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TV를 보다가 <공부의 천재>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학업 성적이 부진한 학생들에게 합숙을 하면서 공부법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나름 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을 통해 듣게 되는 이야기와 가족들의 모습, 그리고 진행자들과 친밀해져가는 과정이 연예프로그램 치고는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모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을 익히고서 치른 모의고사의 점수 공개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더군요.
성적이 오른 학생들과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뒤로한 채 프로그램은 끝이 났습니다. 허나 나는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꼈습니다. 분명 1시간 내내 몰입해서 보았지만 유용했던 영상들과 음성들이 뒤섞여 제 머리 속을 맴돌았고 이내 저는 그 안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제가 보았던 그 날의 프로그램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나와서 공부법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그의 공부법은 간단명료했고 무엇보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도전 의식을 심어줄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환경을 통해서 학업에 대한 열심을 내었던 그의 긍정적 에너지에 큰 박수마져 쳐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학생에게서는 그러한 공부의 '목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인생의 목적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어쩌면 <공부의 천재>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도구로서의 공부에 대한 기술, 방법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기 때문에 그 천재 학생의 가치관, 인생의 목표, 삶의 열정 같은 것이 배제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러한 저의 불편한 마음은 공부의 기술만을 보여주려했던 방송 프로그램에게만 돌아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그래서 제가 그 학생으로 대변되는 가치관에 대한 비판이 그 학생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을 가정한다면 저는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습니다.
그 학생이 공부를 잘 하고 싶었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최고의 학생들과 겨루고 싶다"는 경쟁심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일류와 겨룰 수 있고 그 일류 집단에서 머리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자신을 채찍질했고 그 어렵던 방대한 분량의 공부도 넉넉히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타인과의 경쟁, 겨루기로서의 학업 목표에 대해 당황스러움을 갖게 됩니다. 또한 마음이 크게 불편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된 공부가, 경쟁으로서의 목적 자체가, 진정한 학문의 대가가 되었을 때에는 자연히 더 근본적인 방향으로 전이될 확률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고지를 향한 걸음으로서의 학업은 우리 모두가 지양해야 할 대상은 아닌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공부를 잘하고 정보를 많이 익히고, 학문의 대가의 반열에 오르더라도 그의 인생은 허무할 수 있으며, 때로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일에, 타인을 파괴하고 이웃을 삶의 영역에서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배움이 인간성을 구원할 것이라던 계몽주의적 근대성은 커다란 2개의 전쟁으로 인해 그 명맥을 이을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하였음을 기억합니다.
물론 공부법은 중요합니다. 운동을 할 때에도 정확한 이론에 근거한 자세, 방법, 훈련의 기간을 숙지하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진전이 없는 것처럼 학업에도 효율이 높은 방법과 TIP들이 있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원대하고 희생적인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하더라도 개별 학문에 있어 정확한 정보의 이해와 뛰어난 실력이 없으면 그 목표에 합당한 삶을 사는 데에 장애요소가 될 것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적인 접근으로만 끝나는, 그리고 나아가 그 방법을 통해 이루려는 목적이 고지론인, 일류 그룹에서의 경쟁 그 자체라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스티븐 코비는 그의 강연에서 히틀러와 간디의 유일한 차이는 그의 윤리관이자 가치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는 인간과 동물을, 나아가 존경과 비판의 대상을 구분짓는 가장 근본적인 잣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혹자는 순서가 뒤바뀌었을 뿐 일단 고지를 점령해야 더 큰 이야기, 즉 거대담론, 메타담론, 세계관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러한 생각 때문에 히틀러와 간디의 차이가 생겨났다고 믿습니다.
<공부의 천재>를 보면서 갑자기 "공부해서 남주자"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이 최고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일류이든 이류이든 상관없이, 가장 효율적이든 도리어 불편함을 감수해야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인생이 <공부의 천재>이자 <인생의 천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씁쓸한 마음이 털어지지 않는 저녁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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