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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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버스를 탔다. 안으로 들어가서 여성분 앞에 섰는데 가슴이 많이 패인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정말 의식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고, 엄밀히 말하면 그녀의 가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골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내 시선을 마주치고서 즉시 불쾌한 표정을 짓고는, 놀라서 그 다음 행동을 고민하는 듯 했다.

멍하게 있던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직감했고 - 엄밀히 말하자면 내 시선이 그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직감했고 - 뒷걸음치며 과하게 고개를 돌려서 다른 쪽을 바라봤다. 급한 뒷걸음질로 나는 뒤에 서 있던 남자와 부딫혔고 그는 '아이씨~'하며 짜증스런 소리를 내뱉었다. 난 뒷사람에게 목례로 사과하고 붉어진 얼굴과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난 시선이 그쪽에 머물러 있었지만 정말 보지 않았다. 아니 '의식하며' 본 게 아니었다. 사실 그 좁은 공간에서 그녀쪽을 보지 않으려면 과하게 고개를 획 돌리고 있어야 했었다. 생각을 하다보니 그렇게 오버해야 했나 싶기도 하고 내가 그녀 쪽 어디를 봤더라고 날 째려보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감도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상상하는 나의 한심한 모습을 떠올리니 이번엔 내가 도리어 화가 났다.

'뭐냐.. 옷은 왜 그렇게 파지게 입고, 사실 난 당신 옷에 관심도 없었는데 지금 날 싸이코 변태 아저씨 취급하는 거냐.' 머리속에서 별 생각이 다 났다. 흥미롭게도, 나는 오해를 받자마자 그녀를 미워했고 내 행동이 당사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에 대해 인식 속에서조차 침묵했다. 내 동기가 중요할 뿐 그녀가 받은 불쾌감, 위협감, 그런 것들은 사실상 사소한 문제처럼 느껴졌다.

거의 99%의 남성들이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을 때 '주관적인 모멸감'을 느끼면 성희롱이라는 대목에서 흥분한다. 논리적이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명수인 '남성들'의 잣대에서 '여자 사람'의 개별적 성향에 따라 절대적 기준없이 사과해야 하거나 안 해도 되는 상황, 처벌을 받거나 처벌받지 않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질 못하는 것이다. 해서 남성들은 '주관적 모멸감'에 대한 처벌에 대해 윤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교통법규 같은 규칙으로 인식한다. "IF 불쾌하다고 하면 THEN 당장 사과한다"... 의도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버스안 그녀가 불쾌해 했다는 점을 공감하지 못하는 나처럼.

또한 다수의 남자들은 성희롱 문제 해결 혹은 예방을 위해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대하면 된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한마디로 직장 동료가 아닌 단란주점에서 부르면 나올 법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더듬거나 추태를 부리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진일보한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슴이 파인 옷을 입은 남성의 가슴팍에 시선을 고정하고 멍때리고 앉았으면 동일한 문제가 됐을까.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같은 의미에서 남성 특유의 동료의식을 버리고 여성을 여성으로 대해야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닐까. 이는 성 불평등과는 다르다. 농담을 던지며 가볍게 몸을 두드리는 게 남성들에게 허락되고 그것이 우정의 한 표현이라고 여성에게도 그렇게 하고 그것의 의도를 존중해달라는 남성들을 우리는 가감없이 '변태'라고 부를 수 있다. 같은 파진 옷과 타이즈를 입고 있어도 그 몸매를 주시한다면, 남성과는 달리 여성은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런거다. 성적 평등과 성적 구별은 엄연히 다르며 그걸 놓친다면 당신은 억울해하면 분노하는 '성추행 변태 아저씨'가 될 것이다.

아내는 종종 나를 '게이'로 분류할 정도로 여성적이라고 평가하지만 나도 때때로 마초적 성향이나 가부장적 정서에 깊이 매몰되어 있음을 의식할 때가 많다. 버스 안에서의 사건이 이를테면 그렇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그녀였다면 어땠을까. 한껏 멋내려고 차려입고 버스에 앉았는데 어디서 거구의 아저씨가 앞으로 다가와 내 몸을 눈으로 훑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떤 게 있었을까. 모든 걸 떠나서 일단 불쾌하고 한편으로 무섭지 않았을까. 만일 왜 쳐다보냐고 소리질렀을 때 그 무시무시한 남자가 '내가 언제 쳐다봤냐'고 '난 그냥 멍때리고 있었다'고 도리어 화냈다면 어땠을까. 그를 이해하고 공감했을까. ...혹은 경찰에 신고했을까.
2011/10/05 01:03 2011/10/05 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