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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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가장 절실한 건 늦잠이다. 하지만 성하가 날 가만놔두지 않는다. 애들의 심장이나 뇌에 알람시계가 들어가 있는지 7시반이면 어김없이 척척 일어나서 나를 깨운다. "성하야 아직 아침이 아니야. 좀더 자자"라고 구라를 쳐보지만 방안 어두운 커텐의 틈새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아빠 거짓말 하지마. 밖은 밝거든!!!"

대학생 때부터 직장 초반까지 나는 크고 작은 교계 이슈에 참여했다. 특히 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 문제로 몇몇 지방교회와 광림교회, 소망교회, CCC 선교단체의 시위도 나가고 게시판에서 논쟁도 많이 했다. 처음엔 학생들만 집에서 만든 피켓을 들고 나갔다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기윤실이 합류했고 그것을 가지고도 왈가왈부하다가 기윤실에서 교회개혁실천연대가 떨어져나왔다.

다시 지난 날의 잘잘못을 가리려는 것도, 나도 한때 나가서 피켓도 들었노라 생색을 내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니다. 내 '명함'으로는 썩소를 날릴 법한 더 훌륭한 분들이 주변에 넘쳐난다. 정작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이거다. 세습반대 이슈는 크게 번졌고 우리도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내가 참여했던 모든 단체의 세습이 이루어졌다. 내 생각에 사랑의교회도 정상적으로 새로운 교회당을 지을 것 같다.

레미제라블을 보며 가장 나를 자극했던 인물은 자베르다. 그도 낮은 신분 출신이며 나름 신앙심 돋는 인물이다. (내 입장에서는) 황당하게도 신의 이름으로 혁명 세력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어한다. 결국 혁명을 꿈꾸던 청년 시위대는 모두 죽는다. 시민들은 잠시 그들의 선동에 마음이 동하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 집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 혁명이 일상과 만나면 동력을 잃는다.

아마도 자베르는 수많은 혁명 세력을 경험하고 그들의 논리나 그들의 비참한 삶의 실체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베르는 한번도 그들의 진영논리에 동화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직업이 신이 주신 소명인 것처럼 움직였다. 아우슈비치에서 유대인을 불태운 교도관들, 이라크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미군병,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이스라엘 군인들, 세습이나 건축을 추진하는 교회들의 교역자들.

세상에서 거대화된 조직, 위계질서가 갖춰져 있는, 마치 컨베이어벨트 위를 흘러가는 부품들처럼 자동으로 흘러가는 프로세스를 갖는 많은 거대 구조는 쉽게 '악'으로 향한다. 그것이 '악'한 이유는 언제나 소수약자를 무시하는 방향의 효율성을 내부적 가치로 삼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소수이자 약자를 편드는 이들의 목소리는 이미 효율적으로 잘 굴러가는 구조 속에 묻히기 쉽다. '구조'는 언제나 '개별 양심'을 이긴다. 내 짧은 경험이 그렇다.

레미제라블이 고전이 된 건 은혜를 배신하고 도둑질한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쥐어주는 한 신부의 마음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만들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떤 자기합리화나 홍보, 미사여구 등을 붙이지 않아도 타인의 마음을 녹인다. 신부의 사랑이 장발장에게, 장발장의 사랑이 자베르에게 전달되고 자베르는 자기 가치관의 흔들림을 참지 못하고 자살한다.

내가 관심있게 본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혁명의 실존적 주체는 신부요, 장발장의 값없는 용서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바꾸어 말한다면 그만큼 진영의 논리, 혁명의 저항으로는 악한 구조를 넘어서기가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대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가 체 게바라같은 급진적인 정서를 갖지 못한 한계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인간적으로 신부의 용서는 보편 인간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장발장은 감옥으로 돌아가고 자베르는 혁명을 꿈꾸는 청년들 손에 피값을 치루어야 한다. 그게 정의이고 개혁이고 법치이다. 그것을 거스르는 레미제라블은 불편한 정서 속에 사람의 마음을 들쑤셔놓는다. (물론 소설의 배경에는 가난, 사회계급, 로맨스 등의 문제가 얽혀있지만) 눈을 크게 뜨고 굵은 라인으로 바라보는 이 소설의 키워드는 '불편할 정도로 값없는 용서'다. 끈질기게 나를 쫓던 적군마저도 돌이키게 만드는.

가끔 성하에게 구라를 치면서도 나는 커텐의 작은 틈을 비집고 새어나온 햇빛을 감지한다. 어둠을 몰아내고자 애쓰지 않아도 조그만 구멍으로 빛이 틈을 내면 어둠은 반전된다. 나는 일어나야 하고 아침밥을 준비하고 성하와 재밌는 아침시간을 보내야한다. 내가 아침이 아니라고 우겨도 소용이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인생에도 참 많은 자베르들이 있었다. 그들을 두둔하거나 그들이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나에게 적이었던, 나를 괴롭혔던 개인이나 큰 구조속의 무리들에게 나는 신부나 장발장 같은 존재였던가. 자베르가 자베르인 건 내가 그리스도의 빛이 아니기 때문은 아니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4-15)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요일2:8-11)
2013/01/29 22:13 2013/01/29 2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