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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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donald miller
2015/04/02 23:52 2015/04/02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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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same color.
2015/04/02 23:49 2015/04/02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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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cotton reel.
2015/04/02 23:47 2015/04/02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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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포 영화도 스릴러도 아닌 이 영화. 하지만 보는 내내 긴장감과 불편함이 이어진다. 이윽고 기나긴 갈등 국면 끝에 앤드류의 신들린 드럼 연주가 울려 퍼지고, 연주가 끝나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자리를 뜰 수가 없는 압도감, 뒤이어 긴장했던 온몸으로 전달되는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해방감이 찾아온다. 

하지만 영화를 본 누구도 선뜻 이 영화가 '좋은' 영화였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무리 그래도 플렛처 선생이 너무 가혹하다', '결국 앤드류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 훌륭한 드러머가 됐으니 잘 된 것 아닌가', '앤드류의 성공 욕심에 버림받은 여자친구가 안 됐다', '꼭 뺨을 때려야 했나', '또 한 명의 찰리 파커가 되기 위해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살아야 하나' 등등 영화 전반에 걸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두 주연의 행보 때문에 몸(감성)이 반응한 마지막 10분의 감동을 머리(이성)가 눌러댄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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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플래쉬>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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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러티브를 복기해보면, 사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서로의 관계에서 처세라고 할 법한 우회적인 소통이 없다. 이 지점이 평소에 그렇게 남의 눈치를 살피며 사는 우리에게는 꽤 낯설다. 우리 대부분은 관계를 맺을 때 상대에 대한 배려를 통해 친분을 쌓고 관계가 깊어지는 동안 '그 정도면 좋아!'라고 말하며 발전해간다.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욕망을 표현하기 보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어떤 윤리적 판단이 선행해야만 어떤 사건과 어떤 관계를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플렛처 교수는 윤리적 하자가 많은 캐릭터다. 학생을 매번 극한으로 내몰고 실력 없는 이들에게는 모멸감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고 뺨을 때리기도 한다. 그의 교수법의 피해자로 보이는 제자의 죽음 앞에서도 현실을 외면한 채 제자의 연주만을 칭송한다. 

이런 욕망은 약자인 앤드류에게도 뚜렷하다. 플렛처에게는 일개 학생이지만, 플렛처가 밴드의 다른 드러머인 라이언이 아닌 자신을 인정해줄 때마다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다.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애써 사귄 여자 친구에게 '성공에 방해가 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매정한 말로 결별을 통보하기도 한다. 

극단으로 내몰린 앤드류는 결국 대회에서 연주를 못하게 되자 급기야 분노가 폭발하고 플렛처 교수에게 린치를 가한다. 나아가 플렛처 교수를 파면하기 위한 학생 증인 요청을 수락한다. 플렛처뿐 아니라 앤드류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에너지, 이기적인 감정의 표현들을 지켜보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 사회에서 매순간 그런 욕망을 꼭꼭 숨기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도 누구나 한 번쯤은 나보다 뛰어난 학생이 실수할 때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먼저 승진하는 동료가 미워지거나, 절친의 멋진 애인에 질투심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던가.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고 싶지만, 육아를 위해 포기하거나 부모나 배우자의 건강 문제로 꿈이 좌절됐을 때도 우리는 그 감정을 '어른스럽게' 숨겨야 했고 그에 더해 성공한 이들을 축하해 주거나 도와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매사에 너무도 쉽게 인륜을 저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이 남자들은 뭐냔 말이다.

정글의 법칙, 경쟁의 긴장감 일깨운 또 다른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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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렛처는 학생들을 매번 극한으로 내몰고 실력이 없는 이들에게는 모멸감에 가까운 언행을 일삼고 뺨을 때리기도 한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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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곳곳에서 앤드류에게 드럼의 의미가 각별하다는 것을 자주 보여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드럼에 재능이 있었고 대학에서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하는 노력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주말에 아들과 팝콘을 먹으며 옛날 영화를 보며 시간 보내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그가 편하고 무난한 삶을 살길 바란다. 사실 어머니가 없는 앤드류에게 아버지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고 해를 가하려는 거친 세상에서 몸을 던져 그를 보호해주는 존재, 그의 거친 훈련과 성취욕을 격려하기보다는 걱정하는 존재로서의 아버지는 정서적 모성의 상징이다. 어쩌면 어머니가 없는 앤드류에게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수컷의 냄새를 내기 시작한 이 아이는 열여덟 살의 나이에 경쟁이란 걸 체험한다. '더블타임 스윙'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엄밀하게 평가하는 매정한 선생을 경험한다. 정글의 법칙이 존재하고 그 정글의 법칙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고 채찍질(whiplash,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해주는 '남자 아버지'인 플렛처 선생. 

그는 모멸감을 주는 언행은 기본이고 의자를 집어던지거나 자신의 템포를 가르쳐 준다며 뺨을 사정없이 때리기도 한다. 그는 '그 정도면 됐어'라는 모성의 세상에서 알을 깨고 '찰리 파커'처럼 비상하고 싶은 순수한 욕망의 화신이다. 너의 재능을 증명하려면 그 정도로는 부족해, 더 빨리, 더 빨리. 

영화에서 '템포'로 대변되는 것은 다름 아닌 능력의 증명이다. 정글이 인정하는 플렛처, 그의 템포에 적합한 연주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그에게는 진정한 부성애이자 세상을 향한 비상이다(그런 의미에서 앤드류의 친부가 플렛처에게 가졌던 감정은 분노가 아닌 일종의 질투심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플렛처의 템포, 그리고 앤드류의 템포 

결국 이 긴박감 넘치는 두 사람의 갈등은 이 영화의 백미인 마지막 10분, 앤드류가 '자신의 템포'를 고집하며 둘 사이의 주도권이 뒤바뀌는 것으로 비춰진다. 그는 언제든 자신을 안아주고 감싸줄 아버지를 뒤로한 채 자신을 재즈 음악계에서 다시는 발 붙일 수 없게 만들려는 플렛처 술수를 알면서도 다시 무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제 '그의 템포'가 무대를 압도한다. 혹자는 이것이 앤드류가 플렛처를 이겼다고, 플렛처의 템포를 파기하고 앤드류가 자신의 템포를 주도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때문에 이 영화를 청출어람, 제자의 복수극, 젊은 승부사의 비상이라는 코드로 읽어 마치 무협 영화의 전형적인 플롯을 대입하려고 하지만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마지막 장면의 진정한 감동은, 두 사람의 승부에 있다기 보다는 예술로 승화된 '찰나의 순간' 그 자체에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앤드류는 여전히 플렛처의 템포 안에 있다. 'CARAVAN'이라는 곡의 틀 안에서 앤드류는 자신의 즉흥 연주를 통해서 그의 템포, 자신의 재량을 발휘할 수 있다.

만약 그가 플렛처와 제대로 된 승부를 원했다면 찰리 파커처럼 조 존스를 뒤로한 채 돌아가 자신만의 화려한 데뷔를 꿈꿨을 것이다(그것이 플렛처와 앤드류가 그토록 신봉하는 재즈 신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앤드류는 플렛처의 템포로 돌아왔다. 도리어 플렛처의 밴드라는 제약 안에서 자신의 템포를 점유하려 한다. 이는 플렛처의 템포 아래에서 자신의 템포를 보여주려는 앤드류에게 있어 여전히 플렛처가 중요한 존재임을 반증한다. 그토록 미워하던 플렛처의 연주가 있는 재즈바를 서성이던 그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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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렛처 뿐만 아니라 앤드류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에너지, 이기적인 감정의 표현들을 지켜보는 것도 그리 달갑지 않다.
ⓒ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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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플렛처와 무관한 승부에는 관심이 없다. 정글의 세계를 열어준 '남자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는 그의 집요한 노력이 이 영화를 스릴러에 버금가는 긴장감을 조성해준다. 당신이 말한 바로 '그' 찰리 파커는 내가 되어야 한다. 보는 내내 우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이 내러티브의 말미가 극적인 감동을 가져다 주는 이유는 플렛처와 앤드류 두 사람 모두가 인정하고 공유한 연주의 절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학교에서 쫓겨나게 만든 제자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리고 싶었던 이 냉정하고 잔인한 플렛처는 앤드류의 연주를 듣다가 어느 지점에서 자기의 목적도 잊어버린 채 그의 템포에 빠져든다. 앤드류는 또 어떤가. 뺨을 맞고 차 사고에 퇴학까지 당하게 만든 당사자가 다시 자신의 음악 인생을 종치게 만들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주에 몰입하다가 어느 순간 그의 템포에 자신의 템포를 맞춘다. 서로의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의 연주에 플렛처가 미소를 보낸다. 앤드류도 마치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는다. '이 남자들, 좀 모자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이런 경험은 남 일이 아니다. 대가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종종 겪는다. 밤 새워 선배와 야근을 하면서 마친 일이 회사에서 채택되는 순간, 무명 가수가 신곡을 만들어 리허설 끝에 연주자, 엔지니어와 제대로 녹음을 마친 순간, 하다 못해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아이와 입을 맞춰 자장가를 함께 부르는 순간에도 이런 '찰나의 상승' 경험은 존재한다. 

그 경험이 힘들거나 인간 관계마저 어긋날 때 도리어 그 찰나의 시간이 빛나는, 다소 씁쓸한 인생의 진실이 이 영화에 담겨있기 때문일까. 사실 살면서 자주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그 정도면 됐어'가 아니라 '바로 그거야'를 말해줄 누군가를 열망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복잡하고 불안한 관계를 넘어선 '결정적 템포'의 미학이,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지점이 아닐까.


*기사 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91731
2015/03/25 20:40 2015/03/2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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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엠 그루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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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바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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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 아이엠 그루트...ㅋ
2015/03/08 23:22 2015/03/08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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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제시장을 봤다.
극장에서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버지가 권해서 봤다. 참고로 아버지는 평생에 내게 뭘 하라고 압력을 준 적이 별로 없었기에. 가족과 함께 보러가라고 했지만 가족 대표로 나만 봤다.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나 몇몇 장면에서는 눈물을 쏟았다.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자신으로 인해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은 소년의 죄책감. 그리고 네가 이제 가장이니 가족을 보살피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평생 한 소년의 어깨를 짓눌렀으리라는 부분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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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버지세대의 평범한 가장들이 부모나 가족을 잃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전쟁 후의 비정상적인 삶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국제시장은 그런 평범한 한국의 아버지세대의 미시사를 관통하고 있다.논객 허지웅으로 인해 이슈가 됐던 대목 "이 어려운 시대를 내 자식들이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부분도 맥락에서 충분히 공감이 갔다. 주인공은 가족에 헌신적이어야 하는 자신의 삶을 팔자처럼 받아들이고 아내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 아들이 겪는 것보다 낫지 않냐라고 위로하는 맥락의 말이었다.

정작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준엄하게 가오잡고 훈계하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처럼. 그저 뜬금없이 욕을 하거나 대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뒷걸음질친다. 그런 디테일들이 잘 살아있다고 생각했다.


#2.
하지만 정작 이 영화를 대작의 반열에 놓을 수 없는 부분은 논란이 된 세대 갈등이나 보수-진보갈등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겐. 이 영화의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은 영화가 IT기기로 치자면 '샤오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플 짝퉁.

영화가 끝날 때 나는 이 영화가 <포레스트 검프>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국판이란 비평만 남았다. 백인이 입어서 사랑받은 옷을 아시아인에게도 입혀본 느낌. 뭐 옷이 좋으면 아시아인도 멋져보이는 그런 느낌. 깃털이 나비가 되고 존 레논이 남진이 되고, 애플이 현대건설로, 이만기로 대체되고 마지막에 아버지를 떠올리며 우는 장면은 라이언 일병이 죽은 상사의 무덤 앞에서 우는 장면과 정확하게 교차했다.

흥행을 위해 영화도 흥행을 담보하는 규칙을 세워서 공용가능한 플랫폼을 짜고 모듈을 만들어서 한국인의 컨텐츠에도 옷처럼 영화를 입히는구나. 게다가 그게 대중에게 먹히기까지 하는구나. 뭐 이런 생각 때문에 진영논쟁, 세대논쟁에는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여유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건 예술인가 상품인가. 어쨌든 짝퉁도 많이 팔리면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씁쓸함이 흘린 눈물을 무색하게 만든다.
2015/02/21 19:56 2015/02/2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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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리스트.(2007~2009년)

분교음악회, 숲이 된 122개의 추억/ 예민 지음 / 샘터사
: 가수 예민의 책. 따뜻함이란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일 것.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 지음/ 부키
: 경제학에 있어 내게 새로운 관점을 부여한 장하준 교수의 책. 이후 그의 책을 대부분 공굼하며 읽었다. 그에게 빚진 부분이 많다.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하워드 진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하워드 진과 노암 촘스키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 했으므로 생략하고. 그의 미국사 저서들이 부담스럽다면 이 책이 개론서가 될 것.

에드워드 호퍼/ 롤프 귄터 레너 지음/ 마로니에북스
: 내가 좋아하는 거의 유일한 현대미술가.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복있는사람
: 현대 기독교 복음주의권의 이슈에 있어 그에게 많은 통찰을 얻었다. 얇지만 깊이 묵상할 책. 

회심/ 짐 월리스 지음 / IVP
: 미국 복음주의에 희망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짐 월리스'라고 대답할 것.

과학의 지형도/ 고인석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 과학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계기는 고인석 교수의 강의를 통해서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나의 과학철학 스승인 셈.

다윈의 식탁/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진화론'사'에 대해 알고 싶다면 단연 장대익 교수의 이 책을 권한다.  

아이의 사생활/ EBS 아이의 사생활 제작팀 지음 / 지식채널
: 언젠가 말한 것처럼. 어줍잖게 철학책 수십권을 읽는 것보다 이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 말이 불편하다면 '어줍잖게'에 방점을 찍기를.

뉴욕의사의 백신 영어/ 고수민 지음 / 은행나무
: 사실상 내 영어공부는 이 책과 함께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어를 여전히 공부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길.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는다. 한 개인에게 부여된 무거운 짐에 대해 어느정도의 고마움과 감사, 경의를 가지고 있다면. 이 책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관계중심 시간경영/ 황병구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시간관리의 3대 서적으로 나는 7habit과 GTD, 그리고 황병구의 '관계중심 시간경영'을 꼽고 싶다.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지음 / 창비
: 한국 현대사를 다시 정리하게 만든 분은 단연 강만길 선생이다. 그의 책은 마치 <매트릭스>에서 빨간약을 먹은 것 같은 충격을 가져다줬다. 그 분의 책 중 입문서로는 이 책이 적절하다.

미국사 산책/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왠 미국사? 게다가 17권이 웬말이냐 라고 말한다면 한국은 미국의 짝퉁이기 때문이다 라고 답해야 할 것 같다. 특히 당신이 개신교인이라면 더더욱. 
2015/02/21 18:54 2015/02/21 1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