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쁜 그리스도인’
/김용주
제 목부터가 눈에 확 띄는 책이었다. 그간 기독교 비판서적들은 참으로 많았다. 예수 출생의 비밀을 캐낸다거나, 역사 속의 기독교 죄악들을 담은 책들로부터 최근에는 안티 기독교 카페에서 출판한 책까지, 기독교를 비판하는 책들은 호기심에 사서 읽기는 했어도 큰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해왔다. 물론 이 말이, 내가 몸담고 있는 복음주의권을 향한 세상의 비판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읽게 된 <나쁜 그리스도인 Unchristian>은 내가 그간 헛다리를 짚은 듯이 느꼈던 복음주의권 비판이 제대로 이뤄진 책이었다. 이 책의 내용은 곧 교계에서 계속해서 들을 듯 하니 장황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몇 부분만 인용할까 한다.
“외부인들은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가장 큰 반감을 보였다. ‘복음주의자’라는 표현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복음주의자’에 대해 유별날 정도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40쪽) “외부인들이 그리스도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에게 반감을 느끼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어떤 신학적 입장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잘난 척’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외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41쪽) “이번 조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봉사와 온정과 겸손과 용서와 인내와 친절과 화평과 기쁨과 선함과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61쪽)
아직 절반도 채 읽지 않은 이 책이 내겐, 송곳이 심장을 향해 깊이 박힌 듯 아프고 아프고 또 아프다. 이번에는 내가 할 변명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아내를 심하게 학대를 하면서도 성경공부를 인도하며 아내 사랑을 말하는 남편, 미혼모에게 남편 없음을 지적하며 매사에 충고를 하지만 그 충고대로 살지 못하는 교인들, 침례를 고집하다가 좋은 조건의 장로교회로 이직한 후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으로도 세례가 가능하다고 말을 바꾼 목사를 경험한 비기독교인들의 인터뷰 내용도 등장한다. 이는 비단 미국의 복음주의권이 이야기만이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라고 다른가.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복음주의권이라고 다른가. 그 안에 속해 있는 나의 신앙은 또 얼마나 구별되는가.
보수 기독교를 넘어
나 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다. 교회의 목사님은 항상 ‘국어대사전’만한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셨고, 그냥 자기 곁을 지나가는 학생들에게는 “넌 담임목사님에게 인사하는 법도 모르냐? 너 누구네집 아들이니?”라고 호통을 치곤 했다. 당시에도 흔하지 않던 외제차를 몰고 다녔고 자녀들은 모두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신학생이 되어 돌아왔다. 교회 안에서는 소그룹 성경공부를 하는 교구가 있으면 말씀을 함부로 해석할 위험이 있다고 그룹의 리더를 교회에서 쫓아냈고, 매년 열리는 부흥회에서는 강사들이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사랑하셔서 건축의 마음을 주셨다”며 헌금을 강요하기도 했다. 지교회뿐만이 아니었다. 이 나라의 기독는 조찬기도회에서 축복기도를 드릴만큼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옹호했고 그 울타리 안에서 많은 유익을 누리며 급성장해왔다.
그런 배경 때문에 나는 내가 ‘복음주의자’로 거듭난 것을 너무나 다행스럽게 여겼다. 복음을 개인구원의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분의 통치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기독교 세계관과, 로잔 언약으로 대변되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이른바 ‘양날개론’은 그간 나의 신앙의 갈증들을 말끔히 해소해 줄만큼 시원했었다. 프란시스 쉐퍼로 시작된 기독교 사상가들의 지성은 나의 지적 갈급함과 신앙적 회의, 의심을 긍정하고 진리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만큼 복음주의는 내게, 과거 부정적 환경 속에 편견으로 다가왔던 기독교를 구원시켰다. 그 때부터 나는 신학과 정치, 그리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고, 특히 마음이 맞는 이들과 신학공부도 하고 발제도 하면서 사회와 교계에 쓴소리와 비판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한국의 복음주의자는 다른가
하 지만 나는 내 비판 의식에 조금씩 회의감이 들고 있다. 그 본질적인 원인을 솔직히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바로 보게 되었다. 그것은 앞서 책에서도 말한 복음주의자들의 ‘잘난 척’이다. 내가 자랑하는 복음주의는 어린 시절 내가 경험한 보수적인 기독교에서 벗어나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 비판의식 자체에 안주하고 그것만을 즐기며 타인에게, 특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신학과 사상의 난해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잘난 척을 일삼는 집단으로 전락했다. 내가 경험하는 복음주의권의 모습은 그렇다. 이전에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 간신히 제본하여 읽던 책들도 이제는 번역의 질을 따질 정도로 완성도 있게 출판되는 축복을 누리지만, 또한 책이 출판되자마자 여기 저기서 회자되어 예리하고 창의적인 분석의 글들이 실시간으로 온라인 사이트 여기저기에 올라오지만, 사실상 그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아예 그 이야기 자체를 알아들을 수 있을만한 비그리스도인은 별로 없다. 나의 신앙에 관심을 가졌던 한 지인은 내가 이야기하는 복음주의나 기독교 세계관의 난해함에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나는 이제 스터디 모임을 하지 않는다. 기독교 서적도 잘 읽지 않는다. 난 요즘 어떤 기독교 사상가나 매체보다, 김용택 시인 같은 이의 책이 좋고 김장훈 같은 연예인의 기사가 좋다. ‘말’에 지나치게 경도된 복음주의자인 내가 부끄럽다. 기독 지성은 중요하지만 나부터가 비판의식과 사고에 함몰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향기’, ‘사랑’, ‘은혜’보다는 ‘날카로움’, ‘탁월함’, ‘잘남’, ‘해박함’에 경도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본다. 비그리스도인들이 보수 기독인들을 냉소적으로 대할 때, 같은 목소리로 그들을 비판하는 나를 그들은 어떻게 볼까. 보수 기독인과는 구별된 복음주의자로 칭찬할까. 의문이다. 그냥 행함보단 말이 많고 까칠하고 잘난 척하는 비슷한 류로 보지는 않을까. (끝)
*월간 <복음과상황> 10월호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