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부르면 젠더 논쟁이 될 소지가 있겠지만 '아니마와 아니무스'로 부르건, '음과 양'으로 부르건 간에 일단은 이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에서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시작해야겠다. 심리학을 공부하다보면 프로이트에서 융으로 넘어갔다가 라깡으로 옮겨가서는 머리에 쥐가 내리도록 지성적으로 파고들게 되는 지점이 있다. 물론 융에게 갔다가 라깡에게 갔다가,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정작 깊이는 없이 방황하는 시간도 길었지만.ㅠ 아무튼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물론 융심리학 배경의 이야기다.
지금도 나는 사회적인 영역에서 페미니즘에 공감하고 필요하면 그런 방향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풀어내고 싶어하지만, 언젠가부터 페북을 포함하여 사적 영역에서 남녀 대립각을 세우는 논쟁 등에는 조금 거리를 두게 되었다. 지금은 시간과 내공 모두 부족하여 섬세하게 풀어낼 자신이 없지만, 우리 각자의 사적인 영역에서 페미니즘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와는 별개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니만큼..)
융은 '온전성', 혹은 '개성화 과정'을 인간 성숙의 척도(궁극적 자기실현)로 보았는데 그 시기는 최소 중년 이후로 보았다. 중년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그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념이나 삶의 태도를 고집하면서 돌파할 수 없는 시점이 오는 것 같다. 남성성이 강한 남성, 여성성이 강한 여성들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데, 일례로 퀸카나 여신 같은 여성이 중년 이후에도 여신 같은 모습과 행동을 유지할 수 없게 되거나, 반대로 남성은 힘 빼면 시체인 싸나이 중의 싸나이 혹은 직장에서 추진력 하나로 밀어붙여 성공한 남자가 중년 이후에도 자신의 힘을 내세우거나 부하직원의 감정을 묵살하듯 관계를 지속하려 해도 잘 안 되는 경우가 그렇다. 더욱이 어느 지점에서인가 자신도 지치고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없음, 우울함, 그에 따른 긴장감마저 생긴다.
융은 오랜 임상 끝에, 남성에게도 무의식적 여성성이 존재하고 여성에게도 무의식적 남성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른바 아니무스와 아니마가 그것이다. 직장에서 화통하고 넉넉한 상사였던 남자가 집에서는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거나 사소한 일로 아내를 닥달하거나, 평소에 싹싹하고 온화한 여성이 부부싸움이 커지거나 논쟁 끝에 주변사람들이 불편해질 정도로 단호하고 냉정하게 말하기도 한다. 자신의 무의식적 속에 있던 남성성, 여성성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차이에 의해서 자신을 타자와 구분짓는다. 이런 차이가 구별, 차별화를 낳게 되고 그 구별은 대립을 만든다. 남자와 여자의 젠더와 섹스가 적절히 섞인 채로 각자의 스탠스에서 타자를 바라보고,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걸맞는 문화적인 옷을 입는다. 사실 이십대에는 이러한 대립구도와 구별짓기가 자연스럽고 오히려 권장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 하는 영역, 타자가 칭찬하고 잘해내길 원하는 영역에서 최대치를 끌어내고자 노력하는 과정, 훈련의 과정, 습득과 재능 발현의 과정이 분명히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남성성, 혹은 여성성을 대변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하지만 중년 이후부터는 대립으로 치닫는 것으로 충분치 못하다. 내 안의 그림자와도 균형을 이루어야 하겠지만 내 안의 다른 성, 무의식적 남성성, 여성성을 이해하고 친해지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가장 단적으로 연애를 하는 커플이나 부부가 처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이)성적 매력에 의해 관계가 유지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남녀는 서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이성, 즉 남자의 여성성과 여자의 남성성을 깊게 대면하는 시점이 온다. 이 시점에서 4명(남성, 남성의 여성성, 여성, 여성의 남성성)은 서로 간의 투사, 그에 따르는 대립과 반사를 멈추고 의식과 무의식적인 조화를 이루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고 융은 말한다)
중년 이후부터 이성은 서로 '경쟁'하거나 '대립'하거나, 혹은 서로를 '유혹'하는 타자로 보는 것에 한계에 직면하는 것 같다. 또는 강하게 '의존'적인 관계이거나 '주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서로 대립을 하는 것과 서로 유혹하는 것은 에너지의 준위상으로는 동일한 상태이다. 반대로 의존과 주도는 성적 불평등의 고착이다.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해야 한다. 대립각을 세우던 무의식적 이성과 의식적인 조화,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 쉬운 예로 이효리가 더이상 히로인이 아닌 '페밀리가 떴다'의 국민여동생 혹은 민박집 주인의 조화를 추구하는 면이나, 노주현, 이순재 같은 근엄하고 강인한 남성적인 배우들이 시트콤에 나와서 망가지는 모습으로 변신을 하는 것은 무의식의 완충, 혹은 조화로운 방향 추구 노력이기도 하다.
가부장제 속에서 페미니즘의 필요를 체감하고 그 이론의 메타담론적 특성을 경험하긴 했지만, 때때로 이 이론은 나의 중년의 온전성, 음양의 조화로움에 있어서 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종종 대립적 요소로 작용하는 느낌을 받았다. 내 안의 여성성을 이해하고 화해해야 하는데 젠더적 여성성에 대한 구조적 모순에 천착하게 된다거나 여성 안에 존재하는 남성성을 화해와 조화의 대상이 아닌 주적이나 가부장제의 현현으로 바라보는 상황들이 그러하다.
아무튼, 체화가 덜 되서 말이 투박하여 담백하게도 못 쓰고 있지만.. 요즘 그런 생각을 하고 산다. 시간이 지나면 좀더 다듬어서 제대로 말해보련다.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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