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아주 어릴 적 하나님이 계속 나를 지켜보며 보호하고 있다는 말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마치 매순간 119 구급차 내지는 엄마아빠가 출동대기조처럼 내 근처에 있다는 생각. 그 상상만으로도.
나이가 들고 사춘기 시절이 되고 하나님은 항상 내 근처에 있다지만 나에게는 환난과 고통이 찾아왔다. 입시때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는데 원하던 대학에 낙방하고, 몸은 하나님이 천사를 둘러서 바이러스의 침투조차 막을 수 있을진대 한달 넘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시기도 있었다. 뭐냐 이건..
나이 서른이 넘자 매순간 하나님이 내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다는 게 조금 씁쓸할 때가 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내가 하는 생각들, 말들, 그리고 지인이나 사랑하는 사람조차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내 맘속 동기들을 누군가 아무런 스크린없이 똑바로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미드에나 나올 법한 최첨단 수사대가 내 내밀한 범죄를 캐러다니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는 나이에 따라 달랐고 지금도 마냥 좋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 분 입장에서도 내가 피조물의 기대치에 한참 못미치는 일을 버젓이 하면서, 마치 윤리적으로 '청정인간'인냥 주변에 그럴싸한 말을 해댈 때면 분명 그분은 어깨를 들썩이며 이마를 찌푸릴 것이다. 내가 성하에게 무서운 눈으로 '한번만 더 그러면 아빠한테 혼나!'라고 아주 먼 공간에서 소리치고 계실지도 모른다.
시편의 저자는 군대를 데리고 전쟁을 하던 경험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는 전쟁 가운데 장수가 뛰어나다고 해서 혹은 병사들의 수가 많다고 해서 그 전쟁이 항시 넉넉히 이기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저자는 그 정확한 순간에 자신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명확히 경험했다. 그는 구원의 순간을, 마치 미운 짓하던 내 자식도 결정적 위기의 순간에 뛰어들어 구해주는 엄마의 급한 손길처럼 느꼈을 것이다.
일상의 순간순간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심한 애증이 교차한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자주 나는 '나라는 피조물'을 버리고 싶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창조-피조 관계 속에서 얽힌 혈연? 창연?은 정말 다급한 순간에 '미운 피조물 새끼'를 구원하는 그분의 손길을 경험하고 살아왔다. 시편의 기자는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 같고 나또한 그에 심하게 동의한다.
유다가 야곱을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가다 >>> 창 43:1-34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혼자 살아간 이들에게 가족이라는 존재는 떠올리기만 해도 뭉클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져다 준다. 가족은 실수나 잘못 속에서도 연을 쉽게 끊지 못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최초의 공동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가족 공동체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만 요셉의 가족처럼 헝클어지고 실타래가 꼬여 매듭이 굳게 잠겨버린 경우도 허다하다. 자식을 때리는 아버지, 잘못으로 형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형, 오빠, 부모를 미워하는 자녀...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인간 관계 속의 어려움은 유년 시절 혹은 성장기의 가족으로부터 기인한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러한 가정의 문제 속에서 자신의 억울함과 과오를 명확히 구분하고 이를 되내이며 심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해야만 변화가 된다는 사실이다.
요셉은 야곱의 집안의 최대 피해자였지만 그도 과오가 있는 철부지였고 타지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내면의 질서를 잘 찾아갔다. 이 만찬은 그러한 요셉에게, 그리고 그 형제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선물이며 축복이다. 요셉에게 기억될만한 슬픈 기억이 많이 있겠지만 가장 기쁜 하루는 이 날로 기억될 것이다.
내가 가족 안에서 기쁨을 누리던 날은 언제였던가. 그 날을 기쁨의 날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가족의 문제를 내 안에서 얼마나 들여다보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내 과오와 내 상처를 얼마나 직시하고 있는가. 혹 그 날이 오더라도 나는 내면을 정리하지 못해 그 기쁜 순간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유다의 말 >>> 창 44:18-34
본문에서 유다는 떠날 때 야곱에게 맹세한 대로 야곱이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큰 상심에 빠질 것을 요셉에게 설명하고 그 대신 자신이 남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대목에서 요셉은 야곱의 가정에 찾아든 가족애를 경험했을 것이다.
레아의 아들들과 라헬의 아들들에게 생긴 반목이 자신의 죽음(죽었다고 여겼을 것)으로 인해 더 이상 아버지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으려는 아들들의 노력으로 변화되었고 이제 유다는 라헬의 남은 아들인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생명과 바꿀 것을 제안한다.
어쩌면. 요셉은 자신에게 온 해로 인하여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던 야곱 가정 안의 우애와 화목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을런지도 모른다. 유다의 대속적 고백에 그의 내면에 있던 억울함이 완전히 녹아내렸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의 용서는 당위적인 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생긴 울림으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가정의 실패를 돌아보고 그것을 귀감으로 삼아 유다와 같이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자인가. 나를 희생하고 공동체를 살리려는 마음을 가진 자인가. 형제들 가운데 먼저 나서서 위기에 봉착한 어린 자들을 위해 내 목숨을 담보로 걸 수 있는 자인가. 혹은 나보다 더 사랑받고 인정받는 이들을 여전히 시샘하는 악한 가족원은 아닌가.
기근이 더욱 심해지다 >>> 창 47:13-26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무엇일까. 어두운 곳에 들어갔을 때 그 성품만으로도 주변을 밝게 밝히고 부패를 막는 그런 존재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품과 존재감은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감에 기인한 것이다.
본문에서 요셉은 이방 민족 애굽 땅에 임한 기근 가운데 기준 체제를 허물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구제할만한 제도를 마련한다. 가축을 팔고 남은 게 없자 땅과 몸을 팔려고 온 백성들에게 땅과 종자를 나눠주고 그 수확의 1/5만 상납케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활개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기독인이 모여있지 않은 척박한 이방의 땅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주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성품을 드러내는 존재다.
나는 종교 울타리에서 고급 기독교 문화를 즐기는 한심한 존재는 아닌가. 더 탁월한 교회, 그룹을 찾아다니며 그 안에 매몰되어 스스로가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 공동영역 안에 스치는 빛과 소금에 묻어가고 싶어하는 자는 아닌가.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다 >>> 창 48:1-22
흔히 성경을 읽는 중에 많이 하는 오류는 서사 속에서 이적적인 요소들, 그리고 원리들을 추출해내려는 시도이다. 본문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축복에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요셉의 의도와 다르게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야곱이 특별히 장자인 므낫세를 두고 에브라임을 더 축복한 일에 흥분한다.
이는 성경의 흐름을 통해서도 약속의 성취라는 대목에서 더 그럴듯하다. 북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에브라임 지파의 번성을 보며 우리는 퍼즐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이런 퍼즐맞추기를 즐기다 보면 진정 감동을 받아야 할 한 가족의 축복 장면을 놓치게 된다.
평생 가슴에 묻어둔 아들 요셉의 생존을 확인하고 그와 더불어 그의 자녀들을 보게된 야곱, 그 아비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나는 일찌기 자녀를 잃은 부모들을 몇 분 알고 있다. 그들은 자녀를 잃은 날부터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 자녀의 상실은 어느 것으로도 그 어느 다른 자녀로도 충족될 수 없는 결핍이자 절망이다.
이제 야곱은 자신의 말년에 잃었던 아들의 자녀들을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축복을 내린다. 야곱에게도 여러 기쁨이 있었겠지만 이 장면은 아마 야곱에게 있어 편하게 하나님의 품을 갈 수 있겠다는 행복에 젖은, 자신의 생에 있어 가장 기쁜 장면 중 하나였으리라. 오늘은 한 가장의 아름운 노년을 돌아보며 그 삶을 묵상해야겠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다 >>> 창 41:37-57
고난에는 끝이 있다. 요셉은 오랜 시련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두 아들을 얻었다. 첫째 아들 므낫세를 통해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일을 잊게 하셨다’고, 둘째 에브라임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고 찬양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시련은 그 이유는 여러가지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일시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종국에까지 그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그 시련의 끝을 가늠하는 게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요셉은 자신의 시련의 끝을 어디로 인식했을까. 보디발의 집에 들어갔을 때였을까. 아니면 죄수의 신분으로 옥에 갇혔다가 관원장의 꿈해몽을 해주었을 때였을까. 만일 그 시기를 마지막으로 보았다면 그 때에 일말의 의지조차 흔들렸다면 그는 연이은 시련에 완전히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하였고 그 자체로 그는 영혼의 안식을 누렸다. 그 안식을 통해 현세의 시련들을 묵묵히 감당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련의 끝이 자신이 인식하기 전에 찾아왔음을 깨닫게 되었으리라. 나는 시련의 끝에 연연하는 자인가, 혹은 하나님의 임재를 삶의 매순간 고대하는 자인가.
요셉의 형들이 애굽으로 가다 >>> 창 42:1-25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실제로 인간 관계에서 극한 시련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는 말이다. 복수는 복수일 뿐, 내가 당한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마음 속 뜨거운 분노는 이미 내가 분노를 키우는 게 아니라 분노가 내 영혼을 갉아먹는 상태로 변질된다.
용서가 최고의 복수가 되는 이유는 이미 시작되어 내 영혼을 무너뜨리고 있는 분노를 몰아낼 수 있음에 그 본질이 있다. 용서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하나님은 그 영혼에 그 만큼의 그릇을 허락하고 마음 가운데 자기 정체성, 인격, 영혼의 성숙 혹은 승격을 보장한다. 용서의 그릇만큼 성장하고 강해지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제들과 조우한다. 아마도 그는 그간 자신이 보낸 세월이 머리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자신의 자만심으로 비롯된 언행과 그로인해 몇십배 더 가혹하게 찾아온 시련에 억울함을 호소할 곳 없었던 이방생활을 돌이켰을 것이다.
요셉이 매일매일 형제들에게 복수의 칼을 갈지는 않았겠지만 형제와의 문제가 미결로 남은 것이 그의 평생의 짐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 짐은 용서를 위한 짐이었음을 우리는 이후 본문에서 확인한다.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이러한 관계의 상처와 왜곡이 있고 그로 인한 짐과 분노가 있다. 사실상 용서를 위한 '너무 늦음'은 없다. 분노를 분노로 상처준 자에게 그에 합당한 복수를 하는 길은 영원히 그 테두리 안에 자신을 가두는 가장 손쉬운 길이다. 지금 용서할 이를 용서하고 사죄할 이에게 사죄하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분노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가장 신속한 길임을 항상 인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내가 그러하다.
요셉의 형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가다 >>> 창 42:26-38
야곱은 레아를 얻은 후 또다시 라헬을 아내로 맞으면서 레아를 통해 많은 아들들을 얻지만 또다시 자신이 더 아끼던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을 특별히 총애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야곱은 자신의 호불호를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듯 하다.
야곱의 가정에서 레아와 라헬 사이의 보이지 않는 질투와 감정 다툼은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지며 결국 형제들이 모여서 요셉을 죽이고자 하는 극단적인 가정 파탄으로 귀결된다. 이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야곱의 가정은 내적인 문제가 큰 공동체였을 것이다.
본문에서 야곱은 비통해하며 형제들은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여자를 건드린 상처를 회복하고자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이 아버지가 애정하는 아들 베냐민을 구해오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이 모든 시발점이 야곱에게 있음에도 야곱은 그 사실에 대해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듯 하다. 오히려 그는 그 원망을 그 자식들에게 돌리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이 애정하는 아들의 상실을 레아의 형제들에게 돌리는 무책임함을 보인다. 더불어 그 질책은 레아의 형제들의 실제적 죄의 쓴뿌리로 인해 다시 그 형제들의 마음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꽃단장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가정사의 상처들은 풀리지 않은 채 겉으로만 멀쩡한 척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불안요소는 평소엔 티가 나지 않다가 자기 자녀를 대할 때, 혹은 명절에 고향에 가서 한번씩 폭발하곤 한다. 폭발까지는 아니지만 이따금 내면의 깊은 곳에 묻어둔 시궁창 같은 침전물들이 온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부모 형제 자녀 간에는 대체로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불식간에 참으로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것은 가정사의 상처가 내게 영향을 주었고 그 상처는 아직 진행중이라는 반증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전개함과 동일하게 야곱의 가정사를 요셉을 통해 회복하고자 하신다.
그들의 상처를 이용하여 그들을 치유하고자 계획하는 그 분의 탁월함은 구속사와 동일하게 하나님에게 의미가 있으며 항시 관심을 가졌던 부분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나의 가족사의 상처들을 돌아보고 그 문제를 해결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다 >>> 창 37:12-36
본문에서 르우벤은 빌하와의 통간 이후에 아버지가 아끼는 요셉을 살리려고 많은 애를 쓴다. 그에 대한 많은 기록은 없지만 이를 통해 장자권을 잃은 것에 낙심하고 더 나쁜 선택을 하지 않고 자신을 돌이켜 아버지 야곱에게 더 나은 아들이 되고자 했던 듯하다. 그의 돌이킴을 배우자. 그는 구속사의 중요한 시점에서 요셉을 살리는 역할을 했다.
유다와 다말 >>> 창 38:1-30
인간관계를 맺다보면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몇 차례나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악행의 구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단죄하고 그 연을 끊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혹은 명장이나 대가들은 자신의 이름에 오점을 남길 법한 사소한 흠이 보이면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한 물건을 미련없이 파기한다.
본문에서 메시아의 계보를 잇는 유다는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르우벤으로 인해 그 계보를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고 그의 아들들도 그를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다.
가끔 나는 왜 이런 쓰레기 같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묵묵히 수행하시는지 의아해하곤 했다. ...그의 방법은 100% 순결하다기 보다 피조물과 관계에서조차 100% 신의를 지키고 자신의 약속을 관계 속에서 펼쳐가시려는 절대적인 선함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그럴 수 있을까. 내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그리고 내가 수차례 충고하지만 더 깊은 악행의 실타래 속으로 빠져드는 인간 관계에서 묵묵히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이들에게 선함을 보일 수 있을까. 혹은, 하나님 앞에 나는 악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망스런 존재는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타인에게조차 고통을 주며 반복적인 악한 습관을 끊지 못하는 악한 존재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 >>> 창 39:1-6
보디발은 노예인 요셉을 지켜보면서 그를 주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는 요셉을 신뢰하게 되어서 노예신분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재산 관리 일체를 그에게 맡겼다.
중 요한 것은 나의 위기 관리 능력이나 나의 지식, 정보력과 같은 후천적인 노력보다, 최우선적으로 내가 하나님이 돌보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을 형성하는 근본이 될 것이다.
본문의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에 의해 훈련시키는 존재이므로 내가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해서 내 주변에 물질적인 부나 명예를 동반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오독이 될 수 있겠다.
...
하지만 어떤 의미로든 내가 속한 주변을 하나님의 임재로 채우는 역할은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할, 혹은 드러내야할 주된 정체성이 아닐까. 내 주변은 나로 인해 일상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는가. 그게 오늘의 묵상이자 적용점이 아닐런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다 >>> 창 39:7-23
유혹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요소는 반복적인 경우이다. 또한 이 유혹이 자만과 결합되면 시너지 효과를 크게 발휘한다. 요셉의 나이를 예상할 때 그 시기에 요셉에게 닥친 성적 유혹은 꽤 컸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자기 주인의 여자가 반복적으로 성적 매력을 과시할 것을 요청하는 부분에서 요셉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색옷을 입은 채 꿈얘기를 통해 자신의 특별함을 형들에게 과시하던 철없는 아이에서 이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에게 주어진 노예의 길 속에서도 그 고단한 일상에서도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는 청년이 되었다. 그는 마치 태초의 유혹인 유일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던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는 존재처럼 자신에게 제한된 단 하나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행위임을 명확하게 인식했다.(9절)
그의 선한 행동은 도리어 오해와 누명이라는 나쁜 결과로 돌아왔고 노예에서 죄수로 더 견디기 힘든 위치에 봉착한다. 요셉은 아버지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자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높은 자라고 은근 여기던 철부지였다. 그런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정 가운데 노예에서 오명을 얻은 죄수로 곤두박질치는 인생의 혼란기에도 묵묵히 그의 할 일을 해나간다.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을 구원할 애굽의 총리로 훈련시키는 것이었겠지만 요셉은 그 미래를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힘든 일상에서 최선을 다한다.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을 느끼는 순간에 나는 어떠했던가. 욥기를 떠올리며 하나님과 담판을 짓고 싶어하지는 않았던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보단 내 자존심에 상처받고 내 처지를 비관하며 그것에서 헤어나오기 급급하며 살아오진 않았던가. 고난과 고통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성글은 길을 바라보지 않고 다르싯으로 도피하는 요나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다 >>> 창 41:1-36
요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꿈해몽을 한 게 알려져 애굽의 최고권력자인 바로 앞까지 서게 된다. 요셉은 이번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바로의 마음에 근심을 더하던 꿈을 명쾌하게 해석해낸다.
하지만 요셉은 그에 더하여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라는 치정에 있어서의 구체적인 제안을 한다.
요셉은 노예의 신분으로 경호대장인 보디발의 신뢰를 얻어 그 집의 관리를 맡아서 행하였고 이후에 그는 애굽의 옥에 갇혀서도 옥의 제반사무를 보는 위치에서 공동체의 살림을 꾸리는 훈련을 해왔다. 그는 성실히 자신에게 주어진 공동체 안에서 그 재정과 행적적인 실무들을 성심껏 수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바로 앞에 서서도 하나님이 알려주신 꿈해몽을 풀어냄과 동시에 애굽에 처한 난관에 대한 즉각적인 대책을 바로에게 제시한다.
많은 기독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지고 비워지길 소원하고 그런 무념무상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성령이 부어져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으로 위대한 일을 행하는 것을 소원하곤 한다. 하지만 성경의 많은 인물들의 고단하고 무료한 일상 가운데에서 겪은 반복적 훈련들은 제거되거나 무시되기 일쑤다.
다윗과 요셉, 그리고 다른 많은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의 지지부진했던 하루하루와 그 안에서 성실히 훈련받고 매순간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했던 그들의 일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러한 일상으로 훈련된 그들의 재능은 정작 위기의 순간에 진정한 힘을 발휘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별볼일 없는 하루도 그런 의미에서 성실히 살아야 할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