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나는 대학원생이다. 대학 등록금은 내가 아르바이트도 했고 부모님도 많이 도와주셔서 해결할 수 있었다. 학부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부모님께 이야기 드렸더니 대놓고 화를 내진 않으셨지만 아버지가 자신은 여력이 없으니 대학원 등록금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쌀쌀맞게 말씀하셨다. 퇴직한 아버지 입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무리도 아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남들은 취업 준비하는데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게 두고두고 맘이 편하지만은 않다. 잘못된 결정이었나 자꾸 돌아보게 된다. 공부에 자신도 없고 2년 뒤에는 다시 취업해서 빚을 잘 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자꾸 위축된다. 선교단체를 열심히 섬기던 학생 시절에는 실연을 당하거나 중간고사를 망쳐도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자신감 같은 게 있었는데 몇 천만 원이나 되는 돈을 빌리고 나니 대출금 갚을 생각만 하면 망망대해에 나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요즘은 식당에서 밥 사 먹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벌이는 없는데 자꾸만 찢어진 주머니로 돈이 새어 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다. 가끔씩 지도 교수님이 던지는 농담도 논문이나 졸업과 관련된 얘기면 나답지 않게 경직되곤 한다.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나는 할 수 있어!’ 되뇌지만 오늘밤도 이런저런 잡 걱정으로 뒤척인다.
# 2
나는 이십대 후반 직장인이다.
오늘도 주식이 떨어졌다. 젠장. 오를 때는 찔끔찔끔 오르면서 떨어질 때는 짤 없다. 냉정한 시장경제! 그래도 주식 공부를 나름 열심히 해서 그런지 작년에는 성적이 꽤 좋았다. 중간중간 소액 투자한 돈을 잃기도 했지만 합계를 따지고 보면 아마 몇 백만 원 정도는 번 것 같다. 그래도 옆자리의 김 과장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성적이다. 작년에 김 과장님은 3천만 원 넘는 수익을 냈다는데, 아마도 주변에서 무슨 정보를 들은 게 분명하다. 올해는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분산투자를 위해 펀드도 몇 개 가입했고 부동산도 슬슬 공부하려고 한다. 요즘 은행에 저축해서는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도 못해 마이너스 되기 십상이니만큼 회사 일도 중요하지만 재테크 공부를 제대로 좀 해야겠다. 직장을 다니고 보니 대학 때 세상을 너무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어서 빨리 수익률 대박 나는 아이템을 찾아야 할 텐데. 그러면 가난한 우리 교회에도 크게 후원 헌금 내고 착한 일도 많이 하고 살 수 있을 텐데. 사실 이제는 투자에 좀 자신이 생겨서 얼마 전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올해는 은행 이자보다 큰 수익을 낼 자신이 있다. 주변에서 ‘인생 뭐 있어, 한방이야’ 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는데 겉으로 티 나게 동조는 안 하지만 공감이 될 때가 많다. 작년에 주식으로 번 돈으로 부모님 선물도 해 드리고 태블릿 PC도 샀다. 올해는 시작부터 주가가 불안정하긴 하지만 기회가 또 올 거란 생각이 든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 승자 아니겠나.
# 3
나는 30대 중반의 직장인이다. 여윳돈이 많은 편은 아니어서 대출받은 돈이 꽤 된다. 결혼할 때 부모님이 보태 주신 돈과 대출금을 합해서 서울에서 전세를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 재미에 빠져서 산 지 어언 2년. 집주인이 전세 시세가 올랐다며 4천만 원을 더 달라고 했고 돈을 추가로 빌리기는 싫어서 어쩔 수 없이 경기도로 이사했다. 아내와 맞벌이로 대출금을 조금씩 갚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임신을 했고 그 때부터 다시 금전적인 어려움이 시작됐다. 직원 수가 많지 않은 직장에서 눈치를 받던 아내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출산을 한 첫해에는 아내 수입도 없어졌고 병원비며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서 대출금을 거의 갚지 못했다. 작년 연말에 ‘전세 대란’이 찾아오면서 지금 사는 전셋집 주인아주머니가 몇 천만 원을 올리겠다고 말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도 얼마 안 됐고 익숙하게 다니던 병원이나 가게들이 주변에 있는데다가 전세 시세가 다른 지역도 비슷하게 오른 터라 어쩔 수 없이 추가 대출을 받았다. 그래도 대기업 다닌다고 신용대출은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이자는 6.8퍼센트. 변동 금리라 더 낮아질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매달 이자만 3,40만 원을 낸다. 친한 회사 동기는 그 정도 금액을 연금보험에 내고 있는데 벌써부터 그 친구에게 뒤처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그는 집도 부모님이 사 주셨다. 첨엔 결혼하고 나서도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는 게 한심해 보였는데. 가끔 재미삼아 몇 년이 지난 후 동기와 내 재산의 차이를 셈해 보곤 하는데 그 때마다 기분이 우울해진다.
# 4
나는 40대 초반의 가정주부다. 결혼 초기에는 직장 생활을 했는데 아이 둘을 낳고는 복직을 포기했다. 하지만 ‘둘째가 좀 더 크면 다시 내 꿈을 펼쳐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아이가 크면서 교육비 나가는 게 장난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돼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 사실 나도 이렇게 아이들 사교육비를 많이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이의 반 친구들이 다 학원을 다니는데 내 아이만 바보같이 키울 수는 없잖나. 더군다나 학원을 안 보내면 주변에 함께 놀 친구들이 없다. 큰애는 작년부터 방학 때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보내고 있다. 다행히 주변에 그런 정보에 훤한 학부모가 있어서 그 분 인솔하에 학생들이 방학 때마다 다녀오는데 정말 ‘빡세게’ 공부시키는 것 같아 내심 안심이 된다. 문제는 점점 여윳돈이 없어지고 빚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남편은 아이 교육비가 얼마나 드는지, 요즘은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씀씀이 커졌다고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최근 들어 부쩍 부부싸움이 늘었다. ‘돈이 정말 없기는 없나 보네’ 하고 생각하게 된 게, 얼마 전 남편이 정색을 하며 빚을 줄이고 전세 살자고 말했을 때다. 확답은 안 했지만 생각해 보면 장기적으로 아이 교육비도 계속 들어갈 거고 집안 가구들도 너무 낡아서 이제는 바꿔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전셋집 매물들을 돌아다녀 보니 두 아이 각각 방을 내주려면 집 평수를 줄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애들 학원을 옮기면 성적 떨어질까 봐 걱정돼서 이 동네를 벗어나기도 힘들겠고. 나도 빚에 익숙해진 건지, 처음 대출을 받았을 때는 액수를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꾸 신경도 쓰였는데 지금은 딱히 그렇지도 않다. 주변 엄마들에게 물어봐도 빚 없이 사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나름 안심이 된다. 아이들 사교육비도 첨엔 미쳤다 싶을 정도로 비싸 보였는데 이제는 간이 좀 커진 건지 오히려 너무 저렴하면 의심이 가기까지 한다.
빚이 곧 신용인 사회
위의 사례들은 주변에서 흔히 들을 법한 이야기다. 내 가족의 일일 수도 있고 이웃의 일일 수도, 혹은 자신의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2000년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나라도 급속히 신용카드 사용이 늘었다. 언제부턴가 신용카드는 광고 속 카피처럼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는 도구가 되었고 채무, 빚이라는 단어는 ‘신용(credit)’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신용이 좋은 사람이 사회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은행 이자율은 떨어져서 3퍼센트 대를 넘지 않는 요즘, 돈을 적당히 빌려서 자신의 자산을 불려 나가는 이른바 ‘재테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인정받는 분위기다. 대출을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가 자기 자산 관리 차원,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재테크의 기본적 요소로까지 여기는 인식의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주식 투자를 위해 3천만 원을 빌렸는데 1억 원으로 올라서 빌린 돈도 갚고 결혼 자금으로 썼다더라는 식의 아름다운 전래 동화 같은 이야기가 돌아다니곤 한다. 실제로 그 누군가는 그렇게 돈을 벌었음에 분명하지만 반대로 빚을 내서 시작한 주식투자로 손절매에, 파산까지 맞은 극단적 부류들도 분명 있을 텐데 그런 사례는 잘 회자되지 않는다. 솔직히 주변에서 대출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정말 먹고살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자산 관리의 한 형태로, 혹은 사교육비나 재투자를 위한 여유 자금을 어느 정도는 확보하기 위해서 빚을 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정 규모의 소비를 위해 빚을 지는 성향도 강하다. 자동차, 컴퓨터, 고가의 가전제품들도 지금 당장은 여력이 없지만 신용카드로 할부 구매하면 절대 구입을 못할 정도는 아니니 빚지고(물론 대다수는 지불을 살짝 미루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신상품을 ‘득템’한 후 일단 간지 나게 사용하는 것이다.
빚으로 사는 시대의 복음
2011년 한국은행에서 가계 대출이 900조 원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이제 곧 개강인데 가정마다 입시에 합격한 신입생들은 그저 기쁘기만 했던 과거와 달리 천만 원대의 등록금을 마련할 걱정에 학부모와 자녀 모두 한숨만 쌓인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당선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립대 반값등록금 선언은 진정한 ‘복음’(good news)임에 틀림없다! 그뿐이랴. 미국, 유럽의 위기와 국내의 전세 대란이 겹쳐서 한겨울에도 동네마다 집집마다 이사하는 가구가 늘고 있다. 작년부터 오른 전셋값은 서울의 경우 일 년 사이에 무려 4000~6000만 원 정도가 올랐다. 살던 곳을 고집할 경우 추가 대출이 불가피하고 그럴 경우 대략 이자로만 매년 300만 원 이상 나갈 추세다.
최근에 <시사IN>과 팟캐스트 ‘나는 꼽사리다’ 등 진보 매체들이 가계 대출의 심각성을 절절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 심각한 정도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운 탓인지, 세금혁명당의 선대인 대표는 2012년에는 무엇보다 가계 빚을 줄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사회가 소비를 조장하고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고 있어 그 ‘관성’을 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스마트폰은 매년 새 모델을 출시하는데 가격을 24개월간 낼 통신비에 쪼개 넣음으로써 고가의 기깃값을 숨긴다. 아이들은 중학교만 들어가도 특정 브랜드의 점퍼를 입지 않으면 창피하다고 하소연한다. 자녀 교육은 어떤가.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학군이 낮은 지방 도시로 이사를 간다는 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 옆집 아이들은 벌써부터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원어민처럼 발음도 좋던데 내 아이는 왠지 뒤처지는 느낌이 들 때면, ‘내가 너무 무심해서 이 아이를 바보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노년을 위한 대비도 해야 하는데 지금 상태로는 노년에 빚만 없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겠거니 싶다.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눠 봐도 딱히 정답은 없어 보인다. 성도들도 다들 대출 빚을 어느 정도씩은 가지고 있고 사교육비나 소비 규모도 서로 비슷한 수준이다. 함께 ‘빚진 자들’이라 위로가 되기는 한다. 교회 목사님은 나서서 교인들끼리 돈거래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보증도 서지 말고 큰돈은 누가 부탁해도 빌려 주지 말라고 설교 시간에 강조하곤 한다. 간혹 교회 안에 사기 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돈거래에 있어서는 교인들 사이에서도 경계심이 강해졌다. 한참 웃으며 덕담을 주고받다가 장난으로라도 보증 부탁을 하면 사이코 취급 받기 쉽다. 찬양할 때는 서로를 안아 주기까지 하는 ‘주 안의 형제자매들’인데 서로 돈을 빌릴 수는 없는 게 우리 공동체의 자화상인 셈이다.
빚에 허덕이는 성도들을 교회가 도와 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교회는 그래도 어느 정도의 융통 가능한 큰돈이 있지 않을까. 실상 교회도 성도들 못지않게 빚이 많다. 개척교회에서 교인이 늘면 담임 목사님은 좁은 공간 때문에 교인이 증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금방 큰 장소로 이사를 가거나 건축을 추진하고 그 과정에서 임대료나 대출 빚이 크게 늘어난다. 허나 매달 성도들이 성실하게 십일조 헌금을 하기 때문에 이자를 갚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는 매달 임대료로만 300만 원 이상을 냈다. 따지고 보면 성도의 헌금이 교회나 이웃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건물주나 대출 은행으로 가는 셈이다. 이자로 커진 금융자본은 다시 성도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그 돈은 다시 교회로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교회와 성도가 동반하여 가난해지고 금융자본만 커 간다. 한국 사회의 빚, 한국교회의 빚. 미사여구로 포장된 이 빚은 진정 이 세대의 가장 큰 속임이 아닐까. 그야말로 ‘빚과 속음’의 시대다!
김용주 본지 편집위원, 현대기아자동차 남양만연구소 연구원 myjay.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