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뉴스앤조이] 전자책 시장의 이슈와 전망 |
: 기독 출판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
킨들, 태블릿PC의 성공과 전자책 시장의 호황
전자책 시장이 들썩거리고 있다. 아마존은 지난 7월 19일에 매체를 통해 2/4분기 전자책 판매가 종이책 판매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지난 3개월간 판매 기준 1.43배로 전자책의 판매수가 높았고 지난 한 달로 좁히면 양장본 대비 1.8배 수준이다. 아마존은 이미 킨들2의 가격을 낮춘 데에 이어 이번에 킨들3의 가격도 파격적으로 낮추었다. 또한 아이폰을 비롯한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판매로 전자책 시장의 파이가 커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앞다퉈 전자책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이미 인터파크 '비스킷', 삼성전자 'SNE-60K', 북큐브네트웍스 '북큐브', 넥스트파피루스 '페이지원', 아이리버의 '스토리' 등의 전자책 단말기를 중심으로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전자책 시장의 경쟁이 시작되고 있으며 갤럭시탭과 아이패드의 국내 출시는 시장의 기대감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자책 시장이 콘텐츠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한번 구입한 전자책을 여러 다른 기기를 통해 활용할 수 있는 방안들이 마련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전자책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전자책의 성장은 미국의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서 시작되었다. '전 세계 언어로 된 모든 책을 60초 안에 제공하는 것'이라는 모토 아래 아마존은 2007년 11월에 킨들(Kindle)이라는 전자책 단말기(e-book 리더기)를 내놓고 전자책 시장에 본격 진출했고 이 단말기가 2008년에 50만 대 이상 팔리면서 성공적으로 출판 시장에 안착했다. 킨들의 성공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중 첫 번째로 전자 잉크(e-ink) 기술을 꼽을 수 있겠다. LCD와 같은 액정은 쉽게 눈이 피로하고 햇빛 아래서는 가독성이 떨어지지만 전자 잉크를 사용한 단말기는 비교적 가볍고 배터리가 오래가며 가독성이 우수한 장점이 있다. 둘째로는 3G(3세대 이동통신 기술 규격)망을 이용한 신문 및 e북의 신속한 다운로드 통신망 지원이다. 이러한 통신망을 이용하여 어디서나 책이나 신문, 잡지 등을 단 몇 분 내에 다운 받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휴대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킨들은 광고를 통해 휴가지에서 여성이 한 손으로 킨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자주 부각시켰다.) 대체로 2G의 용량을 지원하는 전자책 단말기는 많게는 1,500~2,000권 정도의 온라인 도서를 저장할 수 있으며 가볍고 한 손으로도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성과 노인들에게도 각광을 받고 있다.
한국의 전자책 추이
국내에서도 킨들의 열풍에 힘입어 올해 들어 많은 기업들이 전자책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단말기를 중심으로 본다면 킨들의 상당 부분을 모방한 인터파크의 '비스킷'이 상당히 공격적인 시장 공략에 나선 느낌이다. 비스킷은 LG에서 개발했으며 킨들처럼 키패드를 탑재하고 있으며 LG텔레콤의 3G망을 이용하여 책을 PC 연결 없이 구입하고 신문을 구독할 수 있다. 삼성의 SNE-60K는 와이파이를 지원하며 터치스크린을 지원한다. 북큐브도 와이파이 지원 및 사전 탑재하였고 아이리버의 스토리도 SD 메모리 확장 및 사전을 지원하며, 넥스트파피루스의 페이지원은 키패드 및 무선 기능 등을 없애고 가격을 낮춘 저가형으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단말기 시장은 점차 그 기능들이 개선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단말기의 사양(specification)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자책 시장의 관건은 단말기보다는 콘텐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교보문고는 이미 6만 8,000권 정도의 전자책을 보유하고 있으며 삼성, 아이리버 등의 단말기를 지원하고 있다. 후발 주자로는 '비스킷'이라는 독자 모델을 개발한 인터파크가 2만 5,000종의 전자책을 내놓았으며 연말까지 10만 권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예스24와 알라딘은 <중앙일보>, 비룡소 등과 연합해 '한국이퍼브'라는 회사를 출범하고 지난 4월부터 온라인 서점을 통해 서비스를 시작했다. 북큐브네트웍스 역시 국일, 다락원, 대교출판, 푸른숲, 행복한책읽기 등 100여 개 출판사와 제휴를 체결하고 전자책 시장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업체들은 최근 독자적인 단말기를 통해 전자책을 보게 하던 폐쇄적 방식에서 구매한 추가적인 비용 부담 없이 PC와 휴대폰, 전용 단말기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보다 개방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계속되는 변화들
최근 들어 전자책 시장은 점점 규모가 커지고 그만큼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간판급 단말기 가격의 하락에 기인하고 있다. 미국 최대 대형 서점 체인인 반스앤드노블이 지난해 누크(Nook)라는 단말기를 3G버전은 199달러, 와이파이 버전은 149달러의 파격가로 시장에 뛰어들자 킨들은 즉시 킨들2를 그보다 10달러 낮은 189달러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국 2위 대형 서점 체인인 보더스가 코보(Kobo)라는 단말기를 150달러에 내어놓고 20달러 상품권을 제공하는 것으로 추격에 나섰다. 이에 아마존에서는 다시 킨들3을 킨들2와 같은 가격으로 출시하였다. 킨들 초기 버전이 400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절반 이하로 가격이 떨어진 셈이며 이러한 저가 정책에 힘입어 아마존의 전자책 시장은 2/4분기 실적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업계에서는 조만간 100달러 수준으로 단말기 가격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그만큼 전자책 시장의 수요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단말기 중심의 전자책 시장에 또 다른 변화의 조짐도 있다. 검색 사이트에서 온라인 인터넷 솔루션의 표준으로 변모하고 있는 구글은 다른 회사들이 단말기를 중심으로 시장 진입을 시도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주력 부문인 '검색'을 앞세워 구글북스(Google Books)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초기에 몇몇 대학과 협력하여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이미 구간 도서를 중심으로 700만 종의 종이책을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했다. 이 서비스는 절판된 책이나 저자의 허락을 받은 도서의 전체를 검색할 수 있으며 시판 중인 서적은 정보나 책의 일부분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구글북스 서비스에 출판사들의 반대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 서비스가 가진 잠재력과 출판계의 파급효과는 실로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쯤 되면 실로 출판계의 디지털 혁명이라 할 만하다.
전자책으로 인해 기대되는 효과들
초창기 전자책 시장은 일인 출판과 같은 전자출판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전자출판은 책 한 권을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디자인, 편집, 인쇄와 같은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출판사 고유 기능의 과감한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이미 아마존을 통해서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책을 편집하여 출판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또한 2007년 킨들의 성공을 기점으로 전자책 시장은 비교적 충분한 양의 콘텐츠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가볍고 작은 단말기로 2,000권 이상의 책을 소지하고 여행을 다닐 수도 있게 되었다. 콘텐츠의 증가와 휴대성의 비약적인 개선이 생긴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원서를 보면서 사전 기능을 통해 단어를 실시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3G망을 이용해서 버스 안에서도 신간 서적이나 신문을 다운 받아 읽을 수도 있다.
이미 알려진 효용 성과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자책에 대한 몇 가지의 이상적인 기대들도 있다. 먼저는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에 의해 수지가 맞지 않아 미출간 혹은 절판된 많은 전문 서적들의 디지털 콘텐츠화이다. 책 한 권을 기획하여 상품으로 팔기까지 고비용이 드는 종이책 시장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베스트셀러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지만 전자책 시장은 이러한 출판 시장의 자본 논리를 해체시키고 콘텐츠의 전문화, 다양화를 만들 수 있는 퍼텐셜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저장이 용이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글을 쓸 때 참고하려고 수집한 방대한 양의 종이책들은 부피도 크고 보관하기도 힘들다. 개인적으로도 글을 쓸 때 인용할 몇 페이지 때문에 보유한 많은 참고 문헌들은 이사할 때마다 그야말로 애물단지다. 그렇다고 그 참고 문헌의 페이지들을 모두 타이핑한다는 건 시간과 노력으로 볼 때 거의 불가능하다. 전자책은 이러한 참고 문헌 확보에 엄청난 이점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력한 검색 기능이다. 만일 전자책을 데이터베이스처럼 관리하고 그 콘텐츠를 검색을 통해 필터링 혹은 클러스터링(clustering)할 수 있다면 그 효용성 또한 클 것이다. 일례로 논문을 쓸 때도 관련 연구 논문 및 서적을 검색하고 검색한 논문들 중에서 내 논문 주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을 추려 내는 작업을 하는 데에도 적게는 며칠에서 많게는 몇 주 동안을 허비하기도 한다. 현대의 이슈는 방대한 자료들을 어떻게 체계화시키고 그것을 가지고 유효하고 가치 있는 정보들로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전자책은 이 작업에 혁신을 가져올 것이다. 구글북스로 검색한 자료들을 3G망을 통해 단말기에 다운 받고, 단말기에 저장된 자료들을 즉시 검색어를 통해 분류하여 필요한 부분들을 정리해 두는 작업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변화로 리서치 논문 한 편을 쓰는데 드는 시간은 지금보다 현저하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전자책 시장의 장애 요소들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전자출판 시장은 아직 장애 요소들이 많이 있다. 종이책 대비 전자책 콘텐츠 자체의 수적인 부족 현상이나 출판 업계의 미온적 대응, 대중의 종이책 선호 정서, 혹은 디지털 매체에 대한 반감 등을 전자출판의 장애 요소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DRM, 즉 디지털 저작권 관리(Digital Rights Management) 자체에 관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전자출판의 핵심 문제들은 모두 이 디지털 콘텐츠의 저작권 문제로 귀결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마존은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해 시작부터 저작권 보호 기능이 적용된 자체적인 파일 포맷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존을 제외한 대다수의 업계에서는 전자책의 표준인 ePub 포맷을 사용하며 전자책 배포 시 자체 DRM 툴이 적용된 콘텐츠를 다운 받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DRM은 저작권 문제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이지만 단순히 기술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몇 가지의 문제점을 야기한다. 첫째로 콘텐츠의 자유로운 복사, 인용, 배포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전자책은 DRM 툴을 통해 허가되지 않은 사용자나 단말기에서 전자 문서를 볼 수 없도록 콘텐츠의 열람을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보유하고 있는 전자책이라 하더라도 흔히 사용하는 텍스트의 전체 혹은 부분적인 COPY & PASTE가 불가하다. 단말기뿐 아니라 PC 상에서도 DRM과 연동되는 프로그램 안에서만 부분적인 추가 기능(책갈피, 밑줄 등)만을 지원한다. 이는 사용자가 손쉽게 콘텐츠를 가공하여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막는다.
둘째는 DRM 툴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전자책의 불법 복제 및 무단 배포의 가능성이 항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출판업계가 우려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이기도 하며 이 문제는 이미 음반 시장에서 mP3 파일로 그 폐해를 경험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첫 번째 문제와 어떤 면에서 모순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전자 콘텐츠의 DRM이 풀릴 경우 개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만 그 순간 수많은 고가의 전자책들이 인터넷 상에 돌아다니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어 출판 시장은 전자책을 통한 수익 구조를 흔들어서 결국 출판업계 자체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셋째로 저작권 자체에 대한 인터넷 서점과 출판업체 사이의 갈등이다. 이는 아마존과 메이저급 출판업체 사이에서 이미 문제가 된 바 있으며 구글북스와 저작자, 혹은 국가 사이에서 지금까지 협의 중인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정리된 바로는 전자 콘텐츠에 대한 판권을 종이책과 별도로 가져가게 되었으며 구글북스도 디지털 콘텐츠에 대해 저자와 저작권을 협의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점점 더 저자와 인터넷 서점 사이의 직접적인 협의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으므로 출판업계는 자신의 입지를 줄어들게 만드는 이 변화들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오픈소스, 카피레프트 운동을 지향하는 그룹에서 저작권 자체의 허용에 대한 목소리도 높다.
기독 출판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전자책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이미 9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최근 아마존의 전자책 판매량 증가와 삼성의 갤럭시탭, 애플 아이패드의 등장으로 국내에서도 단말기의 개발과 콘텐츠의 디지털화가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 출판계는 이런 전자책 시장에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내가 알기로는 아무런 대응을 않고 있다. 비교적 시장의 규모가 큰 기독 출판계는 아직 전자책 시장에 대해 고민할 정도로 위기의식을 느끼지는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디지털 시장의 빠른 변화는 곧 콘텐츠 시장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물론 이는 기독 출판계에만 한정된 이슈는 아니다. 일반 출판업계도 대응이 미진하긴 마찬가지다. 대체로 전자책 시장 진출에 대한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지만 현재로선 앞서 언급한 여러 장애 요소들로 인해 선뜻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하는 것이다. 결국 현재 전자책 시장은 인터넷 서점과 같은 온라인 서비스업체에서 시장 선점을 위해 단말기를 앞세워 출판업계의 등을 떠밀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미 가속화된 전자책 시장은 그 미래를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곧 콘텐츠 시장의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기독 출판 내지는 온라인, 오프라인 기독 매체들은 이에 대한 대응 전략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특히 기독교 윤리 내지는 세계관적 접근이 필요한 DRM과 전자책 저자의 판권 문제 등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화 개혁 세력이라 자처하는 소위 복음주의 출판계는 매번 세상의 변화에는 뒷짐 지고 있다가 슬그머니 무임승차하려는 본성을 이제는 조금씩 고쳐 나갈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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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복음주의 지성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직장인 지성운동 사례
제목: 직장인 지성운동의 현실과 고민들 (설문을 중심으로)
/김용주
기독 지성운동에 대한 발제를 준비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문득 주변 학사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 참에 간단히 설문지를 만들어서 주변 학사들에게 설문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질문지를 공람시켰고, 그 결과를 가지고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기독지성운동의 현실과 고민들을 살펴보았다. 질문은 총 7개로 객관식 문항들이 많았으나 문항들에 구애받지 않고 기타 의견을 개진해달라고 주문했다.
1. 자신이 기독지성운동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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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실 이 질문은 직장인들이 본인을 기독지성운동의 주도적 존재로 느끼는지에 대한 의도로 던져 보았다. 다수는 그렇다라고 대답했지만 17명 중 4명은 아니라고 답했다. (이 4명의 직장인은 이후에도 기독지성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내는 답을 주로 하였다.)
2. 기독지성운동의 구성원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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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는 대학 졸업자가 기독지성인이라는 대답이 29%였고 무엇보다 기타가 51%로 가장 높았다. 기타에 대한 의견으로는 ‘기독지성에 대한 관심자’나 ‘스스로를 기독지성인이라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들이면 누구나 기독지성에 속한다’고 답했다. 결국 다수의 응답자는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모두 기독지성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였고 응답자 중 29%는 학부 졸업하는 정도의 교육 수준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직장인 입장에서 기독지성 운동의 범위, 혹은 실천 영역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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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직장인들이 기독지성운동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한정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주어졌으며 응답자들은 비교적 고르게 선택했다. 복수 응답이 가능한 관계로 기타가 27%로 가장 많았는데 기타 의견으로는 ‘삶의 전 영역’이 실천 영역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고, 이에 더하여 ‘보다 심화된 전문 영역에서 사역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4. 본인이 생각하는 기독지성 운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직장/사회인 입장에서)
여러 의견들이 있었지만 중복되는 답변들을 제외하고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았다.
A. 어떠한 사역이던지 기존의 방식이 아닌 더 나은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변화를 수시로 모색하는 것
B. 직장/사회인 입장에서 볼때는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까지를 하시기 원하시는지를 살펴봐야 함. 이는 구별된 사회적(?)인 달란트를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각자의 소명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하는 문제로 연결되며, 이러한 가운데 진행될 수 있는 여러 활동들을 의미
C. 기독교 세계관에 부합한 직장 생활을 기본으로, 해당 분야에 대한 정부의 정책 혹은 각종 의견에 대한 기독교적 반응 및 전공에 국한되지 않은 이 사회의 전반적인 시대정신에 대한 기독교적 반응
D.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정신과 가치가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삶으로 표현되고, 자연스러운 삶의 양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하나의 삶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E. 교회 내에서 부족한 성경공부나 책나눔(소개)을 하고 가정 공동체에서 성경을 같이 보고 공부함
F. 세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유지하고 삶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운동
G. 각 학문 영역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소망하고 실천하는 것
H. 기독교적 지성의 축적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속한 영역 (직장, 학교, 특정 조직)에서 성경적 관점에 맞게 살려고 하며, 그에 수반되는 지식을 끊임없이 배우고 고민하며 실천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것
I.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어떻게 적용시키며 변화를 이끌어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며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하여 공동체적으로 사회에 대안을 제시
설문 결과, 많은 학사들이 삶, 일상, 실천과 같은 말들이 기독지성 운동의 핵심 단어로 중복해서 나타났다. 결국 직장인들에게 있어서는 기독 지성이 아는 것, 지식의 습득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적 영역에서 발휘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고, 전문 영역에서 더 나은 방향과 실천을 고민하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일상, 삶, 실천에 있어 기독 지성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나 한계를 표현(‘지성의 축적에 머물지 않고’ 등)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5. 실제로 자신이 하고 있는 기독지성 운동 활동이 있는가?
A. 없음. (바뻐ㅜㅜ)
B. 없음!! 부끄러움!!!
C. IVF 수도권학사회. 관심영역별로 그룹을 나누어 성경적 가치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있으며 갓 졸업한 학사들이 사회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실제적인 움직임은 부족)
D. 성경과 신앙서적, 일반서적을 다양하게 읽으며 바람직한 세계관과 안목을 형성 및 공부 분야에서 적용점을 찾기 위해 모색 중 (인권법학회 구성 등)
E. 아기 엄마들과의 큐티모임. (성경적 육아교육에 대한 고민, 산후 위로 사역)
F. 신우회. 믿는 이들이 회사 내에서 모여 개인과 회사, 나라를 위해 중보 (모임이어서 관계의 한계성이 있음)
G. 교회 장애인예배. 소외된 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나라를 위해 예배드림
학사들의 답변들을 보면 대다수의 학사들이 거의 활동이 없었고 그들은 이런 실천 없는 삶에 대한 고민과 부끄러운 마음을 비교적 많이 갖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IVF 학사회 모임이나 신우회와 같은 기존의 모임들을 참석하여 충전과 변화를 꾀하기도 하였지만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개중에는 장애인 예배로 봉사를 하거나 출산 후 엄마큐티 모임을 하는 학사들이 있었고 이런 모임들이 잘 발전되어 정착된다면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듯 하다.
6. 기독지성 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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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독지성 운동의 장애 요소로는 ‘개인영성 회복만으로도 어려움’(31%), ‘바쁜 직장생활로 인한 시간할애 어려움’(24%)가 주된 이유였고 기타에서 ‘육아’ 등을 꼽는 것으로 보아 일상에서도 직장 생활과 육아 등 절대적 시간의 부족으로 인해 자기를 추스르기에도 바쁜 게 학사들의 현실인 것으로 보였다. 설문 대상이 주로 30대 전후반의 직장인들이므로 이들의 현실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기독지성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감’(14%), ‘정보 지식의 결여로 인한 실천 저조’(14%)가 비슷한 수치였고 기타(17%)에서는 ‘롤 모델의 부재’를 꼽는 학사도 있었다.
7. 기독지성운동의 실천을 위해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A. 같은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모임
(교육부분도 그 안에서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B. 대학생들이 졸업하고 기성세대로 넘어가는 인생의 주요한 변곡점(취업, 결혼, 출산 등) 이후에도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묶어줄 수 있는 공동체
C. 시간(직장 생활, 육아 등으로 인한), 공간, 물질적 여유, 혹은 그것들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능력
D. 기독 지성운동에 대한 강력한 동기 부여
E. 비슷한 직종이나 분야 혹은 생활권 등에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들에 대한 논의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
F. 적극적으로 삶을 공유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필요 (빌라 공동생활 등)
G. 풀타임 운동가들과의 접점 마련
이 질문은 6번의 걸림돌 해결을 위한 방법을 물어본 것이었으나 의견이 분분하였다. 무엇보다 학사들 대다수는 ‘전문적인 정보나 삶을 공유할 수 있는 모임,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그 외에도 현재 걸림돌이 되고 있는 ‘시간적, 물질적 부담에 대한 해소’가 선결 조건이라고 여기는 학사들도 있었고 기독지성운동 자체가 필요성이나 매력 자체를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동기 부여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정리하면서
1. 학사들의 설문 결과
설 문에 응한 이들이 특정 지부 학사들 소수에 국한된 관계로 통계적인 의미를 갖지는 못하겠지만 몇 가지의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학사들 다수는 기독지성운동을 학문 영역에 국한시키기 보다는 삶과 일상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원리들이 작용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실천에 대한 나름의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반면 실제로는 그 열매가 미약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학사들이 기독지성운동을 하기 힘든 장애 요소로는 바쁜 직장 생활과 육아 등으로 물리적인 시간과 관심을 갖기가 힘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삶과 괴리감이 있는 기독지성 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보이기도 했다. 기독지성운동을 위해 학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비슷한 직종, 분야 혹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주제 등을 나눌 수 있는 모임이나 공동체를 꼽았고 시간적 물리적인 문제의 해결도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기성 모임보다 한층 전문화되고 일상에서 실천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모임이 필요한 반면 실제 그러한 활동을 하기에는 여력이 없다는 것이 학사들의 현실인 셈이다.
2. 개인적인 생각을 보태며
직장을 다니는 학사로서 느끼는 기독지성운동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지난번 ‘기독지성 잡담회’에서 짧게 언급한 바 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30대 학사들은 일상에 허덕이고 있는 반면 학문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른바 변방의 고수들은 실천이 담보되지 않은 지성적 탁월함에 매몰되고 있는 듯 하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실제로 한국 복음주의의 윗세대로 꼽히는 손봉호, 이만열 이후로 한국 사회에서 이렇다 할만한 기독지성 운동가들이 나오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중동 전문기자로 꼽히는 김동문 선교사, 법조계의 김두식 교수 정도 외에는 한국 사회에서 복음주의 기독 지성인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교수 그룹을 제외하고 일반 학사들만을 고려한다면 한국에는 ‘복음주의 학사 운동’이라고 할만한 토대가 전혀 없다고 평가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런 연유로 설문에서 보았듯이 학사들 중 일부는 자신이 기독지성 그룹에 속하는지조차 의문을 가지며 자연스럽게 기독지성 운동에 대한 무지와 회의감에 빠지기도 쉽다. 선배들의 선례나 롤 모델 자체가 없는데 후배 학사들이 어떻게 그 길을 개척해갈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학부생일 때부터 이미 지성사회 복음화라는 모토 자체를 버린 IVF 캠퍼스 운동은 사회인이 된 학사들에게 지성 영역에서의 어떤 소명 자체를 심어주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30대의 가장 바쁘고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내 입장에서도 본이 될만한 대안을 제시할 자신은 없다. 따라서 대안이라고 하기엔 다소 부족한 몇 가지 고민거리들을 나누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1) 기독지성운동 자체의 회의적 이미지를 탈피해야 한다. 이는 개인적으로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며 이러한 이미지는 점점 더 강화될 것처럼 보인다. 기독지성운동을 이끌고 있는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신학적 지식을 현실 세계에 발 딛고 있는 일반인들에게 풀어내는 데에는 비교적 열심을 내지 않는 것 같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대변되는 한국기독지성운동도 학구적인 몇몇 대학원생, 신학생, 목회자들의 전유물로 탈바꿈되었고 그 현학적이고 난해한 용어들과 개념들로 인해 그 실천성을 경험하지 못한 많은 젊은 학사들에게 기독지성 자체에 대한 회의감만 증폭시키는 듯 하다. 기독지성의 훈련을 위해서는 많은 양의 독서와 성경연구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연구 자체를 불필요한 지식 습득이라 여기고, 아무런 교육 없이 직관적인 관심만으로도 기독지성운동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젊은 학사들의 관점은 그간 지성운동을 이끈 나를 포함한 많은 선배들이 정작 실천 없는 ‘그들만의 리그’에 매몰된 것은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하게 만든다.
2) 거대 담론에서 미시적, 일상적 영역으로의 기독지성운동의 전환이 필요하다. 일례로 진보진영의 운동들도 점차 이데올로기나 진영 논쟁에서 생태적인 관심과 교육, 먹거리 등으로 이슈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 기독지성운동이 과거에는 정치적인 개혁세력으로 뭉쳤다면 이제는 보다 미시적인 일상과 삶 전반에 걸친 관심과 대안들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육아와 교육은 그 자체로 여러 영역(먹거리, 공정무역, 아동도서관, 입시, 대안학교 등)으로 확장 가능하므로 그런 부분에서 보다 전문적인 모임이나 연구 등을 통한 참여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형 할인점에서의 소비를 줄이고 생협이나 공정무역 제품 등을 구입하거나 제3세계 지역 어린이 일대일 후원 결연을 맺는 등의 후원 활동을 하는 것,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봉사활동 등에 참여하는 등의 미시적인 삶의 근본 원리들을 돌아보고 그 적용점들을 나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3) 직장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수준의 온오프 모임 구성이 필요하다. 간혹 기독운동가들이 주최하는 모임들을 보면 주중 오후 시간이나 혹은 참여가 어려울 정도로 자주 모이는 등 직장인들이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수준의 것들이 대다수이다. 물리적으로 여건이 허락치 않는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전임사역자들의 섬세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약자이다. 이들이 여러 모임이나 세미나 등의 지성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불편한 요소가 무엇이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세부적으로 챙기지 않는 한 일반 직장인들이 기독지성운동의 한 축을 형성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므로 그들에 대한 적극적 배려가 필요하다. (끝)
현장에서 느끼는 기독지성운동
/김용주
1. 현장, 30대의 일상이라는 전쟁터
대 학을 졸업한 지는 7년째이고 회사에 입사한 지는 5년째이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서서 화성에 있는 직장에 출근하면 퇴근은 11시. 그래도 주5일제 시행으로 주말에는 쉬지만 연차가 올라가면서 늘어난 업무량으로 인해 그마저도 요즘은 여의치가 않다. 회사에서는 점점더 인원을 줄여가고 있으며 그만큼 축소된 인원으로 더 많은 업무를 감당시키고 있다. 또한 정기적으로 명예 퇴직을 권하며 선임연구원, 수석연구원으로 진급하는 인원도 극히 일부분이다. 정년이 그만큼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내에서 자기 개발이나 어학 공부, 혹은 성경 공부나 독서를 하려면 식사 시간에 끼니를 걸러야 한다. 책을 읽거나 글이라도 쓰려면 식사를 거르고 퇴근 버스 안에서라도 짬짬이 시간을 내야만 한다. 정년을 생각하면서 전세 대출금을 갚기 위한 돈계산을 해보면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서는 몇 년 내로 서울에서 작은 평수의 집은 커녕 대출금을 다 갚기도 쉽지 않을 성 싶다. 대기업 사정이 이러니 2차, 3차 협력업체는 더 열악하다. 일정이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상사의 지시에 의해 업체 직원에게 과도한 업무를 떠넘겨기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 퇴사하는 젊은 업체 직원들도 많다. 급여는 대기업에 비해 적으면서 며칠 밤, 심지어 몇 달씩 야근에 밤을 새워야 하는 경우도 잦아서 심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는 것이다.
최근 비슷한 연배의 동료나 친구들은 결혼을 했고 이제 아이를 낳기 시작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삶의 모든 것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내는 임신 후 육아 휴직 등 사내의 껄끄러운 분위기 때문에 자신의 경력을 포기한 채 직장을 그만 두었고 출산한 이후에는 늦은 퇴근으로 육아를 돕지 못하는 나로 인해 육아에 부담을 느껴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요즘은 주변에서도 출산 후 바쁜 남편과 고부갈등, 육아에 대한 심적 부담감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이 많아졌고 그러한 문제로 이직을 하는 남편들도 생겨나고 있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들의 경우에는 육아 도우미를 쓰거나 기관에 보내기도 하는데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이유로 기피하기도 하고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드는 비용이 만만찮다. 요사이 육아 관련해서 알아야 할 것들도 많아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은 정보를 빨리 얻어야 좋은 부모가 된 기분이다. 이렇듯 육아라는 프로젝트를 놓고 부부 두 사람이 서로 동역자가 되어 이를 감당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지칠 때까지 업무를 하고 있는 30대의 부모들은 이제 자기들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어둔 채 직장생활과 육아에 올인하며 이 시간들을 간신히 버티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도 이전에는 신앙서적도 꽤나 읽었고 사회 문제에 관심도 있었고 때때로 참여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수면시간을 줄이는 방법 외에 이런 일에 시간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대기업과 같은 제조업 관련 직종에게 국한된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직장의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좀더 자라거나 직종을 바꾸지 않는 한 이 상황이 변화될 것 같지 않다.
2. 일상에 허덕이는 다수의 기독지성인들
IVF 시절, 내가 경험한 가장 큰 갈등은 선교단체의 방향성 문제였다. 내부적으로 길고 지루했던 논쟁도 있었고 암묵적으로 제재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갈등의 주요 원인은 이러했다. 나의 주장은 사회 참여의 문제를 학부 때에 사역 방향에 포함시켜서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자는 것-이것이 내가 이해한 IVF와 복음주의의 방향성이었다-이었으나 지부 내의 분위기는 개인 영성을 먼저 다진 후에 사회에 나가서 각론을 실천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리더쉽 자체가 두 방향으로 분리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이후에는 IVF 외적인 일들-기연 활동, 총학 진출, 복음과상황 독자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지부 학사 모임이 있었는데 이제는 점점 그 모임 자체가 경조사 모임으로 축소되고 있는 실정이며 주변 선후배들을 보더라도 졸업 후에 사회참여의 각론을 잘 실천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직장에서 기독인을 만나서 간혹 IVF 선교단체에 속했다는 말을 하면 여전히 어떤 기대감으로 나를 대하는 것을 종종 본다. 사실 지성사회 복음화를 모토로 내걸었던 선교단체의 일원으로서 나의 삶의 모습이 여전히 부끄럽다. 하지만 이것이 비단 나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균형성 문제를 거론했을 때 캠퍼스에서 개인 영성에 집중할 것을 주장했다면 분명 졸업 이후에 사회참여 각론에 있어서의 어떤 방향성에 대한 지침 내지는 훈련의 장이 필요했을 법한데 IVF운동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모델 제시나 훈련의 장 내지는 현장에서의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듯 하다. 학사회 모임도 여전히 실천을 담보로 한 어떤 운동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그저 파라처치의 OB 예배 모임 내지는 재활 교육 같은 느낌이 든다.
내 생각에 앞서 언급했던 현장의 문제들이 30대 직장인에게는 분명 커다란 부담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요즘의 내가 그렇다. 담임직 목회 세습 문제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시청 광장으로 나가는 일에 있어서도 혼자 결정하고 시간을 내어 참석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도 내 개인의 문제니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좋다는 책과 기사들은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꼼꼼히 읽어냈고 실시간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쓰곤 했는데 이제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시의적절하게 그런 일을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학부 때부터 철저하게 고민하고 관련된 논의들을 공부했어도 사회에 나가서 그러한 일들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고 실천해 옮기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데 물리적 시간과 심적 여유가 많았던 캠퍼스에서조차 그러한 고민과 참여의 경험이 없는 다수의 기독인들이 갑자기 사회에 나가서 총체적 복음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로또에 당첨되길 기대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3. 변방의 고수들, 선지자적 방관주의
다 행히 특정 부류의 기독인들이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데 선교단체 출신의 신학도들이나 석사, 박사 과정 중에 있는 학생들, 주로 대학원생들이 이런 부류이다. 이들은 여전히 캠퍼스에서 고민했던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으며 어떤 사안에 대하여 최신의 자료들을 가지고 균형있고 시의적절하게 문제를 접근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이들의 실천이 비교적 약해 보인다는 점이다. 어떤 기독 잡지 기자는 내게 교계에서 비판적인 글을 쓰는 몇몇 교수와 대학원생들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이론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가 느끼기에 지성적인 영역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교계의 다수의 사람들이 비판적인 논조에만 그치고 실제로 그 문제의 현장에 뛰어들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 또한 이에 동의한다. IVF가 됐건 복음주의권이 됐건 간에 그간 지성사회 복음화를 부르짖으면서 어떤 현장에서의 실천이 전혀 담보되어 있지 않은 많은 담론들은 어떤 의미에서 지성적 탁월함 자체에만 매몰되어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과거의 낙선 운동이나 목회세습 반대 운동, 그리고 최근 IVF 출신 학사들이 하고 있는 러빙핸즈 같은 사역들에서 간간이 열매들이 파편적으로 나오고는 있지만 그것이 어떤 패턴이나 연결고리를 가지고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단회적이고 개인의 역량에 국한된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한다. 잘 찾아보면 주변에 지성 영역에서의 변방의 고수들은 많으나 그들의 이른바 선지자적 방관주의는 그들로 하여금 실제로 현장으로 내려와서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첫발을 내딛는 행위는 시도조차 않은 채, 헛딛는 교계의 행보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에 그치는 것 같다. 그리고 북미 중심의 기독교 이슈들과 출판물들에는 비교적 빠른 습득과 전파를 보이지만 한국적 상황에 대한 성경적 적용이나 토착화 문제, 그리고 외부에서 오지 않은 독특한 기독교적 관점의 생성에는 미흡한 면이 없지 않은데 이도 결국 돌아보자면 이론과 실천의 괴리가 한국 사회의 저변에 딸려 있는 상황들과 기독교 지성운동이 따로 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87년형 한국 복음주의' 논의를 고민하며
복음주의 정론지로서 <복음과상황>의 방향성에 관하여
들어가면서
복음과상황(이하 복상) 1월 호에 실린 정정훈 편집위원의 글 '한국 복음주의, 혁신 없이 미래는 없다'를 흥미롭게 읽고 생각을 좀 더 나눠 보고 싶다. 논의에 앞서 질문을 던지고 싶은 부분이 있다. 복상은 '복음주의 정론지'를 표방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전까지 복상은 복음주의 정론지로 로잔언약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는데 현재 혹은 앞으로의 방향을 어떻게 잡고 있으며 잡아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논의를 지금 시작하려는 건가. 여러 가지의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먼저 입장을 조금 표현한다면 나는 한동안 에큐메니컬 그룹을 쫓아다녔다. 정용섭 목사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으면서 한동안 대구성서아카데미 모임을 주로 갔었고- MT도 따라가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하지만 나는 기존 복음주의 진영을 떠나 에큐메니컬 진영에 속하지 못했다. 물론 인맥적인 낯설음도 있었겠고 신학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복음주의자임을 부정할 정도로 복음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다. 여전히 나는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규정한다. 이 글은 그런 개인적 입장이 많이 반영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복음주의에 대한 개인적 애정이 묻어날 것이다.
복음주의의 정의, 특징
먼저 복음주의의 정의와 특징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언급한 바 있으나 4명의 신학자를 중심으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제임스 패커
패커의 논문 '복음주의 영국 국교도의 정체성 문제'는 네 가지 일반적인 주장과 여섯 가지 특수한 확신들로 이뤄져 있다.
1. 실천적인 기독교: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제자도로 이루어진 삶의 방식
2. 순수한/순전한 기독교: 기독교 신앙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닌.
3. 연합하는 기독교: 복음의 진리에 공통된 헌신을 통해 연합함
4. 이성적인 기독교: 대중의 경험에 집착하는 대중적인 경향에 반함
이후 여섯 가지 확신은 △성경의 최고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장엄 하심 △성령의 주 되심 △회심의 필요성 △전도(예배)의 우선성 △교재의 중요성 등으로 표현된다.
데이빗 베빙턴
데이빗 베빙턴의 <영국의 복음주의: 1730~1980>은 패커 논문이 발표되고 10년 후 출판되었고 그 책에서 네 가지 주된 특징을 언급한 바 있다.
1. 회심주의(conversionism) - 성령에 의한 회심('중생', '거듭남', '새로남' 또는 '구원') 경험을 강조한다.
2. 성서주의(biblicism) - 성경 또는 성서를 하나님(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유일한(only) 또는 일차적(primary) 권위로 본다.
3. 행동주의(activism) - 문서 선교나 국외 선교 등의 선교 활동을 강조한다.
4. 십자가중심주의(crucicentrism) -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 본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알 리스터 맥그래스도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 복음주의가 어떤 조직이나 교파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복음주의, 복음주의자들의 특징을 아래의 4가지로 유연하게 정리한 바 있다. 최근까지 대체로 '복음주의'를 정의할 때 맥그래스의 것을 따르는 추세였다.
1.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여 성서 공부, 성서 묵상 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2. 예수의 십자가를 강조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의 죽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3. 성령에 의한 개인의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4. 헌신적인 복음 전파
존 스토트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의 기본 진리>에서 패커와 베빙턴의 특징을 언급하면서 전도 활동, 회심 경험, 교제의 필요성이 성격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 중심, 성령의 주 되심과 같은 진리들과 같은 층위의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고 이에 따라 그는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 우선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으로의 구분을 제안한다. 즉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권위,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장엄성, 그 사역으로 드러나는 성령의 주 되심의 삼위일체적 복음을 통해 이후 특징인 회심, 전도, 교제 등은 따라오는 것, 혹은 복음을 더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그는 이 삼위일체적 복음을 다음과 같이 재정리하였다.
1. 성부 하나님의 계시하시는 주도권
2. 성자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역
3. 성령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사역
복음주의적 정의는 우리를 규정할 수 있나
앞서 언급한 몇몇 복음주의 학자들이 정리한 복음주의의 특징은 서로 차이가 나는 부분이 존재하나 내용 면에서 대동소이하다. 몰론 존 스토트의 삼위일체적 신학과 우리의 행동으로 규정짓는 복음주의의 핵심 진리는 그간의 정의의 층위를 새롭게 구분하는 느낌이 강하나 이 또한 내용이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에 대한 견해차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사실 개신교도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러한 구분은 맥그래스의 지적대로 복음주의를 아우르는 '스펙트럼의 다양성'에 기인한다. 이러한 정의는 결국 자신이 어느 교단, 교파에 속하든지 위에서 언급한 복음주의적 특징에 공감, 헌신하는 자라면 복음주의라는 범주에 속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복음주의권 내부의 이러한 구획 작업은 복음주의의 특징을 정의한다기보다는 개혁주의자는 누구까지를 신앙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나 하는 문제를 고민한 결과라고 인지하는 편이다.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사실 이런 고민이 필요 없지 않겠는가(솔직히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컬에게 '당신도 복음주의자로 끼워 주겠소'라고 말한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며 끼워 줘서 감사하다고 말할 이가 있을까).
하나 개혁주의자들은 20세기에 만연하게 퍼진 연합 운동에 대해 교리적 측면에서 부담을 느껴 왔을 것이고 연합 운동 안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가톨릭, 은사주의, 성공회 등등 많은 기독교 교파들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나름의 돌파구를 찾은 셈이다. 결국, 복음주의적 특징의 표명은 신복음주의자들이 고심 끝에 좀 더 연합할 수 있는 집단에 대한 파이를 키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려는 '나름의 필요'에 의해 활기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복음주의자들이 그런 이유에서 정의 내린 복음주의의 특징으로는 진정한 복음주의의 '구획 설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당혹스러운 결과를 초래한다. 그 특징으로 구획을 나눌 때 복음주의는 손에 잡히지 않는 이른바 '범기독교집단'으로 확장된다. 정정훈 편집위원의 지적대로 한기총도, 순복음교회도, 각종 대형 교회들도 모두 복음주의 교회다.
사실 이런 두루뭉술한 범주화와는 구별되게 실제로 복음주의 진영은 그 실체가 있다. 학자들과 교회들이 어느 정도 뚜렷하고 그들이 말하는 메시지가 차별성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주의의 특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복음주의 진영이 세상과 혹은 교회 내부에서 지속해서 갈등을 겪으면서 정체성을 찾아 나간 궤적이며 자주 그 특징은 '부정적 전략(negative strategy)'의 형태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존 스토트가 <복음주의의 기본진리>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을 설명하기 이전부터 근본주의에 대한 10가지의 부정을 통해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은 이러한 복음주의의 상황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10가지'의 부정이라니).
근본주의가 아닌, 구복음주의와도 구별된
한국 복음주의는 결국 북미의 상황을 그대로 전승받은 것이고 북미 혹은 영국 복음주의의 특징보다는 그들의 시대적 상황에서 대응해 온 부정, 특히 개혁주의 내의 '근본주의적 흐름'에 대한 부정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과학 혁명으로 촉발된 진화론적, 유물론적 사고와 학문에 대한 극단적 반대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이는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으로 이어졌다.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자들의 성경 해석 시에 차용한 고등비평에 반대하였고 고등비평적 방법론을 차용한 어떠한 형식의 성경 비평 작업에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주장했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을 '신복음주의'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논박한 복음주의 신학자 칼 헨리의 저서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 출판을 계기로 본다(칼 헨리는 이 책에서 "현대의 지성이 전 지구적 딜레마와 씨름하고 있는 반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메시지는 서양 문화의 병폐를 해소할 대안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복음주의의 양심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라고 말했고 그 주장은 불행히도 지금 우리의 상황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이러한 방향성 중 사회적 참여에 관한 관심은 존 스토트가 참여한 로잔언약을 통해 정리되었고 복상이 따라왔던 복음주의는 이 로잔언약의 사회적 책임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 복상에서 복음주의를 논할 때 사회 참여적 복음주의로 그 구획을 한정하는 것에는 개인적으로 다소 회의적이다).
또한, 로이드존스, 메이첸, 이안 머레이 등 구복음주의자와 구별되는 교파적, 신학적 특징이 존재하는데 이 때문에 복음주의는 '진보적'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이안 머레이가 쓴 <분열된 복음주의>에서 그는 이러한 복음주의적 구별의 특징과 역사적 상황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영국적 시대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그 사건들을 중심으로 대략 정리한다면 에큐메니컬 운동의 참여,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변화, 복음주의와 가톨릭의 연합 문제에 대한 복음주의권 내부의 의견 충돌과 분리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머레이는 그 책에서 구복음주의자들이 '진정한 복음'을 고수하는 견해라는 것을 명시한다. 개인적으로 청교도적 신앙 유산을 중시하는 교회를 오랫동안 출석하면서 나에게는 영국적 상황이 내 신앙적 입장을 결정하고 변호해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였고 따라서 영국적 고민이 내 실존적 문제로까지 소급되는 경험을 했다. 만일 진보적 성향의 교인이 보수적 개혁주의 교회를 다니는 한국적 상황에서도 이 영국 복음주의의 신학적 입장은 내 경우와 더불어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볼 때 복음주의의 특징은 그 삼위일체적 교리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근본주의적 신앙 흐름에 반대하는 일련의 특징, 학문과 지성의 강조, 과학의 진보에 대한 열린 자세, 전도와 더불어 사회문제에 관한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또한, 교회 내부적으로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참여를 통한 교회 연합 운동의 공감과 성경 해석에서 문자적 해석, 축자영감설의 부정 및 역사 비평에 열린 자세 등이 복음주의의 특징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 복음주의'의 구별적 상황(Context)
복음주의의 특징 형성 과정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특징을 명확화하는 과정 중에는 항시 역사적 상황의 압력 혹은 갈등이 동인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북미의 상황을 볼 때 과학을 위시한 학문적 진보, 특히 진화론과 유물론적인 입장은 지속해서 교회의 태도 표명하기를 기대했고 교회도 한계가 있었겠지만 나름대로는 그 답을 찾고자 애썼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건 교회의 대응이 근본주의적이었느냐 신복음주의적이었느냐 하는 부분보다는, 세상이 교회의 대답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이며 이 부분에 방점을 찍고 싶다. 따라서 20세기 북미의 상황과 21세기 한국의 상황은 시대적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 외에도 '세상은 교회의 입장을 경청했다'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21세기 영국과 북미의 상황을 보더라도 교회가 사회문제에 대한 영향력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나 - 존 스토트의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은 그러한 현상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시작한다 - 우리의 정황은 더 심각하다. 우리나라의 현재는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교회의 입장이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뉴라이트 운동, 기독교 장로 대통령의 횡포와 구국기도회, 빤쓰 목사의 기독교 정당 창당 등 기독교의 정치 참여 자체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다. 따라서 복상이 할 수 있는 그리고 그간 해 온 전략인 '우리는 다르다, 진보적인 태도를 가진 기독교 집단이 존재한다'는 목소리는 그냥 묻혀 버리기에 십상이다. 사회적 진보 세력이 충분히 커버하고 있는 메시지이며 더 진일보하고 시의적으로도 적절한 이슈 선점과 깊이, 영향력 측면에서 모두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과연 교회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한국 복음주의의 현실 인식은 양희송의 '포스트 2007시대: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와 정정훈 편집위원의 이번 글이 맥락을 잘 짚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정훈의 이번 글은 개인적으로 한국 복음주의를 다시 정리해 보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카리스마적 리더 의존형 운동 방식에 대한 한계점, 이만열, 손봉호 이후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고민, 복음주의가 지향하는 교회 갱신, 사회참여 양쪽에서 다 무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는 대목에서 공감과 함께 강한 우려감이 든다. 특히 그가 언급한 '1987년 체제'는 중요한 시점의 지적이며 1987년 체제는 민주화의 불완전성이 그대로 교계에도 복제된 느낌이 강하다. 특히 민주화 주체 세력이 아닌 교회는 이후 사회참여라는 이슈에서 대부분 주도적이지도 못했고 현실 정치 참여적이지도 못했다.
물론 전혀 결과물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결과들이 변질하거나 쇠퇴하고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다. 특히 낙천․낙선 운동은 내가 아는바 사회가 관심을 가졌던 교회의 유일무이한 활동이었고 그러한 관심을 곧 이은 영화, 동성애 문제 등 문화 운동에 대한 다소 깊이 없는 반대 운동으로 이내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제는 앞서 언급한 많은 교회의 부정적 활동 때문에 '개독교'라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1990년대는 민주주의의 태동과 기독교 대중문화 운동이 꽃피우는 시점에서 다행스럽게도 복상적 메시지에 어느 정도 주목하는 집단이 존재했고 그 집단은 어떤 문화적, 인맥적, 신학적인 통일체였기에 그들을 중심으로 복상이라는 매체는 소비되었고 그 메시지, 이른바 복음주의의 특징은 전수되었다. 이후로는 기독교 문화 운동은 세속 문화를 뛰어넘지 못했고 – 원래 못 하는 게 당연하지만 – 그 세속 문화를 비평하는 잣대조차 좀스럽다. 성서한국이나 선교단체로 대변되는 파라처치들도 점점 그 수가 줄고 있고 진보적인 복음주의 집단은 섹트화되고 다각화되었다. 이제는 한 부류로 몰기엔 '너무 다른' 자신들의 입장이 많다.
전략, 방법론으로서의 복상, 복음주의
"나는 분열을 거듭하는 복음주의의 경향에 대해 계속해서 깊이 염려하고 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수적인 측면이나 교회 생활면에서, 학문적 성취나 리더십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단결이나 국가적 영향력에서만은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사람들은 수많은 복음주의 '분파'에 대해 언급하며 '복음주의' 앞에 어떤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보수적, 자유적, 급진적, 점진적, 개발적, 개혁파, 은사주의적, 포스트모던 등 그러한 예들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필요한 일인가?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이해를 선한 양심으로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를 복음주의자들로서 연합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복음주의의 기본 진리>의 서문에서 존 스토트가 한 말이다. 나는 그의 고백에서 진정성을 읽는다. 그리고 이 글에 깊이 공감하는 나는 전략적으로 무엇보다 우선으로 한국교회에 다양한 교리적, 교파적 차이에도 이 분리주의적인 한국교회의 연합에 복상이 가장 치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하나의 생각, 하나의 교리, 하나의 운동으로의 연합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진리 아래에서 다양한 입장과 교파, 교리, 운동들이 방대하게 소개되고 때로는 치열하게 논쟁도 하고 때로는 어떠한 이슈와 이벤트에 물리적으로도 연합하는 일들을 적극 권장하는 운동으로 변해야 하고, 그런 부분에서 복상이 매개체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솔직히 한국교회의 연합 문제를 생각하면 복음주의 정론지의 틀을 유지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부차적으로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복음주의의 베이스캠프는 유지하되 국내의 아나뱁티스트, 가톨릭, 성공회 등등의 교단의 필진을 발굴하여 더욱 많은 견해의 장이 마련되는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
정치, 사회 참여적인 문제에는 어떤 핵심 매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내려놓고 복상이 추구하는 세상적 가치들을 꾸준히 설명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도 진보 진영의 메시지를 카피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의성이 떨어지거나 일반 매체가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성경적 원리들을 돌아보거나 기독교적 가치로 진보 이슈들을 한 번 더 풀어내는 작업들을 복상이 해 주면 좋을 것이다.
올해에는 정치적으로 풍성한 콘텐츠들이 생산될 터인데 이때에는 더욱 과감하게 이슈들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건 어떨까 싶다.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거나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부분에서도 복상의 언로가 정치적으로도 단일화되는 것을 표방하기보다는 복음주의권 전반에서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에 대한 차분하고 내실 있는 논지를 통한 다양한 견해들이 나뉘고 그 견해들에 관해 토론과 공감이 가능하도록 방향성을 잡아 주면 좋을 듯하다.
전자책 시장의 이슈와 전망 (인물과사상 5월호)
/ 김용주
킨들의 성공과 전자책 시장의 호황
전자책 시장이 들썩거리고 있다. 아마존은 2010년 7월 19일, 매체를 통해 2/4분기 전자책 판매가 종이책 판매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지난 3개월간 판매 기준 1.43배로 전자책의 판매수가 높았고 지난 한 달로 좁히면 양장본 대비 1.8배 수준이다. 아마존은 이미 킨들2의 가격을 낮춘 데에 이어 이번에 킨들3의 가격도 파격적으로 낮추었다. 또한 아이폰을 비롯한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판매로 전자책 시장의 파이가 커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앞다퉈 전자책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이미 인터파크 '비스킷', 삼성전자 'SNE-60K', 북큐브네트웍스 '북큐브', 넥스트파피루스 '페이지원', 아이리버의 '스토리' 등의 전자책 단말기를 중심으로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전자책 시장의 경쟁이 시작되고 있으며 갤럭시탭과 아이패드의 국내 출시는 시장의 기대감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자책 시장이 콘텐츠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한번 구입한 전자책을 여러 다른 기기를 통해 활용할 수 있는 방안들이 마련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전자책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전자책의 성장은 미국의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서 시작되었다. '전 세계 언어로 된 모든 책을 60초 안에 제공하는 것'이라는 모토 아래 아마존은 2007년 11월에 킨들(Kindle)이라는 전자책 단말기(e-book 리더기)를 내놓고 전자책 시장에 본격 진출했고 이 단말기가 2008년에 50만 대 이상 팔리면서 성공적으로 출판 시장에 안착했다. 킨들의 성공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중 첫 번째로 전자 잉크(e-ink) 기술을 꼽을 수 있겠다. LCD와 같은 액정은 쉽게 눈이 피로하고 햇빛 아래서는 가독성이 떨어지지만 전자 잉크를 사용한 단말기는 비교적 가볍고 배터리가 오래가며 가독성이 우수한 장점이 있다. 둘째로는 3G(3세대 이동통신 기술 규격)망을 이용한 신문 및 e북의 신속한 다운로드 통신망 지원이다. 이러한 통신망을 이용하여 어디서나 책이나 신문, 잡지 등을 단 몇 분 내에 다운 받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휴대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킨들은 광고를 통해 휴가지에서 여성이 한 손으로 킨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자주 부각시켰다.) 대체로 2G의 용량을 지원하는 전자책 단말기는 많게는 1,500~2,000권 정도의 온라인 도서를 저장할 수 있으며 가볍고 한 손으로도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성과 노인들에게도 각광을 받고 있다.
아이패드, 전자책 시장의 중심에 서다!
2010 년 1월 27일, 스티브 잡스는 그간 비밀에 쌓여 있던 태블릿 PC의 발표회를 가졌다. "애플은 마법같고 혁명적인 제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2010년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We want to kick off 2010 by introducing a truly magical and revolutionary product.)"는 말로 시작된 이른바 '아이패드(iPad)'의 키노트는 발표 당시부터 지금까지 태블릿 PC와 전자책 시장을 뒤흔드는 일대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초기에는 아이폰의 크기만 키워놓은 듯한 단조로운 모습과 기능에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으나, 당시 스티브 잡스가 예견한대로 크기만 다른 것 같은 이 '물건'이 넷북과 전자책을 대체하는 혁신적인 기기로 급성장하였다. 또한 당시 언론에서 '아이패드'의 가격이 999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아이패드'의 가격이 최저 499달러부터 시작한다고 발표하자 참석자들은 예상 밖의 가격에 또 한 차례 환호성을 지르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아이패드가 출시된 이래로 앱스토어에 올라온 어플의 수는 35만종이며 그 중 아이패드용 어플의 숫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특별히 전자책 시장만으로 한정하더라도 아마존 킨들이 아이패드의 어플로 탑재되었고 많은 매체들과 제휴를 맺는 등, 기존 전자책 단말기 대비 칼라 지면의 전문 서적이나 패션 잡지 등의 경쟁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인터파크, 북큐브, 알라딘 등 온라인서점을 중심으로 아이폰과 아이패드용 전자책 어플들이 개발되어 탑재되고 있으며 어플을 통해 전자책을 볼 수 있는 서비스를 확대해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지난 3월 2일, 놀랍게도 병가 중인 스티브 잡스가 발표회에 참석하여 이슈가 되었던 아이패드2는 듀얼코어 탑재와 중량 15%, 두께 30%가 줄어드는 등 많은 개선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499달러를 유지했다. 이로 인해 태블릿 PC 시장은 당분간 성능에 더하여 저가 전쟁에 시달릴 듯 하다.
한국의 전자책 추이
국내에서도 킨들의 열풍에 힘입어 2010년부터 많은 기업들이 전자책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단말기를 중심으로 본다면 킨들의 상당 부분을 모방한 인터파크의 '비스킷'이 상당히 공격적인 시장 공략에 나선 느낌이다. 비스킷은 LG에서 개발했으며 킨들처럼 키패드를 탑재하고 있으며 LG텔레콤의 3G망을 이용하여 책을 PC 연결 없이 구입하고 신문을 구독할 수 있다. 삼성의 SNE-60K는 와이파이를 지원하며 터치스크린을 지원한다. 아이리버의 스토리도 SD 메모리 확장 및 사전을 지원하며, 넥스트파피루스의 페이지원은 키패드 및 무선 기능 등을 없애고 가격을 낮춘 저가형으로 개발되었다. 북큐브도 와이파이 지원 및 사전 탑재한 제품을 출시했다가 최근에는 ‘815’라는 모델명으로 저가의 단말기를 선보였다. (단말기는 페이지원과 동일한 제품이다.) 하지만 단말기 시장은 점차 단말기 간의 기능들이 개선되고 있기 때문에 사양(specification)의 비교 자체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자책 시장의 관건은 단말기보다는 콘텐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교보문고는 이미 6만 8,000권 정도의 전자책을 보유하고 있으며 삼성, 아이리버 등의 단말기를 지원하고 있다. 후발 주자로는 '비스킷'이라는 독자 모델을 개발한 인터파크가 초기에 2만 5,000종의 전자책을 내놓았으며 작년말까지 10만 권의 컨텐츠를 확보한다고 밝혔다. 예스24와 알라딘은 <중앙일보>, 비룡소 등과 연합해 '한국이퍼브'라는 회사를 출범하고 작년 4월부터 온라인 서점을 통해 서비스를 시작했다. 북큐브네트웍스 역시 국일, 다락원, 대교출판, 푸른숲, 행복한책읽기 등 100여 개 출판사와 제휴를 체결하고 전자책 시장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업체들은 최근 독자적인 단말기를 통해 전자책을 보게 하던 폐쇄적 방식에서 구매한 추가적인 비용 부담 없이 PC와 휴대폰, 전용 단말기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보다 개방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지속적인 변화와 경쟁
최근 들어 전자책 시장은 점점 규모가 커지고 그만큼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간판급 단말기 가격의 하락에 기인하고 있다. 미국 최대 대형 서점 체인인 반스앤드노블이 지난해 누크(Nook)라는 단말기를 3G버전은 199달러, 와이파이 버전은 149달러의 파격가로 시장에 뛰어들자 킨들은 즉시 킨들2를 그보다 10달러 낮은 189달러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국 2위 대형 서점 체인인 보더스가 코보(Kobo)라는 단말기를 150달러에 내어놓고 20달러 상품권을 제공하는 것으로 추격에 나섰다. 이에 아마존에서는 다시 킨들3을 킨들2와 같은 가격으로 출시하였다. 킨들 초기 버전이 400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절반 이하로 가격이 떨어진 셈이며 이러한 저가 정책에 힘입어 아마존의 전자책 시장은 2/4분기 실적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업계에서는 조만간 100달러 수준으로 단말기 가격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그만큼 전자책 시장의 수요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단말기 중심의 전자책 시장에 또 다른 변화의 조짐도 있다. 검색 사이트에서 온라인 인터넷 솔루션의 표준으로 변모하고 있는 구글은 다른 회사들이 단말기를 중심으로 시장 진입을 시도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주력 부문인 '검색'을 앞세워 작년부터 구글북스(Google Books)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초기에 몇몇 대학과 협력하여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이미 구간 도서를 중심으로 700만 종의 종이책을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했다. 이 서비스는 절판된 책이나 저자의 허락을 받은 도서의 전체를 검색할 수 있으며 시판 중인 서적은 정보나 책의 일부분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구글북스 서비스에 출판사들의 반대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 서비스가 가진 잠재력과 출판계의 파급효과는 실로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쯤 되면 실로 출판계의 디지털 혁명이라 할 만하다.
전자책으로 인해 기대되는 효과들
초창기 전자책 시장은 일인 출판과 같은 전자출판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전자출판은 책 한 권을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디자인, 편집, 인쇄와 같은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출판사 고유 기능의 과감한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이미 아마존을 통해서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책을 편집하여 출판하는 일이 가능하며 국내에서는 교보문고가 현재 7월을 목표로 전자책 출판 솔루션을 개발 중이다). 또한 2007년 킨들의 성공을 기점으로 전자책 시장은 비교적 충분한 양의 콘텐츠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가볍고 작은 단말기로 2,000권 이상의 책을 소지하고 여행을 다닐 수도 있게 되었다. 콘텐츠의 증가와 휴대성의 비약적인 개선이 생긴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원서를 보면서 사전 기능을 통해 단어를 실시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3G망을 이용해서 버스 안에서도 신간 서적이나 신문을 다운 받아 읽을 수도 있다.
이미 알려진 효용 성과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자책에 대한 몇 가지의 이상적인 기대들도 있다. 먼저는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에 의해 수지가 맞지 않아 미출간 혹은 절판된 많은 전문 서적들의 디지털 콘텐츠화이다. 책 한 권을 기획하여 상품으로 팔기까지 고비용이 드는 종이책 시장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베스트셀러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지만 전자책 시장은 이러한 출판 시장의 자본 논리를 해체시키고 콘텐츠의 전문화, 다양화를 만들 수 있는 퍼텐셜을 가지고 있다(실제로 지난 4월8일, 한국복사전송권협회와 북큐브네트웍스는 `절판 도서의 전자책 복간`에 대한 협약을 마치고 이달부터 절판 도서를 전자책으로 복간키로 합의했다.) 둘째는 저장이 용이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글을 쓸 때 참고하려고 수집한 방대한 양의 종이책들은 부피도 크고 보관하기도 힘들다. 개인적으로도 글을 쓸 때 인용할 몇 페이지 때문에 보유한 많은 참고 문헌들은 이사할 때마다 그야말로 애물단지다. 그렇다고 그 참고 문헌의 페이지들을 모두 타이핑한다는 건 시간과 노력으로 볼 때 거의 불가능하다. 전자책은 이러한 참고 문헌 확보에 엄청난 이점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력한 검색 기능이다. 만일 전자책을 데이터베이스처럼 관리하고 그 콘텐츠를 검색을 통해 필터링 혹은 클러스터링(clustering)할 수 있다면 그 효용성 또한 클 것이다. 일례로 논문을 쓸 때도 관련 연구 논문 및 서적을 검색하고 검색한 논문들 중에서 내 논문 주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을 추려 내는 작업을 하는 데에도 적게는 며칠에서 많게는 몇 주 동안을 허비하기도 한다. 현대의 이슈는 방대한 자료들을 어떻게 체계화시키고 그것을 가지고 유효하고 가치 있는 정보들로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전자책은 이 작업에 혁신을 가져올 것이다. 구글북스로 검색한 자료들을 3G망을 통해 단말기에 다운 받고, 단말기에 저장된 자료들을 즉시 검색어를 통해 분류하여 필요한 부분들을 정리해 두는 작업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변화로 리서치 논문 한 편을 쓰는데 드는 시간은 지금보다 현저하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전자책 시장의 장애 요소들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전자출판 시장은 아직 장애 요소들이 많이 있다. 종이책 대비 전자책 콘텐츠 자체의 수적인 부족 현상이나 출판 업계의 미온적 대응, 대중의 종이책 선호 정서, 혹은 디지털 매체에 대한 반감 등을 전자출판의 장애 요소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DRM, 즉 디지털 저작권 관리(Digital Rights Management) 자체에 관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전자출판의 핵심 문제들은 모두 이 디지털 콘텐츠의 저작권 문제로 귀결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마존은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해 시작부터 저작권 보호 기능이 적용된 자체적인 파일 포맷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존을 제외한 대다수의 업계에서는 전자책의 표준인 ePub 포맷을 사용하며 전자책 배포 시 자체 DRM 툴이 적용된 콘텐츠를 다운 받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DRM은 저작권 문제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이지만 단순히 기술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몇 가지의 문제점을 야기한다. 첫째로 콘텐츠의 자유로운 복사, 인용, 배포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전자책은 DRM 툴을 통해 허가되지 않은 사용자나 단말기에서 전자 문서를 볼 수 없도록 콘텐츠의 열람을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보유하고 있는 전자책이라 하더라도 흔히 사용하는 텍스트의 전체 혹은 부분적인 COPY & PASTE가 불가하다. 단말기뿐 아니라 PC 상에서도 DRM과 연동되는 프로그램 안에서만 부분적인 추가 기능(책갈피, 밑줄 등)만을 지원한다. 이는 사용자가 손쉽게 콘텐츠를 가공하여 활용할 수 있는 자유를 막는다.
둘째는 DRM 툴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전자책의 불법 복제 및 무단 배포의 가능성이 항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출판업계가 우려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이기도 하며 이 문제는 이미 음반 시장에서 mP3 파일로 그 폐해를 경험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첫 번째 문제와 어떤 면에서 모순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전자 콘텐츠의 DRM이 풀릴 경우 개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만 그 순간 수많은 고가의 전자책들이 인터넷 상에 돌아다니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어 출판 시장은 전자책을 통한 수익 구조를 흔들어서 결국 출판업계 자체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셋째로 저작권 자체에 대한 인터넷 서점과 출판업체 사이의 갈등이다. 저작권 문제는 애플의 아이튠즈 내에 설치된 앱스토어와 음반사와의 갈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MP3 포멧이 음반 시장의 불법복제의 통로로 활용되면서 이를 잘 활용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각 음반사와 음악 한 곡에 대한 다운로드 가격을 저가로 체결하였는데 이를 통해 앱스토어가 음반시장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사례가 온라인서점인 아마존과 메이저급 출판업체 사이에서 이미 문제된 바 있으며 구글북스와 저작자, 혹은 국가 사이에서 지금까지 협의 중인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정리된 바로는 전자 콘텐츠에 대한 판권을 종이책과 별도로 가져가게 되었으며 구글북스도 디지털 콘텐츠에 대해 저자와 저작권을 협의하도록 규제하고 있다(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구글과 출판사 간에 온라인에서 자유로이 출판•저작물을 노출할 수 있도록 2008년에 맺은 1억2500만 달러 상당의 계약이 무효라는 판결이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구도는 점점 더 저자와 인터넷 서점 사이의 직접적인 협의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으므로 출판업계는 자신의 입지를 줄어들게 만드는 이 변화들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오픈소스, 카피레프트 운동을 지향하는 그룹에서 저작권 자체의 허용에 대한 목소리도 높다.
마치면서: 출판업계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전자책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이미 9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최근 아마존의 전자책 판매량 증가와 애플 아이패드의 등장으로 국내에서도 단말기의 개발과 컨텐츠의 디지털화가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전자책 시장의 핑크빛 기대와는 달리 전자책에 대한 대중들의 수요와 관심이 아직 그렇게 높지는 않다. 출판업계에서도 전자책 시장 진출에 대한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지만 현재로선 앞서 언급한 여러 장애 요소들로 인해 선뜻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현재의 전자책 시장은 인터넷 서점과 같은 온라인 서비스업체에서 시장선점을 위해 단말기를 앞세워 출판업계의 등을 떠밀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시장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아마존은 지난 1월 전자책 판매가 종이책을 앞질렀다고 발표했고 애플은 지난해 4월 이후 아이북 온라인샵에서 다운로드된 전자책이 1억개에 이른다고 밝혔다. 반스앤노블의 임원 마크 패리시는 “앞으로 24개월 안에 전자책이 출판산업을 지배할 것”이라고 말했고 포레스터앤가트너 리서치은 올해 1800만대의 전자책 단말기가 팔릴 것으로 예상했다.
전 자책 시장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루가 다르게 첨단 단말기 개발이 진행되고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도 개인의 컨텐츠 출판이 가능한 수준까지 변화하고 있는 지금 그 미래를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래를 예측하긴 어렵겠지만 나는 출판업계 입장에서 현 시점이 전자책 시장에 대한 좀더 명확한 기술적 이해와 단기적 장기적 청사진을 가지고 보다 적극적 시장 진입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음반 시장이 결국 음원 대부분의 판매를 애플의 아이튠즈에 넘겨준 것을 귀감으로 삼아 미래의 출판 시장에 대한 큰 그림과 그에 대한 명확한 기술, 컨텐츠 및 판매 전략을 가진 자만이 시장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조만간 흥미로운 전자책 시장의 한 판 승부가 될 듯 하다. (끝)
참고문헌
기독교 사회 참여의 역사
기독교 내의 '사회 참여'라는 이슈는 단순한 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개 복음주의권에서 통용되는 이 단어는 항상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라는 두 개의 축 혹은 새의 양쪽 날개 중 하나로 이해하여야만 한다.
물론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는 역사적 흐름이 있다. 종교 개혁 시기부터 사회 참여, 세상의 변혁과 같은 문제가 신학적으로 잘 정립이 되어 왔고,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변되는 제1차 영적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을 통해서도 그 흐름이 이어진다. 그러나 제2차 대각성 운동에 이르러 기독교는 감정과 체험에 치중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영향보다는 개인의 영혼 구원에 치중한 경건주의적 신앙의 형태로 변모해 갔고, 이로 인해 복음주의 역사 속에서 빈번히 복음과 사회의 연결 고리가 느슨해지거나 단절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오랫동안 사회나 정치, 학문에 대한 관심이 배제된 이런 부정적 영향이 개신교 전통 속에서 지속되어 오다가, 20세기 중반 <Christianity Today>의 편집장이자 풀러신학교의 초대 교수인 칼 헨리가 자신의 저서 <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에서 당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사회 참여를 선언함으로써 개인 복음 전도와 더불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이른바 '신복음주의' 태동의 시발점이 된다.
칼 헨리와 신복음주의의 태동은 기독교의 사회 참여라는 이슈에 크게 기여했고, 1974년 7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에서 채택한 '로잔 선언'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 사이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 대회는 10일간 지속되었고 150개 국가에서 2700여 명의 복음주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였다.) 이 선언은 전도와 사회 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전도와 사회, 정치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했다. 또 로잔 언약은, 사랑에서 나온 예수님의 전도(word)와 봉사(deed)를 이분화하거나 고립시킬 수 없음을 강조했는데, 당시 대회에 참여했던 조종남 박사도 "원색적 복음주의가 귀한 유산으로 간직해 오던 사회적 책임을 로잔 언약에 이르러 되찾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위대한 공헌'이라고 언급했다.
물론 로잔 선언에서는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의 관계에 있어 소위 '복음 전도의 우위성, 우선성'을 명확히 하였는데, 이는 사살상 사회적 책임보다 한 영혼 구원이 더 중요하며 순서상 우선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후 복음주의권의 지도자인 존 스토트가 예수님의 사역, 그리고 제자들의 사역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 사이에서 어떤 우위성도 발견할 수 없으며, 단지 이 두 주제는 신앙의 두 측면으로 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수정된 견해를 '마닐라 선언'에서 재차 강조하게 되는데,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이후 새가 양쪽 날개를 모두 사용하여 난다는 의미에서 '양 날개 이론'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결국 복음주의 내부에서 사회 참여라는 이슈는 복음 전도의 한 가지의 방법이 아니라 동일한 신앙의 두 측면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신학적으로 정립된 셈이다.
기독교 사회 참여, 문제점들
이렇듯 역사적인 신학적 입장 정리를 살펴보았으나 실재로 기독교는 얼마나 사회 참여에 운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 전반에 걸친 실천적 열매를 맺고 있는가. 존 스토트가 자신의 책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밝혔듯이, 정직하게 우리를 돌아볼 때 여전히 그 운동성이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역사 속에 그 흐름이 지속되어 온 기독교 사회 참여가 아직도 소원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1. 사례의 부족
단적으로 말해서 사례들이 희박하다. 외국의 경우(물론 대부분이 북미에 한정되어 있다) 1차 대각성 운동 시기에 부흥이 일어난 지역에 술집이 문들 닫았다는 류의 이야기나,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제 폐지 운동 정도만을 아직까지도 언급하는 일이 다반사이며, 우리나라도 기독교 세계관과 복음주의 신학이 정착한 지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실상 사회 참여의 이상적 모델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국내에서 가장 사회 참여의 이상적 모델로 평가하는 사례는 1990년대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낙천낙선 운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정치인의 면밀한 조사와 함께 각각의 의원에 대한 낙천낙선 운동이 일반 시민 단체와 협조 체제를 구축하면서 그 추진력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 발휘되었다.
하지만 당시 협력 관계에 있었던 진보적인 시민 단체들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 정치적 이슈들이 약해진 가운데 기윤실이 문화 영역에서 영화 <거짓말> 상영 금지 요청, 가수 박지윤의 <성인식> 뮤직비디오 방영 금지 운동을 전개하자 성적 보수성을 비판하며 돌아서게 되었고, 이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회 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소극적으로 대응함에 따라 기윤실로부터 교회개혁실천연대가 독립하는 등, 90년대 후반부터 그 운동성과 영향력이 상당 부분에서 수그러들게 된다.
2. 신학적 입장과 실천의 장 사이의 괴리감
또한 기독교가 사회 참여적인 신학적 입장을 견지했다 하더라도 신학적 입장과 그 실천 사이의 괴리감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국에서의 신사 참배 문제, 군사 정권 아래에서의 조찬 기도회 참여, 한기총의 극우 편향성과 권력 친화적인 행보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바 있으므로 굳이 이 글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사례들에 덧붙여, 개신교 신앙의 선배이자 종교 개혁의 두 주역인 루터와 칼뱅도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만을 첨언하고 싶다. 최근에 교회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담은 김두식 교수의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루터도 칼뱅도 종교 개혁 과정에서 철저하게 세속 권력에 의존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 왕국은 구별된다는 신학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정치권력의 그늘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세속 권력인 독일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토마스 뮌처의 반란이 시작되자 루터는 완전히 군주들 편으로 입장을 선회하여 무고한 농민들의 처형을 묵인했고, 심지어 반란자들을 죽이고 쳐부수고 목 조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영혼이 사탄의 손에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루터의 주장에 고무된 자들의 손에 7만 5,000여 명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네바를 정치적으로 장악하여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칼뱅도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그노 전쟁을 통해 조국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를 획득하려 했고, 신학적인 반대파를 화형으로 제압했습니다. 정치권력과 손잡은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칼뱅이었지만, 정치적 기반 없이 투쟁에 나선 농민 반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있어서 기독교인이 현실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을 때 그 실천적, 입지적인 한계나 편향성으로 인해 오히려 세상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3. 실천을 주저하는 개신교
기독교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스탠리 하우어와스는 그의 책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에서 미국이 리비아에 있는 민간인에게도 폭격을 가했을 때 있었던 토론을 자세히 소개한다. 토 론에 참석한 한 학생이 하우어와스에게 그 의견을 묻자 그는 기독교의 응답은 바로 내일 아침에 리비아로 미국 교회가 1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얘길 들은 학생이 미국 정부가 위험 지역인 리비아에 비자를 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하우어와스는 정작 비자가 안 나와서 못 가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이러한 담대한 일을 감당할 사람을 세우는 교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글을 읽고 나는 한동안 충격에 사로잡혔다. 내 기억으로는 2003년 이라크 전쟁 중에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기독교인들이 '인간 방패'라는 이름으로 반전 평화 팀으로 평화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을 때, 그들의 모교회인 복음주의권 어느 곳도 파송해 주지 않아 전전했던 그들을, 아나뱁티스트(재침례교의 하나) 교회가 아무런 단서나 조건 없이 끌어안았던 일이 있었던 터라 더 충격이 컸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상황을 <뉴스앤조이> 주재일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유은하 씨는 편지 한 장만 들고 알지도 못했던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라크로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여기 아니면 아무도 나를 이라크로 보내 주지 않을 거예요.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없나요.' (...) 이재영 간사는 아나뱁티스트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평화 운동가로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찾아왔다. 그러나 평화 운동에 대한 신념은 분명하다. 우리가 파송하지 않아도 그는 이라크에 갈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모든 이들이 '파송하자'고 회신을 보냈다. 캐나다 아나뱁티스트 교회들도 유은하 씨를 위해 기도하며 모금 활동을 펼쳤다. 유은하 씨는 든든한 기도의 동역자들을 만나 이라크로 향했다. (.. ) 전쟁이 끝나 생사의 문제가 부담이 안 되는 지금에야 비로소 다들 유은하 씨와의 관계를 들춰내고 있다. 유은하 씨는 분명 몸은 '복음주의 진영'에 있었지만 파송은 평화주의 교회로부터 받았다." (주재일, <뉴스앤조이> '유은하가 전쟁터로 떠난 이유는?')
당시 나는 처음 이 기사를 접했을 때 마음이 착잡했다. 사회 참여를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친정과도 같은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내쳐진 반전 평화 팀을,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흔쾌히 받아 주고 그들을 파송하고 진심으로 기도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리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도 하지 못하는 일들을 몸소 실천한 재침례파 교회를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교파 정도로 평가 절하하는 것을 보면서, 문득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마친 후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인가"를 묻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글을 마치며
기독교 사회 참여라는 이슈는 과거 신앙 선배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끄럽게도 20세기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사회 문제에 무심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신학적으로 그 입장이 정립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다행히 이제 우리는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의 두 영역에서 사회 참여를 배제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한쪽으로 처박아 두지는 않겠지만 과거 개신교의 역사와 한국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도 빈번히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고 오히려 세상의 논리로 사회 문제에 개입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일삼기도 했다. 또한 이라크 전쟁 당시 반전 평화 팀 사례와 같이 정작 나서야 할 때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용기 있는 행동의 장애 혹은 방해 요소가 되기도 했다.
글을 접으면서 나는 최우선적으로 한국교회가 더욱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표준 선(善)보다 더 부정부패가 많고 암암리에 세상과 결탁하고 세상의 부와 권력을 나눠 갖고 있는 한국 교회는 사회 참여 자체가 오히려 기독교 세속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한국교회가 주도권을 가진 중심 세력으로서의 사회 참여, 세상 변혁을 이끌기보다는 세속화한 세상을 견제, 비판하고 세상이 때때로 불의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바른 방향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압력 단체로서의 '참여'를 권하고 싶다.
세상 속에서 변혁의 중심 세력이 되었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앙 고백과는 별개로 실천의 장으로서의 세상 속에서 한계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교회가 압력 단체로서의 실천을 하는 것조차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더 복잡해지고 섹트화한 포스트모던 사회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분석하며 대안들을 고민함과 동시에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실천들을 실행해 보는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원론적으로 옮은 말들을 세련되게 되뇌이지만 정작 실천의 장에서는 방관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멈추고, 겸손하게 우리의 할 바를 작은 실천 영역에서부터 성실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 사회 참여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