육체적 교감에 관한 어떤 지식도 경험도 없었다. 물론 책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욕구를 참는다거나 아내의 반응을 살핀다거나 하는, 이런 식의 몸의 대화가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았다. 매순간 아내와 교감을 나눠야 하는 상황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몸은 잘 따라오지 않았다. 아니 그 상황 자체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는 '몸을 통해' 즐거운 날들도 있었지만 나의 즐거움이 아내에겐 도리어 불쾌감을 주기도 했다. 아내 또한 성적인 대화가 편하지 않았기에 대놓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간혹 정서적 불편함을 표현하곤 했다. ‘여자는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야?’ 몸의 대화가 점점 불편해졌다. ‘구원의 확신’만큼 확실하던 내 성적 자존감은 어느덧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 어딘가를 서성이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내 고민은 우리 사회의 보다 깊은 영역에 똬리를 틀고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른바 부부 사이의 성적 역학관계라고 해야 할까.
가부장적인 한국사회 남자들의 대다수는 섹스에 관한 한 여전히 일방적인 성향이 강하다. 자신의 욕구에 대해 매순간 여성이 이해하고 받아줄 것을 기대한다. 통계적으로 여성들의 상당수가 자신은 즐겁지 않더라도 남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성관계를 갖는다고 한다. 섹스가 두 사람 사이의 또 다른 대화의 형태가 아닌 아내의 일방적 봉사인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주변에서는 육아에 지친 아내가 잠자리를 거부한다고 불평하는 남편들의 당당한 하소연도 종종 들린다. 한때 아내가 가입했던 인터넷 출산육아 카페에서 남편의 성욕해소를 위해 임신 중에 유흥업소 출입을 방관했던 엄마들 이야기를 읽었다.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 글에 공감의 댓글을 다는 아내들도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교회 안의 결혼예비학교에서도 사역자들이 공공연하게 남편의 성욕을 아내가 ‘긍휼한 마음’으로 해소시켜줘야 한다는 말도 한다. 이렇듯 부부간의 섹스는 내 세대에서조차도 여전히 남편의 성욕을 받아주거나 아니면 받아줄 수 있는 다른 방법마저도 허용하는 느낌이 강하다.
남성의 성욕을 언제나 긍정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남성의 전부인 것처럼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 말이 불편하다면 고쳐 말해서 성욕이 해소되지 않을 때 그의 전 인격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아내가 잠자리를 거부할 때면 그 순간만큼은 전 존재가 거부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성욕의 좌절 그 이상의 감정적 동요에 휩싸였다. 나는 이것이 남성의 성욕을 절대시하는 이 사회가 개별 남성 한 명 한 명의 깊은 내면에 뿌리내린 부정적 영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흔한 말로 부부싸움 후의 섹스에 대한 농담이 그런 단적인 예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로 잠자리(성욕의 해소)를 들지만, 이것이 아내의 입장에서는 ‘신앙적 긍휼함'이었거나 '굴욕적 외교행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교회는 자주 부부관계를 하나님과 그 백성 간의 관계에 비유하곤 했다. 미숙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것을 기대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줄 땐 환호했지만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길 원할 때는 불편해 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이라 일컫기도 했다. 혹은 아예 하나님을 떠나 풍요를 빌어주는 이방신을 섬기기도 했다. 나는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성경 속 백성들이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남편들과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결혼생활의 전 영역에서 모범 남편이 되고 싶어 하는 기대와는 달리, 나는 성적인 부분에 있어 왜곡되어 있고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아이가 태어난 이후의 현실적 문제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결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사실 아직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 그것이 남성인 내겐 구원이자 희망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