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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회색지대 보고서 (3): 직장 생활 보고서(1) (2003. 5.)

/김용주


<“커피”의 추억>

휴 학을 하고 잠시 회사를 다닐 때의 일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5-6년 전인 그 때에는 여직원이 커피 심부름을 하기가 일쑤였다. 물론 지금도 신문지상에서 간간이 커피 심부름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여전한 관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때는 여직원의 커피배달(?)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있던 부서의 과장은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그리고 손님이 찾아오거나 회의가 있을 때 수시로 여직원에게 커피를 뽑아오도록 시키곤 했다.

“OO야, 커피 좀 뽑아와라!”
“네, 과장님.”

처 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상황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일단 남자직원은 커피 배달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역할 분담에 대한 고민을 해보지 않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커피 심부름은 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과장은 커피를 가져온 여직원을 마치 다방 아가씨 대하듯 할 때가 많았다. 커피를 뽑아 와서 책상 앞에 놓을 때 과장은 야한 농담을 건네기 일쑤였다. 옷차림이나 화장에 대해 타박을 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손을 잡거나 허리 같은 몸의 부위를 두드리기도 했다. 간혹 보이는 커피 접대의 장면에서 나는 상당히 마음이 안 좋았고, 당사자의 입장에서 매일 아침을 불쾌한 마음으로 시작해야 하는 고충이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과장은 사전에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도록 여직원이 일도 잘하고 싹싹해서 칭찬해 주려는 거라고 웃음 섞인 말을 직원들 앞에서 크게 떠들어댔고 사람들은 그저 평상적인 웃음을 보이고 자기 일에 집중하며 상황은 무마되곤 했다.

어느 날 나는 젊은 혈기로 뭉친 의협심이 발동하여 여직원에게 가서 말했다.

“과장님 커피 제가 뽑아다 드릴게요.”

사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그 여직원은 커피 뽑는 문제로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 나는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녀는 상처가 쌓여서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했던 듯 했다.

“그럼, 앞으로 커피 심부름은 용주 씨가 다 하세요!”

그 렇게 말하고는 획 하고 돌아서는 여직원에게 내가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사실 당시의 나는 솔직히 말해서 약간의 도움이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지 매일 커피 심부름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약간의 도움으로 회사에서 여직원을 위하는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도 받고 싶은 동기가 내 안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여직원이 그렇게 나오자 나는 불쾌해졌다. 괜히 나섰다가 덤태기를 쓴 것 같아 솔직히 약간 분한 마음이 들어서 그 여직원이 나간 곳으로 따라 나갔다. 너무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려고 나갔는데 그녀는 화장실 뒤뜰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난 내가 임시직이긴 해도 직장에서 특권층인 남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 여직원은 열심히 공부하고 커다란 포부로 회사에 들어와서는 커피 심부름으로 매일같이 과장에게 불쾌하게 희롱 당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의 선의는 같은 부류인 한 남자의 비아냥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결국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사무실로 돌아왔다.

대신 다음 날부터 과장이 여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면 내가 재빨리 커피를 뽑아다가 과장을 갖다 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여직원의 입장이 좀 난처해지는 것 같았고, 다행히 여직원은 나의 선의를 ‘인정’해 주어 이후로는 역할을 분담하게 되었다. 커피 심부름은 내가 하되 과장에게는 여직원이 직접 가져다 주는 팀웍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게 회사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변화시키진 못했지만 적어도 여직원의 마음은 누그러뜨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커피를 가져가는 타이밍에 생기는 문제 때문에 나는 되도록이면 결제 서류 같은 것을 여직원이 커피를 가져가는 시간에 과장에게 보여주곤 했다. 타이밍이 항상 잘 맞은 건 아니었지만 내가 결제 서류를 보여주는 사이에 여직원은 그냥 나오면 되니까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었던 듯 하다.

 
<여직원은 접대부?>

직 장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치게 미시적인, 그것도 ‘커피 배달’의 추억으로 시작하는 것에 김이 빠지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직장 경험 이후 시간도 많이 흘렀고 이제는 성희롱이나 커피 접대 같은 일에는 여직원이 보호 받는 풍토도 많이 조성되어 철 지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신문에서 교장이 여교사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면서 출세하려면 그런 것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냐는 식의 말을 당당하게 했다는 기사를 보면 불편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직장을 이야기할 때 여직원의 복지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부터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나에게 이 보고서는 기만적이란 생각을 한다. 사실 이 글의 처음에 들었던 개인적 경험은 그나마 잘 풀린 사례다. 내가 경험했던 직장생활에서 항상 그렇게 좋게만 풀리진 않았다. 참다 못한 여직원이 회사생활의 꿈을 접고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도 허다했다. 나 스스로도 가부장적인 직장 생활에서 다른 남자 직원처럼 몸을 사린 기억도 많다.

저 유명했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박노자 교수는 한국의 남자들이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어떻게 형질이 바뀌는지를 잘 설명해주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국의 남자들은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서 이후의 직장생활에서 마주치게 되는 대인관계, 그리고 사회 속의 조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교육받게 된다. 회사라는 조직에 가서도 직장 상사는 단순히 자신보다 연배가 높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나 업무의 최종 책임을 지고 나에게 필요한 업무들을 지시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군대에서 겪은 고참처럼 여기게 된다. 그래서, 이른바 “까라면 까라”는 관계가 형성되고, 상사가 하는 말은 곧 법이 되며 절대 복종의 대상이 된다. 상사의 직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군대에서 경험한 계급과 동일한 관계 계산법이 머리 속에서 작동하게 되고, 그런 전근대적인 회사 조직은 직원들에게 야근을 시켜가며 밤새도록 ‘굴리기도’ 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회사라는 조직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대상은, 군대경험이 없고 신체 조건에서 불리한 연약한 여직원이 된다. 남자 직원은 3년간 그런 상명하복의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서 직장 생활을 무난하게 하는데 여직원은 다르다. “까라면 까”야 되는데 까라면 눈물을 흘리기 일쑤고, 야근을 꺼려하고 임신, 출산 및 육아 휴직에 아이들을 놀이방에 보내고 늦게 출근하는 일도 다반사이다. 이윤추구가 목표인 회사에서 여직원의 그러한 요구들은 눈에 가시임에 분명하다. 그러니 전근대적인 회사일수록 여직원을 채용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런 연유로 면접 시에 여직원의 외모나 키, 나이 같은 것을 은근히 조건으로 내세우는 황당한 일을 저지르곤 한다. “여직원이 회사 생활을 하려면 부엌일도 잘 하고, 커피도 잘 타고 나긋나긋해야지”라고 말하는 데에는 그러한 가부장적인 직장 분위기의 폭력성이 드러나 있다. 이건 한 마디로 기업에서 ‘접대부’를 고용하겠다는 뜻이다.

최 근에는 나도 이러한 관행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어쩌면 대학원에 들어온 지금은 그런 환경에서 멀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에 주변에서 취업을 하는 여학생들이나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들의 아내 얘기를 들어보면 내가 경험하던 불합리한 상황들은 많이 사라졌다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복지 문제에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직장에서 남성과 동등한 위치로 여성들이 경쟁을 하고 있다면, 아니, 보다 원색적으로 말해서 회사가 여사원을 단순히 ‘접대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조직 구석 구석에는 능력 있는 여성들이 많은 남성들과 더불어 이름을 날리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최소한 비슷한 수의 여성들이 회사에서 남성들과 함께 사회 생활을 영위하고 있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의 이른바 고위직에 남성과 비슷한 수의 여성들이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 교수 사회를 예로 든다면, 여 교수가 형편없이 부족한 대학에는 교수직 선출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지속적인 상징적 폐기가 그 조직에 암암리에 고착화되어 있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대개 이런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전반적인 회사에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여성을 폄하하곤 했는데, 내가 직장 생활을 통하여 체험한 여성에 대한 상징적 폐기의 방식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대충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여성들은 업무 시간에 잡담을 하거나 커피 자판기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
2. 여성들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여 사적인 문제가 생기면 업무의 능률이 떨어진다.
3. 여성들은 업무 시간에 개인적인 전화를 너무 오래 한다.
4. 여성들은 결혼 후에는 사직할 확률이 높고 대체로 3-5년 정도 이상 장기 근무할 생각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 론 위와 같은 나열을 어떤 일반적인 유형으로 상정하자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까지 전문적인 통계수치를 가지고 이 문제를 연구하지도 않은 입장에서 나는 단지 내가 경험한 직장 생활의 특수한 경우를 이야기하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주변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회사에서 여성을 평가절하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런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지나치게 여성들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이 포함되어 어서 그러한 정서는 다소 고쳐져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나는 위와 같이 이야기하는 바로 그런 회사에서 도리어 여성에게 허드렛일만을 강요한 결과는 아닌가 하는 되물음을 던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직장인 여성의 분투를 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나는 내가 여성이었으면 글을 쓰기에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겪게 될 문제가 아님으로 인해서 “힘들더라도 우리 이렇게 해쳐나가 보자!”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다. 따라서 결국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그런 거 다 알고 있는 일이야. 신문지 상에서도 매일 접할 수 있고 나도 매일 겪는 일이지. 하지만 단순히 흥미거리로 만들기 위해서 이런 글을 쓴 게 아니라면 무슨 나름의 해결책이라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니야?”라는 비판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 생활 보고서의 시작을 내가 어떤 대안을 이야기할 수 없는 직장 여성 문제로 시작하게 된 것은 처음에도 말했듯이 직장에서 여성의 복지 문제를 도외시하고는 직장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비중이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이를 가볍게 여기고 이전과 동일한 사내의 가부장적 정서로 직장 여성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글을 쓰는 동기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런 인식 없이 직장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기독인 여학생들에게 최악의 경우를 고려해보자는 의도이다. 그리고 나름의 대안들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최소한 적진의 지도조차 없이 들어갔다가 낭패를 보는 일은 겪지 말고 지형의 가장 나쁜 경우가 이렇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나름의 행동지침에 대한 고민을 해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램이다. 특히 기독 선교단체 출신의 여학생들의 경우에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공동체 형제들의 보살핌 속에서 생활하다가 갑자기 바뀐 환경에 당혹스러워하며 상처를 받고 적응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안타깝게 회사 생활을 접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대학 지성사회로의 부르심을 입은 기독인 여학생들도 직장 생활의 부르심에 진지하게 고민하고 여성들의 직장 문화와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을 도피하지 않고 분투하는 일에 함께 대응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3/05/01 23:10 2003/05/01 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