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IVF ‘6개대 사태’에 대한 고찰(7)
/김용주
(8) 학생-간사 간 갈등의 고조
이미 깨어질 대로 깨진 간사-학생간의 신뢰는 갈등의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 때부터 사침에 동의하지 않았던 4명의 간사를 포함한 대책위는 이의서와 지속적인 항의를 거쳐 시위를 주도하게 되고, 간사회는 이런 6개대 학생들을 IVF에서 분리시키는 절차상의 수순을 밟게 된다.
“간사회의 논의 결과에 동의하지 않았던 4명의 간사들은 방향성 논의 자체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이의서를 작성하였다.(8/9) 8/10 모임에서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 및 정체성이 다양성으로 수용될 수 없다는 공식적인 확인이 이루어진 후, 6개대 중심의 연합기도회를 가졌다.(8/17) 이 기도회에서는 (1)방향성 논의 결과에 따르지 않는 지부에 대해 분리한다고 말했던 것에 대한 간사회의 해명과 (2)IVF의 다양성 인정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작성하여 중견간사들(주희재, 박영덕, 황성수)와 만났다.(8/21) 그리고 동북/서남 대표자 수련회(8/23~24)에 6개대 대표가 특별한 사유 없이 모두 불참하였다. (중략) 9인대책위가 신학적인 차이를 공식 인정하고, 대표자들이 학협임원에 대한 탄핵을 결정하였으며(9월7일, 간사-대표자협의회), 91년 1학기 동안 서울대를 담당하였던 박영덕 간사가 서울대 지부의 문제를 이사회에 정식 중재 요청함에 따라 6개대 학생들은 (1)방향성 문제제기 결과에 대해 6개대의 연합적 대처를 주도하고 (2)자신들의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적극 홍보하기 위해 'IVF 현사태 해결을 위한 대책위(이하 '대책위")를 발족시켰다. 이 대책위에서는 (2)와 관련하여, 학사회 창립기념 강연회가 열리던 100주년기념관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10월2일) 또 IVF 문제를 여론화하기 위해 공식 기자회견(10월8일)을 가져 교계신문들에 자신들의 입장이 기사화되도록 했으며, 'IVF 현사태의 진행과정과 사안별 내용'이라는 문건을 작성하여 학생들과 학사들에게 우편 발송하였다.(10월14일)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대책위의 서술은 아래와 같다.
“9인 대책위 중 6인의 원칙위반과 간사들의 분리 선언에 대한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지부 혹은 개인들 150여명이 모여서 기간의 상황보고와 그에 대한 기도와 아울러 간사들의 입장에 대한 공개해명을 요구하였다. 서명작업을 거쳐 공개서한을 간사회에 보내기로 결정했다.(중략) 현 사안에 대한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회 형식으로 모였으나 9인대책위 위원장이 대책위 토론 중 합의되지 않은 논의사항을 토론 중 각자의 신학적 입장인 것처럼 보고하였다. 한 대표간사는 6개대 학생들을 복음주의자가 아니라는 말까지 하였다. 이날 모임에서는 학협임원 탄핵소환, 6개대에 대한 경고, 대책, 지침, 지침에 대한 교육 동의 안건을 가지고 9월7일 간사-대표자회의를 열 것을 대표간사회와 9인대책위 중 6개대 대책위 3인을 제외한 6인이 절차를 무시하고 강제해냈다.(중략) 현행 학협임원 및 총무, 6개대의 신학적 문제 및 단체행동, 향후 대책 등의 안건을 가지고 열렸다. 학협단체에 관한 안건은 지난 여름 ‘임시 대표자 협의회’에서 학생들의 손에 의해 재신임이 결정된 학협회장과 총무를 대표간사 2인의 손에 의해 탄핵되었다. 불신임을 묻는 이유는 6개대와 같이 행동했으며 대표간사의 지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날 6개대 학생들은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신앙적 확신’이라는 문건을 배포하였고 신임간사(정지훈, 장은경, 최진영, 황호동)들이 쓴 문건 ‘사회참여 지침에 대한 이의서’는 배포하려 했으나 검열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포되지 못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러한 차이가 ‘분리’되어야만 하는 근거나 기준이 되느냐, 달리 말하자면 같은 복음주의라도 간사의 신학적 입장과 같지 않으면 IVF에서 함께할 수 없는가를 간사들로부터 듣는 것뿐이다.(중략) 신입간사의 6개월 후 재면접이 ‘이의서’를 밝힌 직후에 있었다. ‘이의서’ 배포 자체와 ‘이의서’ 내용 중 IVF 정체성에 관한 이견, 대표간사의 지도 거부 등의 이유로 잠정적 해임이 결정되었다.(9월13일) 이사회는 재면접을 통해 잠정적으로 결정된 해임을 공식 통보하였다. (10월3일) (대책위, ‘IVF 현 사태의 진행과정과 사안별 내용’)
(9) 서울대 지부 취소
가장 먼저 서울대 지부가 취소된다.
“91년 1학기동안 서울대를 담당하였던 박영덕 간사는 6월 사태 이후 여러 차례 모임을 통해 IVF 본래적인 활동을 전개하도록 설득하고 서남 중견간사들과 함께 서울대 리더들을 만나 간사회의 요청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리더들이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음에 따라 (1)IVFR 운동의 정체성이 대한 이해 차이와, (2)그러한 문제를 지도하려는 간사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문제제기하여 9월 정기이사회(9월30일)에 서울대 문제를 정식 상정하였다. 이에 이사회에서는 서울대 학생들에게 공식 경고하고(10월7일) 수습위원을 선정하여 학생 리더 및 학사들과 만나 대화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서울대 학생들이 IVF 정체성에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간사의 지도력 자체를 거부하였기에 서울대 지부 취소를 결의하였다. (10월28일) (자료집2, 간사회 ‘방향성 문제제기 배경’)
6개대 중 서울대가 가장 먼저 대상이 된 것은 박영덕 간사의 지도 거부 문제와 더불어 당시 모교 출신 이사들이 본 사태를 알게 되면서 이를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던 듯 하다.
“강: 박 간사님과 학생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에 대한 중재안을 서울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지부취소 결정이 났죠. 중재안은 ‘LGM 끝나고 막걸리 먹지 마라. 뒤풀이 할 때 술집 가지 마라.’ 그런 내용이었고요. 그러나 사실 서울대는 건대나 경희대에 비하면 비교가 안됐는데, 어쨌든 그렇게 됐죠./ 이: 서울대 지부 취소는 특히 서울대 출신 이사님들이 실체(일반운동권과 비슷한 분위기)를 알고 나서 경악을 했어요. 그 분들의 모교였으니까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소리, ‘6개대 사태 돌아보기’)
서울대 학생들은 ‘서울대 지부취소 철회’를 결의하였고 문건을 통해 “IVF의 건강성을 되찾으려는 시도였고, 결코 우리끼리 무엇을 해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분리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로 매도 당하였고 IVF에서는 사회참여 자체가 비복음적인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호소하였다.
“서울대 지부취소의 거론은 기초의회선거에 대한 서울대 IVF 입장 대자보 부착 때부터였고 그후 9월11일 서울대 출신 이사 3인, 학사 2인, 박영덕 서남부대표간사, 학생 3인이 모여 지부 속에서 함께 노력하고 지부취소는 없던 것으로 하자는 합의를 했으나 9월30일 그 합의가 대표간사에 의해 다시 번복되고 서울대는 지부취소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내용이 전달되었다. 6개대는 5월 이후로 계속 같은 문제의식과 행동들을 했으며 이는 보수회귀로 불구자적인 모습이 되어가는 IVF의 건강성을 되찾으려는 시도였고, 결코 우리끼리 무엇을 해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분리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로 매도 당하였고 IVF에서는 사회참여 자체가 비복음적인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울대 문제를 그 자체만으로 볼 수 없고 6개대 전체와 문제의식의 맥을 같이하는 많은 IVF 형제, 자매들에게 가하는 조치의 시작으로 본다. 실제로 6개대 중 동북부 4개 대하의 경우 6개월 동안 한 지부씩 대표간사들이 만나면서 사침의 입장으로 교육되지 않는다면 지부취소를 하겠다는 게 동북부 대표간사의 입장이다. 한번도 대체 수련회에서 제기된 문제제기가 적극적으로 상대협에서 논의된 적이 없으며 학생들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사고하는 현재 시점에서 IVF 공식입장도 아닌 ‘사침’을 잣대로 삼아 뿌리를 자르려는 의도는 도저히 인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상대협의 서울대 지부 취소는 철회되어야 한다. (대책위, ‘IVF 현 사태의 진행과정과 사안별 내용’)
(10) 6개대 지부 취소와 한기연 출범
“두 번째 보이콧(제2차 대체수련회)에서는 서울대 지부 취소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시정을 요구하는 항의가 있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날 간사님 몇 분이 6개대가 보이콧을 하던 장소(천마산 기도원)에 오셔서 지부별로 해산하라는 최후통첩이 있었고, 이 날 마지막으로 학교별로 방마다 모여서 최종 결정을 내렸죠.” (이강일,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이후의 사태는 IVF 자료집에는 정리되어있지 않으나 6개대가 IVF와 분리된 후 세운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이하 한기연)의 자료를 통해 6개대의 그 이후 행보를 확인할 수 있다. 서울대 지부 취소 이후 최종적으로는 92년 1월에 나머지 5개 지부도 취소되었다.
"협의의 과정에서 팽팽한 접점과 긴장이 계속되자 동북부 4개 대학에도 최후의 카드가 제기되었다. 바로 다음의 2개항에 대한 동의 여부에 따라 지부취소를 이사회에서 결정하겠다는 통보였다. 그 2개항이란 '간사회의 지도를 받을 것'과 '연대활동 금지'에 대한 것이었는데 건국, 경희, 고려, 광운 등 4개 대학은 겨울수련회에서 2개항이 결국 학생지도력과의 열려있는 대화를 거부하고 적극적인 사회선교활동에 대한 금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서 거부의사를 합의한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사실상 2개항에 대한 동의란 그간의 고민과 논쟁을 백지화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화ivf는 자체 수련회와 몇 차례의 리더모임에서 이화ivf의 방향성을 정리하고 서남부 간사회를 만났다. 이화ivf는 최종적으로 중앙의 파견간사가 아닌 이화 출신학사의 간사지원을 요구하는 안을 제출했는데 서남부 간사회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1992년 1월 25일 ivf는 건국, 경희, 고려, 광운, 이화 지부승인을 취소하였고 장안을 시끄럽게 하던 6개대 사태도 일단락되었다." (한기연, '한기연의 태동')
그 후 6개대는 체제를 정비하여 같은 해 10월에 한기연이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출발한다.
"(6개대) 학생회의 연합기구(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 이하 한기연)가 건설('92. 3.)되고 초기 한기연은 세상을 변혁할 새로운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열망으로 하나되어 있었다. ivf내부의 기나긴 논쟁과 싸움은 신앙이 더 이상 개인에만 머무르거나 적당한 사회적 봉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에 통전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열려있는 신앙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였다.(중략) 학생회와 간사 몇 분으로 용기 있는 출발을 감행했지만 전문성의 결여와 재정문제, 안정된 지도력의 부재, 새로이 대두되는 기독교사회운동의 중요성 등 한기연에게 헤쳐나갈 난관은 너무도 많았다. 이에 한기연은 이사회와 동문회, 간사회, 학생회가 갖추어진 명실상부한 기구로서의 면모를 추진하게 된다. 기구화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직적 체계를 갖추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체계를 어떻게 운용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대체로 합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명 정도의 한기연 학생과 동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9명의 이사가 추대되고 한기연의 정신과 목적을 공유하는 당당한 출발을 선언('92. 10.)하였다.” (한기연, '한기연의 태동')
한기연은 그 후에도 크게 성장하지는 못하였고, 초창기 6개대 학생들의 상당수가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당시 6개대 사태를 경험한 이들은 6개대 학생들과의 관계 복원 실체가 없어졌다는 점에서의 복원의 어려움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 외에도 고직한 간사와의 관계와 IVF 구조의 복원이라는 숙제가 남았다고 말한다.
“김, 강: (6개대 멤버들과의 관계를) 복원하려 해도 이제 복원할 관계의 실체가 없다는 게 어려운 점이죠./ 강: 지금의 한기연은 당시의 한기연과 같은 단체로 보기 어렵죠. 사람도 다 바뀌었고, 방향이나 성격도 달라졌죠. 복원할 대상이 분명치 않아요./이: 고직한 간사님과의 관계는 회복이 필요하죠./ 이: 결국 담아낼 장이 없으면 방향성이나 내용은 그냥 떠돌아다니고 말기 때문에, 이를 담아낼 구조의 복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금은 (방향성에 있어서는 간사들이 다 결정을 하니까) ‘가르치는 자 = 간사, 배우는 자 = 학생’이라는 구도가 굳어져버렸는데, 구조의 복원뿐 아니라 권한과 책임의 복원도 함께 되어야 해요. 일단 지방회 차원에서는, 학생대표들로부터 방향성이나 구조에 대한 피드백을 듣고 이것을 학원사역협의회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방법 등 자발성이 발현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가면 좋을 것 같아요. IVF 전체 차원에서는, 사회부나 과거의 여성부와 같이 전향적으로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이강일, 소리지 ‘6개대 사태 돌아보기’)
5. 마치면서
6개대 사태를 한 개인이 정리하면서 어떤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한 옳지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어떤 결론이나 평가, 혹은 입장 표명은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가운데 혹은 자료를 인용하는 가운데, 되도록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각, 신앙적 확신이 명시적, 혹은 비명시적으로 드러났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돌아보면 IVF로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서조차 내가 IVF에 속함을 후회했던 적은 없었다. 특별히 로잔언약으로 대변되는 사회참여와 복음전도의 동등한 사역적 강조는 내 신앙의 근원적인 DNA로 각인되었음을 고백한다. ‘6개대 사태’는 20년 전 공동체의 상처이기에, 후배인 내 입장에서는 백지로 비워져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회자되면서도 사실상 실체 없이 극단적으로 신화화되는 상황을 경험하곤 했다. 그런 이유로 지금에서 다시 이 사태를 거론하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이것을 메우고 싶은 열망이 내 안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6개대 사태’를 분석하고 정리하는 6개월 동안 자주 눈물을 흘렸고 상당 시간 영혼의 몸살을 앓았다. 부디 이 초안이 어느 누구에게도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부족한 부분은 더 다듬어져서 좋은 자료로 거듭나기를 기도한다. (끝)
한 하나님 안에서.
2012년 10월 3일.
한양대학교 IVF 김용주.
<참고 자료>-----------------------------------------------------------------------
1. IVF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자료집 I, II – 서울지방간사회
2. IVF 소리기획, ‘91년, 6개대 사태를 돌아본다’
3. IVF ‘6개대 사태 세미나’
4. 이재천, ‘소리가 만난 사람, IVF와 함께한 꿈과 열정의 시간’
5.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6.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
7. 류대영,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8. 신옥수, <에큐메니즘 A에서 Z까지> 제13장
9. 김회권, <복음과상황> ‘우리가 주창하는 복음과 상황’
10. 김회권, <복음과상황> ‘김회권 목사가 말하는 87년형 복음주의 태동기’
11. 이종철, <복음과상황> ‘80년대 기독학생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