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주변에 얘기해도 잘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소문난 모범생이었다. 특목고 진학을 꿈꾸던 중학생 시절, 나는 그저 ‘공부기계’였다. 같은 문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풀었으므로 시험을 보면 답이 툭툭 튀어나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코흘리개 시절에 소심하다거나 착하단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시험을 몇 번 잘 치고 나니 ‘모범생’이란 딱지가 붙었다.
그 이후로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범생의 모습을 유지하고자 부단히 애를 썼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부모님은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 두 분이 잠시 별거를 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를 때면,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를 우울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아마도 그때 나는, 내가 모범생이 되면 부모에게 기쁨을 줄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다시는 이전처럼 슬프게 헤어지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까지도 어떤 조직에 들어가거나 어떤 일을 할 때 다분히 성취 지향적인 행동에 집착하여 매사에 지나치게 긴장하는 습관을 갖게 된 건 아마 그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되고 싶었고,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고, 그것도 좋은 학과에 가고 싶었다. 물론 그 근저에는 항상 ‘부모가 원하는’ OO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솔직히 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부모가 뭐가 되라고 괴롭힌 적도 없지만,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공부를 잘하면 의례히 그렇게 되리라는 ‘어떤’ 학과와 직업을 제시하곤 했고 나는 그것을 목표로 공부만 해댔다.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공부기계가 되고 ‘모범생 코스프레’를 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 몹쓸 모범생 코스프레는 30대 초반까지 줄곧, 그리고 불혹을 앞둔 지금까지도 나를 짓누르는 어떤 내적 지향성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 또래의 많은 이들이 참 착한 자녀의 삶을 살아왔고 그 모범생의 삶을 이제는 자기 자녀에게 강요하는 걸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변의 많은 이들도 부모의 기대, 바람의 대물림을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타자의 욕망’, 특히 부모의 욕망에 따른 삶에 익숙한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삶의 주체성이 결여된 채 분주하게 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분주함의 대부분은 파편화된 사건들, 그 개별적인 것들을 잘 마치는 것, 그 성과로 누군가에게(부모에게, 직장상사에게, 혹은 남친이나 여친에게, 배우자나 자녀에게) 칭찬받는 것에 목적을 둔다. 얼핏 보면 책임감이 강하고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그 내면 깊은 곳에서는 영혼이 소멸되는 느낌,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칭찬해주는 주체가 없으면 존재 이유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자신을 지배하는 셈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회사를 왜 다녀야 하는지, 왜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같은 당연한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순간 숨이 멎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요즘 ‘픽업 아티스트’라는 직업이 성행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예술가인가 했더니 쉽게 말해서 여자 꾀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란다. 이런 곳에다 몇 백만 원씩이나 돈을 내며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넘쳐난다고 하니, 이성을 사귀고 싶지만 잘 안 되는 싱글들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연애를 하는 이들은 ‘연애 상담’도 많이들 받는다. 연애 중인 커플들은 ‘결혼예비학교’라는 곳도 간다. 그뿐이랴. 요즘 결혼 후 아이를 출산한 부모들을 위한 ‘부모학교’도 성행하고 있다. 이렇듯 모두가 모범적인 연애, 결혼, 육아, 자녀교육을 실수나 시행착오 없이 수행하고 싶어 한다. 물론 배우는 건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배움 행위들이 어떤 내러티브나 연관성을 갖지 않고 파편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개인이나 관계의 근본적인 성장을 담보로 한다기보다는, 중고교 시절의 반복처럼 연애, 결혼, 출산, 육아도 그 개별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이른바 그 분야의 모범생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느낌이 강하다는 말이다.
연애, 결혼, 출산, 육아 매 단계에 모범생이 되는 게 인생의 목표가 아님을, 나는 결혼한 지 10년째인 지금에서야 아내를 통해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일례로 나는 칭찬받는 연애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정작 연애를 하는 중에는 즐겁지 않을 때가 많았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나는 생애에 한번뿐인 귀한 예식에 집중하기보다는 주변의 눈치를 참 많이 봤다. 그 과정에서 정작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 것도 있었고 원하지 않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 신혼 초에 심하게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이 결혼이 좌초되고 실패한 무엇으로 전락하게 될까봐 두려움에 떨었다.(매번 아내보다 내가 더 지질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본다. 난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진실한 삶 그 자체였나, 아니면 인생에서 중요한 매 단계마다 누군가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으려 한 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모범생의 티를 벗으려고 애쓰는 내 모습을 본다. 내 잣대대로 남을 평가하지 않는 것, 나아가 그 잣대대로 스스로를 옭아매지 않는 것, 타인의 눈치를 보기보단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 문득 그런 상상을 해봤다. 나의 부모가 서로 깊이 사랑해서 그 충분한 사랑을 통해 자주 “우리 걱정은 말고 네가 원하는 걸 하렴.”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었다면, 그러면 나는 어떤 아이가 되었을까. 생각만으로도 표현 못할 감정이 요동치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 가정에, 내 아이에게, 그리고 나와 내 아내에게도 필요한 음성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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