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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형 한국 복음주의' 논의를 고민하며
복음주의 정론지로서 <복음과상황>의 방향성에 관하여

 

 

들어가면서

복음과상황(이하 복상) 1월 호에 실린 정정훈 편집위원의 글 '한국 복음주의, 혁신 없이 미래는 없다'를 흥미롭게 읽고 생각을 좀 더 나눠 보고 싶다. 논의에 앞서 질문을 던지고 싶은 부분이 있다. 복상은 '복음주의 정론지'를 표방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전까지 복상은 복음주의 정론지로 로잔언약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는데 현재 혹은 앞으로의 방향을 어떻게 잡고 있으며 잡아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논의를 지금 시작하려는 건가. 여러 가지의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먼저 입장을 조금 표현한다면 나는 한동안 에큐메니컬 그룹을 쫓아다녔다. 정용섭 목사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으면서 한동안 대구성서아카데미 모임을 주로 갔었고- MT도 따라가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하지만 나는 기존 복음주의 진영을 떠나 에큐메니컬 진영에 속하지 못했다. 물론 인맥적인 낯설음도 있었겠고 신학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복음주의자임을 부정할 정도로 복음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다. 여전히 나는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규정한다. 이 글은 그런 개인적 입장이 많이 반영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복음주의에 대한 개인적 애정이 묻어날 것이다.

 

 

복음주의의 정의, 특징

먼저 복음주의의 정의와 특징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언급한 바 있으나 4명의 신학자를 중심으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제임스 패커

패커의 논문 '복음주의 영국 국교도의 정체성 문제'는 네 가지 일반적인 주장과 여섯 가지 특수한 확신들로 이뤄져 있다.

 

1. 실천적인 기독교: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제자도로 이루어진 삶의 방식
2. 순수한/순전한 기독교: 기독교 신앙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닌.
3. 연합하는 기독교: 복음의 진리에 공통된 헌신을 통해 연합함
4. 이성적인 기독교: 대중의 경험에 집착하는 대중적인 경향에 반함

 

이후 여섯 가지 확신은 △성경의 최고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장엄 하심 △성령의 주 되심 △회심의 필요성 △전도(예배)의 우선성 △교재의 중요성 등으로 표현된다.

 

 

데이빗 베빙턴

데이빗 베빙턴의 <영국의 복음주의: 1730~1980>은 패커 논문이 발표되고 10년 후 출판되었고 그 책에서 네 가지 주된 특징을 언급한 바 있다.

1. 회심주의(conversionism) - 성령에 의한 회심('중생', '거듭남', '새로남' 또는 '구원') 경험을 강조한다.
2. 성서주의(biblicism) - 성경 또는 성서를 하나님(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유일한(only) 또는 일차적(primary) 권위로 본다.
3. 행동주의(activism) - 문서 선교나 국외 선교 등의 선교 활동을 강조한다.
4. 십자가중심주의(crucicentrism) -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 본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알 리스터 맥그래스도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 복음주의가 어떤 조직이나 교파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복음주의, 복음주의자들의 특징을 아래의 4가지로 유연하게 정리한 바 있다. 최근까지 대체로 '복음주의'를 정의할 때 맥그래스의 것을 따르는 추세였다.

1.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여 성서 공부, 성서 묵상 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2. 예수의 십자가를 강조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의 죽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3. 성령에 의한 개인의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4. 헌신적인 복음 전파

 

 

존 스토트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의 기본 진리>에서 패커와 베빙턴의 특징을 언급하면서 전도 활동, 회심 경험, 교제의 필요성이 성격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 중심, 성령의 주 되심과 같은 진리들과 같은 층위의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고 이에 따라 그는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 우선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으로의 구분을 제안한다. 즉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권위,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장엄성, 그 사역으로 드러나는 성령의 주 되심의 삼위일체적 복음을 통해 이후 특징인 회심, 전도, 교제 등은 따라오는 것, 혹은 복음을 더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그는 이 삼위일체적 복음을 다음과 같이 재정리하였다.

 

1. 성부 하나님의 계시하시는 주도권
2. 성자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역
3. 성령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사역



복음주의적 정의는 우리를 규정할 수 있나

앞서 언급한 몇몇 복음주의 학자들이 정리한 복음주의의 특징은 서로 차이가 나는 부분이 존재하나 내용 면에서 대동소이하다. 몰론 존 스토트의 삼위일체적 신학과 우리의 행동으로 규정짓는 복음주의의 핵심 진리는 그간의 정의의 층위를 새롭게 구분하는 느낌이 강하나 이 또한 내용이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에 대한 견해차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사실 개신교도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러한 구분은 맥그래스의 지적대로 복음주의를 아우르는 '스펙트럼의 다양성'에 기인한다. 이러한 정의는 결국 자신이 어느 교단, 교파에 속하든지 위에서 언급한 복음주의적 특징에 공감, 헌신하는 자라면 복음주의라는 범주에 속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복음주의권 내부의 이러한 구획 작업은 복음주의의 특징을 정의한다기보다는 개혁주의자는 누구까지를 신앙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나 하는 문제를 고민한 결과라고 인지하는 편이다.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사실 이런 고민이 필요 없지 않겠는가(솔직히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컬에게 '당신도 복음주의자로 끼워 주겠소'라고 말한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며 끼워 줘서 감사하다고 말할 이가 있을까).

 

하나 개혁주의자들은 20세기에 만연하게 퍼진 연합 운동에 대해 교리적 측면에서 부담을 느껴 왔을 것이고 연합 운동 안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가톨릭, 은사주의, 성공회 등등 많은 기독교 교파들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나름의 돌파구를 찾은 셈이다. 결국, 복음주의적 특징의 표명은 신복음주의자들이 고심 끝에 좀 더 연합할 수 있는 집단에 대한 파이를 키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려는 '나름의 필요'에 의해 활기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복음주의자들이 그런 이유에서 정의 내린 복음주의의 특징으로는 진정한 복음주의의 '구획 설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당혹스러운 결과를 초래한다. 그 특징으로 구획을 나눌 때 복음주의는 손에 잡히지 않는 이른바 '범기독교집단'으로 확장된다. 정정훈 편집위원의 지적대로 한기총도, 순복음교회도, 각종 대형 교회들도 모두 복음주의 교회다.

 

사실 이런 두루뭉술한 범주화와는 구별되게 실제로 복음주의 진영은 그 실체가 있다. 학자들과 교회들이 어느 정도 뚜렷하고 그들이 말하는 메시지가 차별성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복음주의의 특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복음주의 진영이 세상과 혹은 교회 내부에서 지속해서 갈등을 겪으면서 정체성을 찾아 나간 궤적이며 자주 그 특징은 '부정적 전략(negative strategy)'의 형태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존 스토트가 <복음주의의 기본진리>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을 설명하기 이전부터 근본주의에 대한 10가지의 부정을 통해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은 이러한 복음주의의 상황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10가지'의 부정이라니).

 

 

근본주의가 아닌, 구복음주의와도 구별된

한국 복음주의는 결국 북미의 상황을 그대로 전승받은 것이고 북미 혹은 영국 복음주의의 특징보다는 그들의 시대적 상황에서 대응해 온 부정, 특히 개혁주의 내의 '근본주의적 흐름'에 대한 부정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과학 혁명으로 촉발된 진화론적, 유물론적 사고와 학문에 대한 극단적 반대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이는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으로 이어졌다.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자들의 성경 해석 시에 차용한 고등비평에 반대하였고 고등비평적 방법론을 차용한 어떠한 형식의 성경 비평 작업에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주장했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을 '신복음주의'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논박한 복음주의 신학자 칼 헨리의 저서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 출판을 계기로 본다(칼 헨리는 이 책에서 "현대의 지성이 전 지구적 딜레마와 씨름하고 있는 반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메시지는 서양 문화의 병폐를 해소할 대안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복음주의의 양심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라고 말했고 그 주장은 불행히도 지금 우리의 상황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이러한 방향성 중 사회적 참여에 관한 관심은 존 스토트가 참여한 로잔언약을 통해 정리되었고 복상이 따라왔던 복음주의는 이 로잔언약의 사회적 책임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 복상에서 복음주의를 논할 때 사회 참여적 복음주의로 그 구획을 한정하는 것에는 개인적으로 다소 회의적이다).

 

또한, 로이드존스, 메이첸, 이안 머레이 등 구복음주의자와 구별되는 교파적, 신학적 특징이 존재하는데 이 때문에 복음주의는 '진보적'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이안 머레이가 쓴 <분열된 복음주의>에서 그는 이러한 복음주의적 구별의 특징과 역사적 상황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영국적 시대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그 사건들을 중심으로 대략 정리한다면 에큐메니컬 운동의 참여,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변화, 복음주의와 가톨릭의 연합 문제에 대한 복음주의권 내부의 의견 충돌과 분리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머레이는 그 책에서 구복음주의자들이 '진정한 복음'을 고수하는 견해라는 것을 명시한다. 개인적으로 청교도적 신앙 유산을 중시하는 교회를 오랫동안 출석하면서 나에게는 영국적 상황이 내 신앙적 입장을 결정하고 변호해야 하는 실제적인 문제였고 따라서 영국적 고민이 내 실존적 문제로까지 소급되는 경험을 했다. 만일 진보적 성향의 교인이 보수적 개혁주의 교회를 다니는 한국적 상황에서도 이 영국 복음주의의 신학적 입장은 내 경우와 더불어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볼 때 복음주의의 특징은 그 삼위일체적 교리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근본주의적 신앙 흐름에 반대하는 일련의 특징, 학문과 지성의 강조, 과학의 진보에 대한 열린 자세, 전도와 더불어 사회문제에 관한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또한, 교회 내부적으로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참여를 통한 교회 연합 운동의 공감과 성경 해석에서 문자적 해석, 축자영감설의 부정 및 역사 비평에 열린 자세 등이 복음주의의 특징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 복음주의'의 구별적 상황(Context)

복음주의의 특징 형성 과정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특징을 명확화하는 과정 중에는 항시 역사적 상황의 압력 혹은 갈등이 동인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북미의 상황을 볼 때 과학을 위시한 학문적 진보, 특히 진화론과 유물론적인 입장은 지속해서 교회의 태도 표명하기를 기대했고 교회도 한계가 있었겠지만 나름대로는 그 답을 찾고자 애썼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건 교회의 대응이 근본주의적이었느냐 신복음주의적이었느냐 하는 부분보다는, 세상이 교회의 대답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이며 이 부분에 방점을 찍고 싶다. 따라서 20세기 북미의 상황과 21세기 한국의 상황은 시대적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 외에도 '세상은 교회의 입장을 경청했다'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21세기 영국과 북미의 상황을 보더라도 교회가 사회문제에 대한 영향력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나 - 존 스토트의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은 그러한 현상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시작한다 - 우리의 정황은 더 심각하다. 우리나라의 현재는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교회의 입장이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뉴라이트 운동, 기독교 장로 대통령의 횡포와 구국기도회, 빤쓰 목사의 기독교 정당 창당 등 기독교의 정치 참여 자체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다. 따라서 복상이 할 수 있는 그리고 그간 해 온 전략인 '우리는 다르다, 진보적인 태도를 가진 기독교 집단이 존재한다'는 목소리는 그냥 묻혀 버리기에 십상이다. 사회적 진보 세력이 충분히 커버하고 있는 메시지이며 더 진일보하고 시의적으로도 적절한 이슈 선점과 깊이, 영향력 측면에서 모두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과연 교회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한국 복음주의의 현실 인식은 양희송의 '포스트 2007시대: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와 정정훈 편집위원의 이번 글이 맥락을 잘 짚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정훈의 이번 글은 개인적으로 한국 복음주의를 다시 정리해 보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카리스마적 리더 의존형 운동 방식에 대한 한계점, 이만열, 손봉호 이후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고민, 복음주의가 지향하는 교회 갱신, 사회참여 양쪽에서 다 무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는 대목에서 공감과 함께 강한 우려감이 든다. 특히 그가 언급한 '1987년 체제'는 중요한 시점의 지적이며 1987년 체제는 민주화의 불완전성이 그대로 교계에도 복제된 느낌이 강하다. 특히 민주화 주체 세력이 아닌 교회는 이후 사회참여라는 이슈에서 대부분 주도적이지도 못했고 현실 정치 참여적이지도 못했다.

 

물론 전혀 결과물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결과들이 변질하거나 쇠퇴하고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다. 특히 낙천․낙선 운동은 내가 아는바 사회가 관심을 가졌던 교회의 유일무이한 활동이었고 그러한 관심을 곧 이은 영화, 동성애 문제 등 문화 운동에 대한 다소 깊이 없는 반대 운동으로 이내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제는 앞서 언급한 많은 교회의 부정적 활동 때문에 '개독교'라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1990년대는 민주주의의 태동과 기독교 대중문화 운동이 꽃피우는 시점에서 다행스럽게도 복상적 메시지에 어느 정도 주목하는 집단이 존재했고 그 집단은 어떤 문화적, 인맥적, 신학적인 통일체였기에 그들을 중심으로 복상이라는 매체는 소비되었고 그 메시지, 이른바 복음주의의 특징은 전수되었다. 이후로는 기독교 문화 운동은 세속 문화를 뛰어넘지 못했고 – 원래 못 하는 게 당연하지만 – 그 세속 문화를 비평하는 잣대조차 좀스럽다. 성서한국이나 선교단체로 대변되는 파라처치들도 점점 그 수가 줄고 있고 진보적인 복음주의 집단은 섹트화되고 다각화되었다. 이제는 한 부류로 몰기엔 '너무 다른' 자신들의 입장이 많다.

 

 

전략, 방법론으로서의 복상, 복음주의

 

"나는 분열을 거듭하는 복음주의의 경향에 대해 계속해서 깊이 염려하고 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수적인 측면이나 교회 생활면에서, 학문적 성취나 리더십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단결이나 국가적 영향력에서만은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사람들은 수많은 복음주의 '분파'에 대해 언급하며 '복음주의' 앞에 어떤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보수적, 자유적, 급진적, 점진적, 개발적, 개혁파, 은사주의적, 포스트모던 등 그러한 예들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필요한 일인가?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이해를 선한 양심으로 고수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를 복음주의자들로서 연합시키는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복음주의의 기본 진리>의 서문에서 존 스토트가 한 말이다. 나는 그의 고백에서 진정성을 읽는다. 그리고 이 글에 깊이 공감하는 나는 전략적으로 무엇보다 우선으로 한국교회에 다양한 교리적, 교파적 차이에도 이 분리주의적인 한국교회의 연합에 복상이 가장 치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하나의 생각, 하나의 교리, 하나의 운동으로의 연합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진리 아래에서 다양한 입장과 교파, 교리, 운동들이 방대하게 소개되고 때로는 치열하게 논쟁도 하고 때로는 어떠한 이슈와 이벤트에 물리적으로도 연합하는 일들을 적극 권장하는 운동으로 변해야 하고, 그런 부분에서 복상이 매개체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솔직히 한국교회의 연합 문제를 생각하면 복음주의 정론지의 틀을 유지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부차적으로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복음주의의 베이스캠프는 유지하되 국내의 아나뱁티스트, 가톨릭, 성공회 등등의 교단의 필진을 발굴하여 더욱 많은 견해의 장이 마련되는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

 

정치, 사회 참여적인 문제에는 어떤 핵심 매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내려놓고 복상이 추구하는 세상적 가치들을 꾸준히 설명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도 진보 진영의 메시지를 카피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의성이 떨어지거나 일반 매체가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성경적 원리들을 돌아보거나 기독교적 가치로 진보 이슈들을 한 번 더 풀어내는 작업들을 복상이 해 주면 좋을 것이다.

 

올해에는 정치적으로 풍성한 콘텐츠들이 생산될 터인데 이때에는 더욱 과감하게 이슈들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건 어떨까 싶다.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거나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부분에서도 복상의 언로가 정치적으로도 단일화되는 것을 표방하기보다는 복음주의권 전반에서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에 대한 차분하고 내실 있는 논지를 통한 다양한 견해들이 나뉘고 그 견해들에 관해 토론과 공감이 가능하도록 방향성을 잡아 주면 좋을 듯하다.

 

2012/02/12 00:39 2012/02/12 0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