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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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Sartre)로부터 시작된 나의 고민


내가 처음으로 교회가 혹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보다 결코 낫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장 폴 사르트르(J. P. Sartre)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다. 물론 처음 사르트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도와준 책은 제임스 사이어(James Sire)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이었다. 그 책에서는 사르트르를 실존주의자로 분류하여 그의 사상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서술해 놓았다. 이후에 나는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사르트르의 약력이라거나 두껍지 않은 그의 책들 몇 권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잠시 관련된 내용 중 사르트르에 대해 설명한 발라스 듀스의 글을 인용해보자.

사르트르는 인간이 누구보다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의해 조건 지워지고 구속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사르트르 이전의 앙가주망(engagement)에 대한 낡은 내용이다. 그러나 실존의 분석에서 명확하게 밝혀진 것처럼, 인간은 사전에 본질이 결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인간은 그 한계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을 선택할 수 있고, 숙고한 행동은 물론 상황을 무시한, 혹은 자유를 방기한 선택까지도 책임을 져야 한다. 또, 어떤 행동의 선택은 당연히 이후의 행동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에 자유 속에 던져진 인간은 항상 선택을 하고 자기를 새롭게 구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그런 책임에 부합하는 올바른 선택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사는 사계 전체의 움직임과 상황으로 인해 좁혀진 선택의 가능성을 확장해서 자기를 차츰차츰 해방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전의 전체주의 하에서 사람들의 선택의 폭은 몹시 좁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새롭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냉전, 혹은 고도의 자본주의라는 상황 하에서 다시 선택의 가능성이 좁아져서는 안 된다.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자기를 해방시켜라.' 바로 이것이 사회 참여라는 새로운 의미로서의 앙가주망이다.
(발리스 듀스, "현대사상-앙가주망" 중에서)

듀스의 표현대로 실존주의자들의 미덕은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자기를 해방’시키려는 책임과 참여(앙가주망, engagement)에 있다. 사르트르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그의 약력을 살펴본다면 그러한 삶의 자세가 그의 생애 전반에 잘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수복(사회운동연구소 소장)은 사르트르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요소들과 융합하며 자신의 사상을 지속적으로 수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는 인간이 기독교적 교리와 사회적 제도의 구속을 넘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만들어나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또한 사르트르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이후 고전적 좌파 지식인의 전형이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선택과 참여는 역사적 결정론을 거부하고 억압 받는 자의 편에 서서 행위자의 실존적 선택과 자유를 옹호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많은 지식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그런 이유에서 마르쿠제는 사르트르를 가리켜 '세계의 양심'이라고 불렀다.

사르트르는 항상 기득권을 옹호하는 지식인이 되기 보다는 기존의 불합리한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사회참여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역사적 결정론과 환원론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가 실존주의자로서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그의 사상의 근본에 충실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1964년 10월 노벨 문학상이 주어졌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고 생애 말년까지도 알제리 사태에 대한 계속적인 반대 운동, 1966년 베트남에서 자행된 전범을 재판하기 위해 구성된 '러셀 재판소'에서의 열렬한 활동, 쿠바 사태에 대한 항의, 1968년 5월의 프랑스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 체코 사태에 관한 소련의 무력적인 개입 비난 등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사르트르를 단순히 기독교 세계관에서 벗어난 실존주의자로만 평가한다. 이는 그가 어떤 일을 했건, 평생에 걸쳐 사회에 어떠한 이바지를 했건 간에 그가 명시했던 실존주의자로서의 명제, 이를테면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거나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와 같은 고백들을 대다수의 기독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이해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사상을 비난하거나 가볍게 대하는 많은 수의 기독인들의 삶에 비해,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역사와 사회에 끼친 비중 있는 책임과 참여의 폭은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의 ‘양심’은 대다수의 기독인들이 한 구성원으로써 사회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평균적인 도덕성보다 더 순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보다 좀더 나아가 그러한 질문도 던져보고 싶다. 그러면 과연 누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인가. 실존주의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하나님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누구를 사용하는가. 실존주의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세상이 더럽다고 구별된 건물 안에서 세금조차 내지 않으며 고고한 성을 쌓던 교회는 또한 얼마나 세상과 닮았던가. 일말의 대화와 타협도 없이, 그대로 선포되어야 한다던 로고스(Logos)는 그 막힌 건물 안에서 얼마나 위조되고 또한 더럽혀졌던가.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실존주의자보다 못한 우리의 자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딴지일보>의 교훈
 
“우리는 편파적이다. 그러나, 편파성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하다.”
(김어준, "딴지일보")

딴지일보가 처음 인터넷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일반인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많은 기독인들은 딴지일보의 스타일에 마음이 많이 불편했던 듯하다. 물론 이러한 ‘글쓰기 스타일’에 관한 문제는 강준만으로부터 비롯되어 진중권과 같은 류의 논객에 대해서도 여전히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선정적인 표현이라거나 특정 인물에 직격탄을 날리는 듯한 비판조의 글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술수라는 말도 많았다.

물론 일정부분에서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가지가 넘쳐날 정도로 사회에 뿌려대는 극우 신문과 극우 잡지들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러한 스타일의 ‘오버’는 어떤 면에서 오히려 공정한 게임을 위한 좋은 시도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나는 딴지일보를 좋아한다. 그리고 딴지일보의 총수인 김어준의 생각을 존중한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호감을 갖는 부분은 딴지일보적이라 할 수 있는 그 ‘편파성’에 있다. 나는 딴지일보의 ‘편파성’이 좋다. 물론 많은 기독인들이 편파적인 글, 편파적인 행동, 편파적인 처우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조의 의미로 초반에 김어준의 말을 넣었다.

나는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선교단체와 교회 안에서 ‘균형’에 대한 많은 조언들을 들어왔다. 아니, 균형을 말하는 정도의 교회라면 교회 전반적으로 볼 때 소수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거다. 최소한 ‘복음주의’ 내지는 ‘사회참여’라는 용어를 쓰는 그룹에서만 균형이라는 단어가 소위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사이의 균형, 교회와 사회 사이의 균형, 신앙서적과 일반서적 사이의 균형,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 사이의 균형 등.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균형 잡힌 신앙은 중요하다. 하지만 나의 경험을 비추어볼 때, 균형을 말하는 기독 공동체의 상당수는 기만적이었다. 내가 속했던 선교단체가 그러했고 내가 아는 복음주의 교회들이 그러했다. 항상 어떠한 실천적인 움직임을 동반한 행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이러한 공동체는 ‘그래, 그것은 우리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야. 하지만 그것만이 신앙의 전부는 아니거든. 마치 그것을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너의 편파적인 사고는 자칫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리게 되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어.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하지. 그래서 말씀 묵상과 기도가 중요한 거야.’라며 문제를 회피했다. 결국 이러한 고백의 속내는 균형을 잡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세상에 대한 치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변화 자체에 대한 무관심과 불편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기만적인 ‘그럴듯함’에 그 목적이 있는 듯 하다.

딴지일보는 편파적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 편파성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하다. 스타일이 다소 껄끄럽게 느껴진다 해도 편파성에 이르게 된 과정을 누구나가 검색할 수 있고 필요하면 따질 수도 있다. (이것은 양방향 전송이 가능한 인터넷 매체의 유익이라 할 수 있다.) 과정 자체가 오픈 되어 있으며 내용을 담는 데에도 학구적인 냄새로 그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지 않은, 그야말로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는 네티즌의 말투 그대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딴지일보의 이러한 편파성이 복음주의 권의 균형성보다 낫다고 느낀다.
 


편파적인 세상보기를 시작하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이 연재의 흐름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입가를 맴도는데 막상 풀어내려 하니 그 첫 단추가 잘 떠오르지 않는 기분이랄까.

흔히들 기독인의 눈으로 보기에 세상은 기독인과 비기독인, 이렇게 두 가지의 부류로 나누어져 있는 듯하게 보일 때가 많다. 문제는 현실 세계에서는 기독인 부류도 비기독인 못지않게 동일한 불합리성을 가지거나 혹은 그보다 더한 악행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럴 경우 기성 교회는 그에 대한 대답을 칼빈에게서 찾는다. 기독인 중에도 두 부류가 있으며 이 둘은 가시적인(명목상의) 기독인과 비가시적인(진정한) 기독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전통적 구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 구조적인 악행들과 집단적인 행동도 많이 있다. 그리고 실제 세상은 기독인의 생각처럼 사회가 기독인과 비기독인 두 부류로 정확하게 나누어져 정신적, 물리적 활동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은 어떤가. 세상의 잣대 하나로만 두 부류를 평가해 보는 건 어떤가. 교회를 세상의 구조에 맞게 해석하여 그 불합리성을 분석해보는 건 어떻겠는가. 혹은 기존의 세상을 권력을 가진 소수의 조작으로 해석하는 것을 그만두고, 공정한 과정을 통해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건 어떤가. 이 모든 부분에 있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독교적인 표현들을 걷어내고 비기독인의 언어로 대화하였을 때 과연 우리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혹은 윤리의 기준으로서 편파적인 우세를 얻어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런 것들이 내가 써 내려갈 연재의 시도들이 될 것 같다.**

2004/01/01 08:03 2004/01/01 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