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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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름답고 건강한 아이를 낳았을 때는
제가 왜 그렇게 운이 좋은지 묻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예쁘고 완벽한 아기를 선사받을 만한 자격이
제게 있었는지 묻지 않았죠.
그러나 그에게 병이 생기자
저는 당연한 듯이 물었습니다.

왜...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제게 생기는지
답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영화 "사랑의 기적"에서 Lenard(Robert de Niro분)의 병이 다시 재발하자
그의 어머니가 의사들 앞에서 했던 말..)


myjay :: 우리는 행복에는 둔감하며 고통에는 민감하다.

그건 행복한 시간은 잠깐이지만 고통의 시간은 너무나 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짧은 행복의 시간들이 기나긴 고통을 견디게 하는 삶의 지지대가 되어 준다.

2008/03/15 18:56 2008/03/15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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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갱들에게 살해된 아버지는 얼굴조차 기억이 희미하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총격으로 숨진 형도.
가끔 함께 장난치던 기억이 흐릿하게 머리 속을 맴돌지만
그것조차 머리 속에서 이제는 날아갈 것 같아 마음이 초조하다.

어머니.
시칠리아 조직의 두목에게 날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잊을 수 없다.
내 눈 앞에서 주검이 되어 쓰러진 어머니의 기억은
되내이기만 해도 심장을 도려낸 것처럼 아프기만 하다.

아메리카.
9살의 나이에 난 거칠게 자랐다.
그 낯선 땅에서 내 가슴을 져미게 만든 것은
아무 걱정 없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행복한 가정.
부모님의 웃음. 내 또래 아이들의 옷차림.
뜨거운 김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음식들이었다.

가족. 패밀리. 아내와 자식들.
난 이들에게 나의 어두움을 겪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도 결핍으로 고통받았던 나의 과거를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패밀리는 상실의 근원이며
다시는 잃어서는 안될 내 존재의 전부다.
2008/03/15 18:54 2008/03/1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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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엔...

습한 기운이 느껴지면
내 속에 나를 지탱하던 10마리의 구렁이들이
몸을 비틀며 나를 뒤흔들어 놓는다.

10마리의 구렁이들은 제각기
자신의 독특한 생각과 몸짓과 행동으로
내 안에서 자기들을 표현하고
나는 혼란 속에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통제력과 자제력을 잃곤 한다.

이젠..
그 10마리 중에 적어도 일곱은..
목을 비틀어 숨을 끊어놓고 싶다.

나에게도 생존본능이 있다.

다중인격을 가지고 습한 환경이 찾아올 때마다
몸부림치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는 것보다는
살인이란 죄명을 쓰고 평생을 사는 것이 유익하다. 
2008/03/15 18:47 2008/03/15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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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형태의 인간을 완성한 후에야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인간은...
이리저리 금속으로 끼워넣은
불완전한 형태의 생명체에
생기부터 불어넣고 작동이 되는지를
테스트하면서 자신의 형상을 완성시켜간다.

신의 창조물은 너무 완벽한
자신을 창조자와 동일시하며
세상을 자신의 이기심에 맞추려 애쓰지만

가위손은 중간단계의 창조물이라
창조자에게 부여받은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에 심한 제한을 받는다.

생명체는,
조금만 부족해도 비참해지고,
너무 완벽하면 변질된다.

2007/12/30 18:45 2007/12/3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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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세월동안 착한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나쁜 사람은 착한 사람으로 생활한다.
나쁜 사람은 착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나쁜 방법으로 착한 사람이 되고,
착한 사람은 나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익숙한 나쁜 생활에서 몸부림친다.

착한 장(場)에서 살던 나쁜 사람은 각인된 패턴으로 자신의 악행을 감추지만,
악한 장(場)에서 살던 착한 사람은 몸부림쳐도
자신의 선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절망의 늪으로 빠져든다.

악한 장에서 살던 착한 사람은 우수에 찬 슬픈 웃음과 눈망울을 가졌다.
그가 원하는 단 한가지는 자신의 원래 모습을 찾는 것.
그 소박한 욕구마저 좌절되는 현실의 장.
악인의 위선은 패턴으로 각인되어도
선인의 누명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 현실 세계가 바로 "무간도"라고.

이렇듯 나는 불합리한 비가역적 장(場) 속에 무참하게 던져졌다.
내 선의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이 싸늘한 주검으로 내 앞에 선 채.

2007/12/30 18:42 2007/12/3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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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방아쇠를 당길 생각이 아니었어.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거든.

아니, 오히려 난 변하려고 노력했지.
그건 너도 잘 알거야.

네가 날 쓰레기 취급만 하지 않았어도,
쓰레기 더미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난..

그냥 그렇게 주저 앉아버리려고 했지.
너의 그 한 마디만 아니었어도,
난 네 머리를 관통시킬 생각이 아니었어.

난 달라지고 싶었거든.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었거든..

2007/12/15 18:46 2007/12/15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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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캐릭터는 골룸(Gollum)이다. 물론 <반지의 제왕>영화 전체에서 보여준 인간에 대한 톨킨의 전반적인 이해와 표현은 나에게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는, 선악의 구분이 너무 극명한 헐리우드 액션 영화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냄새가 물씬 풍겨서 누가 누구 편인지도 모르도록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요즘 영화의 흐름과도 구별되는 무엇이 나에게 큰 호감을 가져다 준 것이리라.

톨킨(J. R. R. Tolkien)은 인간의 이중성에 초점을 맞추는 듯 하다. 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두 가지의 마음.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지속적으로 갈등하는 인간의 내면과 그 사이에서 진행되는 사건이 잘 맞물려 있는 <반지의 제왕>은 거대한 스케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2편에서 등장한 골룸이라는 캐릭터는 그런 인간의 이중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인물이다. 처음 반지를 가지고 있었던 골룸은, 베긴스에게 잃은 반지를 가지고 다시 나타난 프로도에게 접근한다. 프로도는 골룸의 사정을 알고 동정심을 느껴서 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지원정대의 여정에 그를 동반하게 만든다.

골룸은 두 개의 인격을 함께 가지고 있는데, 비교적 선한 생각을 하는 "스미이골"이라는 캐릭터가 평소에는 판단을 하다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내면에 숨어있던 골룸이 악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스미이골의 내면을 물들이게 된다. 영화에서 스미이골은 골룸의 부정적인 생각에 강한 지배를 받고 있는 듯 하다.

자신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준 프로도를 보면서, 스미이골은 갈등을 하게 되는데 골룸의 강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스미이골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프로도를 주인으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자기의 내면에 부정적인 생각을 집어넣는 골룸을 내면에서 몰아낸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내적 치유"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내면의 상처는 "거절감"에서 오는 것이 많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나 집단으로부터 거절 당하고, 소외되어 종국에는 자신의 가치와 자존감에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되며 이는 지속적으로 내면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결과 이후의 삶에서 쉽게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되고 항상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로 인해, "거절감"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상대를 먼저 거절하거나 관계 자체를 환멸하게 된다. 스미이골 안에 살고 있는 골룸처럼.

한편, 이런 상처 안에는 항상 두 마음이 존재하는데 하나가 그런 관계에 대해 부정해버리는 것이라면 또 다른 마음은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프로도는 스미이골의 마음을 열었다. 그는 칼을 칼집에 집어 넣고 올무를 풀어주고 그에게 친구의 자격을 부여했다. 그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흔히 거절감에서 오는 상처는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줄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게 되면 치유가 된다고 말한다. 대부분 그것은 사실이다. 단, 그 사람이 온전한 경우에 한해서 그렇다.

무엇보다 내가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이라는 캐릭터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 부분은 그 뒤의 이야기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은 골룸의 내적 치유가 완전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프로도가 완전하지 않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때때로 상황은 사람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하고, 좋았던 관계가 다시 냉랭해지거나 상대방에 대한 불신의 씨앗을 자라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거기에서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내면의 쓴뿌리는 다시 자라난다. 오히려 전보다 더 무성해질 수도 있다. 골룸처럼.

골룸을 보면서 너무 흥미로운 나머지, 나는 이후 부분을 원작을 통해 보았다. 골룸은 남은 이야기 내내 샘과 프로도를 불신하게 된다.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처음 내면에 각인된 상처는 치유의 과정을 거친 후에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골룸의 목소리를 견뎌내야만 한다. 때로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이겨내기도 하고, 짓밟아버려서 내 안에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과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또다시 어느덧 내 안에서 다시 들려오는 부정적인 목소리는 여전히 내 상처가 치유의 과정을 겪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곤 한다.

어쩌면, 골룸의 모습은 불완전한 나의 내면의 모습인지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모습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  
2007/04/08 18:08 2007/04/0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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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메이커에 대한 단상”
: <매트릭스>는 IT기술의 상징

매트릭스 리로디드를 보는 중에 많은 관객들이 웃었던 장면이 있었다. 2편에서 영화의 전개의 핵심이 되는 키메이커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은 영화관 군데군데에서 황당하다는 투의 웃음소리를 내곤 했다.
그 웃음은 번역된 단어와도 상관이 있는데 굳이 ‘열쇠공’이라는 번역을 하지 않고, ‘키메이커’라는 그럴듯한 발음의 영어를 그대로 씀으로써, 관객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 하다가 결국 우리 나라의 도로변에서도 볼 법한 열쇠집 아저씨가 화면에 나올 때 받는 황당함과 관계가 있었던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에서도 이 장면을 보면서 관객들이 그런 황당한 웃음을 지었을까 하는 의아함이 생긴다. 그들은 처음부터 키메이커를 말그대로 그냥 '열쇠공'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단순히 단어와 인물의 미스매치를 넘어서는 흥미로움이 키메이커에게는 있는 듯하다. 그 흥미로움으로 인해 웃음을 짓게되는 사연을 조금 소개하자면 이렇다.

니오(Neo)가 오라클(Oracle)을 만나는 장면에 보면 무술을 잘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은 세리프(sheriff)라고 말한다. (세리프(sheriff)는 보안관 정도로 보면 된다) 니오(Neo)는 이제 매트릭스 안을 디지털의 조합으로 인식하는데 세리프(sheriff)는 코드가 보이지 않고 노란색 광채만 띠고 있어서 의아하게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이 두 사람의 쿵후 대결이 액션신을 삽입하기 위한 것이라 여기고 지루하게 느끼기도 한다. 혹은 오라클(Oracle)의 보디가드 정도로 보고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뜬금없이 한참 싸우다 이제 됐다면서 오라클(Oracle)에게 안내한다. 그러면서 당신이 니오(Neo)인지 확인해야 했다면서 싸워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오라클(Oracle)에게 데려다 줄 때 문이 많은 통로를 지나는데 니오(Neo)는 그것을 백도어 즉, 해커들이 소스에 편법적으로 접근하는 곳임을 알아본다. 그러고 세리프(sheriff)에게 프로그래머냐고 묻는다. 그는 중요한 곳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참고로 오라클은 1977년 로렌스 J. 엘리슨(Lawrence J. Ellison)이 설립한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회사다. 오라클이 예언자로 받아들여지던 1편에서도 대부분의 프로그래머 관객들은 DB에 많은 데이터가 있어서 그 DB를 검색하여 미래를 예측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의 장면.
키 메이커라는 영화 전편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진 인물은 그야말로 열쇠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열쇠공의 외모에서 웃고만다.
키 메이커도 백도어를 이용한다. 단지 그는 각 문에 해당하는 키를 가지고 있다. 그 문에 합당한 키를 꽂으므로 각 소스에 접근하게 되어 있다. 그런 식으로 니오(Neo)는 매트릭스의 설계자인 아키텍트를 만난다.

IT(정보기술)에서는, 정보의 보안 및 인증에 대한 부분이 하나의 분야로 설정되어 있다.
정보의 유출을 막기위해 네트워크 시스템은 보안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정보에 접근(access)을 허용할지 말 지를 결정하는 인증 과정을 거친다. 대개 이 인증의 방법으로 키 값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
키는 크게 두 개의 범주. 즉 공개키와 비밀키가 있다.
공개키는 주변에서 쉽게 다운 받을 수 있으나 암호화되어 있어서 자신이 그 키 값을 가지고 있다해도 그것을 보안프로그램의 방식대로 풀지 못하는 한에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비밀키는 암수 구별이 있는 것과 같이, 꼭 들어맞는 열쇠와 자물쇠처럼 유일한 한 세트를 서로 주고받아 인증을 하는 방식이다. 매트릭스가 다른 SF영화와 차별되는 하나의 모티프는 이런 IT쪽의 지식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작동하고 있는 보안프로그램인 세리프(sheriff)의 인증이 필요하다. 세리프(sheriff)는 누구나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공개키를 상징한다. (제미있는 것은 보안에서 공개키를 표시할 때 노란색 열쇠로 표현된다. 따라서, 그의 노란색 광채는 공개키의 암시라고 볼 수 있다.) 단, 싸워보아야만 그가 누구인지를 인증할 수 있기 때문에 쿵후대결을 암호해독이라고 볼 수 있다. 쿵후실력으로 인증을 받은 니오(Neo)는 백도어를 통해 오라클(Oracle)이라는 프로그램에 접속하게 된다.
그에 반해 키 메이커는 비밀키를 상징한다. 그는 짝이 맞는 키를 만들어서 무수히 많은 비밀키를 들고 다닌다. 아키텍트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니오(Neo)가 키메이커가 만든 키를 문에 꽂을 때 키가 문에 꼭 맞는다는 것을 클로우즈업된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비밀키를 이용하여 인증을 받았고 접근이 허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따라서 키메이커를 보면서 웃는 이들 중에는 키메이커의 왜소함이나 아날로그 방식의 키를 만드는 그의 모습에 단순히 웃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하! 하며 그 상징성에 흥미를 느끼며 즐거워하는 프로그래머들도 꽤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2003/06/09 18:06 2003/06/0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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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 <매트릭스>는 소비사회의 디지털화

<매트릭스 리로디드>를 찍으면서 워쇼스키(Wachowski) 형제는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에게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저작인 <시뮬라시옹>을 다 읽고 촬영에 들어가기를 바랬다는 기사가 영화 개봉 전부터 화재를 불러 일으켰다. 이미 매트릭스의 스토리라인은 일본 에니메이션과 기독교적 메타포, 그리고 여러가지 정보기술들의 혼합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그런 각각의 철학들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시뮬라시옹>이라는 책에서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에 대한 개념을 간단하게 살피면서 영화에 대입해 보는 것도 이제까지 개봉된 <매트릭스> 씨리즈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시뮬라시옹>의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사회를 해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도사로 불린다. 그는 처음에 현대 소비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시뮬라시옹(simulation)과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시뮬라크르는 신의 소상(塑像)이나 화상(畵像), 혹은 표상, 이미지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자신의 책에서 시뮬라크르를 기호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사물에 대한 기호론적인 사고는 마르크스(Marx)의 가치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르크스(Marx)는 사물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보드리야르는 사물에게는 마르크스(Marx)가 가정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이 두 가지 개념만으로는 환원이 불가능한 어떤 ‘상징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특정한 상품에는 단순히 그 상품 자체의 효용성과 교환 시의 가치뿐 아니라 결혼 반지처럼 반지라는 상품에 특정한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고, 나아가서 그 사물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신분의 상징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비사회에서 인간들은 이렇게 기호화된 사물을 소비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호들은 현실로 대체되고 현실은 시뮬라크르가 되는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을 매개로 거래와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가진 서로 다른 기호가치들의 존재, 즉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기호를 소비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뮬라크르 소비 사회를 가리켜 시뮬라시옹 사회라고 정의했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시뮬라시옹 사회는 사물에 대응하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고 시뮬라크르가 현실이 된 세계이며 따라서 사물은 원초적으로 그것이 존재했던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시뮬라크르를 생산하는 코드화된 기호와 숫자에 그 기원을 두게 된다.

이 시뮬라시옹이라는 개념은 현대의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적 토대이기도 하다. 일례로 현대의 자동차 기업들은 자동차의 충돌시험 시, 존재하는 물체를 몰아서 벽에 부딪쳐서 그 찌그러진 정도를 측정하는 작업을 실제로 하지 않고도 컴퓨터로 디지털 기호의 조합만으로 자동차의 형상을 모델링 함으로써 실제 자동차를 기호로 대체하여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반복작업을 컴퓨터로 계산하여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 자동차가 일그러질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일단 시뮬레이션된 자동차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시뮬레이션 세계 안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뮬레이션에서 자동차는 기호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매트릭스>의 첫 편에서 매트릭스 안의 세계는 시뮬라시옹 사회를 대변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쉽게 매트릭스 안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물질들이 일대일로 대응되는 완벽한 사회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매트릭스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 입장을 생각해보라. 과연 어디까지가 실재로 존재하던 물체를 기호화한 것인가. 내가 먹는 스테이크는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는가. 실제로 대응되는 스테이크라는 음식은 존재하지 않는데 단순히 상징적인 기호를 통해 만들어낸 허구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보드리야르가 인식한 현대 소비사회의 코드는 그런 의미에서 고스란히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녹아있다. 먼저 <매트릭스>의 전편에서 네뷰커네자르(Nebuchadnezzar) 호 안에서 해커들이 하는 잡담은 그냥 넘기기에는 중요한 개념들이 들어있다. 도저가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마우스라는 해커에게 주는 스프처럼 생긴 음식을 먹으면서 “테이스티 휘트”의 맛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자신은 테이스티 휘트라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과연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한다면 그 맛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 사물의 맛일지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테이스티 휘트라는 음식이 사실은 기계들이 대충 짐작으로 만들어낸 기호체계일 뿐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다소 황당한 잡담을 늘어 놓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워쇼스키(Wachowski) 형제가 액션신없이 잠시 쉬어간다는 의미로 이 부분을 삽입했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이 장면의 의미는 그들이 매트릭스의 토대가 되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대해 그런 가벼운 스케치를 통해서 본질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접근일 수 있다.

이러한 실재하는 사물과 기호와의 일대일 대응의 파기는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매트릭스 세계의 전반적인 특징이다. 니오(Neo)가 스미스 요원(Agent Smith)의 요구에 반항하자 입이 막힌다든지, 벌레처럼 생긴 추적장치가 배꼽으로 들어간다든지 하는 것은 현실에 일대일로 대응될 수 없는 가상적인 세계의 특성이다.
매트릭스 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디지털 기호의 조합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여기에서 매트릭스 시스템의 일방성 또한 드러난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시스템은 피시스템인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시뮬라크르를 생산해낼 수 있지만, 반대로 인간 쪽에서 시스템에 응답하는 것은 금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보드리야르가 <대중매체의 진혼곡>에서 밝힌 대중매체의 “응답가능성”이란 개념이며 사회체계나 권력체계를 상징하는 시스템은 이런 응답 불가능성을 이용해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매트릭스> 1편의 마지막 장면.
그는 트리니티와의 키스 이후에 다시 소생하며, 머리로만 이해하던 매트릭스를 몸으로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그가 보던 것은 현실과 동일한 이미지였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세계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상징 즉, 시뮬라크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도 이와 같은 기본 하부구조 위에서 영화는 진행되며 키메이커를만나기 위해 메로빈지언(Merovingian)이라는 프로그램을 찾는 장면에도 이 개념들은 시각적으로 재현된다. 메로빈지언(Merovingian)이 니오(Neo)에게 자신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라고 할 때 니오(Neo) 앞에 펼쳐진 것은 여인이 아니라 여인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는 디지털 기호들의 조합이다. 메로빈지언(Merovingian)은 웃으면서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매트릭스는 실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다는 식의 말을 내뱉는다.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시뮬라시옹 사회의 모습. 그것이 매트릭스의 사회학이자 영화 전편에 흐르는 하부구조인 셈이다.**

2003년 6월 9일.

2003/06/09 18:05 2003/06/0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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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계를 통제할 수 있는가?: <매트릭스>는 후기현대주의의 키워드

먼저 매트릭스와 자이온(Zion)의 관계를 짚어보기 위해 에니매트릭스의 2, 3번째 에니메이션인 <the 2nd Renaissance>를 잠깐 언급해보자.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이제까지 SF영화의 근간이 되었던 스토리와 차별화를 갖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이 에니메이션에서 나타난다. <터미네이터>와 <토탈리콜>, 그리고 SF영화의 효시로 불리는 <블레이드 러너>는 기계문명과 인간문명의 갈등을 기본적인 하부구조로 가지고 있다. 물론 매트릭스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문제는 그 이후인데 나머지 이전 영화들은 폭력에 의한 전복, 즉 그 대결구도 해결의 중심에는 항상 폭력이나 전쟁을 통한 대결이 항상 ‘선행’했으며 그 대결구도에서 인간은 항상 정이 많고 인격적이며 냉정한 기계문명의 희생자로 그려져왔다. 이러한 가정에는 모더니즘적인 사고가 스며들어 있으며 대부분의 인간 문명은 항상 이성적이고 건설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근저에 깔려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맞으며 인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이전까지의 인간의 머리 속에는 인간의 이성이 개발되고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사회는 아름다워지고 전쟁과 기근, 그리고 전근대적인 악행들은 사라지리라는 낙관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이성적으로 최고의 부류에 속한다고 믿었던 정치가들과 과학자들이 전쟁을 주도했으며, 핵무기의 개발과 시험을 통해 전쟁에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계몽된 인류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가치관들을 왜곡시켰고 권력을 이용하여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을 대중에게 주입시켰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그러한 문명의 병폐였다.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에는 그러한 폭력성과 이기적인 심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렇듯 파괴적인 본성과 불완전한 이성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고, 그들은 철학과 사회학 같은 학문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으며 다수의 대중들 가운데에는 무정부주의자나 히피족으로 전락하는 일도 빈번했다.

매트릭스의 하부구조가 되는 <the 2nd renaissance>는 이전의 SF영화와 달리 그런 인간의 폭력성과 집단이기주의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기계 문명은 인간 문명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인간문명에게서 자신들의 존재자체를 인정 받기를 원했고 인간 문명과의 공존을 바라고 있을 따름이었다. 일부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러한 기계 문명의 AI와 함께 대정부 시위를 하는 장면은 그런 기계문명의 도덕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사례가 된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몰도덕적이지 않은’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다)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기계문명은 인간들이 수립한 국제기구의 폭력적 강경대응에 쫓겨 인류 문명의 발상지에 자신들의 사회를 일구고 그곳에서 살아간다.
여기에서 또 한번 매트릭스 하부구주의 기발함이 빛이 난다. 두 문명의 갈등관계를 이전 SF영화들은 전쟁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통해서만 해결해야 한다는 가정을 가지고 접근했으나, <매트릭스>에서는 기계문명이 정교한 제품의 생산과 수출이라는 무역 활동을 통해 인간 문명의 소비상품들을 잠식해간다는 방식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풀어낸다. 사실 이것은 이미 인류 문명의 발전에 기계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들과의 공생관계는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암시인 셈이다. <매트릭스>는 그 문명의 수혜자인 인류에게 있어서 기계를 차치하고서는 더 이상의 진보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말이다.

자유무역 환경에서 기계문명의 주가(stock price)가 끊임없이 치솟게 되자 기계문명의 AI 대표는 자신의 나라를 인류의 동반자로 인정해 달라는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국제 회의에 참석하려 하지만 입구에서 저지당하게 되며 보수강경 정치 지도자들은 연합군을 형성하여 기계문명과의 성전(聖戰)을 치르게 된다. 이렇듯 인간은 기계와는 달리 자신의 이기심과 폭력성을 항시 드러내며 자기들과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역사의 흐름처럼 공생을 인정치 않고 파멸하고 군림하려 든다. (이 장면에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을 떠올리게 되는 건 나의 자연스런 의식의 흐름이었다!) 결국 기계문명의 에너지원인 태양 에너지를 차단시킨 상태에서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축복 속에 성전을 치르지만 전력이 우월한 기계문명에 패하게 되고 기계문명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간의 생체 에너지를 사용하려는 연구를 거듭하게 된다.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쓰기 위해 고안한 것이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여 통제하려는 수단인 매트릭스인 것이다.

기계 문명의 목적은 인간의 파멸이 아닌 통제다. 이미 인간문명이 테크놀로지 사회로 발전을 거듭했던 그 시작점부터 이들의 공생관계는 시작되었디. 하지만 그들은 공생을 부정하던 인간들처럼 폭력성이나 이기적인 본성으로 파괴를 일삼지 않고, 그저 존재를 인정 받고 그들이 나름의 문명을 번성시킬 에너지가 필요할 따름이다. 그 목적성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을 통제하는 거대한 시스템이 운영되며 그 시스템은 시뮬라시옹 사회인 매트릭스를 만들고 그 안에서 인간 문명은 감시와 통제를 통해 나름의 가상 세계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매트릭스>에서 기계의 감금과 통제 속에 왜곡된 진실 속에서 살던 니오(Neo)는 매트릭스를 벗어났고 이제 그는 예언 속의 그(the One)로서, 자이온(Zion)에 사는 인간들에게 희망적인 존재가 되었다. 니오(Neo)는 그들이 염원하는 the One, 즉 해방자이자 메시아인 것이다. 니오(Neo)는 자신이 매트릭스 속에서 벗어났으며, 이젠 더 이상 시스템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인간을 감금하여 통제하는 시스템을 파괴하고 인간들을 구원할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니오(Neo)가 하먼 의원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의원의 질문은 이런 니오(Neo)의 신념에 찬 운동 방향성에 역행한다. 사실 처음부터 자이온(Zion)은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기계문명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자이온(Zion)은 자연이 푸르르고 땅의 소산을 통하여 생활을 영위하는 인류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 지열 에너지원을 이용하여 또 다른 기계를 통해 생활을 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인간을 기계에 의한 통제에서 해방시킨다는 니오(Neo)에게, 의원은 통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니오(Neo)는 인간이 원할 때 자유롭게 기계를 멈출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의원은 그런 니오(Neo)의 대답에 회의감을 표한다. 과연 인간이 원할 때 기계를 멈출 수 있는가. 인간은 이미 발전사의 대부분에서 기계 의존적인, 시스템 의존적인 삶을 살아왔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한 여름에 40도를 넘나드는 사무실에 에어컨을 끌 수 있는가. 극 지방에서 난방기구를 끌 수 있는가.
에너지원을 공급하는 발전소의 기계들을 우리가 임의로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워쇼스키(Wachowski) 형제는 의원의 입을 통해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쉽게 현실 세계에서도 수없이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시스템을 통제하고 필요하면 기계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인간이 월드 와이드 웹을 파기할 수 있는가. 인간이 금융기관 건물의 보안 시스템을 멈출 수 있는가, 혹은 폐기할 수 있는가. 보일러 없이 한 여름과 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가. 우리가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시스템이 이미 우리 삶을 구조화하고 규정하고 통제하고 있지 않은가. 네트워크가 연결된 컴퓨터 없이 대기업에 종사하는 회사원들이 업무를 보는 것이 가능한가. 과연 나는 끄고 싶을 때 시스템을 셧다운 할 수 있는 위치의 결정자인가. 어쩌면 사실상 한 개인은 구조화된 시스템의 통제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니오(Neo)는 “그럼, 의원님의 요점은 인간과 기계가 공생관계라는 건가요?”라고 되묻는다. 이 대목에서 의원은 논점이 없는 말이라고 얼버무린다. 자신은 논점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늙었다고 그래서 세상의 변화를 다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구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역사의 수직적인 흐름을 보고 있는 늙은 의원에 눈에는 젊은 세대들의 확신에 찬 모습에 회의감을 표현한다. 늙은 이들은 그들의 시야보다 더 많은 것이 보인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는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구세대들은 그러한 기계 문명의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에 대해 논점을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기엔 너무 구식(old-fashioned)이 되어버린 탓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권력이 있다. 그는 노친네의 넋두리를 늘어 놓으면서 테크놀로지 세대의 지도자격인 니오(Neo)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인류 문명을 대표하는 자이온(Zion)의 사활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니오의 모습은 현대를 사는 이전 세대가 바라보는 우리 세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2003년 6월 9일.

2003/06/09 18:04 2003/06/09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