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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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도서관 속의 "창백한 지성" (2000. 2.)
/ 김용주


"이런데서 책이나 실컷 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가까운 공과 대학원생과 함께 도서관을 갔다가 나오면서 내뱉은 그의 말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비전(vision)이라기 보다는 하소연에 가까운 말이었습니다. 대학원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진로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그였기에 비록 그의 말이 저의 생각에 반(反)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끝내 마음 속에 있던 생각들을 그 앞에 속시원히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동상이몽이라 했던가, 함께 길을 걸으면서 저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질문들이 그의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도서관 안에 있을 거라면 책은 무슨 필요인가?'

그는 편안한 의자에서 지적 유희를 즐기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밖에 있는 어렵고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문학과 사상이라는 심오하고 고풍스런 사고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타인에게 자신의 독서량을 자랑하며 상대의 지식을 자신의 화려한 문체로 누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까지 비약하지는 않더라도 도서관의 공무원처럼 앉아서 그 곳을 관장하고 틈틈히 책읽는 문화 생활을 즐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의 책 읽기가 그러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의 짧은 대학 생활은 그야말로 독서를 위한 독서, 지식을 위한 지식쌓기에 골몰하였던, 철없고 목표없는 학생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영복 교수가 감옥 생활을 하던 중의 이야기입니다. 집짓는 일을 하던 노인과 대화할 일이 있어서 한참을 얘기하는 도중 그 분이 집을 그리는 것을 보고 신영복 교수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고, 기둥을 그리고, 문짝을 그리고, 주춧돌을 그리는 것에 익숙해 있었지만 그 분은 바닥에 주춧돌부터 그림으로 집을 완성해 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신 교수는 그 분이 지붕을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그림이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면서 말하길, 아무도 집을 지을 때 지붕부터 만들지 않음에도 꽤나 '먹물'이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그 기본적인 이해없이 집을 마구 그려내는 것이, 하나의 위선이었다는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신영복 교수는 그 무식하지만 "집그리기를 바로 하는" 노인을 통해 이제껏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지성, 그야말로 창백한 백면서생의 어설픈 지식을 자각하는 하나의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현대는 책으로 지식을 얻는 일에 힘쓰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한 달에 평균적으로 0.8권의 책을 읽는다는 최근의 통계를 접할 때, 우리의 지식과 목표들이 희미해져감을 의미한다는 것 또한 자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적 유희로서의 이른바 '도서관 속에 갇힌 창백한 지성'으로서의 책 읽기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독서가 종국에는 우리의 정서를 바르게 가꾸어 주고, 또한 탁월한 지적 업적들을 섭렵함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그 지식의 혜택이 돌아갈 수 있어야 하리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더불어 그 지식의 소산들은 모두가, 정작 그 효용들을 누려야 할 당사자인 '사람'을 소외시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진단처럼 생산물이 그것을 생산한 사람과 소외되어 결국 인간들 사이에 소외를 조장하는 냉정한 현대 산업화의 쓴 열매들을 거두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테크놀로지의 부작용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가 아닌가라는 자문도 해봅니다. 신이 주신 삶과 그가 창조한 모든 창조물들이 서로 인격적으로 사귀고, 그 안에서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의미에서의 지식의 진보와 향유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아닌가... 깊이있게 되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2000/02/01 00:52 2000/02/0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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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의 세상보기>도 실리지 않아야 합니다

** 이 글은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에 올린 글입니다.

 

1999년 5월까지 복음과 상황에는 장대익 편집위원과 창조과학회의 창조, 진화 논쟁이 꽤 오랫동안 이어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개인적으로도 George M. Marsden의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란 책의 5장, "진화론과 근본주의의 싸움", 6장 "왜 창조과학인가?"와 Phillip E. Johnson의 <defeating Darwinism>을 '힘겹게(?)' 읽고 있던 차였기 때문에 관심 있게 지켜보았었고, 복상 측에서도 오랜 기간동안 충분히 반론글들이 올라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적으로는 창조과학을 신뢰하지만 장대익 편집위원의 지적들은 되새길 가치가 있었으며, 오히려 나이를 문제 삼거나 권위적, 혹은 근본주의적인 반응을 보인 창조론 옹호자들의 대응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보기도 했습니다.

저는 당시 2월에 실린 복상의 입장에 크게 고무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연말연시에 벌어진 창조, 진화 논쟁은 <창조과학회> 측으로부터 "도대체 <복음과 상황>이 무슨 의도로 진화론을 옹호하는 듯한 글을 계속 싣느냐?"는 거센 항의에 접하게 했습니다만, 신앙의 문제로 치부하려 들지 말고 지면을 통해 생산적인 논쟁을 계속함으로써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는 게 저희의 생각입니다."
(서재석 편집장)

이렇게 공식 입장을 밝힌 지 3개월 후에 복상에서는 다음과 같은 알림글과 함께 창조, 진화 논쟁을 마감하였음을 기억합니다.

"본지는 특정 이슈를 놓고 다양한 의견과 주장들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앞으로도 우리 사회와 신앙 현실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복음적 고민과 대안 모색이 본지를 통해 활발하게 전개되기를 기대합니다. 동시에 이번 <창조 진화 지상논쟁>은 모든 논점이 명백하게 다뤄지면서 그 실체가 정확히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논의의 범위가 드러나고 이슈가 분명해졌다고 판단해, 이번 글을 끝으로 <지상논쟁>을 마감하고, 두세 달 후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해부하고 조명하는 특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여기에서 저는 두 가지를 상기하고 싶습니다. 먼저는 <복음과 상황>이 "특정 이슈를 놓고 다양한 의견과 주장들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잡지라는 것과 <창조 진화 지상논쟁>이 마무리된 것은 "논의의 범위가 드러나고 이슈가 분명해졌"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1999년 10월호 <복음과 상황>에서는 시론으로 연정희씨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의 "옷 로비 의혹 사건과 복음"이란 글을 실은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달인 11월호에 다시 시론으로 "누구를 위한 변명인가"와 "옷로비 옹호론에 대한 일고"라는 반론이 올라왔고, "논고개에서"에서 편집장님은 균형감각을 역설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1월호의 태도입니다. 제가 참석하지 못한 복상포럼은 제쳐 두고라도 다시 사과문을 발표한 것 때문입니다. 당시 옷로비 사건은 마무리되지도 않았었습니다. 사과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지는 국민적 의혹과 교계 안팎의 관심이 집중된 옷 로비 사건의 검찰 조사가 완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 쪽 당사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글을 실어, 마치 본지가 그 입장을 대변하거나 두둔하는 듯한 인상을 준 데 대해 독자 여러분께 사과를 드립니다. 본지는 이같은 상황을 초래한 편집 실무진에 대해 강력히 주의와 염려를 전달하고, 향후 이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균형잡힌 편집에 힘쓸 것을 천명합니다." ("복상은 작년 10월호 시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식 입장을 밝힙니다" 중에서)

저는 "검찰 조사가 완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쪽 당사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글을 실"은 뒤, 바로 그 다음 달 두 편의 글을 통해 반론을 편 것만으로도 충분히 "균형잡힌 편집에 힘"썼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특검팀 검사 중인 시점에, 포럼을 통해 10월 시론을 쓴 목사님의 변론을 들을 기회조차 주지 않은 복상이 창조 진화 지상논쟁에서 보여준 "특정 이슈를 놓고 다양한 의견과 주장들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잡지인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또한, 그런 눈치를 보는 복상이 "앞으로도 우리 사회와 신앙 현실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복음적 고민과 대안 모색이 본지를 통해 활발하게 전개되기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몇 번이나 저는 여러 곳에서 공개적으로 <인물과 사상>이란 잡지와 강준만 교수를 높이 평가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 여건 상 균형없이 특정 인물을 심하게 지지하거나 질타하면 색안경끼고 보게 되어 있음을 잘 알면서도 저는 그런 일에는 별로 개의치 않아 왔습니다. 제가 복상보다 <인물과 사상>을 더 열린 잡지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물과 사상>에서 몇 달 전 상식 이하의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물론, 편집진의 잘못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몇 분이 정말 심하게 편집진과 강 교수, 그리고 글을 쓴 필자를 욕을 해대고 글에 대한 사전 검열이 없었음을 질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인물과 사상>은 공식 입장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과 '검열'을 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인물과 사상>은 실정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주장이든 그대로 다 싣고자 합니다. 물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왜 없겠습니까. 다만 <인물과 사상>은 그로 인한 부작용보다는 기존의 매체들이 독자들의 글에 대해 행사하는 '검열'을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인한 폐해가 훨씬 더 크고 심각하다는 비교적인 관점에 주목하는 것입니다......앞으로 이와 유사한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자꾸 일어나야만 '보통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만드는 잡지'라고 하는 <인물과 사상>의 독특한 목표가 변질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점 잘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강준만, "김정환, 김창은씨의 반론에 답합니다" 중에서)

그래서 저는 기숙영님의 아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적어도 복상에 올려진 글로 인해 비판이 쏟아지자 서둘러 사과문을 내는 그런 줏대 없는 복상으로 내버려두지는 말자 이겁니다."

저는 "비판이 쏟아지자 서둘러 사과문을 내는 그런 줏대 없는 복상"이 아니라 "논의의 범위가 드러나고 이슈가 분명해졌다고 판단"되었을 때까지 반론을 여과 없이 개진할 수 있는 복상으로 되돌아가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제가 좋아하는 어느 잡지처럼 복상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이와 유사한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자꾸 일어나야만 '보통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만드는 잡지'라고 하는 <복음과 상황>의 독특한 목표가 변질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점 잘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가 본론이었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야 합니다. 물론, 독특한 이 글의 제목이 결론이 되겠습니다. 1999년 10월호를 보면 아시겠지만, "옷 로비 의혹 사건과 복음"이라는 시론이 실리기 전 복상카페에서 저는 지유철님의 글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연정희를 위한 변명"과 <인물과 사상>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있었던 지유철님의 토론내용을 보고 거기에 동의했으며 "좋은 지적이다"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글이 10월호에 편집되어 시론 뒤편에 같이 실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마 제 글을 포함한 그런 글들로 인해 복상에서는 시론을 청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의이든 타의이든 "옷 로비 사건"으로 인해 지유철님의 "데오빌로의 로마통신"이 연재되지 않고 있다면 저의 "세상보기"또한 연재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상의 공식 입장이 사과해야 할 만한 일이었다면, 정말로 반론 두 편과 포럼으로 모자라서 사과문까지 올려야 할 중대한 실수였다면, 제 글도 연재가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균형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10월호에 편집된 제 글에 대해서 후회되는 바도 없습니다.

저는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내색하진 않아 왔지만 개인적으로 작년 한해 동안 가장 저를 들뜨게 만든 일이 있었다면, 제 삶의 일부분과 같았던 짧은 글들이 제가 가장 크게 신뢰한 잡지에 실리게 된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제 나이를 고려한다면 정말 제겐 너무 과한 대접이었다고 진정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 글이 실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이 글을 씁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 위해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김용주의 세상보기>도 실리지 않아야 합니다"

생각있는 필진과 독자들의 숙고어린 글들을 기대합니다.
2000/01/22 00:39 2000/01/22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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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매일 부딪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2000. 1.)

/ 김용주


얼마 전 용무가 있어서 의료보험 관리공단에 갔었습니다. 용무란 것이, 아는 분의 동생이 직장을 그만 두어서 그 분의 의료보험에 편입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몇 개월 전에 지역의료보험과 공무원 의료보험관리공단이 통합된 데에다가 부분적인 파업이 이루어져 사무실 안은 밀린 민원인들로 가득하였습니다. 뒤에서 줄을 서 있는데 앞에서 작게 다투는 듯 하였습니다. 민원인은 관공서가 하나같이 불친절하다는 식으로 비난하였고 담당자도 얼굴이 붉어진 채, 화를 삭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구비 서류를 다 챙겨오지 않아서 발급이 되지 않자, 꽤 멀리서 온 민원인이 허무한 감정과 답답한 마음에 던진 하소연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장 한 가운데에 온 것처럼 시끄러운 가운데 모두가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가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0여분 즈음 지났을까...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담당하시는 여자분은 저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간단히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지요?" 사람을 대할 때, 약간의 장난기가 있는 저는 물끄러미 그 분을 쳐다보았습니다. 생각과는 달리 빨리 대답을 하지 않자 그 분은 얼굴을 들어 저를 잠시 바라보았고, 우리는 미소섞인 눈인사를 주고 받았습니다.
"이것 좀 봐주셨으면 하는데요...이 분이 얼마 전에 직장을 그만 두셨거든요..."
"아 예, 가져오신 서류 좀 주시겠어요?"

조금은 흥분했던 얼굴이 가라앉는 듯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용무로 어떤 장소를 방문하여 어떤 사람을 만나면 일이 이루어지는 동안 침묵하곤 합니다. 아마 대개는 어서 빨리 일을 처리하고 그 장소를 나올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문득, 그 분의 앞에 있는 푸른 빛의 녹차 잔을 발견했습니다. "녹차 좋아하세요?" 웃으면서 물어보자 그 분은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가 이내 같이 웃으며, "아니요, 감기 때문에요"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감기 걸린 지 오래 되셨어요?"
"아 예, 한 3주 정도..."
"학원에서 선생님이 그러는데 오렌지 쥬스를 자주 마시고, 충분하게 잠을 자는 게 가장 중요하대요. 민간요법이라나...물론, 녹차도 좋지만..."
"아...예"

그 때 잠시 서로를 쳐다 보았습니다. 아마 우리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은 저를 민원인이 아닌 한 사람 그 자체로, 저도 그 분을 제 일을 처리하기 위한 담당자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임을 발견한 것이겠지요. 우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이 처리되는 동안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이 유쾌한 대화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언젠가 '소외'에 대하여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현대 사회는 관계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목적 중심, 과업 성취 중심의 사회란 생각이 듭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그 쌀 한톨 한톨 정성스레 수확한 농민의 수고를 잊었고, 내가 하는 일들의 혜택을 입을 사람들은 정작 소외시킨 채 단지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를 운전하는 아저씨는 단지 나를 목적지로 이동시켜주는 도구이며, 수퍼마켓의 카운터에 서 있는 점원은 내가 산 물건을 계산해 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던 것이지요. 하루에도 수백명의 사람들 사이를 오가면서도 그들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마치 장애물 피해가듯 길을 걷고 있는 제 모습에 크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한 동네에 사는 이웃과도 같은 길을 걸어 내려 오면서도 한 마디조차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속에 진정한 삶의 가치가 있을까하는 반성도 해봅니다.

그렇게 그 건물 밖을 나서면서 다시 한 번 저 자신에게 소리쳐 보았습니다.

"매일 부딪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버스에 오르면서 문득 기사 아저씨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의 작은 용기와 더불어 입을 떼어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내리는 길에 저는 기쁜 마음으로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내리는 저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때문에 말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
2000/01/01 00:51 2000/01/01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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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청년들이 교회를 방황하는가

** 이 글은 <주간기독교> 30주년 기념호(2000. 11. 12.)에 썼던 것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소진되는 청년들

성가대 대원, 청년부 회장, 청년부 성경공부반 인도자, 찬양인도, 학생부 교사...

1 년동안 교회에서 내가 맡았던 일들이었다. 어느 교회나 그렇겠지만 내가 있던 교회 내에서도 실질적인 일군이 부족했다. 게다가 사실 내게 주어진 일들은 이보다 더 많았고, 그것들을 다 해내지 못하는 나는 항상 교회에 대한 내 헌신이 부족하다는 자책감과 목사님과 교회 사역자분들에 대한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비단 나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기독 청년들의 상황이 나와 같지 않았을까.

이런 청년들이 그들을 위한 어떤 관심과 교육없이 교회 안에서 소진되다가 캠퍼스의 선교단체에서 공급을 받았던 현실이 어쩌면 다행스런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보다 넓은 시야로 본다면 캠퍼스를 실천의 장으로 보지 못하고 단순한 훈련의 장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그 안에서 제자도와 개인 영성 훈련에 초점을 맞추게 된 우리의 현실은 분명 좋게만 해석할 수는 없는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교회에서 공급없는 헌신에 내몰리던 청년들에게 그나마 위로와 안정을 줄 수 있었던 선교단체의 순기능을 간과하는 것 또한 힘든 일일 것이다.

다 행스럽게도 최근 몇 년 사이에 교회 내의 청년들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져가고 있으며 이른바 "청년 목회"라는 말들도 심심찮게 들릴 정도로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청년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활성화 되고있는 몇몇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청년들이 몰리고 있는 실정이며 여전히 대부분의 지역교회에서는 동일한 문제들로 청년들이 고민하고 있긴 하지만, 상황들이 선배 세대의 그것보다는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리라 생각된다.

 

보다 근본적인 교회의 문제들

하지만 적어도 교회에 속한 청년으로서 느끼기엔 대부분의 교회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부분들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청년들이 교회에서 소진되고 있어서 일 자체에 대한 부담으로 느끼는 어려움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몇 가지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로 교회 일과 교회 일이 아닌 것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이다. 때때로 목회를 하시는 분들은 교회의 모든 행사들을 다 참여하는 것과 믿음이 좋은 것을 동일시 하는 경우가 있다. 주일 예배 외에도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철야 기도회 등의 모임에 잘 나오는 것을 신앙 성숙의 잣대로 삼고 교회의 모임들에 충실하지 못한 것을 불신앙으로 단정지어버리는 분위기 속에서 어느정도 답답함을 느낀다. 결국, 정작 삶에서 드러나야할 영성은 이런 교회 모임들의 연속으로 인해 오히려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것 같다.

둘 째로 교회 건물의 성전화이다. 교회 건물을 자꾸 성전과 동일시 하며 대부분의 교회가 성전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무리한 건물 증축을 하고 있다.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목사님이 새해 첫 날 성전 건축을 위해 70억을 책정했다며 성도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헌금을 작정하라고 설교시간에 말씀과 함께 성도들을 권면했다. 며칠 후에 부흥회가 있었는데 부흥회에 강사로 오신 분이 3일동안 말씀을 전하시고 가면서 "3일동안 기도하면서 이 교회에 하나님의 성전이 어서빨리 완성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70억을 책정한 것으로 아는데 오늘 작정 못하신 분은 믿음으로 작정하시기 바란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친척 중에는 이런 교회가 건축을 하면서 은행대출로 진 빚을 아직도 갚고 있는 분도 계신다.

셋 째로는 돈의 문제다.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면 주보 안에서 많은 봉투들을 발견하게 된다. 십일조, 주일헌금, 건축헌금, 각 절기마다 드리는 감사헌금 봉투는 함께 간 믿은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아직도 많은 교회의 목사님들이 이 헌금자들의 이름을 한사람 한사람 호명하며 무슨 헌금을 내었는지 이야기하고, "헌금한 이 사람들의 손길 위에 넘치는 복을 부어 주시도록" 축복기도를 한다. 한 번은 교회에서 비싼 물품을 구입하고 성도들에게 특별 헌금에 대한 광고를 했었는데 한 성도가 많은 돈을 헌금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목회자 분들이 그 분에 대해 관심을 갖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집사님 믿음이 많이 성장한 것 같다"는 얘길 하는 것을 들을 때는 참 난감한 느낌을 받았다.

넷째는 지역사회에서 구제와 봉사에 헌신되지 못한 부분이다. 로잔 언약이 천명하고 있듯이 복음전도와 사회 참여는 동일하게 중요하며 초대 교회에서도 소외된 사람들의 구제는 중요한 교회의 일이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선교와 자체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도는 높은 반면 정작 지역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데에는 많은 부족함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은 청년들이 목사님에게 우리 교회는 왜 구제 사업과 봉사 사업에 관심이 부족한가에 대해 물었는데 그 때 목사님은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는 곳이다"라고 일언지하에 못박았다.

물 론 그 밖에도 많은 문제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작 청년들은 교회의 어두운 면들에 비교적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그 갈급함이 채워질 때 오히려 더 뜨겁게, 무식하게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는 순수한 존재들임을 알고 있다. 어쩌다 보니 나는 비교적 많은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위에 나열한 것들은 그런 교회들의 좋지 않았던 면들만 부각된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부정적인 부분들에 있어서 바로 바라보고 문제들을 지적할 때에만이 더 나은 현실들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청년들의 문제

얼마 전 선교단체 수련회의 주강사가 한 강해설교 시간에 했던 말에 주목하게 되었다.
"요즘 청년들이 어떤지 아는가. 선교단체에서 열심히 배우고 비판적 시각을 길러서는 교회에 가서 우리교회는 말씀이 안좋다, 교회에서 일을 너무 많이 시킨다며 교회를 떠돌다가 다들 말씀좋은 목사님이 있는 대형교회의 뒷자리에 앉아 주일 예배만 드리는 학사들이 대부분이다."

교 회에 대해 비판하려면 청년들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교회는 없고 동일하게 청년들이 채워가야할 부분이 있는데 많은 청년들이 비판만이 능사인 것처럼 다니던 교회를 비판하고 심지어는 떠나서 더 크고 말씀이 좋다고 소문이 나있고, 청년들이 즐비해서 무리하게 일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들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들을 본다.

청년들의 교회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들과 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들은 청년들이 그 문제들에 대해 비아냥 거리는 것이 아닌, 진정 교회의 참된 모습에 대해 아파하고 고민하며 동일하게 행동으로, 작은 실천으로 교회에서 청년의 역할을 감당해 나갈 때에 진정한 의미를 가지고 더 큰 빛을 발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우리의 작은 노력들이 교회를 바꿔 가며 언젠가는 우리가 기성 세대로서 교회에 자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가 교회의 기성 세대가 될 때에는 더 나은 교회를 청년들에게 물려주어야하지 않을까.**

 

김용주* 한양대 기계과에 재학중/ 예수가족교회 출석
2000/01/01 00:44 2000/01/01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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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T세대론, 그리고 나를 위한 변명

** 이 글은 월간 <복음과 상황> 9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전투적 글쓰기'에 대한 반성

최근 한국IVF 인터넷 홈페이지(www.ivcf.or.kr)에 올라 온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들의 글은 신앙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격한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문제의 부분만을 옮겨보려 한다.

"...혹 형제의 사랑이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랑이 없이 할 수 있느냐 등등...말을 하고 싶으시다면 이 글 읽지 마세요. 도저히 수준을 내가 못 맞추겠으니까"

"...결론은 우린 서로 형제가 아니란 것이지요. 끼나 고동이나 제 형제로 보입니까?(내가 좀 만만하게 보이는것 같군)"

"회개기도도 하고 자기가 죄인이라고 열나 씹닥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감유?"

"그것참 건방스럽기 짝이 없는 개소리군요."

"상식적으로 짱구를 한번 굴려보세요.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

"제가 바보로 보이나요? 제발 고상한 척 내숭 좀 떨지 마세요."

좋게 생각하고 백 번 양보해서 이들의 글이 논리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비하시키고 타인의 글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글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서로 얼굴을 대하지 않은, 인격적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인터넷 게시판 특유의 환경이 그런 표현의 과격함과 용감함(?)을 가져다주었다고 진단해보았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했던가.

나는 원론적인 부분에서 나름대로 연구하고 고민하는 것과 동일하게, 삶 속에서의 작은 실천도 중요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시각에서 보았을 때, 복음과 상황 6월호에 실렸던 내 글에 대해 공적인 언로(言路)를 통해 잘못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고, 또한 알리고 싶은 뒷이야기도 있었다. 시기도 적절하여 8월호에는 양승훈 교수가 장대익 편집위원의 글에서 보여졌던 과격한 표현에 대해 유감을 표한 글이 실려있어 이후 복상에서 이루어질 논쟁들에 있어서도 긍정적 작용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물론, 양승훈 교수도 장대익 편집위원을 향해, "'재방송'이나 '설사'수준에 있는 청년들"이라고 표현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일한 조심성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이를 나에게 적용해 볼 때, 내 글에서 문제라고 생각한 부분은 글의 뒷부분에서이다. 나는 유은하씨에게 '기지촌 지식인'이란 딱지를 붙인 후에 "그에게는 대안도 없고 그에 따른 책임의식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그가 생각하는 대안을 '유치하다'고 표현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나는 유은하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와는 별개로 그의 글만을 따져보았을 때, 그의 글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불만만을 토로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쓴 것이었다. 몇몇 분들은 나에게 전자우편(e-mail)을 통해 논지가 선명해서 많은 도전이 되더라고 얘기해 주기도 했지만, 글을 쓰고 정작 나는 내내 유은하씨의 글을 비판함으로 '인간 유은하'씨에게 너무 과격하게 대한 것 같아 바른 기도생활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래도 복상에 연락해서 유은하씨에게 개인적으로나마 사과의 글을 적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먼저 연락이 왔다. 유은하씨는 자신의 논리가 부족했다고 인정해주었고, 책임있는 기독인이 되겠다고 하면서 오히려 다음과 같이 내 글을 변호해주었다.

"...제 자신도 빈다고 생각했던 논리를 빈틈없이 잡아주었거든요. 제가 우려했던 것은 오히려 그 논리가 형제가 택한 어법으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오히려 잘 전달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거였습니다. 아무튼 저를 적(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서 기분은 참 좋습니다."

나는 유은하씨가 본받을 만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한다. 비난을 당한 사람이 먼저, 그것도 자신의 글을 낮추고 오히려 내 글에 대한 염려까지 하는 그의 자세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물론, 그에 대해 나는 유은하씨의 5월에 실렸던 글만을 문제삼았을 뿐, 유은하씨는 책임있는 신앙인으로 여겨지며 그가 쓴 다른 몇몇 글들은 좋았다고 전했다. 또한, 6월에 실렸던 내 글도 표현이 심했다고 시인하고 용서를 빌었다. 우리는 이러한 몇 번의 전자 우편의 교환으로 서로가 좋은 신앙의 동역자임을 확인했다.

 

 

유은하씨의 글의 허와 실: 무엇이 문제였는가?

그건 그렇고. 복음과 상황 7월호에는 내 글에 대한 반론의 글이 실렸다. 기숙영씨의 <'2인3각'경기 안 해보셨나요>가 그것인데 덧붙여서 몇 가지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냥 인정하기엔 기숙영씨가 내 글을 너무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그의 글을 읽고 이 글이 내 논지를 비판하려고 쓴 것인지 옹호하려고 쓴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그는 내 글을 표지로 삼아 자신의 논지를 내세우려 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제시할 근거가 있으니 차근차근 근거들을 다뤄보도록 하겠다.

먼저 기숙영씨는 내가 유은하씨의 글에 대해 많이 오해하고 있다면서 유은하씨의 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었다.

"무슨 말인지 아는데요, 우리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거든요. 조금만 기다려 주면 우리 스스로 한 번 멋지게 해 볼께요!"...(중략) 오히려 열정만 가지고 달려든 많은 사람들의 결과가 어떠한지 뻔히 알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러고 싶지 않아서, 뭔가 책임지는 행동을 하고 싶어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기숙영, 복음과 상황 7월호 59면)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유은하씨가 가진 전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기숙영씨와 내가 다른 부분이다. 기숙영씨는 처음부터 "어차피 연합하기로 마음먹었다면..."(위의 글, 58면)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해서 기숙영씨는 유은하씨가 연합이라는 관점에 동의한다는 가정으로 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위의 글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글의 말미에서 '...해석하고 싶다'고 했으니 기숙영씨 개인적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유은하씨가 '연합'이라는 관점에 동의했다고 전제할 수 없었다. 다시 거론하자면 길어질 것 같아 내 글의 논리적 개요만을 반복하자면 이렇다. 유은하씨는 지금의 20대가 '다른 싸움'을 하고 있어서 지금의 30대가 쉽게 간섭할 수 없다고 했고 부족한 몇몇 근거를 들어 '제자도'의 측면도 어렵고 연합에도 회의적으로 반응하면서 후배들에게 '그대 길을 계속 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그들의 화려하지 않은 여행일지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나는 감정이 많이 상했고 결국 나는 유은하씨의 글에 동의할 경우 20대는 30대와 어우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이해했다.(복상 6월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가 30대와 연합해야 하는 이유")

교회에서 있었던 한가지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이, 내가 유은하씨의 글을 문제삼은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작년에 교회 청년부 수련회 준비 모임이 있었다. 사실 처음 모였을 때는 모두가 오랜만에 야외로 나가는데 대해 마음이 많이 부풀어 있었다. 회원의 대부분이 직장 생활에 찌든 데다가 모임의 규모가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많은 기대감이 있기도 했다. 한데 소수의 사람이 넌지시 던지는 말들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장소문제를 논의하다가 너무 멀면 피곤하다고, 또 너무 가까우면 왜 그런 곳에 가냐는 말이 나왔다. 성경공부에 대한 프로그램을 짜려니 오랜만에 놀러 가는데 부담이 없어야 한다고 했고, 그러면 계획없이 가자고 하니 그럴거면 뭐하러 교회 수련회를 하냐고 했다. 종국에는 직장인들이 많아서 휴가내기 힘들다는 마지막 푸념 섞인 한마디에 우리는 결국 수련회를 가지 못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아마 처음부터 강하게 가지 말자고 했다면 대부분의 회원들은 반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그건 어려워', '그것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라고 '균형'이라는 현실적 회의감을 표현하다보니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숙영씨의 글에 대해

나는 유은하씨의 글을 정당하게 비판하기 위해 대부분 그의 글을 인용했고 그가 쓴 표현만을 골라 재사용함으로써 반론을 썼다. 나는 반론을 쓰기 위해 그의 글을 10여 차례 반복해서 읽어보았고, TNT세대론이 흐지부지하게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복상에 글을 보낸 것이었다. 그렇게 쓴 글에 비해 기숙영씨가 나에 글에 대해 반박한 내용들은 내 입장에선 너무 허술했다. 특히 그는 내가 표현한 부분도 아닌데 원색적인 표현으로 나를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잔말말고 따라오라고?"라는 문구와 '2인 3각'경기도 안 해봤냐는 식의 말은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내 글을 너무 성의없이 대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혹시 내 글을 기숙영씨의 생각대로 잔말 말고 따라오라고 '해석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제로섬(zero-sum)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유은하씨의 글에 공감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가장 공감하는 부분은 "제자 훈련과 연합이라는 끈은 확인될 필요가 있다. 내용과 전달 방법 면에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제자훈련과정은 이제 그들의 '상황'에 비추어서 재조정되어야 하지 않는가"(유은하, 복상 5월호 56면)라는 부분이다. 문맥에 비추어볼 때, 제자도와 연합에 부정적으로 반응했지만 유은하씨의 주장이 여기에 머물렀다면 나도 흔쾌히 그의 의견에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은하씨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 TNT세대론을 확인하자던 그는 결국 20대를 바라보며 그들의 길을 가도록 방치하면서 혼자서도 잘해 나가라고 말해버렸다.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기숙영씨는 내가 한 표현을 문제삼기도 했다. 먼저, 기숙영씨는 내가 "왜 '깊음의 영성'과 '상황에 대한 인식'이 대치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대천덕과 헨리누엔의 영성이 상황으로부터 얻어졌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나는 '깊음'의 영성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문제는 '깊음'이라는 개인영성으로 '상황에 대해 인식'을 하지 않고, 그에 대해 관심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상황을 바라보아야 할 시점에서 다시 자신의 개인영성회복에 다시 눈을 돌리고 사회정의보다 자신의 내면의 평안, 자아상 회복을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실상, 헨리 누엔의 저작들이 우리 나라에서 인기있게 번역되는 이유가 이런 영성의 유행 때문 아닌가. 문제는 헨리 누엔이 아니라 우리가 헨리 누엔의 저작들을 좋아하는 영성의 '성향'이다!)

또한 기숙영씨는 내가 지적한 20대의 특성인 '개인주의'적 성향이 편협하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히려 이들은 더욱 자신이 속한 그룹이나 공동체에 강한 충성심을 갖고 있고 공동체성을 추구한다(Donovan & Myors, 1996), 동감하는 바이다. 다만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기를 원할 뿐이다. 이것이 문제인가? 아니 오히려 바람직하다.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 성장이 보장되지 않는 공동체, 이런 것이 결국 지하철 노조가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그들의 동료들을 집단 폭행하는 그러한 집단주의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기숙영, 복상 7월호 59면)

좋은 지적이다. 이런 좋은 자료를 나는 왜 내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기숙영씨의 생각과 내 생각은 '동전의 이면' 같을 지도 모르겠다.

아는 사람 중에 JMS에 다니는 자매가 있다. 몇 번이나 교회 목회자가 방문도 하고 집의 부모와 언니가 설득도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최근에 들어서 대중매체를 통해 JMS의 이단성과 정명석씨의 비리들이 보도되면서 다시금 그 자매 생각이 나서 물어보았더니 여전히 방송을 보고도 모임에 나간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이유를 묻자 그 모임이 너무 재미있고 선후배간에 친밀한 관계성 때문에 그 단체가 이단이든 아니든 상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개인주의라는 동전의 이면이다. 개인주의적인 20대의 특징은 자신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 또한 핵가족화된 가정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친밀한 공동체를 원한다.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잘해주며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맡길 수 있는 편안한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이성적 사고를 접어두고서라도 그 단체를 선택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이단 단체에서 친밀함을 누리는 것이 바람직한가?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집단적 행동에 대해 '바른 교리'라는 진리의 지성적 영역에서 일깨워주어야 할 부분이 있지는 않는가 하는 말이다.

한국 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했다. 첫째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실패하여 많은 기독청년들을 이단 단체에게 넘겨준 것. 둘째는 그들에게 세계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지 않고, 지성의 영역에서 복음을 이해하는 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않은 것. 여기에서 두 번째 문제에 대해 지금의 30대가 20대에게 도전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여기에 대한 선교단체의 사역방향이 이단단체와 똑같이 맹목적으로 잘해주는 공동체의 형성에만 치중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와 이단의 구분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처사임에 분명하다. 그들의 개인주의적 성향 이면에 존재하는 왜곡된 집단성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기숙영씨는 글의 끝부분에서 '2인3각'경기를 언급하면서 "스승이 제자를 찾아야 한다", "다리를 묶은 채 두 사람이 함께 골인해야만 한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앞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면 우리 스스로 한 번 멋지게 해볼께요!"라고 하지 않았던가? '2인3각'경기는 '우리 스스로 멋지게' 할 수 없는 게임이다. 그래도 기숙영씨가 나에게 물은 것이니 대답해야겠다.

'2인3각'경기는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몇 번 해보았다. 그전까지 나는 그런 경기를 해 본 적이 없던 터라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원래 새내기는 용감하지 않던가! 끈을 묶고 별로 안면도 없는 선배와 별 얘기도 없이 경기가 시작되자 미친 듯이 달렸다. 결과는 내가 넘어져서 우린 거의 꼴찌를 했다. 두 번째 시기에서는 같이 끈을 맨 선배가 인사를 했고, 이 경기의 방법을 일러주었다.

"용주라고 했지? 이 경기는 두 사람의 발을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아마 '하나, 둘'하며 구령을 붙이면서 뛰면 도움이 될거야"

경기가 시작되고 우린 하나, 둘, 하나, 둘, 소리치며 발을 맞추었다. 참으로 설레이는 경험이었다. 두 사람이 보조를 맞추어 달리는 것. 사실, 우리 팀은 각자 놓고 봐도 달리기를 잘못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상을 타진 못했지만 경험없는 열정만으로는 쉬운 게임에서조차 승리할 수 없다는 진리를 발견한, 나름대로는 좋은 기억이자 배움이었다.

나는 지난 번 글에서 '우리'라는 책임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얽어매지 말고 그들 나름의 길을 가게 놔두라는 유은하씨의 글에 반대하며 내 놓은 나의 주장이었다. 그렇다. "다리를 묶은 채 골인"해야 한다. 또한 "선배들이 이런 고생스런 스승의 역할을 감당해"주어야한다. "스승이 제자를 찾아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 기숙영씨의 비유 그대로 TNT세대론은 '2인3각'경기인 셈이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먼저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서 고생스런 스승의 역할을 해 주면서 그들이 훈련되지 못한 부분을 채워 주어야 하며 함께 끈을 묶은 채로 한국 사회에 가공할 폭발물로 '본색'을 드러내야 한다.(복상 6월호 61면)

이만하면 기숙영씨가 "내 논지를 비판하려고 쓴 것인지 옹호하려고 쓴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는 내 심정을 이해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는 오히려 좋은 동역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강지석씨의 글에 대해

덧붙여서 복상 7월호에 실린 강지석씨의 글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는 "단 한 문장을 가지고 비판한다거나, 평한다는 것이 정말 쓸데없는 일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복상 7월호, 60면)이라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적어 주었다. 물론, 나는 그렇다고 단 한 문장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을 쓸데없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기회에 털어놓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내 생각을 어림짐작한 부분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특히, "김용주님은 세계관 정립이라는 것이 책 몇 권을 읽어서, 또는 함께 스터디를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라는 부분이 그렇다. 내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치자. 사실, 나는 요즘 후배들로부터 그런 류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그들은 책 몇 권으로 세계관을 정립한다는 것이 탁상공론이라며 전 세대 신앙의 선배들이 일구어 놓은 귀한 열매들을 창고 속에 버려둔 채 '복음주의는 실존주의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 물론, 세계관은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이 삶으로 드러나기 위한 최소한의 지식이 기독 청년들의 머리 속에 깔려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쉐퍼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일을 행한다고 생각해보면 단순히 책 몇 권 읽는 것을 그렇게 가볍게만 여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하는 말이다. 문제는 책 몇 권 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책을 읽고 삶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책 몇 권을 읽는 것을 탓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속한 교회에서 혹은 선교단체에서 그러한 기본조차 준비되지 않은 채 떠나가는 후배들을 보며, 그들의 뒤에서 손이나 흔들어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과거에 그렇게 떠나갔던 선배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음도 알고 있다. 물론 개중에는 강지석씨처럼 돌아와서 좋은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이들도 간혹 있지만, 그런 이들이 다수가 아님을 상기할 때, 그들이 군대를 향해 떠나는 여행을 쌍수들고 환영할 수는 없는 것이 슬픈 나의 현실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르트르처럼 '모든 상황은 네 실존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기독청년 사역자들의 현실이기도 하리라.
1999/09/01 00:34 1999/09/0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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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s law of life

살다보니 어느 덧 20대의 중반에 접어 들게 되었다. 비록 짧은 삶이었지만 순간순간 겪었던 일들을 통해 나름의 반성을 해보기도 하고, 이렇게 살아야 겠다는 목표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내 안에 생겼다. 요 몇 년 사이에 추상적으로만 그려 오다가 최근에 접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을 보고 내 나름대로의 삶의 법칙들을 정리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1999. 5. 현재

1. 기도는 내 모든 계획과 행동에 우선한다.
그 말은 나의 계획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삶의 계획들을 세워 나가야 하며 기도를 통해 그 계획들이 검증되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2. 어떤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항상 성실하자. 또한, 매주, 매달, 매해별 평가를 갖도록 하자. 단순히 하나님께 맡긴다는 식의 나태를 기도라는 이름으로 합리화시키지 말자.

3. 타인과 대화하다가 서로의 감정이 격해졌을 때는 시비의 가림을 잠시 멈추도록 하자. 논쟁하는 가운데 감정이 섞이게 되면 서로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기가 쉽다.

4. 항상 타인을 나보단 낫게 여기자. 그 사람이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게서 배울 점을 찾으려 노력하자. 나와는 다르다는 괴리감을 더 깊게하지 말자.

5. 내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실망하게 될 일, 내가 죽기 전에 돌아보았을 때 후회가 될 일을 하지 말자. 언제나 내 비밀스런 행동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것처럼 여기고 행동하자.

6. 반복되는 일상, 매일 대하는
1999/05/05 18:47 1999/05/05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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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PASSION
: Jay가 '재희'가 되길 꿈꾸며...  (1999.5. 5.)

/ 김용주
 

Jay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해야겠다. 원래 나의 필명은 "My Jay"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90년대 중반 학번으로 나의 필명을 모르는 한양IVFer는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 이름은 다소 어거지(?)의 조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처음 나의 필명은 "male Y.J."였다. 같은 선교단체의 지부 내에 영주, 연정이 누나가 "Y.J."라고 많이 썼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성별을 표기한 것이다. 겉보기에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첫 글자 만을 따서 "M.Y.J"로 만들고 보니 "My J."라고 쓰는게 더 그럴 듯해 보였다. 게다가 "my"라는 소유 대명사 뒤에 있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에 같은 발음인 "jay"라고 쓰게 되었고, 그렇게 쓰기 시작한 "My Jay"라는 필명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쓰고 있다. 흔히 외국인들이 부르기 편하라고 "Jay"를 이름처럼 쓰곤 하기도 한다.

jay란 말은 영어로, 흔히 속된 말로 "수다장이" 혹은 "멍청이"정도라고 한다. 필명을 만들면서 내심 속으로 나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나의 삶에 대한 태도가 조소내지는 방관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jay만큼 나와 잘 어울리는 말도 없는 듯 했다. 나는 내 스스로 상당히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중간중간에 있었던 많은 어려움들로 인해 삶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사회의 어두운 부분과, 생존이라는 이름아래 겪어야 하는 많은 고통들을 알게 되고 난 후로는 삶의 그런 어두운 부분이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그렇게 살기로 다짐했었다. 흔히 어린 왕자나 바보이반으로 대표되는 순수함을 나 자신도 간직하고 싶어서 였을까...아무튼 그런 생각들로 마음을 정화(?)하며 살아 보려고 했던 시간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삶이라는 과정 속엔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1년동안 앞을 보지 못하기도 하고, 가정 내의 불화, 직장에서 쫓겨난 아버지, 어머니의 쓰러짐, 학교 내의 비리들...이런 일들 속에서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순수한 마음이 나를 더욱 현실과 거리가 생기도록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학에 발 붙이면서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낙천적 성격을 유지했던 내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아마 나의 여자 친구도 그런 모습에 끌렸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항상 밀려오는 현실의 문제 속에 나는 더이상 어린 왕자 흉내를 낼 수 없었고, 난 한없이 나의 정해진 것 하나없는 미래에 두려워해야만 했다.

휴학 후, 나는 나름대로 여러 경험을 해 보기 위해 공장에 들어가서 3개월동안 일을 해보기도 했고, 거기에서 나의 부족함으로 빚어진 다툼때문에 공장을 그만 두게 되었다. 하지만, 몇가지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노동판에서 일하는 이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과 내 자신의 생각이 너무 협소했다는 것, 그리고 사회라는 이름의 구조를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즈음해서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고 군 문제로 훈련소 들어가기 한 달 전에는 내내 침대 생활을 해야만 했다. 내 예상보다 더 길어지게 된 휴학 이후의 삶을 생각하면서 나에게 참 좋은 사람이었지만 더이상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다.
사실, 힘든 시간이었다. 공장에서 있었던 일의 뒷 문제나 보충역이나마 군 복무가 시작되었는데 계속되는 건강의 악화, 내면의 흔들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서도 낙천적으로 보이기 위해 웃음이라는 가면을 들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곤 했다.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만나려면 꽤나 많은 수치의 약을 복용해야 했던 나를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리라. 결국, 그렇게 내 어리석었던 가치관은 허물어졌다. 광대처럼 사람들 앞에 당당히 웃음짓던, 그 거짓된 여유를 더이상 부릴 자신이 없었다. 현실 세계에서는 바보 이반이란 있을 수 없다는 쓰디쓴 교훈만을 배웠다.


휴학한 지, 이제 3년째에 접어들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그 무섭다는 세상에 대한 공부를 한 지도 꽤나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다. 많은 사람도 만나보고 그들의 얘기를 통해 많은 도움도 받았다. 이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은 조금은 다른 것인 것 같다. 사실, 알고 보면 나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은 현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 반성도 없고 삶에 대해 바르게 대처하고자 하는 열정도 없이, 그저 그것들과는 벽을 쌓고 어린 왕자처럼 예쁘게, 혹은 몸 하나 안 더럽히고 순수함을 유지하려 했던 백면서생의 모습의 전형인 나 자신을 바라 보았다. 리스트의 손처럼 가냘픔이 사라지고 군데군데 굳은 살이 붙으면서, 삶과 직면하고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나는 내 어리석은 과오들이 나를 두렵게 한 근본 원인이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최근에는 "Jay"라는 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법을 골몰하던 중, "재희(再喜)"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말은 "rejoice"와 같다.
"다시 기뻐함"
이제 나에게 붙여야 할 말은 아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에서 뼈가 굳어지고 생각이 넓어지는 요즈음에 이제는 현실과 벽을 쌓지 않고, 그 두려움을 바라 보면서 내심 웃을 수 있는 준비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쁜 건강 가운데에서도, 힘든 일상 속에서도 이제는 자족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내년에는 다시 웃는 내 모습을 캠퍼스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의미는 3년 전과는 사뭇 틀리겠지만...
1999/05/05 18:45 1999/05/0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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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태인이 고향이지만 아버지가 군인(공군 하사관)이었던 탓에 셀 수 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다. 전라 경상 충청 경기 할 것 없이 남한에서 비행장 있다는 고장은 다 살아봤고 그 고장에서도 이런저런 형편 때문에 수시로 이사를 다녀야 했으니 기억하는 이사 횟수만 스무 번은 넘는다. 여섯 살부터 초등학교 4학년까지 살았던 대구는 매미가 다닥다닥 붙은 사과나무의 환영과 가슴 아린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은 곳이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가리켜 말하곤 했다. 김상사 네는 전라도 사람 같지 않아.

그 희한한 칭찬은 어린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런 칭찬의 반복은 나로 하여금 전라도 사람이 어떤 큰 죄를 가진 사람인 모양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아버지에게 그 일을 따져 묻는 게 예의가 아니고 소용없는 일이란 걸 알아챘음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나의 성장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게 뒤집힌 건, 스무 살 무렵이다.
머리는 텅 비고, 반항기만 가득했던 내게 반역으로 점철한 전라도의 근현대사가 갑자기 다가왔다. 머리통을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로 채워가며 나는 난생 처음 겪는 지적 체험에 감격했다. 내 어린 시절 눈에 담았던 그 산과 벌판, 그리고 내가 걷던 길들이 그대로 동학군의 땀과 피가 서린 곳이었다니, 와. 그 뒤로 나는 전라도 사람임을 자랑하게 되었다.
묻지 않아도 내가 전라도 사람임을 밝혔고, 특히 전라도 출신을 꺼릴 법한 상대나 자리라면 반드시 내 고향을 밝혀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려하곤 했던 것이다. 피해 지역의 지역 감정도 좀더 엄격하게 조절되어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은 건 최근이다.

시사잡지 기자인 B는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대뜸 내 글 칭찬을 했다. 문장을 인용까지 해가며 하는 소리라 빈말은 아니었지만, 사람들도 많고 해서 점잔빼고 앉았다가 대신 고향을 물었다. 말씨로 보아 전라도 사람이 분명했기에 그걸 확인해서 우호감을 나누려는 수작이었다. 몰라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B는 정색을 하며 대답을 거부했다. 한참 후 다른 곳으로 술자리를 옮긴 후에야 나는 아까의 일을 물었다. 짐작대로 나는 광주가 집이고 얼마 전엔 5.18 보상금도 받았다. 하지만 전라도 사람끼리 배타적으로 뭉치고 하는 건 딱 질색이다.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이 나라의 지역 문제는 일단 수면 아래로 내려앉은 듯 싶지만, 그럴수록 이 나라가 단일 민족인 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고향 좀 다른 것 가지고도 이렇게 못 잡아먹어 난리인 사람들이 인종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몇 년 전 르완다에선 인종청소로 100만이 죽었고 오늘 유고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아니할 말로 이 나라가 여러 인종이었다면 진작에 수백만은 죽어나가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전라도 문제는 빼고라도, 연변 동포에게, 굶주리는 북한 인민에게 한국인들이 보이는 야비함을 보라.

어릴 적 대구에서의 희한한 칭찬을 들려주었다. 매우 정열적이었던 증조할아버지는 만주를 거쳐 일본에 건너간 식솔들을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다. 동네사람들(일본인들)은 아버지 가족을 가리켜 말하곤 했다. 김상네는 조센징 같지 않아. 해방되던 해 아버지 가족은 연락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해가 바뀌도록 급우들(한국인들)로부터 매를 맞아야 했다. 급우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하곤 했다. 죽어라, 쪽발이 새끼. (99년 4월)
1999/04/16 19:23 1999/04/1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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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물론, 조금 지나긴 했지만-영화 <쉬리>는 대단한 흥행 성공을 가져오고 있다. 물론, 많은 비판적 잡지에서는 이 흥행 성공의 요인을 언론계의 대대적인 광고, 홍보의 결과로 보기도 하고, 헐리우드 영화의 줏대 없는 모방이었다고 나름대로의 평가절하를 하고는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화의 깊이 있는 비평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 분야는 내 전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쉬리>를 보면서 느낀 점이 있어서 그것을 조금 얘기하고 싶다.


감동할(?) 부분에서는 감동하자!

주변이나 많은 영화 평론 잡지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영화를 꽤나 본 사람들 중 대부분은 영화를 그저 흘러가듯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항상 그 영화의 화면 구성, 시나리오의 전개 양상, 혹은 이 영화가 아류작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영화를 분석하려 하기 때문에 실상 영화 한 편에 그리 큰 감동을 받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를 보고는 정작 한다는 말이, "이 영화는 어떤 계열의 연장선에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이 영화는 무슨 무슨 기법을 그대로 따르는 구태 의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의 시나리오 전개는 상식 이하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말들이다.

물론, 평가는 중요하다. 이런 많은 비평이 있기 때문에 영화들의 질도 향상되는 것이며, 그럼으로 인해 영화를 보다 자세히, 그리고 바로 볼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본인도 영화보다는 영화 비평에 더 많이 시간을 할애해서 관심을 가지는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지나친 비평적 사고는 나의 감성에 많은 마이너스 요인이 되더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슬퍼해야 할 대목에서 눈물 흘리지 못하고, 웃어야 할 부분에서 조소를 보내게 되더라는 것이다. 일상적인 것도 진부하게 취급하며, 너무 상식 밖의 장면에선 상상력을 동원하기보다는 개연성 없는 시나리오를 탓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에 몰입해서 그 스토리를 편한 마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 영화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네 삶에 있어서의 작은 감동들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팀버튼의 <가위 손>같은 희한한 영화 속에도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동의 정서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영화도 하나의 흥미거리이고 오락이다. 보면서 마음껏 즐기고 감상적 정서에 젖어 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평은 다음의 문제이다. 처음부터 꼿꼿한 마음으로 영화를 대하여, 자칫 영화의 즐거움을 빼앗기지 말자.

<쉬리>라는 영화를 보면서 종결부에서 나는 울고 말았다.
유중원(한석규 분)이 이방희(김윤진 분)을 죽이고 자신에게 남긴 음성을 듣는 부분에서, 유중원이 정보요원에게 심문 받는 부분에서, 집에서 발견한 이방희가 짠 스웨터를 펼쳐 드는 장면에서...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같이 영화를 본 이들은 액션 영화를 보고 우는 나를 비웃었지만.
사랑을 아는 사람은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후에 갖게 되는 마음의 상처를...더군다나 유중원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이기까지 했잖은가...그것으로 그의 삶도 종말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은 죽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키싱구라미가 죽은 한 마리를 보고 자기도 같이 죽는 것처럼.


쉬리: "키싱구라미"로 대체된 "쉬리"의 비극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내게 돌아오는 질문이 한가지 있었다.

"왜 쉬리인가?"

영화에서 "쉬리"라는 물고기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번밖에 나오질 않는다. 박무영(최민식 분)이 전화로 쉬리에 대한 얘기를 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쉬리는 우리나라에만 분포하는 물고기의 종류라고 한다. 사전을 찾아 봤는데 강원도와 평안도 일대에 서식한다는 말을 보면, 휴전선 사이의 강에 서식한다는 영화 속 대사가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쉬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쉬리"는 분단된 조국의 상징이다. 휴전선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상징적 의미인 셈이다. 또한, 쉬리는 우리 민족에게 당면한 문제인 통일이라는 주제로의 회귀이다. 그것을 해결해야 함을 보여주는, 그것이 우리 사회에 담론으로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쉬리를 주제로 삼지 않는다. 영화는 쉬리에서 키싱구라미로 주제를 대체했다.
키싱구라미는 사랑의 상징이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따라 죽는다는 키싱구라미는 전적으로 인간적이고, 낭만적이며, 개별적인 주제의 상징이다. 키싱구라미는 현대인에게 적합한 인간 관계, 그것도 남여 사이의 지극히 개별적인 감정적 문제의 상징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쉬리는 이데올로기로 분할된 사회적 이슈의 상징이며 개별적이거나 낭만적인 정서가 아닌 전체적이며 사회적인 문제이다. (이해가 안 된다면 그것은 필자의 단어 선정의 문제일 수 있다)

이 영화를 통해 느꼈던 씁쓸한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통일"은, 혹은 "남북 문제"는 영화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진정한 통일에 대해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 통일에 대한 많은 실망스러운 말들을 들었다. "꽃제비"라는 불쌍한 북의 어린 아이들을 보며 눈물없이 무덤덤하게 TV를 보다가 채널을 돌려버리는 사람들.
"북한이 무슨 우리 동포냐? 그런 놈들은 모두 죽어버려야 한다"는 극단적 표현까지 서슴치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남북문제, 통일의 문제는 현대 한국인 사이의 주요 담론이 되지 못하는 셈이다.

<쉬리>는 비극의 영화다. "남북문제"라는 우리의 심각한 문제를 주제로 다루지 못한 채, "남북문제"를 단지 "배경"삼아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낸,-어떤 의미에선-이 시대의 비극적인 영화이다. 지금도 북한은 박무영의 말처럼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꽃제비"들은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주워먹으며 감금된 생활에 고통 받고 있다. 인간의 기본적 인권마저 보장되지 못한 사회에서 사는 같은 민족을 화두로 삼을 수 없는 비극이 우리의 모습이며, "키싱구라미"로 대체된 "쉬리"의 비극인 셈이다.

1999년 4월 1일.
1999/04/01 01:54 1999/04/01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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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트루먼 쇼"라는 영화를 보았다. 오랜만에 참 재미있는 영화를 봤다는 뿌듯함이 있었는데, 영화의 시나리오 발상이 기막히기도 했고, 짐 캐리의 연기변신(?)도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아직 못 본 이들에게는 권하고 싶은 영화다.
그러면, 트루먼 쇼에 대한 나의 어설픈(?) 이야기를 조금 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주인공 트루먼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트루먼 쇼"에서 보여지는 세트장은 철저하게 고립되어져 있고, 수많은 카메라가 트루먼의 위치와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그는 세트장 시설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교육"받았고, 여전히 암묵적 통제를 받고 있다.
이쯤 되면 미쉘 푸코(Michel Foucault)가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말한 "감금 사회"가 떠오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나의 관점: 푸코의 "감금 사회"

푸코는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사회 질서유지의 그 근본뿌리를 "교도소"에서 발견하게 된다. 현대 사회 기구들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는 교도소의 운영방식을 알아보면 당장에 드러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들-현대 사회의 많은 조직들, 이를테면 병원, 학교, 공장-의 억압적인 형태는 감옥에서 행해지고 있는 기율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법자들을 외부 세계와 차단해, 감금시켜 놓고 , 엄격한 감시와 규율로 교정하는 방법을 학교, 병원, 공장과 같은 다른 사회에서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푸코의 이론에 따라 영화를 살펴보면 현대인을 외부세계와 차단해, "감금"시키는 것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는 세트장을 통해서, "엄격한 감시"는 24시간 동안 끈질기게 트루먼을 찍고 있는 수백 개의 몰래 카메라를 통해서, 그리고 현대인들의 몸을 통해 통제를 강화하려는 "규율들"은 어릴 때 아버지를 물에서 죽게 만든다든지, 학교에서 세계 여행에 대한 트루먼의 꿈을 좌절시키려는 일련의 교육들과 무의식 중에 습득되는 수많은 광고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트루먼 쇼"를 푸코의 이론에 비추어 본다면, 세트장은 "교도소"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억압된 현대사회"를 의미하고, 트루먼은 그 곳에서 온갖 감시와 규율로 통제되는 현대인을 의미한다고 적용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의 뒷 부분에서 트루먼은 세트장을 벗어나는데 성공하는데, 아마 그것의 상징적 의미는 "광기의 재생"정도가 아닐까 한다.


또다른 관점: 세상이 보는 유신론

다음으로 넘어가서, 이제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영화를 보도록 하자.
이번에는 종교에 대한 상징으로 영화를 보면, 트루먼은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인간이고 쇼의 세트장은 신이 직접 다스리는 유토피아다. 물론, 그렇다면 트루먼 쇼의 프로듀서는 창조자, 즉 신이다.

신은 진실만 보이도록 통제된 이상적인 세상을 창조했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여 자신이 계획한 세상 가운데 살게 한다. 신은 자신의 치밀하고, 이기적인 계획하에 인간을 통제하고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그것이 종국에 가서는 인간에게 유익이 된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신의 구체적인 의도대로 직장을 가지고, 배우자를 얻고, 인간관계와 주거지의 선택까지 일방적으로 강요 당한다. 모든 것이 그의 섭리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신의 계획 하에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유아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 트루먼 쇼는 신의 통제로부터 자유하고 싶어하는 인간 의지의 발현이라는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긴장점은 신이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하는 "통제"와, 안전과 평안을 버리고서라도 얻고 싶은 "통제로부터의 자유"에 있다.


짧은 기독지성 비판

최근에 몇 편의 영화를 통해서 느낀 것이지만 세속이라 부를 수 있는 세상의 지성은 기독교 세계관을 심하게 압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 지성인들이 80~90년대에 배웠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하여 그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적절하게 혼합한-사실 이 혼합 자체가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징이기도 하다-형태를 가지고 기독 지성인들에게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매체가 딱딱한 논문이나 연구서가 아닌, 시각효과가 뛰어난 영화와 같은 미디어라는 것이 더 현대 사상 흡수에 있어서의 용이한 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상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조차 부족한 실정이 아닌가!

현대 사상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 변증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푸코의 이론에 대한 내용의 일부는 조흡 씨의 "푸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인용했다. 그리고 위의 내용은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지, 영화 자체가 원했던 메시지와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이 글은 푸코의 이론과 기독교 지성의 자성(?)을 위해 어설프게 쓰여진 글임 또한 밝혀둔다.)


1998년 11월 11일.
1998/11/11 18:03 1998/11/11 1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