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사회 참여의 역사
기독교 내의 '사회 참여'라는 이슈는 단순한 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개 복음주의권에서 통용되는 이 단어는 항상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라는 두 개의 축 혹은 새의 양쪽 날개 중 하나로 이해하여야만 한다.
물론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는 역사적 흐름이 있다. 종교 개혁 시기부터 사회 참여, 세상의 변혁과 같은 문제가 신학적으로 잘 정립이 되어 왔고,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변되는 제1차 영적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을 통해서도 그 흐름이 이어진다. 그러나 제2차 대각성 운동에 이르러 기독교는 감정과 체험에 치중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영향보다는 개인의 영혼 구원에 치중한 경건주의적 신앙의 형태로 변모해 갔고, 이로 인해 복음주의 역사 속에서 빈번히 복음과 사회의 연결 고리가 느슨해지거나 단절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오랫동안 사회나 정치, 학문에 대한 관심이 배제된 이런 부정적 영향이 개신교 전통 속에서 지속되어 오다가, 20세기 중반 <Christianity Today>의 편집장이자 풀러신학교의 초대 교수인 칼 헨리가 자신의 저서 <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에서 당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사회 참여를 선언함으로써 개인 복음 전도와 더불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이른바 '신복음주의' 태동의 시발점이 된다.
칼 헨리와 신복음주의의 태동은 기독교의 사회 참여라는 이슈에 크게 기여했고, 1974년 7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세계 복음화 국제 대회에서 채택한 '로잔 선언'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 사이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 대회는 10일간 지속되었고 150개 국가에서 2700여 명의 복음주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였다.) 이 선언은 전도와 사회 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전도와 사회, 정치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했다. 또 로잔 언약은, 사랑에서 나온 예수님의 전도(word)와 봉사(deed)를 이분화하거나 고립시킬 수 없음을 강조했는데, 당시 대회에 참여했던 조종남 박사도 "원색적 복음주의가 귀한 유산으로 간직해 오던 사회적 책임을 로잔 언약에 이르러 되찾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위대한 공헌'이라고 언급했다.
물론 로잔 선언에서는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의 관계에 있어 소위 '복음 전도의 우위성, 우선성'을 명확히 하였는데, 이는 사살상 사회적 책임보다 한 영혼 구원이 더 중요하며 순서상 우선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후 복음주의권의 지도자인 존 스토트가 예수님의 사역, 그리고 제자들의 사역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 사이에서 어떤 우위성도 발견할 수 없으며, 단지 이 두 주제는 신앙의 두 측면으로 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수정된 견해를 '마닐라 선언'에서 재차 강조하게 되는데,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이후 새가 양쪽 날개를 모두 사용하여 난다는 의미에서 '양 날개 이론'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결국 복음주의 내부에서 사회 참여라는 이슈는 복음 전도의 한 가지의 방법이 아니라 동일한 신앙의 두 측면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신학적으로 정립된 셈이다.
기독교 사회 참여, 문제점들
이렇듯 역사적인 신학적 입장 정리를 살펴보았으나 실재로 기독교는 얼마나 사회 참여에 운동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 전반에 걸친 실천적 열매를 맺고 있는가. 존 스토트가 자신의 책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밝혔듯이, 정직하게 우리를 돌아볼 때 여전히 그 운동성이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역사 속에 그 흐름이 지속되어 온 기독교 사회 참여가 아직도 소원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1. 사례의 부족
단적으로 말해서 사례들이 희박하다. 외국의 경우(물론 대부분이 북미에 한정되어 있다) 1차 대각성 운동 시기에 부흥이 일어난 지역에 술집이 문들 닫았다는 류의 이야기나,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제 폐지 운동 정도만을 아직까지도 언급하는 일이 다반사이며, 우리나라도 기독교 세계관과 복음주의 신학이 정착한 지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실상 사회 참여의 이상적 모델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국내에서 가장 사회 참여의 이상적 모델로 평가하는 사례는 1990년대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낙천낙선 운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정치인의 면밀한 조사와 함께 각각의 의원에 대한 낙천낙선 운동이 일반 시민 단체와 협조 체제를 구축하면서 그 추진력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 발휘되었다.
하지만 당시 협력 관계에 있었던 진보적인 시민 단체들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 정치적 이슈들이 약해진 가운데 기윤실이 문화 영역에서 영화 <거짓말> 상영 금지 요청, 가수 박지윤의 <성인식> 뮤직비디오 방영 금지 운동을 전개하자 성적 보수성을 비판하며 돌아서게 되었고, 이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회 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소극적으로 대응함에 따라 기윤실로부터 교회개혁실천연대가 독립하는 등, 90년대 후반부터 그 운동성과 영향력이 상당 부분에서 수그러들게 된다.
2. 신학적 입장과 실천의 장 사이의 괴리감
또한 기독교가 사회 참여적인 신학적 입장을 견지했다 하더라도 신학적 입장과 그 실천 사이의 괴리감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국에서의 신사 참배 문제, 군사 정권 아래에서의 조찬 기도회 참여, 한기총의 극우 편향성과 권력 친화적인 행보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바 있으므로 굳이 이 글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사례들에 덧붙여, 개신교 신앙의 선배이자 종교 개혁의 두 주역인 루터와 칼뱅도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만을 첨언하고 싶다. 최근에 교회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담은 김두식 교수의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루터도 칼뱅도 종교 개혁 과정에서 철저하게 세속 권력에 의존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 왕국은 구별된다는 신학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정치권력의 그늘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세속 권력인 독일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토마스 뮌처의 반란이 시작되자 루터는 완전히 군주들 편으로 입장을 선회하여 무고한 농민들의 처형을 묵인했고, 심지어 반란자들을 죽이고 쳐부수고 목 조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영혼이 사탄의 손에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루터의 주장에 고무된 자들의 손에 7만 5,000여 명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네바를 정치적으로 장악하여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칼뱅도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그노 전쟁을 통해 조국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를 획득하려 했고, 신학적인 반대파를 화형으로 제압했습니다. 정치권력과 손잡은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칼뱅이었지만, 정치적 기반 없이 투쟁에 나선 농민 반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있어서 기독교인이 현실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을 때 그 실천적, 입지적인 한계나 편향성으로 인해 오히려 세상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3. 실천을 주저하는 개신교
기독교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스탠리 하우어와스는 그의 책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에서 미국이 리비아에 있는 민간인에게도 폭격을 가했을 때 있었던 토론을 자세히 소개한다. 토 론에 참석한 한 학생이 하우어와스에게 그 의견을 묻자 그는 기독교의 응답은 바로 내일 아침에 리비아로 미국 교회가 1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얘길 들은 학생이 미국 정부가 위험 지역인 리비아에 비자를 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하우어와스는 정작 비자가 안 나와서 못 가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이러한 담대한 일을 감당할 사람을 세우는 교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글을 읽고 나는 한동안 충격에 사로잡혔다. 내 기억으로는 2003년 이라크 전쟁 중에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기독교인들이 '인간 방패'라는 이름으로 반전 평화 팀으로 평화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을 때, 그들의 모교회인 복음주의권 어느 곳도 파송해 주지 않아 전전했던 그들을, 아나뱁티스트(재침례교의 하나) 교회가 아무런 단서나 조건 없이 끌어안았던 일이 있었던 터라 더 충격이 컸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상황을 <뉴스앤조이> 주재일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유은하 씨는 편지 한 장만 들고 알지도 못했던 아나뱁티스트 센터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라크로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여기 아니면 아무도 나를 이라크로 보내 주지 않을 거예요.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없나요.' (...) 이재영 간사는 아나뱁티스트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평화 운동가로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찾아왔다. 그러나 평화 운동에 대한 신념은 분명하다. 우리가 파송하지 않아도 그는 이라크에 갈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모든 이들이 '파송하자'고 회신을 보냈다. 캐나다 아나뱁티스트 교회들도 유은하 씨를 위해 기도하며 모금 활동을 펼쳤다. 유은하 씨는 든든한 기도의 동역자들을 만나 이라크로 향했다. (.. ) 전쟁이 끝나 생사의 문제가 부담이 안 되는 지금에야 비로소 다들 유은하 씨와의 관계를 들춰내고 있다. 유은하 씨는 분명 몸은 '복음주의 진영'에 있었지만 파송은 평화주의 교회로부터 받았다." (주재일, <뉴스앤조이> '유은하가 전쟁터로 떠난 이유는?')
당시 나는 처음 이 기사를 접했을 때 마음이 착잡했다. 사회 참여를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친정과도 같은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내쳐진 반전 평화 팀을,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흔쾌히 받아 주고 그들을 파송하고 진심으로 기도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리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도 하지 못하는 일들을 몸소 실천한 재침례파 교회를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교파 정도로 평가 절하하는 것을 보면서, 문득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마친 후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인가"를 묻는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글을 마치며
기독교 사회 참여라는 이슈는 과거 신앙 선배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끄럽게도 20세기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사회 문제에 무심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신학적으로 그 입장이 정립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다행히 이제 우리는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의 두 영역에서 사회 참여를 배제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한쪽으로 처박아 두지는 않겠지만 과거 개신교의 역사와 한국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도 빈번히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고 오히려 세상의 논리로 사회 문제에 개입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일삼기도 했다. 또한 이라크 전쟁 당시 반전 평화 팀 사례와 같이 정작 나서야 할 때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용기 있는 행동의 장애 혹은 방해 요소가 되기도 했다.
글을 접으면서 나는 최우선적으로 한국교회가 더욱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표준 선(善)보다 더 부정부패가 많고 암암리에 세상과 결탁하고 세상의 부와 권력을 나눠 갖고 있는 한국 교회는 사회 참여 자체가 오히려 기독교 세속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한국교회가 주도권을 가진 중심 세력으로서의 사회 참여, 세상 변혁을 이끌기보다는 세속화한 세상을 견제, 비판하고 세상이 때때로 불의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바른 방향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압력 단체로서의 '참여'를 권하고 싶다.
세상 속에서 변혁의 중심 세력이 되었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앙 고백과는 별개로 실천의 장으로서의 세상 속에서 한계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교회가 압력 단체로서의 실천을 하는 것조차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더 복잡해지고 섹트화한 포스트모던 사회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분석하며 대안들을 고민함과 동시에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실천들을 실행해 보는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원론적으로 옮은 말들을 세련되게 되뇌이지만 정작 실천의 장에서는 방관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멈추고, 겸손하게 우리의 할 바를 작은 실천 영역에서부터 성실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 사회 참여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