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최근에 본인의 교회 담임 목사님이 출판인으로 계신 부흥과개혁사에서 출판한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옥성호)"를 읽다가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서 목사님께 메일을 보냈다. 기쁘게도 목사님이 흔쾌히 메일 내용을 저자에게 전달해주셨고, 관련된 토론이 흥미롭게 진행되어 그 전문을 올린다. 함께 고민할 부분들이 있으므로 이 토론이 많은 도움이 되길 기대해본다.
1. 부족한 기독교에 대해 (김용주)백목사님! 저, 용주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최근에 부흥과개혁사에서 출판하신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 대해서 말씀드릴 부분이 있어서 메일 띄웁니다.
이 책을 저도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죄사함보다 내적치유를 추구하는 현대 기독교에 대한 질타와 긍정적 사고방식류의 사이비 기독교 출판물의 득세 속에 기독교의 교리가 심하게 훼손되었다는 주된 논지는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서 백목사님이 크게 공감하셨기 때문에 시기를 앞당겨서라도 옥성호씨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갓피플닷컴에서는 그간 기독교 안에 오염된 진리에 답답함을 느꼈던 많은 이들의 긍정적인 평들을 접할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저도 이러한 흐름에 많이 고무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메일을 쓰게 된 이유는, 옥성호씨의 문제제기가 유효하고 시의적절하며 무엇보다 교리의 회복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초반 3장까지의 내용으로 인해 다소 비판을 받게될 소지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서입니다.
간략하게 각 장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이렇습니다.
1장에서 옥성호씨는 심리학이 과학인가라는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고 점괘를 보는 것과 동일할 정도로 학문의 영역에 들어갈 만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합니다.
이 얘기는 과학은 학문영역이고 심리학은 비학문에 가깝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과학철학자들이 했다는 건데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에 대한 맹신을 통해서 과학이 아닌 학문들, 이를테면 신학, 심리학, 인문학과 같은 것들을 사이비 학문으로 규정하고 학문의 지위를 박탈시키려는 시도를 합니다.
결과만 말씀드리자면 과학의 잣대로 학문을 규정지으려던 시도는 과학 자체도 주관이 개입된 가설의 영역 안에서 학문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됩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그러한 과학사에 대한 접근이며 이로인해 학문의 영역에서는 과학이나 심리학이나 신학이나 이런 모든 학문들이 상호 연관성을 통해서 진리로 더 다가가는 정도 밖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사조가 유행하게 됩니다.
요점은 옥성호씨의 토대는 과학이 불변하는 확고한 객관적 진리위에 있는 학문이고 심리학은 사이비 과학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과학에 대한 너무 순진한 접근입니다. 또한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과학의 근본 가정은 진화론적 사고입니다. 물론 창조과학이 있긴 하지만 이는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주류 과학자들의 과학함의 토대는 진화론이며 진화론이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주류로 자리잡은 이유는 창조론이 총체적으로 진화론에 대체가능한 이론으로 최소한 아직까지는 자리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옥성호씨의 주장대로라면 과학도 과학이 아니며 주관적이고 반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증거들로만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주류 과학은 진화론이라는 유물론적인 철학을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판단으로 과학에 대해 옥성호씨가 이야기하는 부분은 너무 주관적인 설명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과학에 대한 이해때문에 심리학과 과학의 관계를 설명하는 첫단추에서 이미 비전문가적인 냄새가 물씬 납니다.
그리고 나서 2장에서는 기독교 심리학이 불가능함을 증명합니다. 주로 거론되는 인물은 데이빗 시멘스와 게리 콜린스라는 걸출한 기독교 심리학자인데 사실 심리학이라는 학문에 기독교적인 방법론이 있겠는가 하는 지적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기 독교세계관을 공부할 때에도 많이 지적된 부분인데 학문 앞에 기독교를 붙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종교의 영역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말이 아니라 학문을 연구함에 있어서 특수하게 기독교적인 방법론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하는 기독교 학자들 가운데 몇몇 이들이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타이틀로 심리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지만 심리학을 연구하는 기독교 학자들 전부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화란의 청교도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지적대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라는 구호 아래 학문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성실하고 객관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옥성호씨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라는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3장으로 넘어갑니다.
3장에서는 왜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반기독교적인가를 논증합니다. 그 이유로 옥성호씨는 심리학이 대충 프로이트 파와 융파로 갈리는데 이들의 배경을 보면 불신자에 마르크스적인 배경도 가지고 있어 다분히 반기독교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심리학의 문제는 다른 학문에도 동일하게 지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경제학도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시작되며 전혀 객관적이지도 않고 예측가능하지도 않은 학문입니다. 과학은 더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과학이라는 학문을 구성하고 있는 토대는 다분히 반기독교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신적존재를 부정하는 학문은 악마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심리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모더니즘을 거치면서 생성된 많은 학문들은 신적 존재의 부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반기독교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문제는 심리학이 반기독교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심리학을 함에 있어서 어떻게 기독교의 진리의 빛으로 그 학문을 회복시킬 수 있느냐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 들어간 옥성호씨의 논지 전개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과학, 정치, 경제학도 그렇고 심리학도 그렇고 현실 세계에서 그 학문적 결과들이 비교적 잘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옥성호씨는 마치 심리학을 주술이나 점괘를 보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지금도 많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환자들을 그들의 방법으로
치료하고 있으며 그 사례들은 실로 엄청납니다.
기독교인들이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하는 것을 반기독교적으로 생각하지 않듯이 정신병에 있어서 대다수의 의사들은 이러한 현상을 질병으로 인식하며 약물과 상담를 통해 병을 치료하게 됩니다.
제 어머니도 우울증세가 있었는데 실제로 정신과 의사가 우울증이라고 병으로 진단한 경우에는 심리적인 질병으로 인해 신체 장기들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신병도 물리적인 영역이며 이에 대한 치료 자체가 사이비 종교 정도에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옥성호씨가 회심후 복음의 정수라고 할 만한 교리들이 내적치유나 긍정적 사고방식과 같은 심리학적인 방법과 맞교환되는 현대 기독교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심 리학에 기댄 기독교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죄사함의 권세를 마치 내면의 치유와 평안처럼 이야기하는 설교자들과 기독교 학자들에 분노했을 것입니다. 저또한 복음을 그 어떤 학문으로 대체하려는 행위에 분노하며 문제 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복음이 심리학에 의해 훼손된 부분을 이야기하기 위해 초반에 심리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토대 위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에 다소 논리 전개가 위태롭게 느껴집니다. 또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 글을 쓴 느낌이 너무 강하게 뭍어납니다. 이 책의 백미는 세 개의 가면에 대한 설명이며 그 이후에 복음에 대한 회복의 내용인데 그 탁월한 내용이 초반의 불안한 토대로 인해 경감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저는 개정판에서 도입부(1~3장)이 대폭 수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런 훌륭한 문제제기를 하는 책이 그 토대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 책은 정말 시의적절하며 좋은 내용들이 많은 책입니다. 하지만, 아래 1,2,3의 토대는 수정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1. 과학에 대한 순진한 접근으로 인해 심리학이 과학이냐 아니냐를 문제삼은 부분
2. 심리학을 하는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 모두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특수한 방법을 따르고 있다는 가정
3. 심리학 자체가 다른 학문과는 달리 반기독교적이라서 의미가 없다는 주장
차라리 초반에 심리학이 마치 복음인양 받아들여지는 북미나 한국 기독교계의 문제를 지적하여 주의환기 시켰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심리학의 목적은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병의 치료에 있지 죄사함과 영생을 보장해주는 기독교의 본질과는 다른데 마치 이것을 동일시하는 이들이 있다는 게 문제라는 정도로 시작을 했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주저리주저리 글을 길게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여타 책들이었으면 이렇게 글을 쓰지 않았겠지만 이 책은 저도 애정이 많이 가서 결례를 무릅쓰고 목사님께 메일을 올립니다. 책에 대한 비평이기는 했지만 이 책을 더 잘 살리고 싶은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혹시 목사님의 또 다른 생각이 있으시면 회신 부탁드립니다. 주일에 뵙겠습니다.
용주 드림.
2. 용주 형제의 문의에 대한 (백금산)
용주 형제
이번 옥성호 형제의 부족한 기독교 심리학편에 대한 관심과
이 책에 대한 형제의 건설적인 비판과 제안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주장에 대해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주장과 일치하는 것인가?'라고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수많은 비성경적 사상들이 스며들어와있고
또한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잘못된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관습들이 난무하게 된 것은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들의 가르침과
기독교안에 유통되고 있는 책들의 가르침을 분별력없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옥성호 형제의 최근 저서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불건전한 성경해석과
불건전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심리치료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용주 형제가 또한 이러한 책을 읽고서
형제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과 동의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질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다고 한 것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진리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은 절대적일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독단적으로 나의 해석과 견해만이 100% 옳은 것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 해석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각자가 주관적으로 해석하면 된다는 극단적인 상대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잘못입니다. 성경은 이런 극단적 회의주의를 전혀 지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어적-명제적인 계시인 성경으로 인간과 의사소통을 하시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인간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에 대해 100% 완벽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어도 성경이 계시해주고 있는 부분에 관련해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상대적인 면을 인정하면서도 객관적인 지식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 라서 성경 해석을 할 때는 나 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해석도 참고해야 하고 특히 2000년 동안 교회의 역사가운데서 바른 신앙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모든 공교회의 공통된 성경해석을 중요한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용주 형제가 책을 읽다가 의문을 제기하고 또 더 정확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정당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이런 풍토는 앞으로 우리 성도들 중에서 더 많이 일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번 책에 대한 용주 형제의 질문에대해서는
이 책을 쓴 당사자인 옥성호 형제의 대답을 듣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해서
옥성호 형제에게 용주 형제가 보낸 메일을 전해주고 답변을 부탁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답변 내용이 와서 전해줍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궁금하거나 토론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옥성호 형제의 메일로 직접 보내어 의견을 교환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토론과 의견 교환이 단순히 사적인 것만이 아니므로
여러 다른 사람들이 함께 토론이 되어 지는 것을 보기를 원하면
부흥과개혁사 홈페이지 안의 부족한 기독교 토론방을 이용해도 좋습니다 .
그리고 이번 용주 형제의 질문과 성호 형제의 답변에 대해서도
그냥 개인적인 문제로 끝내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고
용주 형제의 질문 내용이나 성호 형제의 답변 내용이
다른 사람들도 알아 더 유익하다고 판단된다면
부흥과개혁사 홈페이 부족한 기독교 토론방에 올려놓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만일 용주 형제와 성호 형제 모두 동의한다면 토론방에 올려놓도록 하고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도 원치 않는다면 올려놓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용주 형제는
매주 마다 교회에서 만나기 때문에
내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직접 질문하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럼 주일날 보겠습니다.
백금산 목사.
3. 용주 형제 문의에 대한 답변입니다. (옥성호)
백 목사님:
전 에 제가 만난 임 집사도 그렇고 이번에 메일을 보낸 용주 형제도 그렇고… 목사님의 목회가 참으로 행복하시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변에 이런 분들이 많다니 참으로 부럽습니다. 저는 용주를 만난 적도 없지만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서 참으로 든든합니다.
목사님, 제가 부족한 기독교 심리학편을 쓰면서 예상한 반론은 심리학이 왜 과학이 아닌가? 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첫째, 심리학이 과학이 아니면 다른 모든 사회 과학도 과학이 아니지 않는가? 라는 것과 둘째, 나한테 효과가 있는데 왜 심리학을 부정하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용주 형제의 의견은 위의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째, 저는 사회 과학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 계시로서의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과학은 자연 과학입니다. 사회과학이라 부르는 영역들은 자연과학에서 요구되는 것과 같은 예측 가능한 결과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용주 형제가 메일에서 말한 " 과학의 근본 과정은 진화론이다" 라고 말한 부분은 무슨 의미인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가 저와 다른 것 같습니다. 저에게 진화론은 과학의 출발이 되기는 커녕 그냥 ' 코메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저는 이번 책에서 심리학 특히 심리학 중에서도 정신분석과 심리치료를 기독교와 대비해서 다루기 때문에 심리학이 과학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심리학이 자연 과학이냐 사회 과학이냐의 대비가 아닌 심리학이 물리적 영역이냐 영적인 영역이냐를 가지고 접근을 한 것입니다. 즉, 제가 이 책에서 말한 과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계시로서의 과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좀 더 공부를 해야하는 부분이 있으면 하고 필요하면 더 논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 , 참, 그리고 저는 프로이트와 융과 같은 사람이 주창자이기 때문에 심리학이 과학이 아니라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프로이트와 융이 말하는 심리학은 이미 과학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을 마치 과학처럼 생각해서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내적 치료를 하는데 이론적인 토대가 되는 프로이트 이후의 심리치료 방식을 교회가 성경에 비추어 분별했어야 한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었습니다.
용주 형제가 "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라는 명제를 가지고 저의 주장을 논박하는 부분은 핀트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중심에 있는 사상이 심리학은 그 ' 모든 진리'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니까요. 용주 형제가 얘기하는 인문 과학들이 각기 분야에서 학문적 결과들이 잘 적용된다는 부분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그 이유는 그 인문 과학들이 상당 부분 학문적 근거를 수학을 비롯한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계시로서의 진짜 과학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용주 형제가 제기한 부분이 진짜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 정신병도 물리적 영역이며…" 라고 말한 그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용주 형제의 주장처럼 정신병이 물리적 영역이라면 '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 라는 주장대로 교회가 정신병을 치료하는 수단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지요.
솔직히 저는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좀 더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제 친구 중에 우울증으로 자살한 친구가 네 명이나 되거든요. 제가 이 책을 쓰면서 좀 더 공부해야겠다고 느낀 부분이 우울증입니다. 이것이 과연 organic disease 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대한 부분말입니다. 사실 몇 주 전의 조승희가 살았더라도 만약 과거 우울증 치료 경력만 있다면 그는 무죄까지는 몰라도 상당히 가벼운 형벌로 나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울증이라는 병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사탄의 영향에 대한 영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또 동시에 풀러의 E.J. Carnell 같은 사람이 우울증 약의 과다 복용으로 죽었다는 것을 보면 어떤 물리적인 측면에서의 병의 요소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울증으로 인해 신체 장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병이 물리적인 영역이라는 용주 형제의 주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소화가 안 되고 여러 가지 몸에 이상이 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죄책감이 물리적인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둘째, 용주 형제의 주장 중 상당 부분은 심리학 또는 카운셀링을 통한 효과가 많은데 어떻게 그것을 전면 부정할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 생각은 그것이 효과가 크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효과가 없었다면 아예 부족한 기독교는 나오지도 않았겠지요, 마케팅도 마찬가지입니다. 효과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왜 문제냐는 것 아닙니까? 용주 형제는 제가 과학에 대해서 너무 순진하게 접근한다고 했는데 제 생각에 용주 형제는 심리학에 대해서 너무 순진하게 접근한다고 보입니다. 문제는 효과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성경에 비추어 맞는가 틀린가의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5 장에서 바울이 얘기한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에 대한 경고가 필요합니다. 심리학은 효과가 있기에 이처럼 빨리 퍼지는 것입니다.
용주 형제가 얘기한 다음 부분, "문제는 심리학이 반기독교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심리학을 함에 있어서 어떻게 기독교의 진리의 빛으로 그 학문을 회복시킬 수 있느냐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는 용주 형제가 이어서 쓴 다음 부분과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의 목적은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병의 치료에 있지 죄사함과 영생을 보장해주는 기독교의 본질과는 다른데 마치 이것을 동일시하는 이들이 있다는게 문제라는 정도로 시작을 했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즉, 죄사함은 말씀으로만 완성하지만 정신적 다른 부분에서 고통받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에서 심리학이라는 학문을 회복하자는 요지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
그런데 문제는…이게 안 된다는 것이지요 . 원천적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안 되는지가 제가 책에서 계속해서 주장한 것이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필연적으로 왜곡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서 다 주셨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는 결과가 되니까요.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용주 형제가 앞으로 좀 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한국 또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 상담자들의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러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고 또 하나 제가 책에서 비판한 분들 중 모두 자신이 병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을 돕는다고 얘기하지 죄사함과 영생 보장의 수단으로 심리학을 쓰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위의 용주 형제가 말하는 것 같이 주장을 했다면 아마 비판받은 사람들 모두 다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내가 언제 죄사함과 영생 문제를 다뤘다고 그래? 난 힘든 사람들 도왔을 뿐이야."라고요.
저는 진심으로 용주 형제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동지의 충고이기 때문이지요. 또 이 책에 좀 더 보완이 필요하다는 점도 동의하고요. 제가 느끼는 답답함이나 기독교의 교리의 회복에 대한 열정을 이 책을 읽고 용주 형제처럼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더 감사하고 든든한 것입니다. 아마 제가 여기서 용주 형제의 문제제기에 답하는 부분들 중에서도 제가 잘 이해를 못해서 곡해한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용주 형제가 이의를 제기한 면과 관련해서 제가 좀 더 공부해야 되는 부분에 도움이 되는 책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너무 어렵지 않은 것으로요. 그리고 앞으로 좀 더 깊은 논의가 서로 간에 있기를 바랍니다.
4. 옥성호 형제의 답변에 대해 (김용주)
옥성호 형제님 반갑습니다.
친절하게 제 의견에 대해 꼼꼼히 답변을 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전에도 백목사님께 메일 보낼 때 언급했듯이 이 책이 한국 교회에 좋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길 기원합니다. 보내주신 답변에 대해 간략하게 제 의견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용주 형제의 의견은 위의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첫째, 저는 사회 과학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 계시로서의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과학은 자연 과학입니다. 사회과학이라 부르는 영역들은 자연과학에서 요구되는 것과 같은 예측 가능한 결과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 따라서 용주 형제가 메일에서 말한 " 과학의 근본 과정은 진화론이다" 라고 말한 부분은 무슨 의미인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가 저와 다른 것 같습니다. 저에게 진화론은 과학의 출발이 되기는 커녕 그냥 ' 코메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 과학의 근본 가정이 진화론이라는 것은 제 의견은 아닙니다만 과학이라는 학문의 현재 상황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지난 글에서 길게 언급했듯이 미국이든 한국이든 창조론은 과학의 정론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스티븐 제이 굴드나 도킨스와 같은 진화론자들의 이론들이 과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과학이라는 학문의 가정은 진화론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계에서 널리 알려진 창조 과학이나 현재 유행하고 있는 지적설계운동은 과학이라는 학문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진화론이 코메디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은 옥성호 형제나 다른 기독인들의 사견에 가깝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창조론도 객관적인 잣대가 현재는 없습니다. 현대 과학에서 창조론에도 크게 3-4가지의 이론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젊은지구 창조론과 오랜지구 창조론, 유신론적 진화론, 그리고 지적설계운동 정도의 이론들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요점은 자연과학의 영역도 옥성호 형제가 사회 과학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측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관찰자의 이론에 따라 계측이나 이론의 전개도 차이가 생기며 과학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과학의 패러다임들이 바뀌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뉴튼의 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상수로 고유한 값 9.81m/s^2을 갖는다고 생각했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두 물체의 상대 인력에 따라 변화하는 값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은 개념들이 결국은 과학도 예측가능하지 않으므로 통계적인 방법을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결국에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구분짓기는 사실상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 저는 이번 책에서 심리학 특히 심리학 중에서도 정신분석과 심리치료를 기독교와 대비해서 다루기 때문에 심리학이 과학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심리학이 자연 과학이냐 사회 과학이냐의 대비가 아닌 심리학이 물리적 영역이냐 영적인 영역이냐를 가지고 접근을 한 것입니다. 즉, 제가 이 책에서 말한 과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계시로서의 과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좀 더 공부를 해야하는 부분이 있으면 하고 필요하면 더 논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 그리고 그 다음에 용주 형제가 제기한 부분이 진짜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 정신병도 물리적 영역이며…" 라고 말한 그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용주 형제의 주장처럼 정신병이 물리적 영역이라면 '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 라는 주장대로 교회가 정신병을 치료하는 수단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지요.
-> 이 부분은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은 옥성호 형제의 책은 심리학에 과하게 기댄 기독교를 질책하는 것이 핵심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옥성호 형제님의 답변을 듣고 보니 이 책은 심리학 자체에 대한 비판과 그러한 심리학을 기독교가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결국 옥성호 형제와 제가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정신'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 차이로 보입니다. 저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정신'이 물리적 영역이며 손상을 입을 시에 치료가 필요한 부분으로 보는 반면 옥성호 형제는 '정신'을 영적인 영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영역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심리학에 칼을 대는 것이지요. 저는 '정신'과 '영적 영역'은 동일하지 않으며 '정신의 영역'에서도 충분히 물리적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저도 전문지식이 없는 관계로 더 이상 논의를 발전시키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옥성호 형제가 이야기하는 최면술과 같은 것들은 현대 심리학에서는 타부시 하는 방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다만 심리학, 정신분석학 일체를 거부하려면 그 작업이 지금 성호 형제가 언급하는 사례들보다는 더 방대한 영역의 문제가 지적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세 개의 가면에서 가장 중추적인 비판 사례인 오스틴의 <긍정의 힘> 같은 책은 사실 심리학자들의 이론서가 아니기 때문에 심리학 비판서로서는 곁가지로 새어 나가고 있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려는 이야기의 요지는 옥성호 형제님의 논리를 따른다면 심리학을 철처하게 파헤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또한 기독교계에서 심리학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사례들도 보다 심도있게 살펴보아야 하므로 이 책의 비판 대상이 의도보다 과하게 넓어지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영역이 될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또한 초반에 사회 과학을 사이비 학문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사회과학 일반에 대한 반론에도 적절하게 대처할 근거가 필요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에 비추어 게리 콜린스나 오스틴의 사례는 상당히 비전문적인 대상들이며, 특히 오스틴의 경우에는 학문 영역에서는 별로 할 얘기가 없는 저자입니다.
-> 책에 대해 긍정할 부분들이 참 많은데 자꾸 비판적인 내용을 드러내게 되어 저도 면목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저의 관심과 지적을 애정과 동지의식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사와 과학철학, 창조 과학 관련된 책들만 소개해 드리고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의견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1. 창조와 진화에 대한 세가지 견해 | 원제 Three Views on Creation and Evolution
로버트 뉴먼, 존 마크 레이놀즈 (지은이), 박희주 (옮긴이) |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 현대 과학과 기독교의 논쟁 (2003) / 리차드 칼슨 / 살림
3. 현대의 과학철학 1,2 (1985, 1994) / 앨랜 차머스 / 서광사
4. 과학 철학 - 자연 과학에 대한 기독교적 조망 | 원제 Science & Its Limits: The Natural Sciences in Christian Perspective
델 라치 (지은이), 김영식, 최경학 (옮긴이) |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5. 과학 속 사상, 사상 속 과학 | 과학으로 생각한다
이상욱 , 홍성욱, 정대익, 이중원 | 출판사 동아시아
5. 용주 형제님, 옥 성호입니다. (옥성호)
용주 형제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형제가 생각하는 바를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을 답변을 보고 떠 오르는 세 가지에 대해서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연과학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생각이 서로 평행선을 긋고 있기 때문에 제가 형제님이 권해주신 책을 구해서 읽어보고 다시 기회가 되면 서로 연락하도록 하지요.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저도 창조론이 과학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론theory’ 아닙니까? 단지 진화론을 믿는 것 보다는 창조론을 믿는 것이 훨씬 더 쉬워보입니다. 그건 제가 기독교를 믿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그랬습니다.
한 때 저는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면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기 위해 창조와 진화에 관련된 책들을 꽤 사서 보았는데요. 물론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창조론을 믿고 싶었던 저의 고민을 간단히 얘기하면 두 단어로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지구와 공룡”
지구의 나이가 성경이 말하는대로 만년도 안 된다는 것이 증명이 가능한가 그리고 도대체 그 많던 공룡들을 다 어디로 간 것인가?
그 런 과정을 통해서 생각한 것은 물론 창조를 전혀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허구를 확신한다고 해서 그 허구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여겨지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갖이 생기는 것도 전혀 아니더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름대로의 공부를 통해서 진화론이 허구인 것은 (이론적으로도) 확신하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창조에 대한 믿음이 그런 공부를 통해서 생기는 것은 전혀 아니더군요.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제게는 지적 설득이 크리스챤이 되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리 스트로벨이 쓴 일련의 서적들에 대해서 회의를 갖고 있습니다. 신앙의 차원을 자꾸 인간의 지적 설득 수준으로 알게 모르게 끌어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정신에 대한 입장 차이 역시 토의로 합의될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형제는 mind, spirit and body의 3등분으로 인간을 보고 있지만 저는 body와 spirit의 두 가지로 보고 있는 입장이니까요. 물론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성경도 명확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성경에 등장하는 soul과 spirit을 해석하면서 soul을 mind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잘못된 해석이지요. 왜냐하면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soul과 mind가 서로 혼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들어 인간 속에도 분명 세 가지 영역이 있다고 주장을 하지요. 세상의 모든 것들이 space, time and matter로 구성되듯이 이 세상은 3가지로 다 분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이 명확이 알려주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토대로 할 때 영혼과 육체로 나누는 것이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정신의 영역을 다루는 정신 분석은 제게 있어서 영적인 분야를 다루는 것이지요. 한 가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을 3원화 시켜서 보는 경우 이론적으로 4차원의 영성으로 대표되는 그런 가르침들이 파고들 여지가 매우 높다는 사실입니다. 만민 중앙 교회의 이 재록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셨습니까? 가장 전형적인 3분론에 기초한 신학입니다. 매우…위험합니다. 정신 치료의 가치를 주장하는 분들 역시 예외 없이 3분론을 지지하고 있지요.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 무엇이 맞고 틀렸다를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용주 형제가 이 부분에서 정신과 영혼을 구별하는 한 부족한 기독교에서의 저의 주장에서 공감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요. 용주 형제님께서는 참으로 탁월한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다음 부분입니다.
세 개의 가면에서 가장 중추적인 비판 사례인 오스틴의 <긍정의 힘> 같은 책은 사실 심리학자들의 이론서가 아니기 때문에 심리학 비판서로서는 곁가지로 새어 나가고 있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제 가 하려는 이야기의 요지는 옥성호 형제님의 논리를 따른다면 심리학을 철처하게 파헤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또한 기독교계에서 심리학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사례들도 보다 심도있게 살펴보아야 하므로 이 책의 비판 대상이 의도보다 과하게 넓어지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영역이 될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또한 초반에 사회 과학을 사이비 학문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사회과학 일반에 대한 반론에도 적절하게 대처할 근거가 필요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에 비추어 게리 콜린스나 오스틴의 사례는 상당히 비전문적인 대상들이며, 특히 오스틴의 경우에는 학문 영역에서는 별로 할 얘기가 없는 저자입니다.
이 지적은 100% 타당한 지적입니다. 당연히 이런 지적이 나와야 합니다. 이 부분은 저도 생각했었던 부분입니다. 그런데 왜 알면서 굳이 심리학이라는 ‘전문적 영역’의 차원에서 볼 때 별 가치 없어 보이는 조엘을 건드리고 있는가에 대한 저의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 이유는 저는 이 책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다가와서 읽혀지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출중하게 무장이 되어서 쓰여진 책이라고 해도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이 책을 읽는 분들이 실질적으로 자신을 한번 되돌아 보면서 지금까지 너무도 당연히 여기던 사실들에 대해서 건강한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참으로 만족합니다. 유명한 사람의 말이라면 다 옳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눈을 성경으로 돌리고 싶어지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요.
두번째로, 물론 이 책이 이론적으로 철저히 무장된 반론들에 대해서 다 준비가 된 책은 전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가 심리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엘을 끌어들인 것은 전혀 아닙니다. 대중성을 위해서 전혀 주제와 관계 없는 조엘을 희생물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심리학이 대단히 복잡해 보이는 학문이지만 사실 파고 들어가면 그 학문은 ‘무의식’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 이론입니다. 간단히 말해 용주 형제가 언급한 최면 치료(이런 식의 치료는 지금도 교회 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혀 사라지고 있지 않아요…어떤 의미로 보면 요즘 유행하는 각종 명상 기도들도 최면과 관련이 있습니다.)를 비롯한 각종 방법들, 또 자기 사랑을 위한 각종 노력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구성된 무의식을 재정립하려는 것이고요.
불가능을 없다. 기도하는데로 다 이루어진다는 식의 4차원인지 5차원인지 하는 그런 식의 헛소리는 끝도 없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무의식’을 활용하려는 미래적인 가치와 관련이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이 책의 151페이지의 심리학이 쓴 세 개의 가면이라는 제목 밑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첨가한 것입니다.
“심리학은 첫째 가면인 자기 사랑을 통해 나의 무의식의 가치를 일깨우고 그 위에 두 번째 가면인 긍정적 사고를 통해 나의 무의식을 살찌우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가면인 성공의 법칙을 통해 내 속에 있는 무의식에게 결코 불가능이란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따라서 무의식이라는 영역과 관련해서 볼 때 조엘은 심리학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인 셈이지요. 비록 그는 자기가 떠드는 소리가 과거 여러 심리학자들이 주장한 무의식의 능력에 대한 확인에 불과하다는 것도 모르고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심리학의 가장 중심되는 핵심인 무의식의 세계가 보유한 무한한 가능성을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맞바꾸어 떠들고 있으니까요. 그가 이론적으로는 곁가지이만 영향력으로는 몸통입니다. 그는 전혀 깃털이 아닙니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져서 이 책의 개정판을 내게 된다면 제가 보다 깊이 파고 싶은 영역이 ‘무의식’에 대한 영역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섰을 때 ‘나는 죄 없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탄이 만들어 낸 기가 막힌 개념입니다. 무의식의 영향력을 강조할수록 인간의 책임은 사라지니까요.
마지막으로 제가 이 책을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 하나입니다. ‘성경이 무어라고 말하는지를 들어보자’입니다. 물론 백 목사님 말씀대로 성경에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누구의 말이 100% 맞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의 중요한 줄기에 해당하는 기본 교리들에 대한 해석은 오로지 하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심리학과 마케팅으로 대표되는 수 많은 가르침들은 그 기본에 대한 도전이자 부정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을 예쁘게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용주 형제님, 물론 만족한 답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시간 내서 좋은 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백 목사님 좀 쪼아서 교회 홈피 좀 빨리 만들라고 해 주세요. 언젠가 한국에서 만나서 커피나 한 잔 했으면 좋겠네요.
sungho
6. 김용주입니다 (김용주)
성호 형제님, 답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지적한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 주셨습니다.
저도 대부분의 답변에 공감합니다. 여기에 첨언을 하면 괜히 주변적으로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토론은 이것으로 접으려고 합니다.
성호 형제님과 글을 나누다 보니, 역시 한국 교회는 죄문제를 치유나 무의식, 성공, 적극적 사고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는 고질적인 문제가 무엇보다 큰 위기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조엘 오스틴 같은 저자들도 노만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 방식"이나 크리스탈 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의 아류 혹은 현대적 변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서울에 오시면 정말 커피 뿐 아니라 식사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용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