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발적인 캠퍼스보기 1>: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라!
/김용주
항상 글을 쓸 때면 머리 속에서 뭔가 잘 정리가 되어야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때때로 항상 생각이 맴도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것을 제대로 언급조차 못할 때가 많이 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가고 있다.
복음과상황에 99년 12월부터 연재가 되고 있는 본인의 글(세상보기)은 솔직히 말하자면 매번 나의 마음을 아주 힘들게 만든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부끄러움이다. 집으로 배달된, 발송하느라 수고를 했을 법한 무명의 독자들과 논고개 분들의 애정어린 손길이 담긴 복상을 받고 목차에서 내 글을 발견할 때면 심히 얼굴이 붉어지고 무안해지는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임을 부인할 수 없다. (목차를 볼 때 느끼는 또하나의 불편함은 목차 왼편에 열거된 우리나라의 대표격인 분들의 이름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이 잡지사에는 왜 기자 한 명조차 충원이 되지 않나하는 아쉬움이다!) 물론 누구나 글을 써 본 사람은 자신의 글에 대한 열등감을 어느정도는 느낄 줄로 안다. 나또한 예외는 아니며 그런 종류의 부끄러움도 물론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의 '부끄러움'은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정작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바로 '복음으로 상황을 조명하는' 이 잡지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꼭지의 넌센스 때문이다.
한 동안 복상에 이전까지 보여왔던 상황(context)의 부재와 그로인해 잡지의 날카로움이 예전에 비해 다소 무뎌졌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독자모임에서도 1년동안 그런 류의 지적들은 자주 있어왔고 정당한 비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복상에서 발로뛰는 글을 쓰는 이들은 극히 소수이다. 현장성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게다가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거의 30대를 넘어서고 있으며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캠퍼스의 현장성이 담겨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내가 갖는 불편함은 이런 복상의 '상황'에 기인한다. 발로 뛰는, 현장성을 담보로 한 긴장감있는 글들이 30대에서 나오고 있는데,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20대의 철부지 기독학생이 삶이 어떠니 묵상이 어떠니 하는 류의 글을 쓰고 있는 이 '상황'이야말로 정말 이해될 수 없는 넌센스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의 부끄러움은 바로 이 철모르는 학생이 현장성없는 사색적인 글을 건방지게 쓰고 있다는 불편한 심기에 기인한 것이다.
서론이 길어졌다. 내가 생활하는 공간은 캠퍼스다. 또한 요즘 한창 '잘나가는' 선교단체의 리더이며, 필요성 때문에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기독학생연합회와도 관계를 맺고 있다. 워낙 체육 쪽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또한 그로인해 주변 지체들에게 핀잔도 많이 듣지만, 나름대로는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대학생이다. 처음에 얘기했듯이 나는 동시대의 모든 캠퍼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 모두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다고 느낀다. 또한 어떤 뾰족한 대안을 가진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한지 혹은 적절한지조차도 의심하는 수준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주변의 현장성을 담보로 한 글을 쓰고싶다는 생각은 늘 해왔기 때문에 이렇게 너절한 내용이나마 펼쳐놓아보고 싶었다. 그래야 20대의 또다른 누군가가 고민하고 또한 고민했던 이들은 보다 나은 접근과 토론과 대안을 제시하고 실제 현장도 변화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패거리주의적인 성향>
2000년 3월에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했다. 물론 많이 달라진 캠퍼스와 학생들을 보면서 많이 신기해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캠퍼스 사역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까지는 어떤 모토가 공동체를 형성하게 만드는 원천이었지만 지금은 친밀함이 그 원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대자보'가 중요했고 그 대자보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가 중요했다. 지금은 선교단체도 대자보를 읽고 오는 이들보다는 인맥을 통해 교회 선후배들의 소개로 연결이 되는 수가 극히 많다. 대다수 이들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어떤 목적과 모토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목적으로 결성되었으며 어떤 내용을 담으려는지에 민감하지 못하다. 그들의 중심은 항상 주변 관계성에 기인하며 그 공동체의 목적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유보되어질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신들이 수정해 갈 수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나아가 이렇게 마련된 공동체를 통해 캠퍼스 안에서 집단우월주의적인 성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모더니즘을 경험하지 못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한 우리 시대의 한계이자 폐해라고 보는 편이다. 이는 진리성 여부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후기현대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호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동일하게 긴장점도 느낀다. 사실 이런 후기현대주의적 사상의 흐름은 특정한 식자(aUiº)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쉽게 전달이 되는데, 영화가 가장 중요한 매개물이 되고 있다. 진리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며 또한 그것은 힘의 논리에서 강자가 자신의 논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포장하는 형태를 띄게 된다는 이러한 관점은 <LA 컨피덴셜>이나 <pay back>과 같은 영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 시 캠퍼스 이야기로 돌아오면, 많은 학생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보다는 "누가" 혹은 "어떤 집단"이 그 이야기를 하는지에 크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PD수첩에서 대형교회 문제를 건드렸다는 보도를 들었을 때도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보다는 MBC가 예전부터 교회 문제에 부정적이었다, 혹은 방송(PD수첩)이 너무 비난위주라는 식의 반응이 기독학생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온다. 광림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침례교에 대한 장로교쪽의 비판문제로 환원되어 해석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뉴스엔조이에서 <전병욱 비판적 읽기>라는 책이 발간되었는데 그 책을 대하는 주변 기독학생들의 반응이 "뉴스엔조이가 뭐하는 놈들이야"는 식이었다. 텍스트는 사라지고 모든 문제는 단지 집단적 이권싸움 내지는 패거리나누기 식의 문제로 환원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아주 순결한 부류도 있다.
<사회를 보는 시각이 흐려짐>
이 렇게 학생들이 모든 문제를 집단의 이권다툼식으로 보는 것은 물론 상황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때문이며 그것은 너무 여러 정보들 사이에서 가라지들을 가려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상 너무나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우리는 파뭍혀 있고 그런 많은 정보 중에서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무래도 광고의 효과가 뛰어난 것들이다. 물론 광고는 돈의 문제이고 이 가치중립적(?)인 돈의 문제는 사실상 우리에게는 맘몬적 능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쉽게 정리하자면 캠퍼스의 대학생들에게 전달되는 많은 정보 중 결국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전달되어지는 정보는 끊임없이 광고를 해댈 수 있는 돈을 가진 집단으로부터 나오며, 그 집단은 대다수 성경적이지 않은 과정을 통해 힘을 갖게 된 집단임에 틀림없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리고 자본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깔끔한 포장으로 다가오는 정보들을 우리는 쉽게 '사실'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런 정보들은 텍스트가 충실하다기 보다는 피상적이며 문제를 단순히 흥미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상 대형교회의 목회세습문제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소수에게는 큰 희생이 따르고 있으며 이 문제는 캠퍼스에서 접하는 피상적인 것, 흥미위주의 것 이상이다. 당사자들에게는 삶을 담보로 한 운동임에도 그런 것들은 쉽게 잊혀지게 된다. 주변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매체들을 본다. 조선일보가 그렇고 스포츠투데이가 그렇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정치건 경제건, 종교건 모두가 썩었고 진흙탕이니 관심갖지 말자는 식의 홍보효과를 노리는 것 같다. 그래야 밤의 대통령도 유지되고 기득권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까지 할테니...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깊이 있는 대화를 꺼려하는 것 같다. 토론 부재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좀 엉뚱한 얘기 같지만, 나는 '썰렁하다'는 말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의 토론문화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조금만 얼굴을 진지하게 고쳐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일 것라고 생각한다. '썰렁하다"는 말이 유행하기 이전에는 모든 대화는 텍스트 위주였다. 비록 재미없는 이야기라 할 지라도 그 말을 끊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못했던 탓에 나를 비롯한 많은 90년대 중반 학번들은 지루하기 짝이없는 선배들의 세상 이야기와 신앙 이야기를 인내와 연단(?)의 마음으로 듣곤 했다. (물론 그런 탓에 나는 관심도 없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내 신앙의 색깔도 많이 넓어지는 풍요함을 경험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 안에 퍼져든 이 '썰렁함'이란 단어는 우리의 대화체계를 순식간에 바꿔 버렸다. 케이블 TV의 수많은 채널들이 조금이라도 식상하거나 정적인 화면을 못참게 만들었다면, 이 썰렁하다는 말은 모든 대화 안에서의 텍스트를 '재미'가 있냐 없냐의 문제로 바꿔 놓았고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면 쉽게 말을 끊어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썰렁하다는 단어가 그런 상황을 가져왔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얘기가 재미가 없어서 썰렁하다는 딱지를 받게 될까 두려워 해야하며 그렇게 각인된 사람은 대화에 주격으로 참여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점점 짧고 코믹하거나 심지어 엽기적이어야 수용된다.
물론 토론의 장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캠퍼스는 비교적 많은 세미나와 좌담회 등이 이뤄지고 있고, 미미하게나마 기독학생들 속에서도 사회참여적인 움직임들이 진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들을 본다. 하지만 그들은 엄연한 소수다.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는 소수인 셈이다. 또한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있어 그것은 골수분자, 혹은 흔히들 하는 말로 '매니아'나 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또한 거시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 개인의 기호로 치부되며 파편적 선택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악순환이다.
<청년 사역자들의 책임>
이 즈음에 와서는 선교단체 사역자들의 책임 문제가 나와야만 한다. 모순처럼 들릴 지는 모르지만 내 주변에서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발견하고 흐름을 읽어낼 줄 아는 기독학생들은 기존의 선교단체의 제자도로 키워진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혼자 습득하고 고민한 부류의 학생들이 더 많은 관심과 움직임들을 보이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이것은 두 가지의 문제를 말해준다. 먼저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선교단체의 제자훈련이 철저히 '상황'을 배제한 채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캠퍼스 내에서 선교단체는 마치 지하조직과 같다. 모두가 강의실 구석에 숨어서 모임을 가지며 이 집단들은 대개 학내 문제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 통일 문제, 노근리 사건, 고엽제, 신자유주의, 노동 문제, 장애학우들의 복지문제 등 부지런한 운동권 학생들이 끊임없이 화두를 던져대며 아우성을 쳐도, 기독학생들은 스스로 참된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배우며 그것들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대다수의 학생들처럼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캠퍼스에, 그리고 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너무 익숙한 모습이다. 그런 학내 문제가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며 정말 '익숙한' 우리의 모습이다.
물론, 이들이 캠퍼스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도 가끔 있다. '예수대행진'이라 불리는 이 행사는 "세상이 알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이 "행진"을 통해 기독학생들 내부는 더욱 견고하게 뭉쳐지며 구성원들 간에는 일방적 승리감을 얻게 되는 반면, 일반 학우들에게는 그들과의 괴리감을 증가시키고 캠퍼스 내에서는 기독학생들을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 집단으로 규정짓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진단이 나만의 과장된 생각인가.
두 번째는 시간의 문제이다. 까놓고 얘기해서 선교단체에 있는 리더급 학생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어 보인다. 학사의 삶을 살고 있는 동역자의 입을 빌리자면 어느 단체든 그 공동체는 구조적으로 그 구성원들을 그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이용하게 된다는 말을 했다. 조직에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고 더 견고한 공동체성의 확립을 위해 구성원들은 소진되는 수가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비단 기업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선교단체에서도 보여지는 일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학생들의 경우 그 충성과 헌신은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전적인 헌신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전적'이라는 단어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대상으로 생각하는 수가 많다. 기연활동을 예로 들면, 그런 분위기 속에서 기독학생 연합은 각 선교단체의 '리더 빼가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 두고 대표자 모임에서 '고통 분담'이라는 말을 쓰기까지 하니 더 할 말은 없는 셈이다. 캠퍼스는 고사하고 선교단체조차 조망할 수 없이 자신의 단체에서 소진되고 있는 리더들이 어떻게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겠는가. 다시 여기에서 선교단체들의 구조조정(?) 문제를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된다. (이 얘긴 99년에 TNT사이버 방담 때에도 나누었던 부분이다.)
솔직히 나는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대안을 알지 못한다. 구조는 너무 견고하고 우리네 학생들은 너무나 세상에 대해 보수적이며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이 피상적이다. 변화 자체를 싫어하는 성향도 느낀다. 더 깊이 고민하고 더 많이 기도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또한 더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내내 글 모양새가 너무 조잡하고 진단이 나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비판할 거리들도 많을 것이고, 또한 나와는 다른 캠퍼스의 상황을 이야기해 줄 동역자들도 있을 줄로 안다. 나의 부족한 글이 그런 많은 숨겨진 기독학생들을 자극하고 목소리를 높이게 할 수 있었다면 일단 그것은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침묵하지 말고 이 불씨를 살려 주었으면 한다. 냉정한 비판이나 논리적인 반론도 좋다. 그리고 그럴듯한 대안이나 이미 과정 중에 있는 좋은 운동의 본이 소개된다면 더할 나위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복상의 20대들도 기나긴 겨울잠에서 이제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