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8)
- 신앙과 삶, 그 갈증에 대하여
신앙과 삶
내게 기독교는 말과 글의 종교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나는 목사님의 설교와 주기적으로 읽는 성경에 매우 익숙하다. 내가 회심을 하게 된 계기 중 하나도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를 읽으면서였다. 나는 그가 말하는 하나님에 압도되어 무릎을 꿇고 남은 부분들을 읽기도 했었다. 사실 교회를 나가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목사님의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서임을 부인할 수 없다. 목사님의 설교가 좋으면 주일 하루가 뿌듯하고 가슴이 뭉클하지만, 설교가 성경을 벗어나거나 빈틈이 보인다 싶으면 마음이 무겁고 하루가 심란하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기독교는 내 머리 속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영적인 종교다. 물론 이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하지만 내가 껄끄럽게 느끼는 나의 종교성은 한국 기독교의 그것과 흡사하다.
한동안 나는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일까 고민했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신앙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었고 설교도 많이 들었다. 사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는데 지식, 지각의 영역이 신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반드시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신앙과 삶, 즉 신앙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대충 설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전히 갈증이 난다. 왜일까.
논쟁 속 사람들, 공동체 속 사람들
글을 쓰다 보면, 특히 반론이나 논쟁 글을 쓰다 보면 반대 의견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흥분하여 망발을 하거나,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자신의 말을 반복하곤 한다. 난 그런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면 비판의 대상이 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된 논리임을 각인시키려고 노력했다. 때로는 그런 노력들이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때론 평행선을 달리기도 했다. 몇몇의 심한 경우에는 권위를 내세워 협박을 하기도 했고, 때론 비열한 방법으로 대응을 해대기도 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교양이 없는 건지, 사람들이 보수적이라서 그런 건지. 어쨌거나 나는 감정이 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글쓰기에 충실 하려고 노력했고 그 이상은 내 영역이 아니겠거니 했다.
글뿐이겠는가. 여러 종류의 공동체에 속해있다 보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교회에서는 어떤가. 처음에는 상냥하게 웃음으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면서 왕래를 하며 친절을 베풀다가도 진보, 보수와 같은 신앙의 색깔이나 성격, 정서적인 이유로 패가 갈리기도 한다. 한 번 벌어진 서먹함은 이내 깊게 골을 만들고 어느덧 ‘우리들’에서 ‘그들과 우리’로 지칭하는 단어들이 바뀐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주중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야 하는 직장인들 입장에서 그들의 ‘인간 관계’는 회사의 입사, 퇴사의 주된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학생 때는 몰랐는데 회사에 들어오니 별별 정말 희한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흔히 하는 말이다. 회의를 하면 엄한 말을 내뱉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참아내지 못해 비위를 건드리는 사람들도 있다. 아랫사람을 교묘한 방식으로 괴롭히는 상사도 있고 윗사람에게 잔머리를 굴려가며 뒤통수를 치는 조수들도 있다. 가족은 또 어떤가. 가장 소중하게 다뤄져야 할 구성원들 서로가 진저리를 치며 속속들이 알고 있는 서로의 약한 부분을 비난하거나 원망하기가 더 쉽다. 그래서 가족은 ‘웬수’라고 했던가.
스탠다드, 예절, 에티켓
나는 사람들의 행동에 어떤 표준(Standard) 같은 것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 예절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에티켓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흔히들 말하듯 전화 예절, 화장실 예절, 지하철 예절처럼 인간 예절 혹은 대인관계의 예절 같은 것이 표준처럼 작동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겐 너무 명확해 보이는 선악의 문제가 세세한 일상과 인간 관계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표준을 제시하고 숙지시킬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다소 오만한 생각 말이다.
한때 과학철학을 공부하다가 흥미롭게 읽은 글 중에 빈학파(Vienna Circle)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라는 책을 읽고 학문의 영역에서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운다. 그래서 학문의 구획을 정함에 있어서 논리적, 과학적이지 않은 명제들을 제외시키고 검증된 진리들로만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우리가 주지하듯이 결국 그들은 이러한 구획의 문제(Demarcation Problem)을 명쾌히 해결하지 못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도 자신의 가설을 수정하였는데, 그는 말년에 언어도 구체적인 맥락에서 쓰여질 때 의미가 있고, 마치 게임처럼 상황과 규칙에 지배를 받는다는 이른바 ‘언어게임 이론’을 전개하였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을 통해 인간 행동에 대한 어떤 표준이 있다는, 혹은 있어야 한다는 나의 이상적인 생각-사람들의 행동에서 바른 것과 그른 것을 쉽게 골라내려 했던 생각-을 버렸다.
기독교의 본질은…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내게 있어서 기독교는 말과 글의 종교다. 나는 말과 글에 의해 종교성을 학습했고 그러한 말과 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단하곤 했다. 때때로 나는 주변 사람들의 과한 말과 행동을 불쾌하게 여겼고 그들을 성경의 틀, 혹은 내가 가진 가치관의 틀에 맞춰서 변화시키고 싶어했다. 그렇다고 내가 나의 소신과 종교적 잣대에 걸맞게 산 것도 아니었다. 난 몸을 사리고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대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나의 기준대로 잘 살아온 것 같진 않다. 그런데도 나는 이러한 이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 자체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사람은 모두 죄를 짓고 살아가고 화를 잘 내고, 상처를 받으면 왜곡된다. 부모와 환경에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또한 쉽지 않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특수성을 외면하고 어떤 잣대에 의해 사람들을 규정하려 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조금씩 발견해간다. 그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고 회복하기 힘든 상처들이 있다. 내가 쉽게 재단하고 싶은 타인의 모습 속엔 그런 나약함과 상처, 그리고 왜곡되었지만 자신에겐 익숙한 습관들이 숨겨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기대에 합당한 모범적 인간들을 양성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모나고 부족한 사람들이 타인의 죄를 용서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일이 매일 일어나는 천국의 현현(顯現)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러한 고백이 토론과 논쟁 등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려 진리로 다가가려는 열망의 의미 없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진리와 지성의 추구는 합당하지만 기독교는 그것만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특별히 나는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있음을 고백하고 싶은 것이다.
살다 보면, 마음 속으로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생긴다. 또한 반대로 절대 용서받을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되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은 머리 속에서만 굴러다니는 망상이 아니라 살면서 겪게 되는 관계의 발자취이자 쓰디쓴 결과들이다. 내게 있어 기독교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 그들의 상처와 한계, 그리고 환경들을 깊이 공감하며 그들과 동행하는 일이리란 생각이 든다. 또한 나와 다른 부분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나에게 행한 악행들을 용서하며 나또한 나의 부족한 행동들을 매순간 고백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리라. (끝)
**월간 복음과상황 12월호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