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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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다 >>> 창 37:12-36

본문에서 르우벤은 빌하와의 통간 이후에 아버지가 아끼는 요셉을 살리려고 많은 애를 쓴다. 그에 대한 많은 기록은 없지만 이를 통해 장자권을 잃은 것에 낙심하고 더 나쁜 선택을 하지 않고 자신을 돌이켜 아버지 야곱에게 더 나은 아들이 되고자 했던 듯하다. 그의 돌이킴을 배우자. 그는 구속사의 중요한 시점에서 요셉을 살리는 역할을 했다.



유다와 다말 >>> 창 38:1-30

인간관계를 맺다보면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몇 차례나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악행의 구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단죄하고 그 연을 끊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혹은 명장이나 대가들은 자신의 이름에 오점을 남길 법한 사소한 흠이 보이면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한 물건을 미련없이 파기한다.

본문에서 메시아의 계보를 잇는 유다는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르우벤으로 인해 그 계보를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고 그의 아들들도 그를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다.

가끔 나는 왜 이런 쓰레기 같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묵묵히 수행하시는지 의아해하곤 했다. ...그의 방법은 100% 순결하다기 보다 피조물과 관계에서조차 100% 신의를 지키고 자신의 약속을 관계 속에서 펼쳐가시려는 절대적인 선함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그럴 수 있을까. 내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그리고 내가 수차례 충고하지만 더 깊은 악행의 실타래 속으로 빠져드는 인간 관계에서 묵묵히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이들에게 선함을 보일 수 있을까. 혹은, 하나님 앞에 나는 악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망스런 존재는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타인에게조차 고통을 주며 반복적인 악한 습관을 끊지 못하는 악한 존재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 >>> 창 39:1-6

보디발은 노예인 요셉을 지켜보면서 그를 주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는 요셉을 신뢰하게 되어서 노예신분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재산 관리 일체를 그에게 맡겼다.

중 요한 것은 나의 위기 관리 능력이나 나의 지식, 정보력과 같은 후천적인 노력보다, 최우선적으로 내가 하나님이 돌보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을 형성하는 근본이 될 것이다.

본문의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에 의해 훈련시키는 존재이므로 내가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해서 내 주변에 물질적인 부나 명예를 동반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오독이 될 수 있겠다.
...
하지만 어떤 의미로든 내가 속한 주변을 하나님의 임재로 채우는 역할은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할, 혹은 드러내야할 주된 정체성이 아닐까. 내 주변은 나로 인해 일상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그게 오늘의 묵상이자 적용점이 아닐런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다 >>> 창 39:7-23

유혹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요소는 반복적인 경우이다. 또한 이 유혹이 자만과 결합되면 시너지 효과를 크게 발휘한다. 요셉의 나이를 예상할 때 그 시기에 요셉에게 닥친 성적 유혹은 꽤 컸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자기 주인의 여자가 반복적으로 성적 매력을 과시할 것을 요청하는 부분에서 요셉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색옷을 입은 채 꿈얘기를 통해 자신의 특별함을 형들에게 과시하던 철없는 아이에서 이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에게 주어진 노예의 길 속에서도 그 고단한 일상에서도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는 청년이 되었다. 그는 마치 태초의 유혹인 유일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던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는 존재처럼 자신에게 제한된 단 하나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행위임을 명확하게 인식했다.(9절)

그의 선한 행동은 도리어 오해와 누명이라는 나쁜 결과로 돌아왔고 노예에서 죄수로 더 견디기 힘든 위치에 봉착한다. 요셉은 아버지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자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높은 자라고 은근 여기던 철부지였다. 그런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정 가운데 노예에서 오명을 얻은 죄수로 곤두박질치는 인생의 혼란기에도 묵묵히 그의 할 일을 해나간다.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을 구원할 애굽의 총리로 훈련시키는 것이었겠지만 요셉은 그 미래를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힘든 일상에서 최선을 다한다.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을 느끼는 순간에 나는 어떠했던가. 욥기를 떠올리며 하나님과 담판을 짓고 싶어하지는 않았던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보단 내 자존심에 상처받고 내 처지를 비관하며 그것에서 헤어나오기 급급하며 살아오진 않았던가. 고난과 고통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성글은 길을 바라보지 않고 다르싯으로 도피하는 요나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다 >>> 창 41:1-36

요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꿈해몽을 한 게 알려져 애굽의 최고권력자인 바로 앞까지 서게 된다. 요셉은 이번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바로의 마음에 근심을 더하던 꿈을 명쾌하게 해석해낸다.

하지만 요셉은 그에 더하여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라는 치정에 있어서의 구체적인 제안을 한다.

요셉은 노예의 신분으로 경호대장인 보디발의 신뢰를 얻어 그 집의 관리를 맡아서 행하였고 이후에 그는 애굽의 옥에 갇혀서도 옥의 제반사무를 보는 위치에서 공동체의 살림을 꾸리는 훈련을 해왔다. 그는 성실히 자신에게 주어진 공동체 안에서 그 재정과 행적적인 실무들을 성심껏 수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바로 앞에 서서도 하나님이 알려주신 꿈해몽을 풀어냄과 동시에 애굽에 처한 난관에 대한 즉각적인 대책을 바로에게 제시한다.

많은 기독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지고 비워지길 소원하고 그런 무념무상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성령이 부어져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으로 위대한 일을 행하는 것을 소원하곤 한다. 하지만 성경의 많은 인물들의 고단하고 무료한 일상 가운데에서 겪은 반복적 훈련들은 제거되거나 무시되기 일쑤다.

다윗과 요셉, 그리고 다른 많은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의 지지부진했던 하루하루와 그 안에서 성실히 훈련받고 매순간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했던 그들의 일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러한 일상으로 훈련된 그들의 재능은 정작 위기의 순간에 진정한 힘을 발휘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별볼일 없는 하루도 그런 의미에서 성실히 살아야 할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루이다.

2011/02/06 20:31 2011/02/06 2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