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까지 마쳐야 하는 온라인 수업이 있어서 아침일찍 잠을 깼으나 성하가 하필 그시간에 깨서 뒤척이며 우는 바람에 수업을 못 들었다. 때때로 자녀 때문에 해야할 일을 못하거나 발이 묶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빠가 이럴진대 엄마는 더 하지 않겠나. 임신 때부터 직장에서는 일도 제대로 못하고 업무 능력이 떨어졌다고 눈치주기 일쑤고 출산 후 최소 2-3년은 아이를 돌보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 대부분을 쏟아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아이를 낳으면 사회가 전혀 책임져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자녀를 키우는 일이 쉽지가 않다.
요즘 한창 뜨는 단어는 '지속 가능한'이란 말이다. 한 사회가, 한 세대가 지속가능한 어떤 일을 추진함에 있어 자신의 후임자에게 그것을 잘 알려주고 또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다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간혹 교계의 사역자들 가운데에도 자신은 스타급으로 분류되면서 자신의 공동체에서 어떤 2인자, 3인자, 혹은 청출어람이 되는 리더를 키워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종종 본다. 공동체에서 더 어린 자, 더 연약한 자를 배려하고 그들을 키워내려는 노력없이 오랜 시간을 방치하면 그 곳은 어느새 '지속불가능한', '역사와 단절된' 형체로 전전하다 끝내 소멸하게 될 소지가 크다.
육아 초기 나는 아이의 소중함과 구별되게 아이를 돌보는 일에 에너지를 쓰는 게 속상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한걸음 뒤에 서서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사는 세상보다는 나은 세상에서 나보다 나은 아들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고 있음을 자주 망각하는 것 같다.
나도 그렇고 우리 직장도 그렇고 우리 사회또한 그러하다. 임신, 출산, 육아에 관련된 모든 에너지의 손실을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공급, 전투력 투입?이라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빠이자 직장인, 사회의 한 구성원인 나부터 반성이 요구되는 바다.
#2.
영화 [Womb]을 봤다. 어릴 적 사랑하던 남자를 찾아 할아버지집으로 돌아와서 그를 다시 만나지만 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 차사고로 그는 죽는다. 그녀는 그를 복제하여 임신하고 그 아이를 낳아서 키우다가 그가 장성하자 그와 사랑을 나누고(성관계를 가지고) 난 후 영화는 끝맺는다. 이렇게 나열한 팩트들은 이 영화를, 그 내러티브들을 다 담지 못한다. 어떤 이의 삶을, 그 파편적인 팩트들 그것도 비난받아 마땅한 사건들을 추려서 나열하고 그 관계성들을 언급하지 않는 판단들을 자주 본다. 그럴 때면 마음이 불편하다.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거나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라는 성경의 구절들을 아전인수식으로 끌어다가 모든 비판 자체를 부정적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들도 문제지만 팩트를 제시했다는 이유로 어떤 사건을 혹은 한 인간의 인생 전체를 허무는 듯한 말들은, 때로는 입가에 맴돌아도 삼켜야 한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자극했다.
#3.
주말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분의 집들이에 가서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헌데 그 모임에서도 여전히 옥의티가 있었으니. 남자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여자들은 부엌쪽에 모여서 음식 만드는 일을 도왔다. 간간이 한두 분이 돕기는 했지만 음식을 준비하고 차리고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여자들에 의해 치뤄졌다.
나도 안다. 남자들이 익숙하지도 않은 남의 집 부엌에서 남의 아내를 도와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싫다기 보다는 무안하고 어색할 수 있다는 걸... 트리플A 성격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차라리 아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우리집 부엌에서 내가 음식을 만들고 접대를 하는 건 어렵지 않아도 남의 집 부엌에서 다른 여자들과 일하는 게.. 참 쉽지 않다.
그런데 대체로 성격이 내성적인 여자들은 남의 집에 초대를 받으면 겉옷을 벗자마자 부엌으로 달려가서 음식 장만을 돕는다. 일상적으로 하도 훈련이 되서 성격적 결함을 극복한 것이다! 시댁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여자들은 부엌으로 달려가도록 요구받기 때문에 어색하고 불편한 남의 부엌에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된 셈이다.
나는 꿈꾼다. 여러 가정이 모여서 남자들이 아이들과 놀이터를 나가고 음식을 만들고 아내들이 겉옷을 벗자마자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강정을 얘기하고 한미FTA를 얘기하고 육아와 자녀교육을 이야기하는 모임을. 현실적으로는 소원한 일이고 여전히 어색한 일이겠지만 그런 자리가 내게는 2% 더 즐거울 것 같다.
2012. 3. 20. 페이스북 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