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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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좀더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옥집사님의 3부작은 심리학과 마케팅, 그리고 엔터테인먼트로 대변되는 것들에 기독교의 본질이 많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케팅은 가치중립적인 방법이라는 느낌을 어느 정도는 받을 수 있으나 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마케팅적 요소는 분명 그 자체만으로도 악하게 치부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전 저작에서 심리학은 기독교에 강한 영향력을 보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심리학 자체가 학문의 범주에 속할 수 없을 정도로 사이비 과학에 가깝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특히 소비자중심주의로 대변되는 현대 교회의 흐름에 대한 강한 비판과 문제 의식을 가지고 시작된 본 연작들은 과거 청교도 신앙과 칼빈주의로 대변되는 신앙의 성향으로 교회를 회복해야 할 것이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이에대해 저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지적했고, 또한 반면 제 개인적으로는 이 두 책에 대한 긍정적 요소들에 대해 많이 동의하고 있다는 것도 이야기드린 바 있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소비자중심주의, 인간적인 방법, 현대 사상과 같은 류의 문제들에 있어서 옥집사님이 기독교와 극단적 대립구도로 이 '묶음들'을 설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한 것들을 통칭하여 '문화', 혹은 '세상'이라고 정의한다면 결국 이 문제는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기본 전제의 문제로 환원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러한 '기독교와 세상의 문제'는 리차드 니버의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에서 한 다섯 가지의 범주로 그 입장을 구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니버는 기독교와 문화,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를 1. 대립 2. 역설 3. 조화 4. 종합 5. 변혁 모델로 그 범주를 나눈 후 변혁 모델로서의 기독교와 세상의 관계를 나머지 4개의 모델에 비해 가장 설득력 있는 모델로 소개하였습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와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신칼빈주의자들과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를테면 헤르만 도예빌트와 알버트 월터스가 여기에 속합니다)에게 이 모델은 기독교 안에서 아주 유효한 모델임을 입증하였고 또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이 모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기독교는 문화를 적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변혁시킬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적할 것은 다른 대립 모델이나 종합 모델과 같은 것들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문화와 기독교의 관계 설정에 있어 개혁 모델이 가장 효과적이며 타당해 보인다는 것이지요.

옥집사님의 글을 차근차근 읽어보면 지속적으로 언급했듯이 각론적인 내용들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100% 지지를 나타낼 만큼 속이 후련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특히 지난 번 저작에서 조엘 오스틴의 사례라거나 이번 책에서 새들백교회, 윌로우크릭 교회의 사례들을 분석한 것은 참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사례들을 비판하는 틀로 작용하는 보다 근본적인 잣대, 즉 세계관에 있어서 옥집사님은 심리학,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현대 사상, 그리고 인간 중심적인 마케팅적 요소, 이후에 쓰게 될 엔터테인먼트와 같은 문화적 요소들을 기독교와 대립구도로 끌고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에 어떤 순수하지 못한 요소들이 섞이는 것 자체를 불편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복음은 그 당대의 문화와 소통했고 그 안에서 마치 밀가루에 섞인 누룩처럼 어떤 변혁적 요소로 작용해 왔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도 복음의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전달하는데에만 그 사역을 제한한 것이 아니라 아픈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시며 그들의 필요에 민감히 반응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역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한 단순한 '떡밥' 같은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보이기 위함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도래하는 그 분의 나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의 나라인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피조물들이 온전히 회복되어 그 피조물들을 온전한 방법으로 누리는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옥집사님이 '물든'이란 표현을 쓴 것에 크게 동의했습니다. 복음과 세상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 그 복음과 세상의 위치가 뒤바뀐 것이 현대 기독교의 비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적 요소가 교회에 들어오면서 복음의 본질을 마치 세상적인 것으로 채우는 것 자체에 대한 것이 '...에 물든"이란 표현으로 대변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케팅이나 현대 사상, 심리학 자체는 기독교에 반하는 요소들이 있지만 또한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어느 정도 효과적인, 그리고 변혁의 필요성이 있는 요소임을 전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마케팅적 요소자체를 뿌리 뽑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암송대회를 해서 상품을 주는 행위, 새벽기도회에서 성도들의 필요들이 적힌 기도제목을 받아서 그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행위, 예배에 현대적인 기술이나 성도들이 보다 예배에 활력을 받을 수 있는 요소들을 적용하는 행위, 상담이나 심리학적 방법들을 가지고 성도들을 돕는 행위는 제 생각으로 그 자체가 악하다거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에 복음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가려지며 그것들로 인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경의 권위, 구원의 유일성, 성령의 사역이 불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복음이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복음을 물들이는 것이 현대 교회의 비극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이유로 옥집사님의 책에 큰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완전히 동의하기에 옥집사님의 책은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몇몇 요소들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각론들을 감싸고 있는 전제들에 있어 때로는 치밀해보이지 않으며 때로는 제 신앙과 배치되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합니다. 혹은 제가 독해력 부족으로 혹은 책을 세심하게 읽지 않아 생기는 편견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옥집사님 같은 분들이 한국교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또한 제 생각에 대해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봐주시고 문제가 되는 부분들은 때로는 혹독하게 비평해주셔도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저나 옥집사님의 견해들은 보완 되며, 복음은 더 순수해지고 빛을 발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샬롬.
2007/11/27 18:36 2007/11/2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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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옥 집사님이 본서에서 언급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과도한 단순화입니다. 본서에서 옥 집사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를 반기독교적인 사상으로 다원주의적인 사고로 나아가게 만드는 주범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이제 절대 진리는 없고 모두가 상대적인 관점으로만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게 되어 어떤 문제의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잣대를 잃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절대 진리, 즉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믿는 것이므로 기독교와 포스트모더니즘은 궁극적으로 양립할 수 없고 그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반기독교적이자 사탄적인 사상으로 둔갑합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면 그 입장이 근본주의적인 성향으로 치닫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기독교출판을 전제로 하였다 하더라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의 폭이 상당히 좁게 느껴지며 이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연구와 설명이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면서 관련된 사상가나 문헌이 거의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러한 생각을 굳히게 만드는 요소가 됩니다.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할 때 언급되는 대표적인 학자들 이를테면, 니체와 하이데거로 비롯되어 리오타르와 데리다, 푸코와 같은 이들의 관점에 대한 문제 의식이 없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배경이 되는 프랑스 사상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된 구조주의 이후의 후기구조주의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리쾨르 같은 학자들의 간략한 이해가 동반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성중심주의, 형이상학의 극복과 같은 주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전/후기 사상들도 어느 정도는 섭렵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런 많은 사상가들과 학문적 배경들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설명드리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를 쓸 때 이미 그 사상적 복잡함 속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히 영화 몇 편과 근본주의적인 신앙 서적에서처럼 단순하게 접근하기에는 그 깊이와 넓이면에서 상당한 격차가 존재합니다. 또한 제 생각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신앙인도 충분히 고려할 만한 긍정적 요소들이 존재하며 그러한 이해없이 무작정 상대주의적이며 다원주의적이고 사탄적인 사상으로 치부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모더니즘의 세 축은 과학주의, 경험주의, 그리고 합리주의로 대변됩니다. 이러한 소위 계몽주의적인 접근이 모든 학문을 객관적인 잣대, 절대 진리의 추구, 역사 진보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며 이 사상의 중심인 서구인들의 자신감에 그 사상적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진보, 계몽, 이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의 상실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학문적 영역에서 사이비학문처럼 보이는 형이상학, 신학과 같은 것들을 학문의 구획에서 제거하려는 노력들이 오히려 수포로 돌아가고 학문, 특히 과학과 같은 객관적 진리 영역으로 치부되던 학문, 사상들에 있어서도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됩니다. 또한 서구중심적이었던 서양인들은 자문화 우월주의적인 생각으로 제3세계에 제국주의적인 침략과 교화(?)를 일삼던 것에 대해 반성하고 상대주의적인 관점에서 동양 문화와 사상을 흡수하게 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과 성찰, 완성 혹은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반기독교적인 요소는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서구중심적인 종교라는 이유에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절대 진리의 부정 역시 단순히 절대 신의 존재를 반대한다는 단순한 도식 보다는 그간에 이루어진 '구조'에 대한 성찰, 이성중심주의의 타파, 거대담론의 해체, 절대적 판단자로서의 이성의 한계 인식, '주체'의 죽음과 같은 배경 속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접근은 모더니즘과 계몽주의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타당하며 또한 기독교인들도 충분히 섭렵하고 이해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면에는 기독교가 지나치게 '모더니즘의 옷'을 걸치고 있다는 비판적 성찰에도 기인합니다.

물론 상대주의적인 관점, 서양 종교이자 절대 종교로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 진리에 대한 다원주의적인 시각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 속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할 요소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항상 어떠한 문제나 사상, 사물의 존재나 발생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현상만으로 단정짓고 그것을 자신의, 이를테면 우리에게는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로 난도질하는 접근에 대해 경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구별 자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며 결국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와 기독교에 대해 설명한 후 근대 후기 사회에서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접근을 보여 줍니다. 제 생각에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접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근본에는 세상과 세상의 사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지적하고 싶은 글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옥 집사님의 글에서는 복음과 비교하자면 현대 사상과 문화, 그리고 현대적인 방식들이 얼마나 가치가 없는가에 대한 방향으로 글이 전개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가 당대 사상이나 문화, 세속적 방식과 대립적인 요소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전개 방향이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이고 개혁주의에 반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우려감이 듭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글에서 설명을 좀더 하겠습니다.
2007/11/27 18:34 2007/11/27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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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부 중 헨리 나우웬이란 사람의 <상처입은 치유자>란 책이 있다.
그 책의 요지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상처를 입은 사람만이 타인의 상처를 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상처를 싸매면서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고 다가가서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서에서 저자는 자신에게 있었던 고통스러웠던 과거들에 대해 적나라한 서술을 아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손자이자 자폐증세를 보이는 샘에게 그의 인생에 도움을 주고자
꺼낸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학습장애를 딛고 상담가로의 인생을 시작할 때 즈음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에 이르게 된다.
그 가운데 이혼, 그리고 우울증에 시달렸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그의 소중한 딸이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가 자폐아 판정을 받게된다.
이에 저자는 손자의 상황에 마음 아파하다가 이 아이에게 편지를 쓸 결심을 한다.
이 아이에게 정상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의 의미와 충고 그리고 격려들이 담긴 편지를
4년에 걸쳐 쓰게 된다. 본서는 그런 책이다.
상담 사례들이 등장하고 자전적인 이야기가 쓰여졌지만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 사람에게 애정어린 격려와 충고의 글로 가득하다.

때론 눈시울이 붉어지고 때론 나에게 상황을 대입시켰을 때
예리한 칼처럼 마음을 도려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미치 엘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이후 참 훈훈한 책을 만났다. 감사하다.
2007/11/15 18:36 2007/11/1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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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해 샬롬을 선포하는 것
: 김두식, '평화의 얼굴' 서평



군대 이야기

 돌이켜 보면 20대 초반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군대 문제였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남자 어른들은 6.25 전쟁 당시 피난 생활의 기억들을 간간이 떠올리곤 하셨고 그에 이어 이어지는 것은 언제나 군대 이야기였다. 구타도 심했고 근무 여건도 좋지 않은데다가 기간도 길었던 당시의 군대 생활이 그분들에게는 힘든 시기이기도 했겠지만 추억거리, 혹은 자랑거리들이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대체로 누가 더 힘든 군생활을 했느냐가 대화의 중심이었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담을 듣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또한 그분들 이야기 속에서의 군대는 소년이 남자로 거듭나는 통과의례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따라서 누구든지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입대를 꺼려하는 조짐이 보이면 ‘겁쟁이’, ‘계집애’, ‘엄마 치맛자락이나 잡고 다니는 애송이’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나이야 스물이 되었지만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그 시절의 나는 군대라는 ‘진정한 남자들의 세계’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다가오곤 했다.

 

 시간이 흘러 군대라는 ‘숙제’를 마치고 돌아온 캠퍼스에서 친척들 모임에서 큰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에게 들었던 영웅담을 다시금 들을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 복학생들의 대화는 30분이 지나면 대부분 군대 이야기로 모아졌고 거기에서는 또 여러 명의 영웅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물론 반대로 피해자들의 하소연이 이어지기도 했다. 군대 생활을 통해 다친 몸으로 돌아온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 체육이나 기타 훈련, 혹은 근무 중에 다친 친구들 중에는 인대가 끊어졌던 경우가 가장 흔했고 팔이나 다리를 잘 못쓰거나 시신경을 다쳐서 무리한 운동을 못하게 된 경우도 더러 있었다. 공개되진 않았지만 통계에 의하면 한 해에 군대에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수는 1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나는 때때로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얻은 힘든 경험들은 무의식 중에 각인되어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박노자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의 남성들은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사회 생활, 직장 생활, 대인 관계에서의 권력적 요소를 습득하게 되고 그러한 조직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을 불편해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회사에서는 “그 친구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래!”, “군대 생활 편하게 해서 회사가 놀이터로 보여?”, “좀 굴러야 정신을 차리겠구먼!”과 같은 이야기들이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다루다
 최근에 김두식 교수는 한국백상출판문화상을 받은 <헌법의 풍경>이후로 3년 만에 신간 <평화의 얼굴>을 출간했다. 이 책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중심으로 다룬 것으로, 2002년에 기독매체 뉴스앤조이에서 출판한 <칼을 쳐서 보습을>을 전면 수정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 책을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대한 김두식 교수의 접근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에 나 또한 처음 ‘양심적 병역거부’, ‘집총거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평화를 사랑하거든. 그래도 군대는 가야지. 사실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냐?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 못하니까 자꾸 구실을 찾는 거겠지. 차라리 당당히 갔다 와서나 그런 이야기를 하시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너무 철이 없었는가. 사실 그랬다. 하지만 지금도 병역 문제와 관련된 모든 담론들은 이러한 무의식적 반감의 두꺼운 층에 막혀 전쟁이나 평화주의적 사고에 대한 논리적 논의 자체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병역거부의 대명사로 통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길거리에서 갑자기 접근해서 <파수대>라는 이상한 전단지를 나눠주고, 가정 집까지 찾아와서는 자꾸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기괴한 이들이며 그들이 취하는 집총거부는 동일하게 ‘기괴한 행동’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솜털이 보송보송했던 금쪽 같은 아들을 눈물 쏟으며 군대로 떠나 보냈던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들을 그 길에서 피신시킨 이회창 대선후보에게 등을 돌렸다. 아버지들은 사회조직의 권위적, 상명하복적 규율을 처음으로 전수받은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겁쟁이의 하소연 정도로 치부한다. 국민가수 유승준에게 환호했던 그의 팬들은 그가 입대하겠다던 말을 번복했다는 이유로 이제는 “스티브 유, 양키 고 홈!”이라며 비아냥거린다. 한국의 남학생들은 군가산점 때문에 공무원 시험에 불리하다고 하소연을 쓴 여대생의 인터넷 게시판 글에 ‘미친년’ 운운하며 흥분하여 몇 백 개의 댓글을 달고 있다. 이렇듯 군대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너, 군대 갔다 왔어, 안 갔다 왔어?’의 문제로 환원되며, 군대를 피하려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만큼은 다수의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의 심정적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김두식 교수는 1장에서 ‘나의 양심 재판 체험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경험을 서술한다. 자신이 만난 여호와 증인들이 집총거부로 군사재판을 받았던 이야기로 입을 뗀다. 책의 문체도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 형식으로 마치 친절한 상담자가 내 앞에서 차분하게 설명해주는 느낌이 든다. 김 교수가 만난 병역 거부자들은 운동가 정신으로 무장된 남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아직 세계관조차 정립되지 않은 듯한 여린 소년에 가까웠고 그가 여호와 증인이라는 종교적 배경에 의해 선택한 집총거부로 인해, 이후 자신의 남은 삶에 받게 된 사회적 처벌의 무거움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 교수가 만난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생길 법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다시금 그들을 향한 연민을 억누른다. ‘그럼 군복무를 수행한 나는 뭐 전쟁광인가. 나는 안 불쌍한가. 내가 허비한 2년의 힘들었던 시간들도 쉽지 않았어. 결국 군대 안 가려고 자신이 불행을 자초한거야.’ 자연히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연이어 양심적 병역겨부를 반대하는 이들은 ‘비양심적 병역이행자’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들의 양심적 병역거부 사례들을 이야기한다.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란 용어의 일괄적 사용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며 이에 대해서는 병역자체의 거부와 집총 거부를 나눌 것을 지적하며, 전자에 대해서는 대체 복무를 시키는 방법이 있고 후자에 대해서는 비전투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음도 설명한다. 여기에 또 다른 질문이 가세한다. 군사재판 때에도 자주 물어보았다고 하는 이 질문은 ‘그럼 만약 네 여동생을 누가 강간하고 죽이려 하면 어떡할래?’이다. 이쯤 되면 다시 독자의 내면은 원상 복귀되며 오히려 그들에 대한 반발심만 커진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이상(理想)이고 현실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다급하고 필요한 폭력이 있다는 생각이 다시금 우리를 괴롭힌다.

 

이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3장에서 존 하워드 요더의 글을 인용하여 그 질문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오히려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는 여호와 증인과 같은 이단들만의 문제라는 생각에 대해서도 과거 정통으로 분류되는 기독교 역사에서 드러난 사례들을 통해 주의를 환기시키며(4장), 무엇보다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평화주의자였고 전쟁을 반대했음을 지적한다(5장). 그렇다면 전쟁은 모두 나쁘기만 하며 정당한 전쟁은 없는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정당한 전쟁론’이라는 용어가 평화주의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정당한 전쟁’은 평화주의의 친구에 가까우며 오히려 문제는 정당한 전쟁을 가장한 ‘짝퉁’ 정당한 전쟁론에 있음을 보여준다(6장). 책의 후반은 우리 나라의 특수성에 기인한 문제들을 주로 다루는데 그 중 하나가 전쟁 중인 나라에서는 징집제도를 불가피하게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본서는 전쟁 중에 있었던 혹은 지금도 대치중인 다른 나라들의 사례들을 들어 반박하며(8장), 그런 상황에서도 전쟁을 거부했던 이들의 역사를 돌아본다(9장).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내에서 이뤄진 지독한 병역거부 탄압의 사례들을 소개하고(10장), 그에 대한 대안으로 대체복무제도를 언급한다(11장). 특히 11장에서는 대체복무제도의 현주소와 그 내용에 대해 소개하고 각 안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형평성에 맞게 제도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설명한다.

 


진정한 변화를 위한 온정적 글쓰기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해돌이의 모험’ 같은 반공 만화나 로보트 만화를 보고 자란 내게, 그리고 장난감 총을 들고 밖에 나가 아이들과 총 싸움을 했던 내게, 평화라는 단어는 피를 보고 나서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상급과 같은 것이었다. 남자다워지려고 배웠던 태권도는 자신과 이웃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대련이라는 방법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즐거움을 선사했고, 회심한 이후에도 교회 안에서 설교를 통해 구약의 전쟁들을 예화로 들으며 이스라엘 민족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면 속으로 크게 환호하곤 했다. 샬롬과 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기독교를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 20대 중반의 일이었고 기독매체를 통해 접했던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이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와 같은 책들의 내용을 통해 생각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한국의 싸나이’로서 내면의 중심에는 병역거부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주변에서 ‘너 자상하고 친절한 척 하지만 사실은 겁쟁이지? 전쟁 나면 도망이나 갈 녀석!’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이런 내면의 문제를 안고 있던 내게 김 교수의 책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군대라는 문제로 여전히 뒤틀려 있던 내 내면의 친절한 상담가가 되어 주었다. 책을 읽는 동안 속으로 가끔은 난감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는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공감한다는 태도와 말투로, 그리고 지루하리만치 방대한 자료와 사례들을 차분히 풀어내는 그의 설명에 이제는 나도 충분히 ‘설득’되었고 그 찜찜한 심기를 털어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던 많은 전쟁 사례들이 지금도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을 맴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책에서 김두식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시작된 당위적 전쟁들조차도 또 다시 많은 수의 피해자들을 만들어 냈고 그들의 피 흘린 복수가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을 이루어왔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칼을 뽑아 다른 사람에게 휘두르는 순간 평화는 깨어지고, 폭력은 도리어 폭력을 낳게 되는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수님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26:52)’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말한다. 내 가정, 내 나라, 내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전쟁과 피흘림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에 항거하여 반전 행동을 실천했던 많은 이들의 모습을 본다. 이 책은 그러한 이들이 묵묵히 수행했던 길, 즉 세상에 대해 샬롬을 선포하는 것, 전쟁에 나서는 것을 반대하는 부단한 실천만이 복수로 점철되어 온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다 준다.

 

 지식인들 혹은 글 쓰는 이들 가운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스타일은 급진적이고 도발적이지만 찬찬히 읽고 나면 알맹이가 없거나 진부한 경우가 있고, 반대로 차분하고 따뜻하여 다소 온건한 느낌을 문체로 썼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신선하고 개혁적이며 진보적인 경우가 있다. 사실 나는 전자의 글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후자의 글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왔다. 때론 몸을 사리는 것 같기도 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대개 끝을 보지 않아서였다. 김두식 교수의 글은 물론 후자에 속한다. 그의 모든 글에 대해서는 아니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군대’ 문제에 대해 이 책에서 보여준 그의 스타일을 나는 기꺼이 옹호하고 싶다. 그렇다. 그의 스타일이 옳다. (끝)
2007/08/11 23:55 2007/08/1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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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해 샬롬을 선포하는 것
(기독교사상 8월호, "이 책을 말한다_김두식 <평화의 얼굴>")

/김용주


군대 이야기
 돌이켜 보면 20대 초반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군대 문제였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남자 어른들은 6.25 전쟁 당시 피난 생활의 기억들을 간간이 떠올리곤 하셨고 그에 이어 이어지는 것은 언제나 군대 이야기였다. 구타도 심했고 근무 여건도 좋지 않은데다가 기간도 길었던 당시의 군대 생활이 그분들에게는 힘든 시기이기도 했겠지만 추억거리, 혹은 자랑거리들이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대체로 누가 더 힘든 군생활을 했느냐가 대화의 중심이었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담을 듣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또한 그분들 이야기 속에서의 군대는 소년이 남자로 거듭나는 통과의례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따라서 누구든지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입대를 꺼려하는 조짐이 보이면 ‘겁쟁이’, ‘계집애’, ‘엄마 치맛자락이나 잡고 다니는 애송이’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나이야 스물이 되었지만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그 시절의 나는 군대라는 ‘진정한 남자들의 세계’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다가오곤 했다.

 시간이 흘러 군대라는 ‘숙제’를 마치고 돌아온 캠퍼스에서 친척들 모임에서 큰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에게 들었던 영웅담을 다시금 들을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 복학생들의 대화는 30분이 지나면 대부분 군대 이야기로 모아졌고 거기에서는 또 여러 명의 영웅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물론 반대로 피해자들의 하소연이 이어지기도 했다. 군대 생활을 통해 다친 몸으로 돌아온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 체육이나 기타 훈련, 혹은 근무 중에 다친 친구들 중에는 인대가 끊어졌던 경우가 가장 흔했고 팔이나 다리를 잘 못쓰거나 시신경을 다쳐서 무리한 운동을 못하게 된 경우도 더러 있었다. 공개되진 않았지만 통계에 의하면 한 해에 군대에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수는 1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나는 때때로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얻은 힘든 경험들은 무의식 중에 각인되어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박노자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의 남성들은 군대라는 조직을 통해 사회 생활, 직장 생활, 대인 관계에서의 권력적 요소를 습득하게 되고 그러한 조직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을 불편해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회사에서는 “그 친구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래!”, “군대 생활 편하게 해서 회사가 놀이터로 보여?”, “좀 굴러야 정신을 차리겠구먼!”과 같은 이야기들이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다루다
 최근에 김두식 교수는 한국백상출판문화상을 받은 <헌법의 풍경>이후로 3년 만에 신간 <평화의 얼굴>을 출간했다. 이 책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중심으로 다룬 것으로, 2002년에 기독매체 뉴스앤조이에서 출판한 <칼을 쳐서 보습을>을 전면 수정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 책을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대한 김두식 교수의 접근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에 나 또한 처음 ‘양심적 병역거부’, ‘집총거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평화를 사랑하거든. 그래도 군대는 가야지. 사실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냐?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 못하니까 자꾸 구실을 찾는 거겠지. 차라리 당당히 갔다 와서나 그런 이야기를 하시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너무 철이 없었는가. 사실 그랬다. 하지만 지금도 병역 문제와 관련된 모든 담론들은 이러한 무의식적 반감의 두꺼운 층에 막혀 전쟁이나 평화주의적 사고에 대한 논리적 논의 자체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병역거부의 대명사로 통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길거리에서 갑자기 접근해서 <파수대>라는 이상한 전단지를 나눠주고, 가정 집까지 찾아와서는 자꾸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기괴한 이들이며 그들이 취하는 집총거부는 동일하게 ‘기괴한 행동’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솜털이 보송보송했던 금쪽 같은 아들을 눈물 쏟으며 군대로 떠나 보냈던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들을 그 길에서 피신시킨 이회창 대선후보에게 등을 돌렸다. 아버지들은 사회조직의 권위적, 상명하복적 규율을 처음으로 전수받은 군대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겁쟁이의 하소연 정도로 치부한다. 국민가수 유승준에게 환호했던 그의 팬들은 그가 입대하겠다던 말을 번복했다는 이유로 이제는 “스티브 유, 양키 고 홈!”이라며 비아냥거린다. 한국의 남학생들은 군가산점 때문에 공무원 시험에 불리하다고 하소연을 쓴 여대생의 인터넷 게시판 글에 ‘미친년’ 운운하며 흥분하여 몇 백 개의 댓글을 달고 있다. 이렇듯 군대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너, 군대 갔다 왔어, 안 갔다 왔어?’의 문제로 환원되며, 군대를 피하려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만큼은 다수의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의 심정적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김두식 교수는 1장에서 ‘나의 양심 재판 체험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경험을 서술한다. 자신이 만난 여호와 증인들이 집총거부로 군사재판을 받았던 이야기로 입을 뗀다. 책의 문체도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 형식으로 마치 친절한 상담자가 내 앞에서 차분하게 설명해주는 느낌이 든다. 김 교수가 만난 병역 거부자들은 운동가 정신으로 무장된 남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아직 세계관조차 정립되지 않은 듯한 여린 소년에 가까웠고 그가 여호와 증인이라는 종교적 배경에 의해 선택한 집총거부로 인해, 이후 자신의 남은 삶에 받게 된 사회적 처벌의 무거움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 교수가 만난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생길 법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다시금 그들을 향한 연민을 억누른다. ‘그럼 군복무를 수행한 나는 뭐 전쟁광인가. 나는 안 불쌍한가. 내가 허비한 2년의 힘들었던 시간들도 쉽지 않았어. 결국 군대 안 가려고 자신이 불행을 자초한거야.’ 자연히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연이어 양심적 병역겨부를 반대하는 이들은 ‘비양심적 병역이행자’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들의 양심적 병역거부 사례들을 이야기한다.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란 용어의 일괄적 사용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며 이에 대해서는 병역자체의 거부와 집총 거부를 나눌 것을 지적하며, 전자에 대해서는 대체 복무를 시키는 방법이 있고 후자에 대해서는 비전투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음도 설명한다. 여기에 또 다른 질문이 가세한다. 군사재판 때에도 자주 물어보았다고 하는 이 질문은 ‘그럼 만약 네 여동생을 누가 강간하고 죽이려 하면 어떡할래?’이다. 이쯤 되면 다시 독자의 내면은 원상 복귀되며 오히려 그들에 대한 반발심만 커진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이상(理想)이고 현실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다급하고 필요한 폭력이 있다는 생각이 다시금 우리를 괴롭힌다. 이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3장에서 존 하워드 요더의 글을 인용하여 그 질문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오히려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는 여호와 증인과 같은 이단들만의 문제라는 생각에 대해서도 과거 정통으로 분류되는 기독교 역사에서 드러난 사례들을 통해 주의를 환기시키며(4장), 무엇보다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평화주의자였고 전쟁을 반대했음을 지적한다(5장). 그렇다면 전쟁은 모두 나쁘기만 하며 정당한 전쟁은 없는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정당한 전쟁론’이라는 용어가 평화주의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정당한 전쟁’은 평화주의의 친구에 가까우며 오히려 문제는 정당한 전쟁을 가장한 ‘짝퉁’ 정당한 전쟁론에 있음을 보여준다(6장). 책의 후반은 우리 나라의 특수성에 기인한 문제들을 주로 다루는데 그 중 하나가 전쟁 중인 나라에서는 징집제도를 불가피하게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본서는 전쟁 중에 있었던 혹은 지금도 대치중인 다른 나라들의 사례들을 들어 반박하며(8장), 그런 상황에서도 전쟁을 거부했던 이들의 역사를 돌아본다(9장).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내에서 이뤄진 지독한 병역거부 탄압의 사례들을 소개하고(10장), 그에 대한 대안으로 대체복무제도를 언급한다(11장). 특히 11장에서는 대체복무제도의 현주소와 그 내용에 대해 소개하고 각 안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형평성에 맞게 제도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설명한다.


진정한 변화를 위한 온정적 글쓰기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해돌이의 모험’ 같은 반공 만화나 로보트 만화를 보고 자란 내게, 그리고 장난감 총을 들고 밖에 나가 아이들과 총 싸움을 했던 내게, 평화라는 단어는 피를 보고 나서야 ‘우리’에게 돌아오는 상급과 같은 것이었다. 남자다워지려고 배웠던 태권도는 자신과 이웃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대련이라는 방법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즐거움을 선사했고, 회심한 이후에도 교회 안에서 설교를 통해 구약의 전쟁들을 예화로 들으며 이스라엘 민족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면 속으로 크게 환호하곤 했다. 샬롬과 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기독교를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 20대 중반의 일이었고 기독매체를 통해 접했던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이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와 같은 책들의 내용을 통해 생각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한국의 싸나이’로서 내면의 중심에는 병역거부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주변에서 ‘너 자상하고 친절한 척 하지만 사실은 겁쟁이지? 전쟁 나면 도망이나 갈 녀석!’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이런 내면의 문제를 안고 있던 내게 김 교수의 책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군대라는 문제로 여전히 뒤틀려 있던 내 내면의 친절한 상담가가 되어 주었다. 책을 읽는 동안 속으로 가끔은 난감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는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공감한다는 태도와 말투로, 그리고 지루하리만치 방대한 자료와 사례들을 차분히 풀어내는 그의 설명에 이제는 나도 충분히 ‘설득’되었고 그 찜찜한 심기를 털어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던 많은 전쟁 사례들이 지금도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을 맴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책에서 김두식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시작된 당위적 전쟁들조차도 또 다시 많은 수의 피해자들을 만들어 냈고 그들의 피 흘린 복수가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을 이루어왔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칼을 뽑아 다른 사람에게 휘두르는 순간 평화는 깨어지고, 폭력은 도리어 폭력을 낳게 되는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수님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26:52)’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말한다. 내 가정, 내 나라, 내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전쟁과 피흘림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에 항거하여 반전 행동을 실천했던 많은 이들의 모습을 본다. 이 책은 그러한 이들이 묵묵히 수행했던 길, 즉 세상에 대해 샬롬을 선포하는 것, 전쟁에 나서는 것을 반대하는 부단한 실천만이 복수로 점철되어 온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다 준다.

 지식인들 혹은 글 쓰는 이들 가운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스타일은 급진적이고 도발적이지만 찬찬히 읽고 나면 알맹이가 없거나 진부한 경우가 있고, 반대로 차분하고 따뜻하여 다소 온건한 느낌을 문체로 썼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신선하고 개혁적이며 진보적인 경우가 있다. 사실 나는 전자의 글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후자의 글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왔다. 때론 몸을 사리는 것 같기도 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대개 끝을 보지 않아서였다. 김두식 교수의 글은 물론 후자에 속한다. 그의 모든 글에 대해서는 아니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군대’ 문제에 대해 이 책에서 보여준 그의 스타일을 나는 기꺼이 옹호하고 싶다. 그렇다. 그의 스타일이 옳다. (끝)

2007/08/05 18:29 2007/08/0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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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최근에 본인의 교회 담임 목사님이 출판인으로 계신 부흥과개혁사에서 출판한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옥성호)"를 읽다가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서 목사님께 메일을 보냈다. 기쁘게도 목사님이 흔쾌히 메일 내용을 저자에게 전달해주셨고, 관련된 토론이 흥미롭게 진행되어 그 전문을 올린다. 함께 고민할 부분들이 있으므로 이 토론이 많은 도움이 되길 기대해본다.  



1. 부족한 기독교에 대해 (김용주)

백목사님! 저, 용주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최근에 부흥과개혁사에서 출판하신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 대해서 말씀드릴 부분이 있어서 메일 띄웁니다.

이 책을 저도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죄사함보다 내적치유를 추구하는 현대 기독교에 대한 질타와 긍정적 사고방식류의 사이비 기독교 출판물의 득세 속에 기독교의 교리가 심하게 훼손되었다는 주된 논지는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서 백목사님이 크게 공감하셨기 때문에 시기를 앞당겨서라도 옥성호씨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갓피플닷컴에서는 그간 기독교 안에 오염된 진리에 답답함을 느꼈던 많은 이들의 긍정적인 평들을 접할 수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저도 이러한 흐름에 많이 고무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메일을 쓰게 된 이유는, 옥성호씨의 문제제기가 유효하고 시의적절하며 무엇보다 교리의 회복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초반 3장까지의 내용으로 인해 다소 비판을 받게될 소지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서입니다.

간략하게 각 장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이렇습니다.
1장에서 옥성호씨는 심리학이 과학인가라는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고 점괘를 보는 것과 동일할 정도로 학문의 영역에 들어갈 만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합니다.
이 얘기는 과학은 학문영역이고 심리학은 비학문에 가깝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과학철학자들이 했다는 건데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에 대한 맹신을 통해서 과학이 아닌 학문들, 이를테면 신학, 심리학, 인문학과 같은 것들을 사이비 학문으로 규정하고 학문의 지위를 박탈시키려는 시도를 합니다.
결과만 말씀드리자면 과학의 잣대로 학문을 규정지으려던 시도는 과학 자체도 주관이 개입된 가설의 영역 안에서 학문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됩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그러한 과학사에 대한 접근이며 이로인해 학문의 영역에서는 과학이나 심리학이나 신학이나 이런 모든 학문들이 상호 연관성을 통해서 진리로 더 다가가는 정도 밖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사조가 유행하게 됩니다.

요점은 옥성호씨의 토대는 과학이 불변하는 확고한 객관적 진리위에 있는 학문이고 심리학은 사이비 과학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과학에 대한 너무 순진한 접근입니다. 또한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과학의 근본 가정은 진화론적 사고입니다. 물론 창조과학이 있긴 하지만 이는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주류 과학자들의 과학함의 토대는 진화론이며 진화론이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주류로 자리잡은 이유는 창조론이 총체적으로 진화론에 대체가능한 이론으로 최소한 아직까지는 자리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옥성호씨의 주장대로라면 과학도 과학이 아니며 주관적이고 반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증거들로만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주류 과학은 진화론이라는 유물론적인 철학을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판단으로 과학에 대해 옥성호씨가 이야기하는 부분은 너무 주관적인 설명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과학에 대한 이해때문에 심리학과 과학의 관계를 설명하는 첫단추에서 이미 비전문가적인 냄새가 물씬 납니다.

그리고 나서 2장에서는 기독교 심리학이 불가능함을 증명합니다. 주로 거론되는 인물은 데이빗 시멘스와 게리 콜린스라는 걸출한 기독교 심리학자인데 사실 심리학이라는 학문에 기독교적인 방법론이 있겠는가 하는 지적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기 독교세계관을 공부할 때에도 많이 지적된 부분인데 학문 앞에 기독교를 붙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종교의 영역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말이 아니라 학문을 연구함에 있어서 특수하게 기독교적인 방법론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하는 기독교 학자들 가운데 몇몇 이들이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타이틀로 심리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지만 심리학을 연구하는 기독교 학자들 전부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화란의 청교도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지적대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라는 구호 아래 학문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성실하고 객관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옥성호씨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라는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3장으로 넘어갑니다.
3장에서는 왜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반기독교적인가를 논증합니다. 그 이유로 옥성호씨는 심리학이 대충 프로이트 파와 융파로 갈리는데 이들의 배경을 보면 불신자에 마르크스적인 배경도 가지고 있어 다분히 반기독교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심리학의 문제는 다른 학문에도 동일하게 지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경제학도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시작되며 전혀 객관적이지도 않고 예측가능하지도 않은 학문입니다. 과학은 더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과학이라는 학문을 구성하고 있는 토대는 다분히 반기독교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신적존재를 부정하는 학문은 악마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심리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모더니즘을 거치면서 생성된 많은 학문들은 신적 존재의 부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반기독교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문제는 심리학이 반기독교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심리학을 함에 있어서 어떻게 기독교의 진리의 빛으로 그 학문을 회복시킬 수 있느냐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 들어간 옥성호씨의 논지 전개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과학, 정치, 경제학도 그렇고 심리학도 그렇고 현실 세계에서 그 학문적 결과들이 비교적 잘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옥성호씨는 마치 심리학을 주술이나 점괘를 보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지금도 많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환자들을 그들의 방법으로
치료하고 있으며 그 사례들은 실로 엄청납니다.
기독교인들이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하는 것을 반기독교적으로 생각하지 않듯이 정신병에 있어서 대다수의 의사들은 이러한 현상을 질병으로 인식하며 약물과 상담를 통해 병을 치료하게 됩니다.
제 어머니도 우울증세가 있었는데 실제로 정신과 의사가 우울증이라고 병으로 진단한 경우에는 심리적인 질병으로 인해 신체 장기들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신병도 물리적인 영역이며 이에 대한 치료 자체가 사이비 종교 정도에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옥성호씨가 회심후 복음의 정수라고 할 만한 교리들이 내적치유나 긍정적 사고방식과 같은 심리학적인 방법과 맞교환되는 현대 기독교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심 리학에 기댄 기독교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죄사함의 권세를 마치 내면의 치유와 평안처럼 이야기하는 설교자들과 기독교 학자들에 분노했을 것입니다. 저또한 복음을 그 어떤 학문으로 대체하려는 행위에 분노하며 문제 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복음이 심리학에 의해 훼손된 부분을 이야기하기 위해 초반에 심리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토대 위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에 다소 논리 전개가 위태롭게 느껴집니다. 또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 글을 쓴 느낌이 너무 강하게 뭍어납니다. 이 책의 백미는 세 개의 가면에 대한 설명이며 그 이후에 복음에 대한 회복의 내용인데 그 탁월한 내용이 초반의 불안한 토대로 인해 경감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저는 개정판에서 도입부(1~3장)이 대폭 수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런 훌륭한 문제제기를 하는 책이 그 토대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 책은 정말 시의적절하며 좋은 내용들이 많은 책입니다. 하지만, 아래 1,2,3의 토대는 수정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1. 과학에 대한 순진한 접근으로 인해 심리학이 과학이냐 아니냐를 문제삼은 부분
2. 심리학을 하는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 모두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특수한 방법을 따르고 있다는 가정
3. 심리학 자체가 다른 학문과는 달리 반기독교적이라서 의미가 없다는 주장

차라리 초반에 심리학이 마치 복음인양 받아들여지는 북미나 한국 기독교계의 문제를 지적하여 주의환기 시켰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심리학의 목적은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병의 치료에 있지 죄사함과 영생을 보장해주는 기독교의 본질과는 다른데 마치 이것을 동일시하는 이들이 있다는 게 문제라는 정도로 시작을 했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주저리주저리 글을 길게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여타 책들이었으면 이렇게 글을 쓰지 않았겠지만 이 책은 저도 애정이 많이 가서 결례를 무릅쓰고 목사님께 메일을 올립니다. 책에 대한 비평이기는 했지만 이 책을 더 잘 살리고 싶은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혹시 목사님의 또 다른 생각이 있으시면 회신 부탁드립니다. 주일에 뵙겠습니다.

용주 드림.



2. 용주 형제의 문의에 대한 (백금산)

용주 형제

이번 옥성호 형제의 부족한 기독교 심리학편에 대한 관심과
이 책에 대한 형제의 건설적인 비판과 제안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주장에 대해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주장과 일치하는 것인가?'라고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수많은 비성경적 사상들이 스며들어와있고
또한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잘못된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관습들이 난무하게 된 것은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들의 가르침과
기독교안에 유통되고 있는 책들의 가르침을 분별력없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옥성호 형제의 최근 저서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불건전한 성경해석과
불건전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심리치료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용주 형제가 또한 이러한 책을 읽고서
형제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과 동의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질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다고 한 것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진리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은 절대적일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독단적으로 나의 해석과 견해만이 100% 옳은 것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 해석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각자가 주관적으로 해석하면 된다는 극단적인 상대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잘못입니다. 성경은 이런 극단적 회의주의를 전혀 지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어적-명제적인 계시인 성경으로 인간과 의사소통을 하시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인간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에 대해 100% 완벽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어도 성경이 계시해주고 있는 부분에 관련해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상대적인 면을 인정하면서도 객관적인 지식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 라서 성경 해석을 할 때는 나 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해석도 참고해야 하고 특히 2000년 동안 교회의 역사가운데서 바른 신앙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모든 공교회의 공통된 성경해석을 중요한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용주 형제가 책을 읽다가 의문을 제기하고 또 더 정확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정당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이런 풍토는 앞으로 우리 성도들 중에서 더 많이 일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번 책에 대한 용주 형제의 질문에대해서는
이 책을 쓴 당사자인 옥성호 형제의 대답을 듣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해서
옥성호 형제에게 용주 형제가 보낸 메일을 전해주고 답변을 부탁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답변 내용이 와서 전해줍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궁금하거나 토론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옥성호 형제의 메일로 직접 보내어 의견을 교환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토론과 의견 교환이 단순히 사적인 것만이 아니므로
여러 다른 사람들이 함께 토론이 되어 지는 것을 보기를 원하면
부흥과개혁사 홈페이지 안의 부족한 기독교 토론방을 이용해도 좋습니다 .

그리고 이번 용주 형제의 질문과 성호 형제의 답변에 대해서도
그냥 개인적인 문제로 끝내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고
용주 형제의 질문 내용이나 성호 형제의 답변 내용이
다른 사람들도 알아 더 유익하다고 판단된다면
부흥과개혁사 홈페이 부족한 기독교 토론방에 올려놓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만일 용주 형제와 성호 형제 모두 동의한다면 토론방에 올려놓도록 하고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도 원치 않는다면 올려놓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용주 형제는
매주 마다 교회에서 만나기 때문에
내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직접 질문하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럼 주일날 보겠습니다.

백금산 목사.



3. 용주 형제 문의에 대한 답변입니다. (옥성호)

백 목사님:

전 에 제가 만난 임 집사도 그렇고 이번에 메일을 보낸 용주 형제도 그렇고… 목사님의 목회가 참으로 행복하시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변에 이런 분들이 많다니 참으로 부럽습니다. 저는 용주를 만난 적도 없지만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서 참으로 든든합니다.

목사님, 제가 부족한 기독교 심리학편을 쓰면서 예상한 반론은 심리학이 왜 과학이 아닌가? 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첫째, 심리학이 과학이 아니면 다른 모든 사회 과학도 과학이 아니지 않는가? 라는 것과 둘째, 나한테 효과가 있는데 왜 심리학을 부정하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용주 형제의 의견은 위의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째, 저는 사회 과학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 계시로서의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과학은 자연 과학입니다. 사회과학이라 부르는 영역들은 자연과학에서 요구되는 것과 같은 예측 가능한 결과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용주 형제가 메일에서 말한 " 과학의 근본 과정은 진화론이다" 라고 말한 부분은 무슨 의미인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가 저와 다른 것 같습니다. 저에게 진화론은 과학의 출발이 되기는 커녕 그냥 ' 코메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저는 이번 책에서 심리학 특히 심리학 중에서도 정신분석과 심리치료를 기독교와 대비해서 다루기 때문에 심리학이 과학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심리학이 자연 과학이냐 사회 과학이냐의 대비가 아닌 심리학이 물리적 영역이냐 영적인 영역이냐를 가지고 접근을 한 것입니다. 즉, 제가 이 책에서 말한 과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계시로서의 과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좀 더 공부를 해야하는 부분이 있으면 하고 필요하면 더 논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 , 참, 그리고 저는 프로이트와 융과 같은 사람이 주창자이기 때문에 심리학이 과학이 아니라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프로이트와 융이 말하는 심리학은 이미 과학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을 마치 과학처럼 생각해서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내적 치료를 하는데 이론적인 토대가 되는 프로이트 이후의 심리치료 방식을 교회가 성경에 비추어 분별했어야 한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었습니다.

용주 형제가 "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라는 명제를 가지고 저의 주장을 논박하는 부분은 핀트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중심에 있는 사상이 심리학은 그 ' 모든 진리'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니까요. 용주 형제가 얘기하는 인문 과학들이 각기 분야에서 학문적 결과들이 잘 적용된다는 부분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그 이유는 그 인문 과학들이 상당 부분 학문적 근거를 수학을 비롯한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계시로서의 진짜 과학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용주 형제가 제기한 부분이 진짜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 정신병도 물리적 영역이며…" 라고 말한 그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용주 형제의 주장처럼 정신병이 물리적 영역이라면 '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 라는 주장대로 교회가 정신병을 치료하는 수단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지요.

솔직히 저는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좀 더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제 친구 중에 우울증으로 자살한 친구가 네 명이나 되거든요. 제가 이 책을 쓰면서 좀 더 공부해야겠다고 느낀 부분이 우울증입니다. 이것이 과연 organic disease 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대한 부분말입니다. 사실 몇 주 전의 조승희가 살았더라도 만약 과거 우울증 치료 경력만 있다면 그는 무죄까지는 몰라도 상당히 가벼운 형벌로 나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울증이라는 병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사탄의 영향에 대한 영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또 동시에 풀러의 E.J. Carnell 같은 사람이 우울증 약의 과다 복용으로 죽었다는 것을 보면 어떤 물리적인 측면에서의 병의 요소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울증으로 인해 신체 장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병이 물리적인 영역이라는 용주 형제의 주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소화가 안 되고 여러 가지 몸에 이상이 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죄책감이 물리적인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둘째, 용주 형제의 주장 중 상당 부분은 심리학 또는 카운셀링을 통한 효과가 많은데 어떻게 그것을 전면 부정할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 생각은 그것이 효과가 크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효과가 없었다면 아예 부족한 기독교는 나오지도 않았겠지요, 마케팅도 마찬가지입니다. 효과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왜 문제냐는 것 아닙니까? 용주 형제는 제가 과학에 대해서 너무 순진하게 접근한다고 했는데 제 생각에 용주 형제는 심리학에 대해서 너무 순진하게 접근한다고 보입니다. 문제는 효과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성경에 비추어 맞는가 틀린가의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5 장에서 바울이 얘기한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에 대한 경고가 필요합니다. 심리학은 효과가 있기에 이처럼 빨리 퍼지는 것입니다.

용주 형제가 얘기한 다음 부분, "문제는 심리학이 반기독교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심리학을 함에 있어서 어떻게 기독교의 진리의 빛으로 그 학문을 회복시킬 수 있느냐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는 용주 형제가 이어서 쓴 다음 부분과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의 목적은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병의 치료에 있지 죄사함과 영생을 보장해주는 기독교의 본질과는 다른데 마치 이것을 동일시하는 이들이 있다는게 문제라는 정도로 시작을 했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즉, 죄사함은 말씀으로만 완성하지만 정신적 다른 부분에서 고통받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에서 심리학이라는 학문을 회복하자는 요지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

그런데 문제는…이게 안 된다는 것이지요 . 원천적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안 되는지가 제가 책에서 계속해서 주장한 것이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필연적으로 왜곡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서 다 주셨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는 결과가 되니까요.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용주 형제가 앞으로 좀 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한국 또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 상담자들의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러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고 또 하나 제가 책에서 비판한 분들 중 모두 자신이 병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을 돕는다고 얘기하지 죄사함과 영생 보장의 수단으로 심리학을 쓰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위의 용주 형제가 말하는 것 같이 주장을 했다면 아마 비판받은 사람들 모두 다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내가 언제 죄사함과 영생 문제를 다뤘다고 그래? 난 힘든 사람들 도왔을 뿐이야."라고요.

저는 진심으로 용주 형제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동지의 충고이기 때문이지요. 또 이 책에 좀 더 보완이 필요하다는 점도 동의하고요. 제가 느끼는 답답함이나 기독교의 교리의 회복에 대한 열정을 이 책을 읽고 용주 형제처럼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더 감사하고 든든한 것입니다. 아마 제가 여기서 용주 형제의 문제제기에 답하는 부분들 중에서도 제가 잘 이해를 못해서 곡해한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용주 형제가 이의를 제기한 면과 관련해서 제가 좀 더 공부해야 되는 부분에 도움이 되는 책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너무 어렵지 않은 것으로요. 그리고 앞으로 좀 더 깊은 논의가 서로 간에 있기를 바랍니다.



4. 옥성호 형제의 답변에 대해 (김용주)

옥성호 형제님 반갑습니다.
친절하게 제 의견에 대해 꼼꼼히 답변을 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전에도 백목사님께 메일 보낼 때 언급했듯이 이 책이 한국 교회에 좋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길 기원합니다. 보내주신 답변에 대해 간략하게 제 의견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용주 형제의 의견은 위의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첫째, 저는 사회 과학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 계시로서의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과학은 자연 과학입니다. 사회과학이라 부르는 영역들은 자연과학에서 요구되는 것과 같은 예측 가능한 결과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 따라서 용주 형제가 메일에서 말한 " 과학의 근본 과정은 진화론이다" 라고 말한 부분은 무슨 의미인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가 저와 다른 것 같습니다. 저에게 진화론은 과학의 출발이 되기는 커녕 그냥 ' 코메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 과학의 근본 가정이 진화론이라는 것은 제 의견은 아닙니다만 과학이라는 학문의 현재 상황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지난 글에서 길게 언급했듯이 미국이든 한국이든 창조론은 과학의 정론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스티븐 제이 굴드나 도킨스와 같은 진화론자들의 이론들이 과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과학이라는 학문의 가정은 진화론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계에서 널리 알려진 창조 과학이나 현재 유행하고 있는 지적설계운동은 과학이라는 학문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진화론이 코메디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은 옥성호 형제나 다른 기독인들의 사견에 가깝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창조론도 객관적인 잣대가 현재는 없습니다. 현대 과학에서 창조론에도 크게 3-4가지의 이론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젊은지구 창조론과 오랜지구 창조론, 유신론적 진화론, 그리고 지적설계운동 정도의 이론들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요점은 자연과학의 영역도 옥성호 형제가 사회 과학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측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관찰자의 이론에 따라 계측이나 이론의 전개도 차이가 생기며 과학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과학의 패러다임들이 바뀌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뉴튼의 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상수로 고유한 값 9.81m/s^2을 갖는다고 생각했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두 물체의 상대 인력에 따라 변화하는 값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은 개념들이 결국은 과학도 예측가능하지 않으므로 통계적인 방법을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결국에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구분짓기는 사실상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 저는 이번 책에서 심리학 특히 심리학 중에서도 정신분석과 심리치료를 기독교와 대비해서 다루기 때문에 심리학이 과학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심리학이 자연 과학이냐 사회 과학이냐의 대비가 아닌 심리학이 물리적 영역이냐 영적인 영역이냐를 가지고 접근을 한 것입니다. 즉, 제가 이 책에서 말한 과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계시로서의 과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좀 더 공부를 해야하는 부분이 있으면 하고 필요하면 더 논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 그리고 그 다음에 용주 형제가 제기한 부분이 진짜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 정신병도 물리적 영역이며…" 라고 말한 그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용주 형제의 주장처럼 정신병이 물리적 영역이라면 '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 라는 주장대로 교회가 정신병을 치료하는 수단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지요.

-> 이 부분은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은 옥성호 형제의 책은 심리학에 과하게 기댄 기독교를 질책하는 것이 핵심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옥성호 형제님의 답변을 듣고 보니 이 책은 심리학 자체에 대한 비판과 그러한 심리학을 기독교가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결국 옥성호 형제와 제가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정신'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 차이로 보입니다. 저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정신'이 물리적 영역이며 손상을 입을 시에 치료가 필요한 부분으로 보는 반면 옥성호 형제는 '정신'을 영적인 영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영역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심리학에 칼을 대는 것이지요. 저는 '정신'과 '영적 영역'은 동일하지 않으며 '정신의 영역'에서도 충분히 물리적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저도 전문지식이 없는 관계로 더 이상 논의를 발전시키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옥성호 형제가 이야기하는 최면술과 같은 것들은 현대 심리학에서는 타부시 하는 방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다만 심리학, 정신분석학 일체를 거부하려면 그 작업이 지금 성호 형제가 언급하는 사례들보다는 더 방대한 영역의 문제가 지적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세 개의 가면에서 가장 중추적인 비판 사례인 오스틴의 <긍정의 힘> 같은 책은 사실 심리학자들의 이론서가 아니기 때문에 심리학 비판서로서는 곁가지로 새어 나가고 있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려는 이야기의 요지는 옥성호 형제님의 논리를 따른다면 심리학을 철처하게 파헤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또한 기독교계에서 심리학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사례들도 보다 심도있게 살펴보아야 하므로 이 책의 비판 대상이 의도보다 과하게 넓어지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영역이 될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또한 초반에 사회 과학을 사이비 학문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사회과학 일반에 대한 반론에도 적절하게 대처할 근거가 필요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에 비추어 게리 콜린스나 오스틴의 사례는 상당히 비전문적인 대상들이며, 특히 오스틴의 경우에는 학문 영역에서는 별로 할 얘기가 없는 저자입니다.

-> 책에 대해 긍정할 부분들이 참 많은데 자꾸 비판적인 내용을 드러내게 되어 저도 면목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저의 관심과 지적을 애정과 동지의식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사와 과학철학, 창조 과학 관련된 책들만 소개해 드리고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의견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1. 창조와 진화에 대한 세가지 견해 | 원제 Three Views on Creation and Evolution
로버트 뉴먼, 존 마크 레이놀즈 (지은이), 박희주 (옮긴이) |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 현대 과학과 기독교의 논쟁 (2003) / 리차드 칼슨 / 살림
3. 현대의 과학철학 1,2 (1985, 1994) / 앨랜 차머스 / 서광사
4. 과학 철학 - 자연 과학에 대한 기독교적 조망 | 원제 Science & Its Limits: The Natural Sciences in Christian Perspective
델 라치 (지은이), 김영식, 최경학 (옮긴이) |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5. 과학 속 사상, 사상 속 과학 | 과학으로 생각한다
이상욱 , 홍성욱, 정대익, 이중원 | 출판사 동아시아 
 


5. 용주 형제님, 옥 성호입니다. (옥성호)

용주 형제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형제가 생각하는 바를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을 답변을 보고 떠 오르는 세 가지에 대해서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연과학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생각이 서로 평행선을 긋고 있기 때문에 제가 형제님이 권해주신 책을 구해서 읽어보고 다시 기회가 되면 서로 연락하도록 하지요.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저도 창조론이 과학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론theory’ 아닙니까? 단지 진화론을 믿는 것 보다는 창조론을 믿는 것이 훨씬 더 쉬워보입니다. 그건 제가 기독교를 믿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그랬습니다.

한 때 저는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면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기 위해 창조와 진화에 관련된 책들을 꽤 사서 보았는데요. 물론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창조론을 믿고 싶었던 저의 고민을 간단히 얘기하면 두 단어로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지구와 공룡”
지구의 나이가 성경이 말하는대로 만년도 안 된다는 것이 증명이 가능한가 그리고 도대체 그 많던 공룡들을 다 어디로 간 것인가?
그 런 과정을 통해서 생각한 것은 물론 창조를 전혀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허구를 확신한다고 해서 그 허구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여겨지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갖이 생기는 것도 전혀 아니더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름대로의 공부를 통해서 진화론이 허구인 것은 (이론적으로도) 확신하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창조에 대한 믿음이 그런 공부를 통해서 생기는 것은 전혀 아니더군요.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제게는 지적 설득이 크리스챤이 되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리 스트로벨이 쓴 일련의 서적들에 대해서 회의를 갖고 있습니다. 신앙의 차원을 자꾸 인간의 지적 설득 수준으로 알게 모르게 끌어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정신에 대한 입장 차이 역시 토의로 합의될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형제는 mind, spirit and body의 3등분으로 인간을 보고 있지만 저는 body와 spirit의 두 가지로 보고 있는 입장이니까요. 물론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성경도 명확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성경에 등장하는 soul과 spirit을 해석하면서 soul을 mind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잘못된 해석이지요. 왜냐하면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soul과 mind가 서로 혼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들어 인간 속에도 분명 세 가지 영역이 있다고 주장을 하지요. 세상의 모든 것들이 space, time and matter로 구성되듯이 이 세상은 3가지로 다 분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이 명확이 알려주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토대로 할 때 영혼과 육체로 나누는 것이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정신의 영역을 다루는 정신 분석은 제게 있어서 영적인 분야를 다루는 것이지요. 한 가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을 3원화 시켜서 보는 경우 이론적으로 4차원의 영성으로 대표되는 그런 가르침들이 파고들 여지가 매우 높다는 사실입니다. 만민 중앙 교회의 이 재록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셨습니까? 가장 전형적인 3분론에 기초한 신학입니다. 매우…위험합니다. 정신 치료의 가치를 주장하는 분들 역시 예외 없이 3분론을 지지하고 있지요.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 무엇이 맞고 틀렸다를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용주 형제가 이 부분에서 정신과 영혼을 구별하는 한 부족한 기독교에서의 저의 주장에서 공감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요. 용주 형제님께서는 참으로 탁월한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다음 부분입니다.

세 개의 가면에서 가장 중추적인 비판 사례인 오스틴의 <긍정의 힘> 같은 책은 사실 심리학자들의 이론서가 아니기 때문에 심리학 비판서로서는 곁가지로 새어 나가고 있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제 가 하려는 이야기의 요지는 옥성호 형제님의 논리를 따른다면 심리학을 철처하게 파헤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또한 기독교계에서 심리학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사례들도 보다 심도있게 살펴보아야 하므로 이 책의 비판 대상이 의도보다 과하게 넓어지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영역이 될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또한 초반에 사회 과학을 사이비 학문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사회과학 일반에 대한 반론에도 적절하게 대처할 근거가 필요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에 비추어 게리 콜린스나 오스틴의 사례는 상당히 비전문적인 대상들이며, 특히 오스틴의 경우에는 학문 영역에서는 별로 할 얘기가 없는 저자입니다.

이 지적은 100% 타당한 지적입니다. 당연히 이런 지적이 나와야 합니다. 이 부분은 저도 생각했었던 부분입니다. 그런데 왜 알면서 굳이 심리학이라는 ‘전문적 영역’의 차원에서 볼 때 별 가치 없어 보이는 조엘을 건드리고 있는가에 대한 저의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 이유는 저는 이 책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다가와서 읽혀지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출중하게 무장이 되어서 쓰여진 책이라고 해도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이 책을 읽는 분들이 실질적으로 자신을 한번 되돌아 보면서 지금까지 너무도 당연히 여기던 사실들에 대해서 건강한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참으로 만족합니다. 유명한 사람의 말이라면 다 옳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눈을 성경으로 돌리고 싶어지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요.

두번째로, 물론 이 책이 이론적으로 철저히 무장된 반론들에 대해서 다 준비가 된 책은 전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가 심리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엘을 끌어들인 것은 전혀 아닙니다. 대중성을 위해서 전혀 주제와 관계 없는 조엘을 희생물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심리학이 대단히 복잡해 보이는 학문이지만 사실 파고 들어가면 그 학문은 ‘무의식’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 이론입니다. 간단히 말해 용주 형제가 언급한 최면 치료(이런 식의 치료는 지금도 교회 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혀 사라지고 있지 않아요…어떤 의미로 보면 요즘 유행하는 각종 명상 기도들도 최면과 관련이 있습니다.)를 비롯한 각종 방법들, 또 자기 사랑을 위한 각종 노력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구성된 무의식을 재정립하려는 것이고요.
불가능을 없다. 기도하는데로 다 이루어진다는 식의 4차원인지 5차원인지 하는 그런 식의 헛소리는 끝도 없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무의식’을 활용하려는 미래적인 가치와 관련이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이 책의 151페이지의 심리학이 쓴 세 개의 가면이라는 제목 밑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첨가한 것입니다.

“심리학은 첫째 가면인 자기 사랑을 통해 나의 무의식의 가치를 일깨우고 그 위에 두 번째 가면인 긍정적 사고를 통해 나의 무의식을 살찌우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가면인 성공의 법칙을 통해 내 속에 있는 무의식에게 결코 불가능이란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따라서 무의식이라는 영역과 관련해서 볼 때 조엘은 심리학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인 셈이지요. 비록 그는 자기가 떠드는 소리가 과거 여러 심리학자들이 주장한 무의식의 능력에 대한 확인에 불과하다는 것도 모르고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심리학의 가장 중심되는 핵심인 무의식의 세계가 보유한 무한한 가능성을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맞바꾸어 떠들고 있으니까요. 그가 이론적으로는 곁가지이만 영향력으로는 몸통입니다. 그는 전혀 깃털이 아닙니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져서 이 책의 개정판을 내게 된다면 제가 보다 깊이 파고 싶은 영역이 ‘무의식’에 대한 영역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섰을 때 ‘나는 죄 없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탄이 만들어 낸 기가 막힌 개념입니다. 무의식의 영향력을 강조할수록 인간의 책임은 사라지니까요.

마지막으로 제가 이 책을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 하나입니다. ‘성경이 무어라고 말하는지를 들어보자’입니다. 물론 백 목사님 말씀대로 성경에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누구의 말이 100% 맞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의 중요한 줄기에 해당하는 기본 교리들에 대한 해석은 오로지 하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심리학과 마케팅으로 대표되는 수 많은 가르침들은 그 기본에 대한 도전이자 부정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을 예쁘게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용주 형제님, 물론 만족한 답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시간 내서 좋은 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백 목사님 좀 쪼아서 교회 홈피 좀 빨리 만들라고 해 주세요. 언젠가 한국에서 만나서 커피나 한 잔 했으면 좋겠네요.

sungho
 


6. 김용주입니다 (김용주)

성호 형제님, 답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지적한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 주셨습니다.
저도 대부분의 답변에 공감합니다. 여기에 첨언을 하면 괜히 주변적으로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토론은 이것으로 접으려고 합니다.
성호 형제님과 글을 나누다 보니, 역시 한국 교회는 죄문제를 치유나 무의식, 성공, 적극적 사고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는 고질적인 문제가 무엇보다 큰 위기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조엘 오스틴 같은 저자들도 노만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 방식"이나 크리스탈 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의 아류 혹은 현대적 변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서울에 오시면 정말 커피 뿐 아니라 식사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용주 드림.

2007/05/01 22:44 2007/05/01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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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여년간 10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자잘한 책들을 보탠다면 더 되겠지만, 대략 세어보면 그 정도가 된 듯 하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이래로 책은 우리 삶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지식을 보존할 수 있었고, 그것을 가공하고 확장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책의 해악도 있다. 양서냐 아니냐의 문제도 분명 그러한 범주에 들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이 독자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가를 돌아보는 일이다.
많은 책을 읽었다면 읽었고, 적게 읽었다면 읽었을 책들 중 정작 내 삶을 변화시킨 책들을 뽑아 보았다. 나의 영적인 스승인 이 책들의 저자들께 감사한다.



1.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98)
신영복 / 돌베개
'나무야 나무야'를 먼저 읽었지만 이 책이 신영복 교수의 대표저서다.
개정판에 실린 "청구회 추억"은 읽을 때마다 마음이 무겁곤 했었다.

2. 거꾸로 읽는 세계사 (2004)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유시민을 처음 알게 된 책. 베스트셀러라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듯.

3. 과학혁명의 구조 (2002)
토마스 쿤 / 까치글방
과학사, 과학철학 분야에 한 획을 그은 책. 패러다임 이론으로 유명하다.

4.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1998)
이외수 / 동문선
이외수 이름 석자를 처음 접하게 된 책. 글쓰는 '재주'란 말을 처음 떠올린 책.

5. 대학생 글쓰기 특강 (2005)
강준만 / 인물과사상
글쓰기에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읽은 책 중 가장 도움이 된 책.

6. 뛰어난 사진을 만드는 비결 (2002)
피터 버라이언, 로버트 카푸토 / 청어람미디어
내셔널 지오그라피의 사진 기자들이 말하는 사진 잘 찍는 법. 사진이 예술이다!

7. 김대중 죽이기 (1995)
강준만 /인물과사상
진보진영을 어우르게 된 강준만 교수의 대표 저서.
이 책을 통해 조선일보를 비롯한 매체의 문제성을 처음 인식하게 되었다.

8.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2 (1998)
진중권 / 개마고원
진중권의 극우 저자들에 대한 텍스트 비판 서적.

9.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2002)
노암 촘스키 / 시대의창
진보 지식인 촘스키의 인터뷰를 정리한 책.
촘스키의 운동가적인 기질이 빛나는, 운동가로서의 촘스키 입문서.

10. 러셀의 철학 노트 (1990)
페인버그, 카스릴스 / 범우사
버트란트 러셀의 쪽글들 모음. 러셀의 세심함과 성실함이 엿보인다.

11.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2002)
미치 앨봄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서적
'메멘토 모리' 내 삶에서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 책.

12. 무소유 (1993)
법정 / 범우사
법정 스님의 베스트셀러. 그 분의 청빈함에 기름낀 내 삶을 돌아보게 하다.

13. 미학 오디세이 1,2,3 (2004)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진중권이 한국 사회에 알려지게 된 대표적 저서. 미학의 모든 것.

14. 베토벤 평전 (2003)
박홍규 / 가산출판사
클래식과 부르주아에 대한 나의 고민. 그에 대한 제3의 길이었던 베토벤.

15. 사진에 관하여 (2005)
수잔 손택 지음 / 이후(시울)
진보 지식인으로 유명한 수잔 손택의 대표작. 사진에 대한 비평의 최고봉.

16. 서른살 경제학 - 30대를 위한 생존 경제학 강의 (2005)
유병률 / 인물과사상사
서른에 읽었다. 왜 난 스물에 경제에 문외한이었나.

17. 서울-워싱턴-평양 (2002)
정연주 / 비봉
군사 독재 시절의 기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아픔을 느꼈던 책.

18. 설득의 심리학 -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6가지 불변의 법칙 (2002)
로버트 치알디니 지음 / 21세기북스(북이십일)
설득도 설득이지만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만든 책.

19. 성공하는 시간관리와 인생관리를 위한 10가지 자연법칙 (1998)
하이럼 스미스 / 김영사
프랭클린 플래너 사용법.

20.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 Hommes Pour Changer Le Monde (2005)
마튜 르 루, 실벵 다르니 / 마고북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NGO 방향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 책.

21.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1999)
홍세화 / 한겨레
신자유주의적인 영향 아래에 있는 한국사회에서 제3의 길을 보여준 홍세화. 그가 이야기하는 파리와 서울.

22. 소유의 종말 The Age of Access (2001)
제레미 리프킨 / 민음사
다가오는 밀레니엄을 '접속'이라는 코드로 풀어낸 탁월한 책.

23.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2006)
김경태 / 멘토르
애플사의 CEO 스티브 잡스의 환상적인 프리젠테이션. 그에 관한 강의.

24. 신문읽기 혁명
손석춘 / 한겨레
손석춘 기자가 말하는 신문 읽는 방법. 삼성을 알면 중앙일보가 보인다?

25.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 청아
실존주의자이자 실천적 지성인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주의론.

26. 아직도 가야할 길 The Road Less Travelled (2007)
M. 스코트팩 / 동아
베스트 셀러이자 스테디 셀러로 올해에도 다시 개정판이 나온 스캇펙 박사의 대표작. 처음 상담심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든 책.

27.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 (2007)
에드워드 사이드 / 교보문고
작고하신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의 백미. '오리엔탈리즘'이란 화두로 실천적 지성인의 본을 보이다!

28.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2002)
유시민 / 돌베개
유시민이 정치계로 뛰어들기 전에 쓴 책.
경제학에 대한 입문서 정도.

29. 유쾌한 이노베이션 The Art of Innovation: Lessons in Creativity from Ideo, America's Leading Design Firm (2002)
조너던 리트맨, 톰 켈리 / 세종서적
회사 다니는 이들의 로망. IDEO 회사의 사례를 통해 이노베이션을 꿈꾸다.

30.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Ten Theories of Human Nature (1974, 1998, 2004)
레즐리 스티븐슨 / 종로서적
원래는 7가지 이론이었다가 개정판이 최근에 나옴. 세계관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준 책.

31. 좀머씨 이야기 (1999)
파트리스 쥐스킨트 / 열린책들
어지간해서는 소설을 읽지 않는 나. 이 책을 읽은 후론 자꾸 생각나는 그의 자살.

32. 좋은 것부터 먼저 시작하라 (2002)
에이브람 트워스키 / 미래사
만화 "피너츠"를 통해 본 심리학. 그리고 세상의 모든 찰리 브라운과 루시를 위한 삶의 지혜!

33.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 (2005)
빅터 프랭클 / 청아
홀로코스트, 그 고통 속에서 생존한 빅터 프랭클 교수의 증언.

34.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2004)
최성일 / 논장
사상가들에 대한 백과사전 같은 책. 그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저서들 목록을 제공.

35. 철학으로 영화보기, 영화로 철학하기 (1994)
김영민 / 철학과사상
영화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사색으로 본다는 생각이 들게 한 첫 번째 책.
 
36. 체 게바라 평전 (2005)
장 코르미에 / 실천문학사
혁명을 꿈꾸던 사람. 쿠바 혁명의 주체였던 체 게바라의 일생.

37. 총각네 야채가게 (2003)
김영한.이영석 / 거름
총각네 야채가게 이영석 사장의 성공담.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그의 성공은 정직한 성공이라는 점.

38. 춤추는 죽음 1,2 (2005)
진중권 지음 / 세종서적
진중권의 죽음에 관한 미학 에세이.

39. 코드 훔치기 (2000)
고종석 / 마음산책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던진 고종석의 화두, 이슈들.

40. 파문 (2003)
이명원 / 새움
문단의 몇몇 저자들을 대상으로 쓴 비평서. 꼼꼼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

41.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이야기
리차드 파인만 / 승산
세계적 물리학자이자 뛰어난 저술가인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모음.

42. 패스트푸드의 제국 (2001)
에릭 슬로서 / 에코리브르
햄버거, 그 해악에 대한 물질적이고도 구조적인 문제를 풀어낸 책.

43.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1,2,3 (200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강준만 교수의 현대사에 관한 대작.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한국 사람이라면 읽어야 한다.

44. 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2003)
박노자 지음 / 한겨레신문사
박노자 교수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영전에 바친 본서는 오리엔탈리즘의 실체를 한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45.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오연호 / 해냄
반미기자 오연호가 쓴 책. 근느 귀국하여 이 책을 쓰고 난 후 오마이뉴스를 창간했다.

46. 현대의 과학철학 1,2 (1985, 1994)
앨랜 차머스 / 서광사
모더니즘의 화두. 과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배울 점이 많았던 책.

47.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Men Are from Mars Women Are from Venus  (2006)
존 그레이 / 친구미디어
존 그레이의 대표작이자 이성교제의 바이블격인 책.

48.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  (2007)
신시야 샤피로 지음 / 서돌
대기업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면 꼭 한 번 읽어볼 책.

49. Against Methods
Paul Feyerabend
상대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 이 시대의 논객으로 널리 알려진 파이어아벤트의 대표작.

50. The seven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
Stephan R. Covey (FP)
스티븐 코비의 "일곱가지 습관". 삶을 알차게 살고 싶으면 그의 도움을 받으라.


**되도록 번역본의 연도를 따랐고, 개정판이 나온 경우에는 개정판 연도를 표시했습니다.

2007/04/30 18:24 2007/04/30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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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들 사이의 경계선 허물기"


"우리의 스승인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

위의 문구로 시작되는 박노자 교수의 이 책은 여지없이 성역을 무너뜨리는 작업을 이루어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이 동양의 모습이 아닌 서양이 바라보는 동양의 왜곡된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영전에 바쳐진 이 책은 러시아,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이스라엘에 걸친 하얀 제국의 가면을 들춰낸다.

이슬람을 테러 자행국가로 지명한 저 유명한 영화 <다이하드> 씨리즈를 보며 자라난 내게, 죽어가는 이라크의 서민들을 뒤로한 채 걸프전에서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우수성과 전략을 기반으로 한 첨단 테크놀로지에 환호했던 CNN 뉴스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시대에 가치관의 혼란을 겪던 내게, 살인마에게 주어진 노벨상을 받는 것을 어릴 적 꿈으로 삼던 내게 이 책은 더 이상 서구의 눈으로 동양을, 우리를,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편견을 한 꺼풀 더 벗겨내어 주는 역할을 해 주었다.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서구 중심주의는 우리가 헐리우드 영화만큼이나 유럽 영화에 열광하는 것에서 드러나며, 종로 어학원 근처에서 만나는 백인에게는 달려들어 길을 가르쳐 주는 친절함을 보이는 반면, 안산 근처에서 지친 몸으로 퇴근하는 제3세계 노동자들 앞에서는 뒷걸음질 치며 아이들 조차 가까이가지 못하게 하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코엑스 몰의 화려함과 지하철 매 구간에서 울려퍼지는 영어 방송은 마치 미국의 식민지를 방불케 하는 비참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세계화라는 이름의 회벽으로 뒤덮는다.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들썩이며 말이다.
"옥시덴탈리즘의 비참"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박노자 교수는 이 책을 쓰면서 "독자들이 '선진국'만 역사의 무대로 인식하는 태도를 벗어나 일제와 다를 바 없는 미제의 침략을 당하는 이라크나 침공위 워험이 직면한 시리아, 식민 통치에 허덕이는 티베트, 박정희나 전두환과 유사한 점이 있는 노선을 지향하는 푸틴 정권 하에서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를 체득하고 있는 러시아 등, 그 모든 변방들에 대한 동병상련의 동지 의식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이미 성공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박노자 교수의 몫이 그것이라면 이후 하얀 가면을 벗는 일은 우리의 몫일 것이다.**
2007/04/15 18:11 2007/04/1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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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캐릭터는 골룸(Gollum)이다. 물론 <반지의 제왕>영화 전체에서 보여준 인간에 대한 톨킨의 전반적인 이해와 표현은 나에게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는, 선악의 구분이 너무 극명한 헐리우드 액션 영화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냄새가 물씬 풍겨서 누가 누구 편인지도 모르도록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요즘 영화의 흐름과도 구별되는 무엇이 나에게 큰 호감을 가져다 준 것이리라.

톨킨(J. R. R. Tolkien)은 인간의 이중성에 초점을 맞추는 듯 하다. 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두 가지의 마음.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지속적으로 갈등하는 인간의 내면과 그 사이에서 진행되는 사건이 잘 맞물려 있는 <반지의 제왕>은 거대한 스케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2편에서 등장한 골룸이라는 캐릭터는 그런 인간의 이중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인물이다. 처음 반지를 가지고 있었던 골룸은, 베긴스에게 잃은 반지를 가지고 다시 나타난 프로도에게 접근한다. 프로도는 골룸의 사정을 알고 동정심을 느껴서 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지원정대의 여정에 그를 동반하게 만든다.

골룸은 두 개의 인격을 함께 가지고 있는데, 비교적 선한 생각을 하는 "스미이골"이라는 캐릭터가 평소에는 판단을 하다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내면에 숨어있던 골룸이 악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스미이골의 내면을 물들이게 된다. 영화에서 스미이골은 골룸의 부정적인 생각에 강한 지배를 받고 있는 듯 하다.

자신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준 프로도를 보면서, 스미이골은 갈등을 하게 되는데 골룸의 강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스미이골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프로도를 주인으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자기의 내면에 부정적인 생각을 집어넣는 골룸을 내면에서 몰아낸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내적 치유"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내면의 상처는 "거절감"에서 오는 것이 많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나 집단으로부터 거절 당하고, 소외되어 종국에는 자신의 가치와 자존감에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되며 이는 지속적으로 내면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결과 이후의 삶에서 쉽게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되고 항상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로 인해, "거절감"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상대를 먼저 거절하거나 관계 자체를 환멸하게 된다. 스미이골 안에 살고 있는 골룸처럼.

한편, 이런 상처 안에는 항상 두 마음이 존재하는데 하나가 그런 관계에 대해 부정해버리는 것이라면 또 다른 마음은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프로도는 스미이골의 마음을 열었다. 그는 칼을 칼집에 집어 넣고 올무를 풀어주고 그에게 친구의 자격을 부여했다. 그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흔히 거절감에서 오는 상처는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줄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게 되면 치유가 된다고 말한다. 대부분 그것은 사실이다. 단, 그 사람이 온전한 경우에 한해서 그렇다.

무엇보다 내가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이라는 캐릭터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 부분은 그 뒤의 이야기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은 골룸의 내적 치유가 완전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프로도가 완전하지 않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때때로 상황은 사람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하고, 좋았던 관계가 다시 냉랭해지거나 상대방에 대한 불신의 씨앗을 자라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거기에서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내면의 쓴뿌리는 다시 자라난다. 오히려 전보다 더 무성해질 수도 있다. 골룸처럼.

골룸을 보면서 너무 흥미로운 나머지, 나는 이후 부분을 원작을 통해 보았다. 골룸은 남은 이야기 내내 샘과 프로도를 불신하게 된다.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처음 내면에 각인된 상처는 치유의 과정을 거친 후에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골룸의 목소리를 견뎌내야만 한다. 때로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이겨내기도 하고, 짓밟아버려서 내 안에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과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또다시 어느덧 내 안에서 다시 들려오는 부정적인 목소리는 여전히 내 상처가 치유의 과정을 겪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곤 한다.

어쩌면, 골룸의 모습은 불완전한 나의 내면의 모습인지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모습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  
2007/04/08 18:08 2007/04/0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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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 영혼당 2달러로 결과를 보장한다"
마이클 호튼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 현대 복음주의 세일즈 마인드를 비판

/김용주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영화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할리우드 영화에 미쳐있던 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학교 다닐 때부터 미국 영화의 제목과 감독, 주연 배우들 이름은 물론 영화의 스타일이나 기타 세세한 내용까지도 외우고 다닐 정도다. 종국에 그 친구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시나리오 대상을 수상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할리우드 영화의 장면 장면을 짜깁기해 놓은 것으로 밝혀지는 내용이다.


패스트푸드처럼 길들여진 미국식 복음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나는 미국 문화에 너무나 깊게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그 즈음에야 처음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피자헛'에서 이태리식이 아닌 미국식 피자를 시켜먹고 '스타벅스'에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며, '와퍼'나 '빅맥' 같은 햄버거에 <터미네이터>와 <프렌즈>를 즐기며 보며 자라온 나에게서 한국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는 교회 문화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Praise & Worship'이란 용어는 한국에서 특정한 찬양 집회의 형태를 의미한다. 또 한국에서 일어나는 찬양집회의 스타일은 정확하게 'Hosanna Integrity'나 'Vineyard Church'에서 행하는 스타일과 일치한다. 결국 한국 교회의 찬양 집회는 그 스타일 그대로를 한국말로 번역하여 따라한다는 의미다. 소그룹 운동, 극장식 교회, 내적 치유와 같은 용어들은 미국 교회에서부터 발생되어 한국으로 넘어온 개념들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좋건 싫건 세속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미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론으로 넘어가자. 마이클 호튼의 저서인 <복음이란 무엇인가>(원제: Putting back into amazing grace)는 책에 쓰인 대로 기독교의 기본 진리, 즉 교리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흥미롭게도 종교개혁 세계로 초대한다. 마이클 호튼은 우리가 기독교 역사를 통해 접한 대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만인제사장주의, 종교개혁의 보편성, 실재성, 예배중심성에 대한 주의 환기로 우리를 교리의 중심으로 이끈다.


복음은 24시간 편의점처럼

이 책의 흐름은 정확하게 기독교의 기본진리와 일치한다. 도예빌트가 완성한 창조, 타락, 구속의 흐름을 따르면서 예정론과 성육신, 소명과 중생, 칭의, 교회와 성례, 그리고 종말까지 우리가 명쾌히 정리하고 내적 확신을 가져야 하는 중심 교리들을 모두 건드리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집중한 교리적인 측면을 서술하기보다는 그간 기독교 현대적 이슈들을 건드렸던, 웨스트민스터의 신학 교수로 하여금 왜 또다시 복음주의적 정통 교리에 집중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 어쩌면 그러한 컨텍스트가 우리에게 더 큰 시사점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호튼의 전작인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는 이 책과 함께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 사회로부터 신앙의 근본적인 '수혜를 입는' 우리에게 이 책은 시사하는 면이 많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마이클 호튼은 이 책을 통해서 미국 복음주의자들이야말로 미국 사회와 시민 생활과 문화 생활에서 기독교 몰락의 주범이며, 기독교적 활력의 침체의 책임은 세속 인본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속화된 기독교인에게 있다고 서술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입교인 자격에 회심의 체험을 요구한 지 불과 30년이 지난 1662년에 와서 성찬이 "중생의 여부와 관계없이 품행이 단정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다는 점과 당시 기독교가 점점 타협을 통하여 한 사회를 통합 유지시켜주는 '시민종교'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이 칼빈주의적 정통신앙을 포기할 때, 그들은 가족과 교회와 지역 사회 및 학교와 직장에서 그들에게 성경적 원리대로 행동하며 사고할 수 있게 하는 지적 사고의 체계 또한 함께 버렸으며 홉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교회들은 세속 사회와의 지적 접촉을 회피하였고 신앙이 지적 경험의 총체적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호튼은 제2차 대각성 운동 기간(1775~1825)에 대중적인 부흥 운동을 통하여 신앙의 객관적 내용이 신앙의 실존적 행동으로 대체되어 버렸음을 강하게 비판한다.

"죠지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끌었던 제1차 대각성 운동을 제2차 대각성 운동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초기의 대각성 운동시 신학적, 철학적, 학문적 천재인 조나단 에드워즈가 바로 전도자였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초대했는데, 다름 아닌 교리에 대한 명료한 선포를 통해 그 일을 수행했다…(이하 중략)…그러나 제2차 대각성 운동시에는 메시지가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전환되었다.

첫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는 강조점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에 있었다면 두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리하여 구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듣는 사람들이 해야만 할 일을 할 수 있게 하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테크닉과 방법의 큰 체계가 등장하게 되었다. 에드워즈나 휫필드에게는 부흥이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였다. 그에 반하여 나다나엘 테일러와 찰스 피니에게서 부흥은 "수단을 올바로 사용한 것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특히 피니는 '부흥은 기적이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도 기적에 의지하지 않는다. 부흥은 순전히 수단을 올바르게 사용한 철학적 결과이다’라고 말했다."


소비자 중심이 최고의 복음?

이러한 신앙의 실용주의적인 잣대가 개입되었던 부분뿐만 아니라 미국 복음주의는 소비자 중심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19세기 말의 복음전도자 드와이트 무디가 세일즈의 접근법을 그의 복음 전도 사업에 이용하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복음 전도자이지만 복음을 전할 때 여전히 세일즈맨이라고 주장했던 점을 지적한다. 즉 그는 단지 파는 상품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세기가 바뀐 후에 빌리 선데이는 강단을 무대로 바꾸기가 일쑤였으며 자기가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도자이며 한 영혼당 단 2달러로 결과를 확실히 보장한다"고 자랑하곤 했던 점을 인용하며 현대 복음주의의 세일즈 마인드를 비판한다.

또한 그는 크리스탈 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가 "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이지 인간 중심적이 아니라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과거에 루터와 칼빈이 신본주의적으로 생각한 것은 적절했다. 하지만 이제는 형세가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나 자아 존중이라는 새로운 종교개혁에서 "죄는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에게서 신적인 존엄성의 권리를 빼앗는 것은 무엇이나 죄"라고 주장했던 점을 지적했고, 이렇게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난 현대 교회의 문제들을 토저의 말을 인용하여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신식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지 않는다. 그 새 십자가는 죄인에게 더 즐겁고 깨끗한 삶의 길을 보여 줌으로써 죄인의 방향을 고쳐 준다. 주장이 강한 사람들에게 새 십자가는 '자! 어서 주님을 향하여 너희 권리를 주장하라'고 말한다."

미국제 복음주의의 부정적 영향은 한국 교회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경영자 예수", "자아 회복을 위한 효율적 기독교"라는 문구들이 여전히 즐비하며 인간의 편의를 위해 예배당을 공연장처럼 혹은 수많은 물질을 투자하여 크리스털 교회에 버금가는 교회를 짓고자 애쓰는 교회도 보인다. 인간의 죄는 상처로 대체되었고, 전 지구적 구원은 개인의 내적 치유로 변질되고 있으며 사상의 중심에 서있던 복음주의자들은 도리어 신앙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위안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한 생각을 품는다.

하나님 중심의 신학은 인간 중심, 인간 편의를 위한 시민종교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를 쓴 호튼의 비판이었고, <복음이란 무엇인가>는 진정한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되짚어 보고자 하는 그의 충정 어린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할리우드 키드로 대변되는 우리도 그의 메시지에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아야겠다. 

2007/03/15 18:15 2007/03/15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