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상황] "공동체에 속한 기독학생들에게 띄우는 편지" (2001. 2.)
/ 김용주
<시작하면서...>
지부의 몇몇 가족들에게서 몇 번이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기들이 변했으면 좋겠어요."
" OO가 바뀌도록 기도하고 있어."
" OO는 XX가 부족한 것 같아."
저는 여러분께 조심스럽게 질문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성숙'이라는 이름으로 변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그 모습 그대로를 고수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서 사랑을 거두려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기질: 하나님이 주신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질'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외적요인, 즉 환경의 영향으로 생긴 후천적 성격이 한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비록 원죄로 인해 인간이 타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충분히 가치있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환경이란 외적 요인은 이런 개인의 본성을 아름답게 가꿔 갈 수도 있고 - 대다수의 경우처럼 - 과거의 상처로 인해 왜곡된, 그리고 다소 억압된 자아로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상처'조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과 함께 아파하셨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주변 사람이 변하길 원하는 것은 제 생각으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화'같은 개념과는 의미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성도들이 자신과 똑같은 복제품의 영적 존재를 이루어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얼굴과 손발, 심지어 지문까지 다르게 창조한 것은 우리 각각의 생각과 성격조차도 다양함 속에서 하나됨의 풍성함을 누리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그렇게 이야기한 분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이들이 똑같이 말하며, 똑같이 생각하며, 똑같이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IVF의 어떤 신앙 프로그램이 몇 년 안에 그것을 이루어 주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은 필요한 요소일 수 있겠으나 저의 견해와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회심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하나님은 어떤 기질의 불신자를 다른 기질의 회심자로 바꾸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기질로 인해 행했던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가졌던 이가 삶에 대해 긍정적이며 감사하게 변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옛 성품을 버린다'는 말은 그 본성이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다는 뜻이지 자신의 기질이 다수의 Christian의 것으로 적응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기질에 대해 말하길 "우리의 성격과 기질의 근본적인 요소들은 회심과 신생(新生)에 의하여 변화되지 않습니다....심리학적으로 그 사람은 본질적으로 이전의 그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쓴뿌리": 환경을 통해 생성된 상처들과 그로 인한 부정적 성격의 형성>
두번째로 지적할 것은 외적요인으로 인해 생긴 부정적 성격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을 흔히 IVF에서는 '쓴뿌리'라고 표현합니다. 가령 과거에 자신의 동생만을 편애하는 가정에서 자랐다거나, 부모가 이혼한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자신의 핸디캡으로 인해 받았던 학대와 같은 과거의 기억들은 현재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어떤 성격적 결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공동체에 있는 모든 가족들이 이런 쓴뿌리들을 하나씩 은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하게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일수록 무의식중에 더 상처가 드러나길 원치 않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청년 시절 종교에 너무 집착하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시련이 없으면 절대자를 찾기가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모임 가운데에는 자기만의 "쓴뿌리"를 소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그것은 지나친 판단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심각한 긴장점이 발생하는데, 그 긴장점은 바로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는 온통 상처를 주고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상처를 주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상 속의 대화에서도 서로에 대한 상처가 쌓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지체에게 상처를 받고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겐 오직 하나님뿐입니다."라고. 그리고 밖에서는 자신을 보여주고 교제하려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채, 날씨 얘기, 지부의 일정들, 난해한 신앙이야기, 레포트 등으로 분주하게 보이려 애씁니다. 그러다가 자신을 빚댄 듯한 주위의 발언에 대해 "넌 내 입장이 아니니까."라며 아예 대화의 문을 막아 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조차 불안해하던 자신의 결점에 대해 타인이 공격할까봐, 오히려 그것을 확인하는 게 더 큰 고통이기 때문에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한 예로, 제가 처음 신입생을 맞았을 때 저는 내 부족함과 상처들을 한사람, 한사람에게 드러냈습니다. 물론 내 부족함이 드러나면 후배들이 나를 선배로 여겨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집에 오는 길엔 속이 상해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내 얘기에 그들이 침묵할 때, 나는 그들이 나를 판단하고 있다는 비참한 느낌 속에 가슴을 찢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길 바랬습니다. 어차피 내 부족함은 내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드러날 테니. 오히려 후배들이 날 이해해주며 부족한 가운데에도 신뢰해 주길 바랬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려는 형제애가 필요>
정리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나의 약함과 결점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상대방의 결점을 비판하거나 행여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의 결점은 감싸주라고 있는 것이지 찔러서 더 큰 상처를 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충고를 했을 경우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용납되었다는 감정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판에 대처하는 법"에서 제람 바즈 교수는 평생 그 사람의 문제로 자신이 그 멍에를 함께 질 수 있을 때에만 비판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이야기를 맺으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고유한 본성이 있으며 환경으로 인해 왜곡된 모습 또한 본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신에게 있어서의 자유함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사람 자신에게도 같은 상처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상대방에게 용납되길 바라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상대방을 용납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솔직할 때 그 누구도 자신의 모습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셔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까지" 제자들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분은 그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인간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형벌대인 십자가에서 파격적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있는 모습 그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그분의 은혜, 그 자체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Christ)의 제자(Christian)로서 가족인 지체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 수 없겠습니까? 지체의 급변(?)을 위해 조바심을 내며 섣불리 비판하기보다는 그가 그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인내하며, 인내로써 교제하여 죽기까지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갖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원리가 아닌 역사 속에 실재했던 그분의 사랑의 본이기 때문입니다. 입보다는 귀를 여십시오. 그리고 함께 아파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공동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