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은 아직도 글을 쓸 때 연필을 깎아서 원고지에 쓰기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주 이야기하던데 사실 나는 별로 감흥이 없다. 여러 차례 말한대로 나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는 세대다. 처음 기고글을 썼을 때도 나는 자판을 두들겼고 지금도 노트에 글을 쓰기보다는 휴대폰이나 전자기기에 키버튼을 입력하는게 편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다.(자아비판적 의미에서...ㅠㅠ) 전자책 단말기나 태블릿 PC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간혹 관련된 글도 쓰고 기기 사용기나 최적 사양에 대해 고민하기는 하지만 나는 디지털 기기가 하나의 도구라는 점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고 본다. 가끔 '나는 내가 먹는 그것이다'라거나 그 유명한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어느정도 환원주의적인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너는 네가 구매한 그것으로 규정지어진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팽배하다.
아이패드가 내 생활패턴을 상당히 바꿔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패드가 없던 시절보다 내가 훨~씬더 생산적인 일을 하거나 에버노트 없이 종이노트를 쓰던 때보다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고 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나는 그것이 없던 시절에도 글을 썼고 일을 했고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도 지인들과 효과적으로 연락을 했고 메시지를 남겼고 은행업무를 전화로 봤다. 정작 업무의 생산성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스마트기기를 업무용도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회사보안 정책상 불편한 요소도 많지만 정작 회사 메일이나 업무 LOAD를 퇴근 후까지 가져오고 싶지는 않다!
냉정하게 말해서 IT기기의 효용에는 상당한 거품이 존재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냥 '어른들의 장난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것도 고가의 장난감.. 우리회사 이사님이 내 아이패드를 보더니 게임만 잔뜩 깔려있는 거 아니냐고 추궁했다. 물론 게임만 잔뜩 있는 건 아니지만(그래서 살짝 버럭했지만) 사실상 아이패드가 유희적 용도가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그 지적의 의도는 옳다.
고가, 고성능 전자기기를 구입한 사람들은 하드웨어 사양이 높아서 반응속도가 빠르고 용량이 커지고 해상도가 높아졌다고들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기기적 진보가 개개인 '생각의 진보'를 도와주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2초 기다리던 게 1초가 되었다고 그 1초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16G가 32G가 되었다고 2배의 가치있는 자료들을 저장할 수 있을까. 그저 빨리 돌아가는 기기가 뽀대나게 느껴지는 것 그 자체를 즐길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유희적, 자기만족적 소비의 과잉이 현대 기술의 진보에 선순환이 되고 있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나또한 그 선순환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입장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런 도구 없는 아날로그 방식이 더 좋다고 말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고 산 기기들에 대한 기대치와는 달리) 나라는 존재, 나의 생각의 깊이, 창조적 아이디어, 사색적 묵상 같은 것들은 아날로그건 디지털이건 간에 대체로 '도구-의존적'이지 않다는 거다. 사실 그런 일은 도구와 상관없는 별도의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문제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지는 것 자체를 마치 이것과 동일시하는 정서에 있다.
나를 여전히 어린애 취급하는 어떤 아버지같은 존재가 있다면 내가 구매하는 많은 제품들에 대해 '네가 그게 왜 필요한데?'라고 물을 것이다. (나이가 드니 그런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잘만 포장하면 고급 장난감을 생산성을 돕는 도구라고 '구라'칠 수도 있다. 그런 기기들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업그레이드해주지는 않는다. 최근 몇년간 '스마트-'가 유행이다. 스마트-폰 스마트-패드, 스마트-펜 등. 하지만 어떤 스마트- 뒤에 붙는 도구를 소유한다 하더라도 정작 본인의 '스마트'는 담보되지 않는다. 내 오랜 경험 상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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