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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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가 야곱을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가다 >>> 창 43:1-34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혼자 살아간 이들에게 가족이라는 존재는 떠올리기만 해도 뭉클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져다 준다. 가족은 실수나 잘못 속에서도 연을 쉽게 끊지 못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최초의 공동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가족 공동체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만 요셉의 가족처럼 헝클어지고 실타래가 꼬여 매듭이 굳게 잠겨버린 경우도 허다하다. 자식을 때리는 아버지, 잘못으로 형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형, 오빠, 부모를 미워하는 자녀...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인간 관계 속의 어려움은 유년 시절 혹은 성장기의 가족으로부터 기인한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러한 가정의 문제 속에서 자신의 억울함과 과오를 명확히 구분하고 이를 되내이며 심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해야만 변화가 된다는 사실이다.

요셉은 야곱의 집안의 최대 피해자였지만 그도 과오가 있는 철부지였고 타지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내면의 질서를 잘 찾아갔다. 이 만찬은 그러한 요셉에게, 그리고 그 형제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선물이며 축복이다. 요셉에게 기억될만한 슬픈 기억이 많이 있겠지만 가장 기쁜 하루는 이 날로 기억될 것이다.

내가 가족 안에서 기쁨을 누리던 날은 언제였던가. 그 날을 기쁨의 날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가족의 문제를 내 안에서 얼마나 들여다보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내 과오와 내 상처를 얼마나 직시하고 있는가. 혹 그 날이 오더라도 나는 내면을 정리하지 못해 그 기쁜 순간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유다의 말 >>> 창 44:18-34

본문에서 유다는 떠날 때 야곱에게 맹세한 대로 야곱이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큰 상심에 빠질 것을 요셉에게 설명하고 그 대신 자신이 남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대목에서 요셉은 야곱의 가정에 찾아든 가족애를 경험했을 것이다.

레아의 아들들과 라헬의 아들들에게 생긴 반목이 자신의 죽음(죽었다고 여겼을 것)으로 인해 더 이상 아버지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으려는 아들들의 노력으로 변화되었고 이제 유다는 라헬의 남은 아들인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생명과 바꿀 것을 제안한다.

어쩌면. 요셉은 자신에게 온 해로 인하여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던 야곱 가정 안의 우애와 화목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을런지도 모른다. 유다의 대속적 고백에 그의 내면에 있던 억울함이 완전히 녹아내렸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의 용서는 당위적인 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생긴 울림으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가정의 실패를 돌아보고 그것을 귀감으로 삼아 유다와 같이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자인가. 나를 희생하고 공동체를 살리려는 마음을 가진 자인가. 형제들 가운데 먼저 나서서 위기에 봉착한 어린 자들을 위해 내 목숨을 담보로 걸 수 있는 자인가. 혹은 나보다 더 사랑받고 인정받는 이들을 여전히 시샘하는 악한 가족원은 아닌가.


기근이 더욱 심해지다 >>> 창 47:13-26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무엇일까. 어두운 곳에 들어갔을 때 그 성품만으로도 주변을 밝게 밝히고 부패를 막는 그런 존재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품과 존재감은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감에 기인한 것이다.

본문에서 요셉은 이방 민족 애굽 땅에 임한 기근 가운데 기준 체제를 허물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구제할만한 제도를 마련한다. 가축을 팔고 남은 게 없자 땅과 몸을 팔려고 온 백성들에게 땅과 종자를 나눠주고 그 수확의 1/5만 상납케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활개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기독인이 모여있지 않은 척박한 이방의 땅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주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성품을 드러내는 존재다.

나는 종교 울타리에서 고급 기독교 문화를 즐기는 한심한 존재는 아닌가. 더 탁월한 교회, 그룹을 찾아다니며 그 안에 매몰되어 스스로가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 공동영역 안에 스치는 빛과 소금에 묻어가고 싶어하는 자는 아닌가.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다 >>> 창 48:1-22

흔히 성경을 읽는 중에 많이 하는 오류는 서사 속에서 이적적인 요소들, 그리고 원리들을 추출해내려는 시도이다. 본문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축복에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요셉의 의도와 다르게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야곱이 특별히 장자인 므낫세를 두고 에브라임을 더 축복한 일에 흥분한다.

이는 성경의 흐름을 통해서도 약속의 성취라는 대목에서 더 그럴듯하다. 북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에브라임 지파의 번성을 보며 우리는 퍼즐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이런 퍼즐맞추기를 즐기다 보면 진정 감동을 받아야 할 한 가족의 축복 장면을 놓치게 된다.

평생 가슴에 묻어둔 아들 요셉의 생존을 확인하고 그와 더불어 그의 자녀들을 보게된 야곱, 그 아비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나는 일찌기 자녀를 잃은 부모들을 몇 분 알고 있다. 그들은 자녀를 잃은 날부터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 자녀의 상실은 어느 것으로도 그 어느 다른 자녀로도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이자 절망이다.

이제 야곱은 자신의 말년에 잃었던 아들의 자녀들을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축복을 내린다. 야곱에게도 여러 기쁨이 있었겠지만 이 장면은 아마 야곱에게 있어 편하게 하나님의 품을 갈 수 있겠다는 행복에 젖은, 자신의 생에 있어 가장 기쁜 장면 중 하나였으리라. 오늘은 한 가장의 아름운 노년을 돌아보며 그 삶을 묵상해야겠다.

2011/02/16 20:32 2011/02/16 2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