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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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소견
: 직장인이 바라본 기독교 세계관

/김용주


들어가면서
최 근 복상에 김기현의 세계관 관련 연재가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아직까지 김기현만큼 제대로 기독교 세계관(이하 기세)을 논한 글을 읽어보지 못했다. '공격적 책읽기'로 널리 알려진 그는 이 연재를 쓰면서도 엄청난 양의 참고 문헌들과 신학과 철학 분야의 사상가들을 언급하고 있다. 혀를 내두를 정도다. 도예베르트, 아브라함 카이퍼, 리차드 니버로부터 시작해서 로버트 웨버, 제임스 사이어, 알버트 월터스, 브라이언 월쉬, 레슬리 뉴비긴. 이에 더하여 낸시 피어시, 스탠리 하우워와스, 알빈 플란팅가, 존 요더, 하워드 스나이더, 로날드 사이더, 자크 엘룰에 이르는 기독교 저자들의 최근 저작들까지도 자유롭게 넘나든다. 또한 데리다나 하이데거, 후설 같은 사상가들을 인용하며 그 사상의 깊은 의미를 반추하는가 하면 국내 저자들(송인규, 이승구, 신국원, 양승훈 등)의 저작들도 꼼꼼히 읽은 흔적이 역력하다. 뿐만 아니다. 양희송, 박총, 이원석, 정정훈 등 세계관에 대해 한 번이라도 글을 쓴 청년 필진들의 글들조차도 빠짐없이 읽고 적절한 대목에서 언급하는 성실함이 엿보인다. 이 정도라면 김기현의 기세 비판은 빈틈을 찾을 수 없이 촘촘하고 또한 성실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난처하다'는 김기현의 지적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깔끔하지 않은 부분들이 자꾸 머리 속을 맴돈다. 사실 그의 연재가 끝난 후에 글을 쓰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글을 쓰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미 그의 초반 연재 글에서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연재 중반에 내가 지적하는 문제들이 후반에 가서 해결될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기세에 대한 논의의 풍성함을 위해 기꺼이 글을 쓰려 마음 먹었다. 이 글의 주목적이기도 하지만, 부족한 내 글이 종국에는 김기현의 연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본론 으로 들어가자. 김기현은 개혁주의 기세의 현실 진단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며 몇 가지로 기세를 비판한다. 사실 기세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으며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 상에 김기현의 글이 위치하고 있고 그의 글은 이제까지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던 비판적 논의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기현이 연재 글에서 비판한 기세의 몇몇 문제에 대한 반론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적하려는 내용들 외에도 김기현은 자신의 연재 글에서 개혁주의 기세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논의의 축소를 위해 내가 언급하지 않는 내용은 거의 동의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사실 나는 김기현의 글에 비판적인 입장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감탄하고 있으며 멀리서 뵌 기억 밖에는 없지만 동지 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그것들을 풀어보려고 한다.

개혁주의 기세는 명제적이며 내러티브가 없다는 비판에 대해
첫 째는 기세에는 ‘내러티브(narrative)’가 없다, 즉 명제만 있고 이야기는 없다는 비판이다. 기세의 명제적 성격이 현실 세계와의 괴리감을 크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라는 이야기다. 이는 일반적으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서도 동일하게 지적되는 부분이다. 사실 내러티브의 강조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어 하나의 트렌드라 할 수 있다. 기세의 명제/내러티브 문제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이는 성경이 어떤 지침이나 규율, 혹은 신조와 같은 명제로 추출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가진 긴 서사(敍事)라는 말이다.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과 요셉이 경험한 하나님으로부터 공통 분모를 뽑아서 우리가 취해야 할 지침으로 삼는 것이 진정한 혹은 온전한 기독교인가? 거칠게 표현하자면 대충 이런 류의 고민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 의식이 신학과 세계관에 녹아나는 일은 고무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제적 성격의 기세를 평가절하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이는 마치 예수님의 행적이 중요한가, 그가 가르친 주기도문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와 같다. 물론, 둘 다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둘은 상호 보완이 필요하다. 관계를 따지자면 주기도문은 명제적 성격이 강하고 예수의 가르침이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서사적인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내러티브의 살이 붙어야 그 명제가 온전히 드러나고 또한 강화된다. 이러한 문제는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이나 사도신경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신학분야에서도 특정한 주제들을 뽑아낸 조직신학이나, 성경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성경신학과 같은 도구의 효용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일례로 도로교통법에 의한 교통표지판을 상기해보라. 그 각각의 기표들은 특정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일반인들은 적절한 시간 동안의 교육만으로도 교통표지판을 읽고 그 기표를 보고서 자동차를 몰 수 있다. 신호등의 파란불이 깜박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파란불의 깜박임은 너무 많은 생략이 있는 것은 아닌가. 차라리 구구절절 자세한 문장으로 길을 건너는 데에 필요한 설명을 보기 좋은 곳에 서술해 두어야 하지는 않을까. 내게 내러티브의 문제는 이와 비슷하다. 기독교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김기현은 상대적으로 내러티브를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압축적이고 일관성 있는 명제의 효용을 지나치게 축소시키고 있다. 반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세의 일관성과 명제성을 배제하고 내러티브를 살린다면 기독교를 효과적으로 관통할 수 있겠는가? 


나는 기세를 모르던 시절에도 경건의 시간을 5-6년 동안 가지면서 성경을 읽었다. 하지만 도통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성경은 신화적으로 다가왔고 예수님의 구속은 내 죄를 대속한 것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예베르트의 창조, 타락, 구속으로 대변되는 기세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틀로 역사를 관통하는 성경신학적 배경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김기현의 문제 제기는 포스트모던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지적이나 자칫 잘못하면 성경의 일관성을 파악하는 효과적인 틀 자체를 허물어뜨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상 내러티브의 강조는 개혁주의 기세의 명제성을 허물어뜨린다기 보다는 내러티브의 도움으로 오히려 강화되고 내러티브를 통해 무미건조한 신학적 도그마로 전락하지 않는 상호보완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지적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원론이 아니라 혼합주의가 문제라는 비판에 대해
두 번째 비판 대상은 이원론이다. 김기현은 기세를 현실에 맞게 적용하려면 기존의 개혁주의 기세가 말하는 것처럼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보다는 교회 내의 콘스탄틴주의, 즉 혼합주의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개혁주의 기세는 현실 진단에서부터 이미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이미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가 세상과 격리될 걱정을 하는 것은 기우(杞憂)에 불과하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 그 왕국의 가시적 형태인 교회가 도리어 세상 속에서 세상 정신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김기현은 송인규의 “평신도 신학”에서 언급한 ‘세상’이라는 개념의 구분을 언급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 전체를 가리키는 ‘세상1’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정신을 의미하는 ‘세상2’를 구분하자는 송인규의 지적에 대해 “한국교회의 문제는 ‘세상1’과 ‘세상2’를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2’가 교회 안에 침투해서 사실상 장악 당한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김기현은 세상과 교회의 구분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 없이 오히려 우리가 교회의 세속화에 주목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 근거로 그는 신구약 성경의 내러티브와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의 혼합주의적 성격을 지적한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도 교회가 어떻게 권력과 결탁했으며 그로 인해 얼마나 기독교가 변질되어 왔는지를 설명한다. 그렇다.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우리 내부에 있었으며, 결국 친절한 금자씨가 말하듯 “너나 잘하세요”가 우리 귀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김기현이 이성주의 시대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근대주의는 이성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경험적, 합리적, 과학적인 것들을 신격화하였다. 근대 기독교인들은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가 무엇인지에 대한 수많은 탈기독교적인 답변들 속에서 혼란의 시기를 겪어야 했다. 모더니즘이 한 세대를 휩쓴 후, 기독교 신앙을 포함한 종교는 사유화되었고 내면화되었고 탈사회화 되었다. 종교는 이제 학문, 정치, 문화, 사회에 개입할 수 없으며 신존재에 대한 문제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그 무엇이 되었다. 이로 인해 학문 영역 자체에서의 도피가 이루어졌으며-이를 두고 쉐퍼는 “이성에서의 도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무신론으로 회심한 유물론자들로 인해 대다수의 기독인들은 과학, 심리학, 예술, 매체, 정치와 같은 영역의 것들은 세상적인 것이며 그 자체로 이단적이고 사탄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시대가 달라져도 인간 조건과 세상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로이드존스조차도 그의 대표적 저서인 “부흥(Revival)”의 초반부에서, 이런 근대적 사고로 인해 교회가 그 이전 세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에 봉착해 있음을 직시했다. 유대민족과 중세 유럽의 문제가 혼합주의였다면, 근대 이후에 생겨난 이성우월주의적 사고 때문에 대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은 세상의 각 영역, 특히 학문과 문화 영역을 부정하고 이단시했다. 이 시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미시적인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도 하나의 포괄적인 틀로 제시될 수 있었던 기세의 긍정적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국 교회도 개혁주의 기세에서 말하는 이원론의 극복이 ‘여전히’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김기현은 나와 생각을 달리할 것 같다. 지금은 모더니즘을 넘어선 포스트모던 사회로 들어섰으며 모더니즘의 문제에 집중했던 개혁주의 기세는 고스란히 모더니즘의 해악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으나 이는 한국 사회를 탈근대 사회로 볼 것이냐, 근대 사회로 볼 것이냐, 아니면 진중권의 지적처럼 오히려 전근대적인 방향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볼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의 생각은 제3세계, 특히 북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한국적 상황은 이 모든 것이 중첩된 형태를 띄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는 이원론적 사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나는 개혁주의 기세로 대변되는 “구조와 방향 모델”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기독인들이 세상의 구조-문화, 정치, 사회, 학문, 예술 등-그 자체를 부정하고 불경스러워하며 담을 쌓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김기현의 문제 제기와는 반대로-송인규의 원래의 지적처럼-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세상에 관심이 없는 것이며 또한 ‘세상1’(구조)을 ‘세상2’(방향)처럼 여겨서 ‘세상1’과 접촉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를 혼합주의로 치부하고 정죄하고 멀리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리차드 미들톤의 교회와 세상에 관한 이원론적 사고의 문제성을 접했을 때 들떠 있었고, 월터스의 구조와 방향 모델을 접했을 때 내가 누리던 음악, 예술, 영화, 대중매체들이 악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제서야 졸이던 가슴을 펼 수 있었다. 송인규가 천국에는 예술 작품들이 있고, 문화가 보존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을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는 것, 나아가서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 기다려졌다. 김기현의 잣대로 본다면 나는 교회 안의 혼합주의에 전염된건가. 교회 안에서 사회와 문화를 누리고 더 나아가 변혁을 꿈꾸는 나는 콘스탄틴주의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인가. 이원론을 지적하는 기세는 여전히 현실을 잘못 파악한 건가. 나는 기세를 접한 그 때부터 후배들에게 기세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나와 같은 심리적 부자유함에 눌려 지내는 수많은 기독학생들을 만난다. 그 때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금도 나는 음악을 하면 CCM을 고집하는 청년들은 본다. 아침 기도회를 빼먹고 시험공부를 했다고 죄의식을 느껴 학점을 포기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려는 학생들도 본다. 주변에서는 적성에 맞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주기적으로 신학교에 가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는 회사원들도 자주 만난다. 게다가 그들 열에 하나 둘은 이미 회사를 떠났다. 나에겐 이원론이 여전히 극복의 대상이며 개혁주의 기세는 여전히 현실에서 유효하고 가치 있는 모델임을 느낀다. 김기현은 때때로 주변의 보수 교회들을 탐방해보라. 그 교회의 평신도들과 이야기해보라.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성도들이 아닌 보수 교단의 기독 직장인들, 기독청년들과 이야기해보라. 난 그렇게 생각한다. 여전히 이원론이 문제다!


한국이라는 컨텍스트와 이야기에 무감하다는 비판에 대해
세 번째로 김기현은 개혁주의 기세 운동이 한국적 상황과 이야기에 무감각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기세 운동은 처음부터 단순한 지식체계의 성립보다는 삶 한가운데서의 실천을 목적으로 해왔다”는 최태연의 말을 인용하면서 “도예베르트나 쉐퍼가 매력적이었던 건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고뇌하고 대답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널리 읽히는 세계관 서적들은 ‘한국’이라는 컨텍스트가 아예 부재하거나 언급하더라도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그 관점 역시 비판 받을 소지가 많다”고 결론 지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사실 나는 이렇게 시작된 김기현의 연재에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이라는 컨텍스트를 관통하는 세계관의 비전을 제시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저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김기현의 세계관 연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렵고 오히려 “지식체계의 성립”에 치중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한국적 상황이 아주 언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네 번째 연재인 “이원론과 혼합주의”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이라크 파병, 국가보안법, 사학법을 대하는 한기총의 정치 참여를 혼합주의의 틀로 보는 대목이 그 부분이다. 하지만 이 대목은 혼합주의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예시 정도로만 읽힌다. 그렇다. 김기현에게도 현장은 아직 멀기만 하다. 사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세계관에 관한 연재를 시작했을 때 나는 이런 류의 글을 기대하지 않았다. 친절하게 소개된 참고 문헌과 논문 버금가는 수준의 잘 짜여진 이론들의 종합과 비판을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생생한 현장성이 담보된 실체로서의 세계관을 경험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김기현은 한국 교회의 고질적 문제인 담임목사직 세습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미 FTA 문제는 어떤가? 교회의 세금 문제는 어떠한가? 지역 사회, 한국 사회에 대한 교회의 봉사와 사회 참여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수정로교회에서는 그런 현장성 있는 사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내러티브와 현장성이 반영된 김기현의 사역은 부산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어떤 열매들을 맺고 있는가? 그가 일구어 가고 있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어디쯤 와 있는가? 사실 나는 이런 것들이 궁금하다. 모든 사역을 가시적인 열매로 환산하려는 것에는 나도 부정적이지만 세계관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더군다나 현장성, 현실 세계의 참여를 이야기하면서 사역에 대한, 열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온 후로 세계관 관련해서는 별 다른 책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물론 세계관 딱지를 달고 나오는 책들을 되도록 모두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실상 내게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책들은 현장성이 담보된 책들이다. 제3세계의 사회복음의 사례들이 잘 드러난 로날드 사이더의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나 사무엘 에스코바의 “벽을 넘어 열방으로” 같은 책들과 도시 빈민촌 선교행전이라고 볼 수 있는 “홍등가의 그리스도”, 그리고 일반 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NGO 운동의 한계를 느낀 학생들이 비영리 기업을 조직하고 운영하여 성공한 이들을 인터뷰한 사례들이 담긴 “세상을 바꾸는 대안 기업가 80인”같은 책들이 그것이다. 이런 책들은 수사법이 화려하지 않으며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10배에 달하는 참고 문헌을 돌아볼 필요도 없다. 이미 그들은 또 하나의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짧은 고백 속에는 언제나 ‘현장’이 묻어나며 그 소박함 속에서 울리는 공명은 내 깊은 양심을 오랫동안 뒤흔든다. 


사실 나는 이 대목에서 김기현이 지적하는, 이른바 개혁주의 기세라는 모델 자체가 현장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개혁주의 기세에 대한 모델의 검증이 안 된 것 아니냐는 얘기다. 김기현의 지적대로 개혁주의 기세가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그 세계관 배후에는 화란 개혁주의 기독교 선배들의 현장성이 담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기세는 그들의 삶의 토대 위에서 구축된 실천적 틀인 셈이다. 이미 어느 정도의 성공 사례가 있는 모델을 우리가 적용해보지도 않은 채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지 않냐는 거다. 내가 불편한 것은 김기현이 기세가 현실에 뿌리박지 못하는 이유를 자꾸 개혁주의 기세 내부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나는 사실 기세의 다양성 문제와 모더니즘적인 토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기세 자체는 여전히 그 틀을 유지하면서 현실에 부단히 적용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백 번 양보해서 개혁주의 기세 운동이 우리나라 형편에는 일대일로 대응시켜서 적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니 수정, 보완하여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틀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나는 아직까지는 회의적이다.


기세 비판, 텍스트의 평이성을 지향해야
알 버트 월터스는 기독교 세계관을 철학, 신학과 구별 짓는 키워드로 ‘일상’과 ‘상식’을 든다. 세계관이 그만큼 일반적이고 비전문적인 문제라는 얘기다. 기독교 세계관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혜와 상식의 문제이며 일상적인 문제다. 하지만 개혁주의 기세 자체가 철학, 신학을 잘 알지 않으면 논의하기조차 어렵다는 점을 많은 청년들이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고 나 또한 그에 동의한다. 김기현의 글에서 내가 답답한 대목은 김기현이 그런 기세의 문제를 지적하는 동안에도 다시 너무나 많은 철학과 신학의 토대를 넘나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세계관이 신학, 철학적 토대 없이 정립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세계관은 철학과 신학에 대해 메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철학적, 신학적 연구가 세계관의 형성에 영향을 준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관의 표현이 학문적인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세는 노동자나 어린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 비록 그렇게 하기엔 다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되도록 텍스트의 평이성을 지향해야 한다. 


나는 기세의 수혜자다. 내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신학을 공부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 유혹이 만만치는 않다. 모두가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신학을 공부하는 방법만은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항상 그런 도전을 받아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솔직히 나는 기독교 세계관 논쟁에 끼어 들어야 하는지를 놓고도 몇 달을 고민해왔다. 사실 기세를 놓고 내가 할 얘기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실 그렇다. 기세 논쟁은 그 텍스트의 난해함과 그를 해결하기 위한 방대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세계관 운동의 논의 자체에 세계관의 수혜를 입은 사회인들과 운동가들을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있다. 기세 논쟁의 중심에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결국 운동가들은 말 한마디 하려고 해도 좀처럼 논의에 끼지 못한다. 내가 아는 이들 중 참여연대나 기윤실, 공의정치포럼, 뉴스앤조이 혹은 사회 운동가들과 직장인들이 기세에 대해 이렇다 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사실 그들이 세계관 운동을 하는 데에는 깊이 있는 철학과 신학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기세를 이야기하려면 그런 현장에서, 미답지(未踏地)에서 분투하고 있는 운동가들을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그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담론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기세를 갇힌 학문의 영역에서 척박한 사회의 중심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나는 김기현이 그의 연재를 통해 원론적으로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의 기세 논의가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도 믿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의 논의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 되려면 학문의 옷을 벗고 보다 알기 쉬운 일반인들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학문적인 글이라도 리차드 파인만이나 송인규, 강준만 수준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나는 김기현의 글을 읽으면서 또다시 병이 재발하는 경험을 했다. 텍스트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김기현의 탁월함을 보면서 나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다시 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실 회사 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독서량에 한계를 느낀다. 내 문제의식이 지식의 한계 때문인가 하는 생각에 한 몇 달 동안을 1-20분만 시간이 나도 관련된 글들을 최대한 많이 그리고 자세히 읽어 보았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서서 11시 가까이 되어야 퇴근을 하는 내 입장에서는 저녁식사 시간을 포기하더라도 최소한 그가 인용한 참고 문헌은 다 읽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지금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그의 연재를 다 읽을 때 즈음에는 나는 엄청난 참고 문헌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끝내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다. 내심 꽤나 성실하게 기세 관련 책을 읽었다고 자부하는 나는 내가 넘어설 수 없는 물리적 처지에 있는 김기현이 한편으로는 부럽고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내 모습은 뱁새가 황새를 쫓아 가려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꼴이다. 하지만 나는 이변이 없는 한은 회사 생활을 지속할 것 같다. 또한 이 토대 위에서 지속적으로 기세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고 또한 나를 포함한 많은 운동가들을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면서: 기세가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진짜 이유는?
정 리하자면 이렇다. 기세가 현실세계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를 김기현은 개혁주의 기세의 변혁 모델 ‘안’에서 찾고 있다. 나는 그의 비판 중 내러티브의 부재나 이원론에 대한 비판과 같은 일부는 좀 과하다는 지적을 했다. 김기현이 컨텍스트 문제를 거론하는 데에서는 보다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기세라는 전략으로 경기를 뛰어본 선수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군사 독재 시절 사회참여 문제를 놓고 기독연합 운동은 이른바 ‘6개대 사태’와 같은 사건들로 인해 보수-진보 세력 간의 아픔이 있었고 그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듯하다. 이후에 우리는 기세를 실천적으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내세울만한 현실의 운동 경험 없이, 북미의 영향을 듬뿍 받은 포스트모던-다원주의 시대를 맞이 했다. 권력은 다양화되었고 기세운동은 문화 운동으로 변화했으며 진보 세력은 분화되었다. 그 와중에 기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대두 되었고, 이제 기세는 김기현과 같은 신앙인들에 의해 한국 교회에서 아직 써보지도 못한 낡은 칼자루 취급을 받고 있다. 문제는 김기현이 ‘낡은’에 주목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 써보지 못한’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을 마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다. 나는 여전히 개혁주의 기세의 변혁모델을 유효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다는 점과 참여는 하고 싶으나 기세 논쟁 자체의 난해함으로 인해 토론의 시작점을 찾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내 글로 인해 보다 많은 이들이 기세 논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의 부족한 잡문(雜文)이 김기현의 이후 기세 연재에 부족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끝)

2007/06/01 22:48 2007/06/01 2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