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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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 오빠 비와이에 대한 교회 진보 아재들의 우려가 많다.
가사에 비춰진 기독교적인 요소들이 걱정스러운 듯
도리어 교회오빠 비와이가 추구하는 힙합의 세속화를 권장한다.
.
일면 공감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생각 자체가 좀 낡았다는 느낌...
그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기독교적 요소를
차용했을 때 그 메시지를 형식에서 구별하려는 욕망이 
여전히 교회 아재들에게는 있는 것 같다.
.
한때 CCM은 세속 음악에 기독교적 메시지를 얹어서 전달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구현해왔다. 
그런 경험으로 음악을 이해하는 교회 아재들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음을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른다.
.
비와이의 랩 퍼포먼스에서 메시지를 세속화시키면
퍼포먼스 자체의 아우라가 사라진다. 
이른바, 미디어가 메시지인 셈이다.
낡은 틀로 새 포도주를 담으려 하지 말라. 
우리가 가진 생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시대는 가고 있다.


#2.
비와이. 기독교세계관 랩을 개척한건가.^^
그냥 몇가지 생각이 들어서 끄적이자면.
비와이 나이에 나는 어떤 생각을 했나 돌아보면
그의 가사에서 오는 기독교적 오글거림은 받아들일 만 하다.
.
허나, 나는 비와이를 지저스웨거로 부르면서
문화선교의 첨병으로서의 기대감을 비추는 교계 분위기에는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단순히 '기독교적인 컨텐츠'가 대중문화의 한 영역으로 
무리없이 자리잡는 부분에 있어서는 CCM을 넘어선 또다른
분위기가 감지되어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는 있겠지만.
.
기독교인들이 힙합씬에서 기독교적 메시지를 통해
힙합씬 자체에 자기들이 말하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겠다,
끼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방식은 단적으로 말해 
기독교 담론을 문화영역의 메타담론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
논리적으로 본다면 메타담론으로서의 기독교 컨텐츠는
결국 비기독교 컨텐츠를 대립, 정복, 변혁의 대상으로 본다.
그럴 경우, 
각각의 로컬담론으로서의 컨텐츠는 신의 반대영역으로 설정되고
결국 신의 창조물 자체에 대한 반대, 정죄가 이뤄지게 된다.
.
그 끝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비와이 만을 지지하는 자로
제한되고 그 하나님은 힙합씬과 대적하는 신으로 전락한다.
아마도 이 논리적 흐름이 지저스웨거 지지자들의 결말이 될 것이다.
2016/07/16 11:38 2016/07/1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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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가 주목하는 뮤지션 중에 루시드폴(Lucid Fall)이란 1인 밴드가 있습니다.
얼마 전 시사IN에도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번에 그의 감미롭고 세련된 음악은 용산 참사와 광주 항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그의 세상을 향한,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좋습니다.
그의 기사와 음악 몇 곡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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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으로 음악을 만드는 루시드 폴 
루시드 폴(사진)은 네 번째 앨범 <레 미제라블>에서 ‘소리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으로서의 노래’에 전력을 쏟았다. 그는 레 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로 앨범을 채우고 싶어했다. 

2008년 9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학술 콘퍼런스가 열렸다. 스위스 로잔 대학에서 생명공학 박사를 마친 뒤 연구를 계속하던 조윤석(35·루시드 폴)도 참가했다. 포스터를 붙이고 로비에 앉아 있던 중 홀연히, 행사장에 들어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자가 아닌 뮤지션으로 살아가야겠다는 돈오(頓悟) 같은 것이 그에게 찾아왔다. 루시드 폴로서.

그러나 돈오는 아니었다. 점오(漸悟)에 가까웠다. 인간을 치료하는 약의 개발을 위해 필연적으로 해야 한다는 동물실험이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른 연구자들은 조금만 익숙해져도 아무렇지 않게 흰 쥐의 목을 비틀 수 있지만, 그는 거부감을 버릴 수 없었다.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임상시험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그 대가로 돌아가는 게 밥 한 끼라는 사실에 끝까지 둔감해지지 않았다. 그런 나날의 결과였다. 그가 생명공학 연구를 그만두고 음악만 하겠다는 결심을 만든 시간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 7년간 유럽에서 쌓인 짐을 정리하고 한국행 편도 티켓을 끊었다.


    

 
2집 <오! 사랑>에 담긴 노래 제목이기도 한 서울 삼청동에 집을 구했다. 인적이 드문, 한번 들어가면 선뜻 나오기 쉽지 않은 그 집에서 그는 곡을 썼다. 네 번째 앨범이었다. 하지만 데뷔 앨범 같은 기분이었다. 루시드 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전, 그가 이끌었던 밴드 ‘미선이’의 앨범은 대학원에 몸담고 있을 때 낸 작품이었다. 2001년 루시드 폴의 데뷔 앨범은 방위산업체에 다니면서 만든 작품이었고, 2집과 3집은 각각 스웨덴과 스위스에서 공부하며 낳은 앨범이었다. 그는 애초에 음악계에 속해 있지 않은 주변인이었다. 한 번도 전업 뮤지션인 적이 없었다. “그동안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음악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내가 이질적인 존재인 것 같았다.”

네 번째 앨범 <레 미제라블>이 어떤 의미에서 데뷔 앨범인 건 그 때문이다. 이 앨범은 루시드 폴이 경계인의 신분을 떨쳐버리고 낸 첫 작품이자, 이제 전업 뮤지션임을 선언하는 출사표이다. 강박이 컸던 건 당연하다. “전에 있던 것 중 뭘 버리고, 뭘 가져가야 할까 고민했다.” 홀로 나일론 기타를 뜯으며 노래하는 곡은 안 싣기로 했다. 주위에서는 “그게 너다운 거다”라며 말렸다. 하지만 그는 관철했다. 연주에서의 클리셰(진부한 표현)를 버리기 위해서였다.

다른 이에게 연주를 맡기고 그는 ‘음악’이 아니라 ‘노래’에 집중하기로 했다. 멜로디와 코드와 가사를 만드는 데 전력을 쏟고, ‘소리’에 대한 고민을 덜어내기로 했다. 오선지에 멜로디를 쓰다가, 자신에게는 오선지보다 빈 노트와 펜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 후였다. 백지에 가사를 쓰고 거기에 맞춰 노래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그의 길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싱어송라이터란, 소리로서의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으로서의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루시드 폴의 4집 앨범 <레 미제라블>(위)은 지난해 말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용 산참사·광주항쟁 다룬 노래

그가 내려놓은 소리에 대한 고민을, 여러 사람이 나눴다. 앨범에 참여한 연주자들과 사전에 이야기를 나누고 편곡과 합주를 했다. 녹음을 3일 만에 끝낼 수 있었던 건 그래서다. 일류 세션맨들의 정갈한 연주와 1960년대 브라질 보사노바의 질감을 살린 12인조 오케스트레이션의 풍성한 스트링은 앨범의 사운드를 어느 때보다 고급스럽되 사치스럽지 않게 만들어냈다. 그 소리 위에서 루시드 폴은 노래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작고 작은 목소리로, 인터뷰 때 나눴던 대화를 녹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에 비해 많은 집중력이 필요한 그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노래한다. 넓지 않되 깊이 들어오는 멜로디를. 정갈한 들숨과 조붓한 날숨으로.

지난해 말 조용히 발매되어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던 <레 미제라블>의 타이틀 곡은 ‘고등어’다. 시장 좌판에 얹힌 고등어의 시점에서 지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노래다. 퇴근길 만원 버스에서 흘러나오기라도 하면 잠시 집중하며 가사를 음미하고 아주 옅은 미소를 짓게 될, 어느 물고기의 노래다. 그렇게 ‘고등어’가 세상을 헤엄치는 한편에는 용산과 광주가 있다.

용산참사를 노래한 ‘평범한 사람’과 광주항쟁을 다룬 ‘레 미제라블’. 그는 그 노래들을 “하고 싶었다”가 아니라 “하고 싶었겠지”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대문은 다시 지으면 된다. 하지만 피맛골을 다시 지을 수 있나? 피맛골을 지나가면 혈압이 오른다. 폭격 맞은 서울을 보는 것 같다. 4대강은? 거기 사는 새와 개구리는 어떻게 할 건가. 한 번 무너지면 재생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다. 그게 너무 슬프다. 용산, 그 안에는 끔찍한 논리가 있다. 거기서 얻는 막대한 이익을 아무도 나누려 하지 않는다. 단순히 사람이 죽은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애초에 사람이 없다.”


    

 
‘레 미제라블’은? 왜 지금 광주일까? “공권력이 개인을 파괴하는 행위는 너무 많다. 티베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 시짱(西藏) 위구르족에게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체첸에서도, 한국에서는 광주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나. 그래서 하고 싶어 했겠지.” 루시드 폴은 원래 그런 이야기들로 앨범을 채우려 했다. 레 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로.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다 외롭고 불쌍해 보인다.

처 음에는 잘사는 사람들은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많은 돈을 벌고, 열 살 어린 금발의 아내와 딸 셋이 있으며,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석학인 그의 지도교수는 하루 종일 하품을 하면서, 행복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그의 선배는 평소 밝은 성격인데 회사에서 공황장애를 앓았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로 앨범 하나를 만들려 했다.

그렇게 앨범 <레 미제라블>에는 나와 너,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들이 합쳐져서 ‘우리’ 이야기가 된다.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서정적인 것이 이런 멜로디와 사운드에 맞물려 있는 음반을 우리는 좀처럼 만난 적이 없었다. 구체적인 사건과 대상, 은유적인 묘사와 감성이 함께 머무는 앨범을 차트 1위에서 만난 적은 더욱 오랫동안 없었다. ‘미선이’ 시절부터 루시드 폴의 노래는 대체로 그러했다. 옷을 바꿔 입었다고 몸이 바뀌는 게 아니듯, 그는 일관된 방향으로 경계와 중심을 오가며 걸어왔다.

“내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어. 그래서 장기 공연을 하려고. 일주일에 하루 쉬면서, 한 달이든 두 달이든 노래하면 그보다 좋은 연습이 어디 있겠어.” 이 장기 공연을 위해 서고 싶은 무대는 서울 대학로 학전소극장이다. 김광석이 노래했고 김민기가 운영하는 학전에서 그는 홀로 나일론 기타를 튕기며 노래하고 싶어한다.

(출처: 시사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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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그대 떠난 그날 오후 그대 모습 잊을 수가 없네
날 말리다 터져버린 그대 울음 초여름의 거리

비를 부르던 거리의 슬픔 시간은 다시 지나가고 비는 멎었네
서서히 밀려오던 군화 소리 대검의 빛 줄어드는 시간

지쳐가던 사람들 하나 둘씩 쓰러져
마른 달빛 비치던 그 밤 보고 싶었던 그대 모습
내 몸은 식어만 가요 조금 더 살고 싶어요

시간이 흘러가도 기억 속의 그대 얼굴 지워지지 않아

작은 풀 하나 피지 못했던 차가운 여기 이자리에
홀로 남은 날 잊어 줘요
이제는 볼 수 없어도 그대는 나를 잊어요

 

평범한 사람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너무나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 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

(출처: [레미제라블] 중에서)

2010/04/16 21:02 2010/04/16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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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홍대에서 뜨고 있다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UCC를 봤을 때,
그저 웃긴 친구라는 생각을 했다.
예사롭지 않아보이긴 했지만 워낙 백댄서하며 퍼포먼스가 코믹 컨셉처럼 여겨져서
그다지 잘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곧 RSS뉴스에 장기하라는 이름이 간간이 나오는 것을 보았고 얼마 전에는
그가 녹음한 붕가붕가 레코드에서 정식 1집 앨범이 발매된다는 사실을 알고
한 번 들어볼까 싶어 음반을 주문했다.
발매한 지 몇 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알라딘 자간 음반 판매 순위 1위.

난 처음 음반을 들을 때는 조용한 곳에서 헤드폰으로 듣는다.
특히 스튜디오 녹음인 경우에는 주변 잡음이 없는 것이 최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들었다. 기가 막히다.
한 마디로 총평하자면 사견이지만 퀸 이후로 이렇게 창의적인 밴드는 처음이다.

유쾌하면서도 세련되고 운동권 노래 같다가도 '얼터너티브'스럽다.
어떤 곡은 송창식스럽기도 하고 키보이스의 "해변으로가요"가 연상되는 대목도 있다.
중간중간 들어가는 스캣? 추임새 류의 가사들도 곡의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시너지 효과를 준다. 게다가 가사는 미시적이면서도 사고하게 만든다.

장기하와 얼굴들. 난 그의 열렬한 팬이 될 것이다.

 

*별일 없이 산다 - 장기하와 얼굴들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거다
왜냐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다리 쭉뻗고 잠들진 못할거다
그게 뭐냐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이건이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거다
이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거다
하지만
나는 사는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좋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알았냐?

2009/03/13 20:38 2009/03/13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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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조규찬 공연을 갔다.
아내가 회사일로 바쁜 중에 육아를 돕느라 수고한다고 하루 휴가를 준 셈.^^ 함께 육아로 뺑이치고 있는 상국이 형에게 연락하여 함께 토요일 저녁 대학로로 휴가를 떠났다. 상국이형과는 95년도에 처음 조규찬공연을 대학로 소극장에서 같이 본 적이 있다. 그 때는 리더-멤버의 관계라 지금처럼 친하지는 않았고 14년 동안 이렇게 관계를 유지하리라 생각도 못했었다. 생각해보면 형과의 관계는 정말 흥미롭다.

95년 전에 무얼 먹을지 몰라 대학로 골목을 2-3번이나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에는 분식집에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 때 무슨 얘길 했던 것 같은데 이젠 기억이 잘 안나네. 아무튼. 2집 공연을 시작으로 3집 공연, 박학기 듀엣 공연 등 몇 차례가 우리는 같이 공연을 보았고 4년 전에는 결혼한 아내들과도 조규찬을 들었다.

어찌보면 조규찬은 좋아하는 가수이기도 했지만 나의 청년 시절의 발자욱 구석구석에 흔적이 남아 있는 추억거리다. 그도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겼고 이제는 마흔이 가까워온다. 공연은 그의 음악 인생을 편한하게 풀어낸 것 같았다. 그가 좋아했던 영화들, 음악들이 같은 세대인 나에게도 그러했다. 그는 공연 중간에 간간이 자신이 쓴 글을 읽어주곤 했는데 그의 나이가 느껴지는 대목들이 많이 있었다.

'고려장'
그는 지금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고려장에 비유했다. 아직 건강한 아버지를 등에 지고 산으로 데려가는 힘쎈 아들로 인해 급하게 자신의 자리를 다음 세대로 넘겨주고 사라져야 하는. 벌써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심사위원으로 교수로 강의나 하도록 밀어내고 있는 주변의 분위기를 이야기하는 그를 보면서 우리의 중년은 우리 아버지 세대보다 더 빨리 세상에서 떠밀려 나가는 느낌이 든다는 생각을 했다. 엔지니어인 나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10대부터 뜨고 20대 후반이면 퇴물취급받는 연예계에서 가수라는 직업의 그가 느끼는 '밀려남'의 강도는 더욱 가파를 것이다.

따뜻했던 그의 공연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고 또한 차분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발은 마치 내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이 나를 움직였다. 내 몸의 변화만큼이나 내 머리와 감성들도 변해가는 걸까. 아니면 똑같이 느끼는 나를 세상이 먼저 다르게 바라보는 걸까. 그 순서가 어찌됐건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혹은 아니어야 하는 것 같다.
2009/03/08 20:34 2009/03/08 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