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사님 단상. 1
'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육아나 운전, 인간관계 등 일상적으로 겪는 이야기들을 적다가 마지막에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로 환원 혹은 유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아이의 어리석음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로 환원하거나 새 한마리를 살리기 위해 많은 비용이 드는 대목은 죄많은 인간 하나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한 존재가 그들의 죄를 위해 값진 희생을 치르는, 보다 고차원적인 '유비'(analogy)가 된다.
나는 모든 일상을 하나님의 사랑, 그분의 공의, 정의로 환원하는 신심을 추호도 의심하지는 않으나 사실 자주 이런 글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신심으로 도약하는 모든 '개별 이야기'는 퇴색되기 때문이다. 본론은, 더 고차원적인 의미는, 더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이런 너저분한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다수가 설교욕구가 있다. 어떤 사건의 의미를 신심에 비추어 조명하고 그것을 설파하고자 한다. 그 결과로 그는 신심도 검증받고 대중의 구루 지위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들이 점점 현실의 디테일한 일상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일상을 설교거리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 내 작은 일상의 깨달음을 신심으로 환원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요즘엔 챙겨서 그런 욕구를 억제한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 신앙은 어떤 고차원적인 의미로 유비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 남루한 일상 자체를 더도 덜도 말고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몇몇 페친분들의 포스팅을 받지 않고 있지만 가끔 다른 페친의 좋아요로 그 분들의 포스팅이 쓰리쿠션 찍고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도 교계에 스타급 목사님의 포스팅이 그렇게 내 담벼락에 떠서 할 수 없이 읽었다... 페친의 상당수가 목사님이라 자주 지적(질)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목사님들의 포스팅을 보면 그분들의 '욕망' 같은 게 읽힌다. 이른바 설교 욕구다. 중년을 넘어서면서 나름의 정체성, 자신감 같은 것도 생겨서인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부분에 있어 거침이 없다.
흥미로운 건 글의 도입에 자신에 대한 약점 내지는 험담을 툭 던지는 게 상례인데 중반 이후를 읽다보면 그 약점에 대한 고백은 장대한 피날레를 위한 하나의 예화, 혹은 에피타이저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난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훌륭한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다...라는 내러티브가 사례들을 바꿔가며 반복된다.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것이 흡사 미국드라마의 시즌2, 3로의 진화를 보듯 흥미진진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그런 글들을 보면 조금 씁쓸하다.
어림잡아 개신교인 반, 비개신교인 반의 친구를 가진 내 입장에서 그런 글들이 반대쪽 분들에게 어떻게 읽힐까를 생각하면 좀 오글거릴 때가 있다. 기온차가 너무 크다는 말이다. 그래도 그 구획(교계내) 안에서는 좋아요 작렬이니... 그 프레임이 깨질리는 없겠으나, 내가 기대하는 포스팅은 좀 다른 것들이다. 페북의 특성상 좋아요를 유도하는 글들이 요구된다. 목사님들은 된장남처럼 자기가 입고 먹고 마시는 것들을 자랑하지는 못하니 주로 자신의 거룩한 생각, 행실, 선행사례들을 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유명 목사님들의 회개거리, 실수, 분노, 망가짐,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고백들을 읽은 적이 별로 없다. 하다못해 자신이 풀 수 없는 문제를 놓고 '하등한' 일반 성도들에게 기도부탁하는 글도 본 적이 없다. 요즘은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이 극도의 갈등을 겪는 게 적나라하게 표현되는데(배트맨은 허리까지 부러지지 않던가) 우리네 유명 목사님들은 죄지을 틈도 없이 성공만 하시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초류향이나 레밍턴 스틸같은 실력자(?)이셨는지 전혀 일상사에 어려움이 없이 성도들에게 모범 사례들만 설파하신다.
아무래도 페북이, 목회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부족해요', '실패했어요' 같은 버튼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2013년 1월 3일
매달 발송 도우미를 모집하는가 하면 기자들 없이 편집장이 교정 교열을 일일이 보고 과장 한 분이 영업과 기타 모든 행정업무를 보는 식이었다. 매월 적자가 누적되어 급여 및 디자인 업체에 비용 지불이 안 된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갔다. 당시에 독자모임을 만들었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후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 때 편집부의 멤버들이 모두 물러났고 혼란스럽던 재정문제를 뉴스앤조이가 떠 안았다. 뉴스앤조이는 복상이라는 잡지 자체를 살리려는 생각 하나로 뛰어들었지만 괜히 복상을 탐낸다는 오명을 얻었고, 복상 또한 그렇게까지 생명을 연장해야겠냐는 비난도 받았다.
이후로 나는 다소 거리를 두고 이 매체를 지켜봤다. 잡지 자체가 '읽고 싶지 않을 정도로 부실하던' 시절도 있었다. 작년 초엔가 박총형이 귀국하여 복상 편집장으로 일하게 됐고 나는 그의 권유로 편집위원으로 합류했다. 거지꼴 같은 복상이지만 그 와중에도 오랜 생명력과 좋은 컨텐츠로 말미암아 한국의 크리스채너티투데이급으로 분류하는 이 잡지의 편집위원이 된 것이 한편으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편집부의 열악한 상황으로 박총형은 근무중 병을 얻어 편집장 직을 내려놓았다. 대체로 내부 분위기는 잡지를 살리자는 의견이었고 사실상 편집위원 중 존재감이 없는 나는 박총형의 사임에 함께 책임, 내지는 입장을 정하자는 의도로 편집위원직을 내려 놓았다.
그 이후로 복상은 힘들게 운영되다가 최근 새 편집장을 영입했고 10월호를 휴간하고 다시 정상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정말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때때로 나는 복상이 참 '악마같은 잡지'란 생각이 든다. 잡지와 관련된 사람들을 괴롭히고 상처를 주면서 정작 잡지의 명성은 커가는 느낌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복상을 대할 때 극단적 양가감정에 휩싸인다. 잡지의 생존을 걱정하며 달려들었다가 불에 덴 것처럼 아파서 멀어지고... 그러면서도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채 이 잡지 주변을 기웃거린다.
이 잡지를 통해 정말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또한, 원치않게 그 소중한 관계가 틀어지는 걸 지켜봐야했다. 십여년 동안 반복되는 이 뒤틀린 관계를 생각할 때면 이제는 현기증으로 물리적인 구토가 날 지경이다. 오늘 아침에는 영화 '서편제'가 생각났다. 이 영화에서 판소리꾼은 자기 딸의 득음을 위해 일부러 눈을 멀게 만든다. 오빠도 떠나보낸다. 그 고통 속에서 그 딸은 판소리의 대가로 성장하고 그 목소리는 어떤 판소리꾼보다 깊어진다.
물론 복상이란 잡지가 일부러 연관된 사람들에게 고통과 분열을 안겨주는 건 아니겠지만, 어떤 유의미한 목적을 위해 구성원들의 상처와 시련으로 '그 대상이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복상과 서편제는 닮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자주 책임 운운하며 이 조직을 떠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선 송구스럽고 백번 사과하고 싶다.
아울러 바라기는. 나는 복상이 누군가가 바라듯 탁월하고 풍성한 컨텐츠가 넘치는 잡지가 되길 기대하지는 않게 되었다. 차라리 사람들이 "도대체 이 쓰레기 같은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맨날 즐거워 보이는거지?"라는 소문이 무성한 잡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 소박한 바람이다.
김동문 선교사님과 대화 중에 김선교사님이 그런 말을 했다. 귀국한 후로 주변 사람(기독교배경)의 대화의 절반은 못알아듣겠다고. 이유인즉슨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할 때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책들과 저자들의 이름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저자명과 서명이 어떤 기호나 암호처럼 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김선교사님은 그간 본인이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음을 반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친 외국 저자들의 이름이 난무하는 대화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살짝 드러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외우기도 쉽잖은 미쿡, 유럽 저자들의 책을 읽으면 사실 그 핵심 주장들이 그리 낯설지 않은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풀어내기 보다는 저자명, 서명으로 암호화한다는 말이다. 결국 알맹이는 단순하고도 일반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임에도 많은 대화에서 그 담론을 암호키 주고받더라는 거다.
나는 크게 공감했다. (아마도 원저자, 원저서명을 주고받는 이런 트렌드는 레퍼런스를 장황하게 밝히는 미국학풍을 반영한 것이리라.) 대화를 나누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우리에게 시급한 건 좋은 저자의 핵심 개념, 탁월한 상상력을 캐치하는 것이고 그것을 한국사회에 중첩시켜놓고 실천, 참여(앙가주망)의 방향성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미 내 것이 된 개념의 레퍼런스명들을 장황하게 외우고 그것을 상대에게 전송하는 키값(key value)처럼 주고받을 이유는 없지 않나...하는 거다.
불현듯, 중고등학교 때 사건의 의미보다는 연도나 위인의 이름을 외우던 역사시험 시간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