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발송 도우미를 모집하는가 하면 기자들 없이 편집장이 교정 교열을 일일이 보고 과장 한 분이 영업과 기타 모든 행정업무를 보는 식이었다. 매월 적자가 누적되어 급여 및 디자인 업체에 비용 지불이 안 된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갔다. 당시에 독자모임을 만들었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후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 때 편집부의 멤버들이 모두 물러났고 혼란스럽던 재정문제를 뉴스앤조이가 떠 안았다. 뉴스앤조이는 복상이라는 잡지 자체를 살리려는 생각 하나로 뛰어들었지만 괜히 복상을 탐낸다는 오명을 얻었고, 복상 또한 그렇게까지 생명을 연장해야겠냐는 비난도 받았다.
이후로 나는 다소 거리를 두고 이 매체를 지켜봤다. 잡지 자체가 '읽고 싶지 않을 정도로 부실하던' 시절도 있었다. 작년 초엔가 박총형이 귀국하여 복상 편집장으로 일하게 됐고 나는 그의 권유로 편집위원으로 합류했다. 거지꼴 같은 복상이지만 그 와중에도 오랜 생명력과 좋은 컨텐츠로 말미암아 한국의 크리스채너티투데이급으로 분류하는 이 잡지의 편집위원이 된 것이 한편으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편집부의 열악한 상황으로 박총형은 근무중 병을 얻어 편집장 직을 내려놓았다. 대체로 내부 분위기는 잡지를 살리자는 의견이었고 사실상 편집위원 중 존재감이 없는 나는 박총형의 사임에 함께 책임, 내지는 입장을 정하자는 의도로 편집위원직을 내려 놓았다.
그 이후로 복상은 힘들게 운영되다가 최근 새 편집장을 영입했고 10월호를 휴간하고 다시 정상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정말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때때로 나는 복상이 참 '악마같은 잡지'란 생각이 든다. 잡지와 관련된 사람들을 괴롭히고 상처를 주면서 정작 잡지의 명성은 커가는 느낌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복상을 대할 때 극단적 양가감정에 휩싸인다. 잡지의 생존을 걱정하며 달려들었다가 불에 덴 것처럼 아파서 멀어지고... 그러면서도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채 이 잡지 주변을 기웃거린다.
이 잡지를 통해 정말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또한, 원치않게 그 소중한 관계가 틀어지는 걸 지켜봐야했다. 십여년 동안 반복되는 이 뒤틀린 관계를 생각할 때면 이제는 현기증으로 물리적인 구토가 날 지경이다. 오늘 아침에는 영화 '서편제'가 생각났다. 이 영화에서 판소리꾼은 자기 딸의 득음을 위해 일부러 눈을 멀게 만든다. 오빠도 떠나보낸다. 그 고통 속에서 그 딸은 판소리의 대가로 성장하고 그 목소리는 어떤 판소리꾼보다 깊어진다.
물론 복상이란 잡지가 일부러 연관된 사람들에게 고통과 분열을 안겨주는 건 아니겠지만, 어떤 유의미한 목적을 위해 구성원들의 상처와 시련으로 '그 대상이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복상과 서편제는 닮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자주 책임 운운하며 이 조직을 떠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선 송구스럽고 백번 사과하고 싶다.
아울러 바라기는. 나는 복상이 누군가가 바라듯 탁월하고 풍성한 컨텐츠가 넘치는 잡지가 되길 기대하지는 않게 되었다. 차라리 사람들이 "도대체 이 쓰레기 같은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맨날 즐거워 보이는거지?"라는 소문이 무성한 잡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 소박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