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시대의 변화를 가장 크게 느낀 건 대학생들이 문화소비자의 위치로 전락한 때부터였다. 학생들은 대자보로 의견을 말했고 문화의 밤이나 동아리 축제, 대학축제 같은 공간에서 컨텐츠의 생산자로 자리매김했다. 언제부턴가 대학교의 대자보는 기업들의 홍보지로 가득차게 되었고 학교의 축제도 엄청난 돈을 들여 아이돌 그룹을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됐다.
캠퍼스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를 소비하는 곳, 아니 문화와 무관하게 취업준비에 집중해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담론을 생산하던 많은 지식인들도 어느덧 도매상을 자처하거나 문화비평, 이를테면 음악평, 영화평, 서평에 몰두하는 모습도 이제는 익숙하다. 대중은 맛집 비평, 대기업 상품평에 자신의 노하우와 지식의 깊이를 내보이며 뛰어난 제품들의 간접 홍보자를 자처한다.
어느덧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보여주는 행위가 되었다. 문화생산자는 치열한 자본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본과 권력, 인프라가 갖춰져 있는 프로페셔널한 영역에 국한되고 그 영역에 들어가려면 엄청난 경쟁력을 뚫어야 할 뿐 아니라 들어가서도 '저녁이 없는 삶'을 담보로 한 야근과 노력, 경쟁구도에 순순히 자신의 청춘을 바쳐야 한다. 그 청춘의 녹을 먹고 그 안에서 선별된 글로벌 경쟁력이 보장된 컨텐츠만이 살아남게 되고, 다시 그 양질의 컨텐츠를 지친 대중은 찬양하고 열광해하며 쉼을 얻는다.
백설공주를 상상하면 월트디즈니 만화의 최적화된 캐릭터가 떠오르고 커피나 마카롱만 검색어에 쳐도 최고의 브랜드를 찾아준다. 조금만 어설퍼도 우리는 채널을 돌리고 음식점에서 먹다말고 뛰쳐나와 인터넷에 악평을 단다. 소비자가 일상에서조차 생산 구조 자체를 제로섬게임으로 내몰면서도 대중은 책에서, 뉴스에서 읽는 신자유주의 유령만을 비난한다. 사실상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본주의를 찬양하며 일상적으로도 경쟁을 부추기며 일상적으로도 차별에 찬성한다.
아이들 재롱잔치는 내 아이이기 때문에 감내해도 남의 아이의 어설픔에는 하품을 해대고 제품의 하자는 고쳐지길 기대하기보단 그 제품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라기도 한다. 그러한 긴장과 불안 속에서 우리는 이미 컨텐츠를 생산해내던 행복한 아마추얼리즘을 잃었다. 교회에서 밤 늦은 저녁, 청춘남녀가 모여 낭송하던 자작시나 클래식 기타를 뜯으며 화음을 맞추던 어설픈 듀엣곡들은 없다. 자신의 창의성을 뽐내기 보다는 프로페셔널들의 컨텐츠를 평하며 그것에 안주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나또한.
자주 그 장단에 춤을 추다가도 가끔씩은 이런 일상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를 떠올리곤 한다. 한때 우리는 모두 아마추어였고 겁없이 무대에 나서곤 했다. 서로를 글로벌 잣대로 냉정하게 평가하기 보다는 어설든 매력에 빠져들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하향평준화됐지만 그런 사실마저도 행복해했다. 가끔 겁나게 잘난 녀석이 나타날 때면 시샘을 하면서 속으로 열광하기도 했다. 지금의 삶이 지옥같다는 말은 아니지만 가끔 어설프게 주변에서 만들어내던 컨텐츠들이 그립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