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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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하종강-이선옥

다시 한번 느낀 건데 트위터는 논쟁의 도구로는 부적합한 것 같다. 파급효과는 큰 반면 제대로된 소통에 제약이 있어보인다. 즉흥적, 즉각적 감정 대응...그에 따르는 순식간에 팔로워를 타고 전파되는 속도가 정말 무서울 정도다.

공지영-하종강-이선옥의 표절 문제는, 과거 월간지 논쟁으로 본다면 2-3개월간 주고받을 내용이 축약+감정고조 상태로 진행된 느낌이 적지 않다. 더우기 한 가지 이슈로 한 사람의 내면이나 그의 인생 여정을 모두 난도질하는 식의 표현들이 오가는 대목에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제3자 입장인 나조차도 꽤나 불쾌했다.

다들 나름의 이유와 논리가 있겠고 트위터라는 공간 자체의 특수성도 감안해야겠다. 그리고 언제나 공지영은 주변의 지적에 다소 까칠한 언니의 모습을 보여왔는데, 그 까칠함이 적에게 향했을 때는 환호하다가 아군을 향하니, 비판을 넘어 '공지영'이라는 인간 자체를 냉소하고 실망감을 내비치는 경우들은 ...좀 아쉽다. 공식적으로는 '좀'이지만 내심 상당히 아쉽다.

'12. 8. 16.


힘조절
 
1.
 섬세한 작업이나 운동 경기에서 힘조절을 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장에서 자동차 조립시에도 규정 토크를 줘서 나사를 돌려야지 과토크를 주면 나사 머리가 날아가거나 나사산이 뭉개진 채로 차에 박힌다. 그러면 빼내서 다시 조립하기 조차도 쉽지 않다.

2.
아내와 대화 중에 말하길 우리 나라 진보진영의 사람들은 10개 중에 1-2개 잘못했는데 그것을 잘 가려서 비판하지 못한다는 얘길 했다. 트위터나 게시판 댓글에도 지지와 비난의 극단을 달릴 줄만 알지 그 사이의 입장 표명이 쉽지 않다는 거다. 모처럼 탁월한 지적이란 생각을 했다.

3.
 보수층은 너무 덮어줘서 문제라면, 진보는 서로에 대한 분노지수가 너무 높은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 진보:보수:무당파를 30:30:40으로 분류
하지만 난 우리나라 진보가 30이나 되는지 잘 모르겠고(그런 이유로 김두식 교수는 자주 진보를 찻잔 속 태풍으로 비유한다) 그 진보의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하고 그 사이가 너무 소원하다는 생각을 요즘은 자주 한다.
 
4.
비판은 장려되어야 한다. 비판은 당사자와 더불어 지켜보는 제3자에게도 양쪽의 논리적으로 약한 부분을 짚어보는 계기를 만들며 더욱 다양한 시각,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지만 힘조절되지 않은 비판은 때로는 과투입된 처방전처럼 독이 된다.
 
5.
 사사로운 잘못에도 매번 회초리 100대를 맞아야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완성도가 뛰어난 성인이 될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승자독식 사회와 더불어 패자, 실수자에게도 가혹한 사회다. 또한 진보 논객들은 그런 오류나 잘못들을 귀신처럼 찾아내어 극단적인 혐오나 냉소를 쏟아내고 스스로의 '관'이 없던 대중들은 그 논리대로 호불호를 흡수하여 그 극단적 정서를 가감없이 '리트윗'한다.
 
6.
 어쩌다 공지영 얘기가 나와 이 글의 말미는 공지영의 옹호가 되는 느낌이지만, 김영삼부터 김대중, 노무현, 하다못해 철새 김민석에서 코리안 드림 박찬호, 최근에는 임수경, 이정희까지. 내가 겪은 많은 이들은 그들을 중간 정도를 옹호하고 중간 정도를 비판하지 않았다.

7.
 난 가끔 내 주변 진보 진영 지인들이 나의 말실수나 잘못된 논지 한두번으로 나를 떠나는 상상을 자주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종종 있다. 요즘은 진영에 상관없이 SNS에서 주기적으로 언팔에 친구 정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고 동지애를 느끼던 이들이 실망감을 비추고 갑자기 관계망에서 사라지면 참 마움이 지옥 같다. 삶의 방향성이 같은 지옥. 솔직히 난 그런 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12. 8. 16.



입금하라!

아내와 오늘도 공지영-하종강-이선옥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 내 트위터와 페북에도 여전히 관련 글들이 오르내린다. 이제 나도 세 사람 당사자들의 글들은 충분히 읽었다. 솔직히 모두 공감이 간다. 허나 여기서 누구의 손을 드는 순간 뭔가 내 주변 사람들과도 서로 벽을 만드는 느낌마져 드는, 일종의 '서늘함'이 내 이마에까지 전달되는 요즘이다.

사실 나는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의 근본에는 22명의 자살로 귀결된 쌍용차 문제 자체가 존재함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같은 사건으로 이십여명이 줄줄이 목숨을 끊는 이 전대미문의 비극적 사건에 국민적 관심과 도움이 절실한데 세 사람의 이름이 번갈아가며 호불호로 확대 재생산, 그것도 강한 분노와 더불어 퍼지는 게 공감이 되다가도 이 논리싸움이 솔직히 때론 절망스럽기도 하다. 그만큼 각자 입장에서 어느 정도는 반대입장으로 해명되지 않는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사실상 이 문제는 담론의 과잉 수준에 이르렀으니 당사자가 아닌 제3자들은 논지를 퍼나를 때에 근본적인 쌍용차 문제 자체를 잊지 말자는 의미로, 또한 자판이나 두들기며 잘잘못을 가르는 무책임한 논객으로 치부되지 않기 위해 글 하나 쓸 때마다 후원계좌에 입금하라는 거다. '닥치고 입금'이 아니고 '선 떠들고 후 입금'하라는 거다.

인증샷까지 권하고 싶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고. 글하나에 입금 한번. 잘잘못 가리는 일이 중요한 만큼 쌍용차 노조에 도움을 실질적인 주었으면 싶다. 먼저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일빠로 입금하련다...!

'12. 8. 21.

2012/08/22 21:49 2012/08/2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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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ting de Corazon>을 봤다. 이 영화는 스페인 영화라는 걸 빼면 전형적인 2류 불륜 영화다. 원래 이 영화는 중년 남성의 일탈이나 욕망에 집중되었저만 '젊은 여성' 입장에서 조금만 썰을 풀고 싶다.

스토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중년 남성은 자신에게 손자가 생겼다는 얘길 들을 때 즈음 젊은 여잘 만나게 되고 그 여자에게 빠져든다. 젊은 여자는 원래 사귀던 중년 남친이 있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어 감정에 충실하게 달려가고 두 사람의 불륜을 알게된 중년남자의 아내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자 남편과 별거에 들어가고 그녀도 상담하던 남성과 교제를 시작한다. 결국 젊은 여자는 중년남자가 아내와 헤어지지 못할 거란 사실을 직감하고 중년남자도 아내가 떠나자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일탈은 끝나고 중년부부는 손자를 맞는다.
 
때때로 젊은 여성들은 또래 남성보다는 심정적인 여유가 느껴지는 성공한 남성, 혹은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는 안정적인 중년 남성에게 끌리는 것 같다. 이성에게 호감을 느낄 때를 전형적인 방식으로 분석할 수는 없겠지만 중년 남성에 호감을 느끼는 여성들은 자신의 unstable한 상태를 stable한 반려자를 통해 확보하려는 욕망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자신의 늙음에 대한 자각과 함께 점점 커지는 일탈의 욕구와 관련이 깊은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지적(질)은 여기에서 시작되는데...) 따라서 어떻게 불륜이 시작됐든 대체로 남성은 젊은 여성이 일탈적 존재에서 일상적 존재가 되는 시점에 정신을 차린다. 영화에서도 젊은 여성은 중년 남자와 아이를 낳고 함께 살기를 원한다. 남자는 그 일상의 무상함에 짓눌려 시작된 관계가 다시 삶의 '정상 루프' 안으로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나면 일상적 영역 안에서는 정서적으로 안정된 중년 남성이라면 대체로 익숙함과 보수성이 고개를 쳐든다. 아내가 차려준 식사, 아내와 함께 힘들게 키워낸 자녀, 그 아이들과 함께 사는 스윗홈... 그 게임 룰 안에서는 이 영화에서처럼, 아내가 이기게 되어 있다. 이 영역에서 젊은 여자는 철저하게 타자이고 미지의 세계이며 지금까지의 안정화된 삶을 뒤집는 불안 요소가 된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출산 육아 공부 차, 함께 자주 들락거리던 인터넷 카페에서 듣게 된 이야기가 있다. 유부남과 교제하는 여성들의 비밀 카페가 있는데 그 카페에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유부남과 사귀는 여성들의 고충이 많이 올라온다고 한다. 가끔씩 읽는 holicatyou.com 블로그에도 간간이 유부남과 사귀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본다. 비슷한 패턴은 첨엔 미친듯이 들이대다가 시간이 지나면(일탈이 일상이 되는) 그 관계가 역전되고 종국에는 젊은 여성들만 상처를 입는 것이다.

이 2류 영화와 사례들을 자질구레하게 언급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자 결론이다. '젊은 여성이여, 유부남과 절대 엮이지 말라.' 첨엔 따스한 정서와 공주같은 대접을 받을 지는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의 경우 홀로 남겨지는 건 젊은 여성이다. 유부남은 가정으로 돌아가고, 아내는 그 남편을 용서하고 젊은 여성은 버려진다.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고 내가 아는 한 이는 다분히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2012/07/27 22:51 2012/07/27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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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밤에 보긴 좀 우울한 감이 있었지만, 영화 <뱅뱅클럽>을 봤다. 이 영화는 포토저널리스트가 피사체를 단지 찍어서 알리는 일에 그쳐야 하는가, 아니면 피사체의 현실에 개입해야 하는가의 화두를 던진다. 영화 속 실존인물인 케빈 카터는 퓰리쳐 수단의 기아 사진으로 퓰러처상을 수상한다. 허나 그의 사진은 사진가의 현실 개입에 관한 윤리적 논란에 휩싸이게 되고 퓰리처상을 수상한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조금 다른얘기지만 한편으로 저널리즘은 역사 속에서 사진 영상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선정적인 사진은 인간정서를 자극하여 이성적 판단 자체를 방해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현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 한 예로 광주항쟁에서 무기로나 수적으로 터무니없이 열세였던 시민이 군인에 대항하는 한 장면의 프레임을 취하는 것. 이런 게 전형적 영상의 왜곡, 진실의 왜곡에 속한다. 영화 속에서도 사진가들은 자신의 사진이 그 자체만으로도 정부군을 옹호하거나 반군을 옹호하게 되는 상황을 염려한다.

 
‎그런 이유로 르몽드는 신문에 일절 사진을 게재하지 않는다. 선정적 사진이 사건의 객관성을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진이 발명된 이래 포토저널리즘은 사회에 많은 화두를 던져왔다. 게다가 미술작품과는 달리 수많은 똑같은 복사물을 찍어낼 수 있는 사진들은 발터 벤야민으로 하여금 '아우라'에 관한 사색을 더하기도 했다. 사진과 인간, 뷰파인더로 바라보는 피사체는 나와 타자의 관계성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는 낯설면서도 닮은 구석이 있다.


덧글.
 라이언 필립은 인물이 많이 망가졌다지만 그의 얼굴과 연기가 좋았다.

2012/07/16 22:49 2012/07/16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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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페미니즘

페이스북에서 집단 지성의 결과로 정리한 페친들이 애정하는 여성 글쟁이들을 모아봤습니다.
블로그에도 올리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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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
 정신분석이라는 전문영역을 맑은 정서적 감성으로 전달하는 정신과전문의이자 정신건강 컨설팅 기업인 ‘마인드프리즘㈜’의 CCO(Chief Contents Officer)이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으며 연세대와 아주대 의대 외래 교수를 지냈다. 1996년부터 여러 기업의 중견 관리자를 대상으로 '자아경영 프로그램'을 진행하는가 하면,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살아남은 직장인들의 심리적 공황상태를 연구한 'ADD 증후군'을 제기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밖에 기업경영에 정신의학을 접목시킨 '심리경영' 등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불안한 시대로부터의 탈출』『남자 vs 남자』『사람 vs 사람』『삼색공감』『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공저) 『홀가분』등이 있다.
 

정희진
 여성학은 하나의 분과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多학제적, 間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가정폭력과 여성인권』,『페미니즘의 도전』을 썼고,『한국 여성인권운동사』,『성폭력을 다시 쓴다』을 엮었으며, 그 외 여러 책을 함께 썼다.

김현진
 이제 막 삼십대에 접어든 글쟁이다. 1999년, 강압적이기만 한 고등학교를 박차나고 나와 『네 멋대로 하라』를 쓴 이후로 줄곧 글로 목소리를 내며 살았다. 88만원세대를 대표하는 그녀는 늘 거친 현실과 사투를 벌이듯 뜨거운 마음으로 살았다. 집도 절도 돈도 빽도 없이 도시빈민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왔지만, 가진 건 없어도 긍지는 있다고 자부한다. 거침없이 솔직하고 당찬 그녀의 글은 그런 특유의 굴하지 않는 강인함에서 나온다. <한겨레><시사IN> 등에 칼럼을 써왔고, 2011년 현재 <경향신문>에 기고 중이며, 지은 책으로는 『불량소녀백서』『질투하라 행동하라』『그래도 언니는 간다』『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김현진의 B급연애 탈출기』 『뜨겁게 안녕』 등이 있다.
 

조한혜정
 1948년 부산에서 태어남.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UCLA 대학에서 인류학 박사를 수료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고 있음. ‘또 하나의 문화’를 통해 여성문화,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담론들을 제시하고 생산해 왔음. ‘하자센터’를 통해 작업장 학교라는 대한학교를 설립하고, 노리단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발족시켜 청소년 문화운동과 대안교육의 다양한 실험을 해옴. 현재 환경운동연합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우정과 환대가 가득한 공동체 마을의 복원을 꿈꾸고 있음. 저서로 <한국의 여성과 남성>, <성찰적 근대성과 페미니즘 ― 한국의 여성과 남성 2>, 연작 형태의 문화 비평서인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1·2·3>, 교육 현장을 다룬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학교를 찾는 아이, 아이를 찾는 사회>가 있으며, 마거릿 미드의 <세 부족 사회에서의 성과 기질>를 번역했다.

김혜리
 서울에서 태어나 역사를 공부하고 영화잡지 기자가 되었다. 다른 일은 한 적이 없다. 『씨네21』을 만드는 과정에서 쌓인 글을 묶어 리뷰집 『영화야 미안해』, 인터뷰집 『그녀에게 말하다』 『진심의 탐닉』을 책으로 냈다. 영화 속 한 컷을 관찰한 짧은 에세이를 모은 책 『영화를 멈추다』가 『그림과 그림자』와 사촌에 가깝다.
 

목수정
 목수정은 공연 예술, 문화 정책 분야에서 일하다가 현재 파리에서 문화, 여성, 정치 분야의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나이 차가 스무 살 넘게 나는 프랑스 남자와 비혼인 채 아이를 낳고 사는 만만치 않은 미션을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는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야성의 사랑학》 등이 있다.
 

장영희
 1952년 9월 1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뉴욕 주립대학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간 번역학을 공부했으며, 서강대 영미어문 전공 교수이자 번역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중·고교 영어 교과서 집필자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문학의 숲을 거닐다》와 영미시 에세이 《생일》, 《축복》의 인기로 ‘문학 전도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김현승의 시를 번역하여 ‘한국 문학 번역상’을 수상했으며, 2000년에는 월간 <샘터>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첫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을 펴냈다. 이 책으로 2002년 ‘올해의 문장상’ 제 1회 수상자가 되었다. 2003년에는 아버지인 故 장왕록 교수의 추모 10주기를 기리며 기념집《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을 엮어 내기도 했다. 마지막 수필집인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완성해 희망의 빛을 남기고, 향년 57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타계 후 1주기 기념 유고집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가 출간되었다.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2011년 1월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작품으로는 소설집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등이 있고,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1),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등을 수상하였다.
 

김류미
 강남이 허허벌판일 때부터 거기 살았고 반지하 자취생활을 거쳐 다시 강남에 산다. 몇 년 간의 알바 인생에서 얻은 좌우명은 ‘일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다’였다. 졸업 후, 1년간 희망청에서 일하며 ‘88만원 세대’라는 접점을 고민했다. 블로그질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트윗질에 집중하는 편. 구원 같았던 책을 만들고 소개하며 마침내 쓰게 된 행운도 누렸지만, 여전히 좋은 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여전히 하루하루가 산만하다. 저서로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가 있다.
 

노혜경
 시인. 정치에 사랑이라는 담론을 이끌어들인 노사모를 만드는 데 기여했고, 말과 글과 삶의 일치를 통해 지식인의 실천을 꿈꾼다. 탈근대의 정치는 시(詩)여야 한다고 믿는다. 지은 책으로 <새였던 것을 기억하는 새>, <뜯어먹기 좋은 빵>,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등이 있다.
 

강금실
 1957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1975년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1979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여 1981년 23회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법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3년~1995년 판사로 재직(1994~1995 서울고등법원 판사)하였고, 2000년에는 법무법인 지평 대표 변호사를 맡았고, 2001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부회장을 역임했다. 2003년 첫 여성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현재 여성인권대사, 아시아재단우호협회 이사, 법무법인 우일아이비씨 고문 변호사를 맡고 있다.
 

고은광순
한의사, 마인드 힐링 전문가. 1955년 서울 출생. 이화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으로 2회 구속, 2회 제적됐다. 1984년 대전대 한의예과에 입학, 학사·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한의사협회와 한국한의학연구원 감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해 호주제 폐지, 부모 성 함께 쓰기, 종교법인법 제정 운동을 주도했다. 현재 충청남도 시골에서 솔빛한의원을 운영하며 빛사람수양회를 이끌고 있다. 또 새로운세상여성연합 대표로 여성평화행복학교를 운영하며 한겨레 휴센터와 공동 주관으로 ‘고은광순과 함께하는 여성 건강 교실’(2박 3일)을 열고 있다. 곧 충북 옥천 지역에서 공동체 마을을 시작할 계획이다. 저서로 《어느 안티미스코리아의 반란》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 등이 있고, 《펄루, 세상을 바꾸다》 《그래도 내일은 희망》 《웃을 순 없잖아!》 《엄마가 결혼했어요》 등 청소년을 위한 번역서가 여러 권 있다.


김형경
 소설가이자 시인. 1960년 강릉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3년 《문예중앙》에 시가, 1985년 《문학사상》에 중편소설 《죽음 잔치》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83년 첫 장편소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로 제 1회 국민일보 문학상을 수상하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장편소설 《세월》,《피리새는 피리가 없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성에》, 《외출》, 《꽃피는 고래》를 발표했고, 창작집 《단종은 키가 작다》, 《담배 피우는 여자》, 시집 《모든 절망은 다르다》 등을 펴냈다. 심리 에세이로 《사람풍경》, 《천 개의 공감》, 《좋은 이별》,《만가지 행동》이 있다. 제10회 무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권윤주
고양이와 재즈, 카페를 사랑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카투니스트이다. 대학 졸업 후 각종 일러스트레이션과 캐릭터 작업을 해왔다. 만화 웹진 <넷터치 코믹스>에 카툰을, 영화 잡지 FILM 2.0에 '스노우캣의 영화일기'를 연재했다. 그녀는 자신의 홈페이지 http://www.snowcat.co.kr/ 에서 Snowcat이란 이름으로 일상생활을 잔잔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그려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스노우캣은 네티즌들 사이에 '귀차니즘', '귀차니스트'라는 말을 퍼뜨렸으며, '혼자 놀기'와 '카페 놀이' 등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작품집으로 <Snowcat in New York>, <Snowcat의 혼자 놀기>, <Snowcat in Paris>, <Snowcat Diary>(1·2권), <To Cats 고양이에게>가 있으며, 삽화를 그린 책으로 <웃지 마 나 영어책이야>, 표지 그림을 그린 책으로 피터 게더스의 <파리에 간 고양이>, <프로방스에 간 고양이>, <마지막 여행을 떠난 고양이> 등이 있다. 2002년 제1회 독자만화대상 온라인 만화상, 2006년 제24회 프랑스 3천만 동물 친구들을 위한 재단 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여진
영화배우. 2011년 부일영화상, 2002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2000년 대종상영화제, 1999년 춘사대상영화제, 1998년 청룡영화상 수상. <청춘콘서트 2.0 청춘, 외치다>에서 ‘행동하는 청춘 Action!’이라는 내용으로 청년들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의제와 행동을 제안하는 액션토크를 서울에서 진행하였다. 청년들의 현실적인 문제와 대안을 함께 만들어나갔으며, 정의로운 영혼이자 행동하는 여배우로 불리고 있다. 다수의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쌓았고 영화, TV 등 다양한 매체에서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여배우다. @yohjini

 
나임윤경
 연세대학교와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학교 교육학과 성인(여성)교육학을 공부했으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히는 일, 대한민국 여성들의 현주소를 성찰하고 불합리한 사회를 바꿔나가는 일에 열정적이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젠더연구 입문』, 『여성교육 개론』, 『여성커리어와 리더십』과 같은 여성학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여자의 탄생』, 『여성교육과 실천』, 『여성과 남녀공학대학교의 ‘공정한’ 만남을 위하여』등이 있다.
 

공지영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계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착한 여자 1,2권》《고등어》《봉순이 언니》《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즐거운 나의 집》《도가니》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존재는 눈물을 흘린다》《별들의 들판》, 산문집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상처 없는 영혼》《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등이 있다. 21세기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앰네스티 언론상 특별상, 제10회 가톨릭문학상, 2011년 제35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김려령
 서울예술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마해송문학상,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았다. 첫 소설 『완득이』가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 독자까지 아우르며 큰 사랑을 받고 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져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대표 작품으로『우아한 거짓말』,『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 『기억을 가져온 아이』, 『요란요란 푸른아파트』,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가 있다. 『우아한 거짓말』은 ‘2012 IBBY(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어너리스트’로 선정되었다.
 

나희덕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등이 있고, 산문집 『반 통의 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편저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유리병 편지』등을 펴냈다. 2011년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8년 소월시문학상, 2005년 이산문학상, 2003년 현대문학상, 2001년 김달진문학상, 1998년 김수영문학상,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수상.
 

유인경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경향신문 여성부 부장을 거쳐, 현재 경향신문사의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유인경의 해피먼데이>, <웬수들과 살기>, <내 인생 내가 연출하며 산다>,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등이 있다.
 

어슐러 르 권
 1929년 10월 21일, 미국 버클리에서 인류학자 알프레드 크로버와 작가 디어도어 크로버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장 이른 작품들은 <오시니아의 이야기>와 <말라프레나> 등에서 다시 보게 되듯 가상의 나라를 배경으로 하기는 하지만 판타지가 아니었다. 관심사를 살려 출판할 방법을 찾던 르 귄은 초반기 과학소설에 대한 관심을 돌이켰고, 1960년대 초반부터 정기적으로 출판을 하기 시작했다. 르 귄은 1969년에 출간한 유명한 과학소설, <어둠의 왼손>으로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미국과 영국에서 백만 부 이상이 팔리고 16개국에 번역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더불어 세계 3대 판타지 소설로 꼽힌다. '휴고 상', '네뷸러 상'을 십여 차례 수상했으며, 그 외에도 '세계 환상문학상'과 '카프카 상', '필그림 상'을 수상했으며 세계 과학소설 연맹에서 수여한 '간달프 상'을 1979년에 수상하였고, 과학소설과 판타지 소설에 기여가 큰 사람에게 수여하는 '그랜드 마스터 상'을 2003년에 수여받았다.
 

한나 아렌트
 제2의 로자 룩셈부르크로도 불리는 한나 아렌트는 시몬느 베이유, 로자 룩셈부르크, 에디트 슈타인과 함께 4대 유태인 여류 철학자로 꼽힌다. 아렌트는 1906년 독일의 하노버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유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평생 강하게 간직하며 살았는데, 이러한 조건이 그의 삶이나 사상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독일 아카데미로부터 프로이트 상을, 덴마크 정부로부터 소니그 상을, 함부르크 시로부터 레싱 상을 수상하는 등 50년대와 60년대를 실천적 강의와 저술 활동으로 빼곡이 채우며 세계 지성인의 주목을 받았다. 미완성작으로 남은 <정신의 삶>을 집필하던 중, 1975년 12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지은책으로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혁명에 관하여>, <공화국의 위기> 등이 있으며 사후에 <정신의 삶>, <칸트의 정치 철학 강의>가 출간되었다.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
 1933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15세가 되던 1948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에 입학해 일찍부터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시카고 대학으로 옮긴 후 그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28세의 젊은 사회학도 필립 리프와 결혼, 1952년에 첫 아들 데이빗을 낳았다. 1955년 하버드 대학의 철학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간 뒤 1957년 학위를 수여하고, 이듬해 파리 대학, 옥스퍼드 대학,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며 다시 학계로 돌아 왔다. 그 뒤 1959년부터 뉴욕시립대학, 사라 로렌스 대학, 컬럼비아 대학 등에서 철학 강의를 맡게 된 이후 1960년부터 각종 신문과 잡지에 활발한 기고 활동을 펼쳤다. 이때 첫 번째 소설 <은인>(1963)을 발표하면서 서서히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이며 예술 평론가로 입지를 굳혔다. 지은책으로는 평론모음집 <해석에 반대한다>, <은유로서의 질병>, <타인의 고통> 등이 있으며,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올해의 평화상(Peace Prize)'를 수상했다.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니콜 크라우스
1974년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의 고독』에 반해 10대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주로 시를 썼으며 이십 대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스탠퍼드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미술가 조지프 코넬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 년 동안 마셜 장학금을 받으며 영국의 코톨드 미술 연구소에서 미술사를 공부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철학과 예술 전반을 깊이 있게 공부한 니콜 크라우스는 남편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함께 뉴욕 문단에서 분더킨트(신동)로 불린다. 2002년에 출간한 첫 소설 『남자, 방으로 들어간다』는 기억과 정체성, 고독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강렬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니콜 크라우스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적 상상력과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특유의 서정적인 미스터리 기법으로 사랑을 이야기한 두 번째 소설 『사랑의 역사』(2005)는 출간 당시 뉴욕 문단의 최대 화제작으로 떠올랐으며, 35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레베카 피펏
일리노이 주립대와 바르셀로나 대학, 리전트 칼리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했다. 국제적인 강연자이자 저술가로, 여러 학교와 목회자 훈련 세미나에서 영적갱신, 전도, 성품 훈련 등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 지은책으로 <빛으로 소금으로>, <하나남의 마음에 합한 사람>, <전도>, <토마토와 빨간 사과>등이 있다.




 *소개글 출처: 온라인 서점 알라딘

2012/06/16 01:09 2012/06/16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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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슈바르처의 <<아주 작은 차이>>를 다 읽었다. 대체로 그 책에 나오는 70년대 독일 여성들의 고통은 헤어나올 수 없는 가사, 육아 노동과 남편에게 언제나 '대줘야' 하는, 그러나 자신은 단 한번도 만족하지 못한 성적 봉사에 기인했다. 그로 인해 멀쩡한 가정에서 호사를 누리는 듯이 보이는 여성들도 스스로를 노예나 창녀로 인식하곤 했다.

여성문제를 파고들다 보니 어느덧 '성해방'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허나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내가 몸담은 개신교계에서는 대체로 함구하거나 회피하는 편이다. 여성 문제를 지적하는 분들도 '몸'에 대한 담론을 풀어가지만 일상적으로 겪는 성관계에서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려한다.

알리스 슈바이처는 자신의 책에서 킨제이보고서를 언급하면서 질 오르가즘 vs. 클리토리스 오르가즘의 문제를 거론한다. 결론적으로 질 오르가즘 집착은 남성의 성욕구 충동에 한정될 뿐 여성은 후자를 통해서도 충분히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레알' 여성이 아닌 관계로 더 깊이 다루지 않더라도 성관계 안에서도 남성은 자신의 욕구를 항상 해결하는데 반해 여성은 가정에서도 성적 욕구를 억압받고 강요당하여 남편에게 성적인 '봉사'를 해야했다고 언급한 경우가 많았다. (사례들은 가사노동과 남편 음주폭력과 동반되곤 했다)

성적인 부분, 즉 가정안 섹스의 역학 관계를 규명하기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배우자와의 침실을 공론장으로 끌어내야하기 때문이다. 부담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으나 바로 그런 이유로 가정안에서의 여성의 성은 은밀하게 억압받고 강요받고 왜곡되는 현실이 지속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자주 느끼는 건데, 남성은 여성문제에 관해 배워야 할 부분이 참 많은 것 같다. 일상 가운데에서 폐쇄적인 이런 성문제를 어떻게 담론화 시킬 지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하겠다. (끝)
2012/06/13 01:08 2012/06/13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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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멘토의 시대'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해 '멘토'에 관한 책은 아니다. 강교수는 이 책을 통해 지금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하고픈 말을, 몇몇 멘토로 각광받는 이들을 지명하여 그들의 명과 암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듯 하다.

강준만 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개혁과 진보를 외치는 것 같은 몇몇 열혈 네티즌은 [강남좌파]가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책이라고 비난하는 수고를 해 주셨다. 인물과사상에 실린 '박원순 현상의 명과 암'이라는 글에 대해서도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네티즌이 많았다... 이 사건은 한국 정치가 갈수록 종교화돼 간다는 내 생각을 재확인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은 대중으로 하여금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적 지지, 내지는 냉정하고도 자성적인 판단을 촉구하려는 목적성을 가지고서 멘토로 치부할 만한 몇몇 진보적 인물들을 해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런 이유로 아마 이 책을 읽고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강교수의 '변절'에 실망감을 갖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강준만 교수는 자신이 처음부터 진영에 상관없이 그들의 명암을 드러내는 일을 자처해왔고 그로 인해 비판도 많이 받아왔다고 고백하지만, 내 생각에 그의 억울한 마음의 초점이 약간은 빗나가지 않았나 싶다. 사실 박원순 시장의 당선에는 나꼼수의 영향력이 있었듯,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의 일등공신은 강준만과 그의 [인물과사상]이지 않았던가.
 
강준만 교수는, 현재로서는 그런 평가로부터 벗어나길 바라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타부시 되어온 실명 비판과 양비론 비판의 효시라 할 만 하다. 특히 그는 정치에 관한 한 '도토리 키재기'가 필요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놈을 골라 그를 지지하는 꼼꼼한 수고가 필요하다고 역설해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진보진영에 강한 자신의 스탠스를 유지해왔다. 그가 한국논단이나 김대중, 조갑제 같은 언론과 언론인의 진상 짓거리들을 촘촘하게 비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진보진영 논객들이 함께 참여한 '안티조선 운동'으로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의 강준만 교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강 교수는 진보정치에 실망하고 특히 민주당에서 열우당 창당 시기에 논쟁을 하다가 정치 이슈에 대해 절필을 선언한다. 문제는 그 지점에서 그는 언로를 스스로 닫았고 그 후로 심경의 변화 내지는 -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 지평의 확장이 일어났겠지만, 그 부분이 사실상 크게 대중이나 논객들에게 각인되지는 못한 느낌이다.
 
결국 이후로 나오는 [인물과사상] 기고글들이나 [강남좌파], 이번에 출간된 [멘토의 시대]에서 취하는 그의 정치적 스탠스는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느끼기에 왠지 낯설고 불편한 것이 되고 있다. 강 교수는 또다시 네티즌들이 그런 불편함을 표하는 것이 불편한 악순환을 돈다.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멘토라고 생각하는 '강준만'의 변화에 나도 적응하지 못해 작년 초인가..한동안 그의 기고글이나 관련 기사들을 매의 눈으로 열심히 찾아서 읽어대던 기억이 난다. 그의 궤적을 훑어간 지금은 그를 이해한다. 여전히 동의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지만 대체로 그의 지적에 공감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 책도 나는 귀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진영 구획'을 여전히 좋아할 지는 모르겠으나 진보 진영에서 여전히 그는 귀한 존재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덧글)
강준만 교수의 책을 보면서 든 생각2. 우리나라 중도진보는 노빠를 중심으로 분열된 것 같다. 문제는 노무현 전대통령 사후에 정서적으로는 국민 모두가 노빠가 되어 그 정치적 입장조차 비판할 수 없게 된 점. 둘째는 노무현을 아끼는 정서가 노무현의 세력에게는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
전자는 정치사적으로 어려운 부분이고 후자는 당장 대선에서 어려운 부분이다. 후자는 통진당 사태로 대선직전까지 장기적인 카오스 상태가 지속될 듯 하지만 전자라도 어서 빨리 노대통령을 끼고서도 합리적인 논쟁이 가능한 지점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무학의, 아니 독학의 진단을 해본다.

2012/05/30 22:45 2012/05/30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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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교]를 봤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제외하고는 20년만에 처음 보는 소설인 것 같다. 은교를 보게된 건 영화 [은교]를 보고 영 찜찜했기 때문이다. 영화 [은교]는 사실 별로였다. 아니 나쁘지 않았지만 플롯이 좀 성글게 느껴졌달까. 결국 열흘을 보내고 소설을 전자책으로 다운받아 읽었다.

일단 소설과 영화는 다르다. 영화에 나오는 단편 '은교'란 소설은 없다. 영화에서는 서지우가 자기 스승 이적요가 몰래 써 놓은 은교(에 관한 개인의 기록)을 자신의 이름으로 공개함으로써 갈등이 심화된다. 문제는 소설은 영화에서처럼 이적요가 불같이 대노하거나 두 사람의 갈등이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은 사제간이며 글쟁이들인지라 미묘하게 얽히는 - 물론 중간에 은교라는 17세의 소녀를 두고서도 - 갈등이 서서히 고조되어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싸이클이 존재하는데 영화는 이 흥미로운 내러티브를 뭉개버린다.

 

특히 마치 은교를 사이에 두고 욕정과 질투에 불타는 두 남자의 대결처럼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는, 마지막 서지우의 차사고 장면에서도 이적요가 미리 자동차를 고장낸 사실을 알고 분노의 질주를 하다 중앙선을 고의로 넘으면서 사고가 나는 것으로 설정했지만, 소설에서는 그 사실을 안 서지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한다. 이는 오랜 스승이자 마음의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보여준 데 대한 깊은 슬픔의 표현이다. 그렇게 서지우는 죽기 직전까지 이적요를 놓지 못했다. 이적요 시인 또한 차를 타려는 서지우에게 허겁지겁 달려가 잠시나마 차를 타는 것을 말리려했다. 은교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둘은 서로 많이 아꼈노라고 회상한다.

은교와의 관계도 그렇다. 영화는 후반에 이적요가 이마에 키스를 하자 그를 재우고 서지우와 섹스를 나누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소설에서는 은교가 먼저 이적요에게 자신에게 키스를 해도 된다고 말한다. 허나 이적요는 이마에만 키스를 하고 은교 또한 이적요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방을 나온다. (이 차이는 크다) 소설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 이적요의 내외적 갈등들도 모두 삭제되었다. 소설에서 이적요는 은교와 만나기로 하지만 은교의 남친 행세를 한 서지우의 지인에게 길바닥에서 고딩을 희롱한 노인으로 개망신을 당하고 그 사건으로 이적요는 심한 상처를 받는다. 이후에도 은교와 함께 들어간 카페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며 그 과정에서 겪는 노년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특히 이적요의 과거사. 이렇다 할 따뜻한 가정의 모습을 겪지 못한 그가, 서지우를 질투하는 가운데에서도 셋이서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행복해하는 장면이나, 어릴 적 동네의 인민군 학생들에게 피터지게 맞던 자신을 구해준 D라는 처녀.(그녀가 이적요의 이상적인 여성의 원형이다) 얼마 전까지 만났던 후배 여성 시인과의 밀회가 자신이 원할 때 발기되지 않는 나이로 접어들면서 관계를 끊은 일 등. 은교보다는 이적요에게 상당히 많은 지면과 묘사를 할애하고 있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그의 인생(인간성)을 잘라내버리고 은교에게 호감을 주는 '시적 천재성'(기능)만을 부각시켰다.

장면들도 영화에서는 들쑥날쑥하다. 집청소 알바를 하기로 한 은교가 바로 다음에 이적요의 집에서 잠을 자고 그날 밤 천둥소리에 이적요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자는 장면은 소설 속에서는 한참 후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는 대시인 이적요가 17세의 은교에 대한 욕망이 발전하고 급속도로 안에서 번지다가 내적 갈등 후 그 아이를 내면 깊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개연성있게 전개되지만 영화에서는 70대 노인의 '로리타 애착' 정도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이 다분하다.

서지우와의 관계도 삼각관계임에는 분명하나 둘의 갈등의 주변 상황들을 잘라내어 그 갈등의 깊이를 무디게 만들었다. 일례로 서지우는 인세 중 육천만원을 가로채지만 그 사실을 이적요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은교라는 단편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비평매체에 싣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소설에서는 그가 이적요의 단편 소설 몇 개를 훔친 뒤 그 결론 부분을 살짝 개작하여 발표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적요가 불편해하는 것은 서지우가 도둑놈일 뿐 아니라 자신의 소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결말을 수정하여 그 소설 자체의 통일성을 무너뜨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느 인터뷰 상에서 원작 소설가 박범신은 동명의 영화에 대해 비교적 좋게 평했지만, 내 생각에 그는 영화 은교에 대해 서지우의 각색처럼 불편하게 여긴 점들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소설 은교는 참 좋았고 영화 은교는 아주 나쁘진 않았지만 뭔가 잘못 손댄 '덧칠'처럼 느껴졌다.


사족)
영화 은교는 노출로도 홍보가 많이 되었지만 다시 한번 아쉬운 점을 짚자면 소설 은교에서는 서지우와 한은교의 섹스 장면을 디테일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적요 시인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장면을 적나라한 영화 노출신의 하이라이트로 설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내 생각에 영화의 대중성을 고려해서 굳이 강한 베드신을 넣어야했다면. 서지우가 한은교를 모텔로 데리고 가서 억지로 잠자리를 갖는 장면이어야 했다고 본다. 그게 임팩트도 있고 서지우의 심리 묘사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2012/05/14 22:41 2012/05/14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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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적은 약자다' 라는 말이 있다. 흔히들 하는 말로 여성의 적은 여성이란 말이 있도 있다. 며느리의 적은 시어머니고 여성 사원의 적은 여성 상사라는 의미다. 이 부분을 좀더 풀어서 말해볼까 한다.

 

사회에서 부를 가지지 않은 자, 여성,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반대 계급, 이를테면 부를 가진자, 남성, 비장애인, 고용주에 의해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지속적인 차별과 억압을 당한다. 이것은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관점이지만, 실제 개개인인의 미시적인 삶에서는 구조적 개혁이 더딘 관계로 구조를 뜯어고치기 보다는 개인의 윤리와 처세에 보다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가난하지만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성으로 차별을 받지만 그 상황에 불평하지 말고 더 열심히 일해서 가정과 회사 모두 인정받는 삶을 살아라.. 등.

이 대목에서 우리는 관련된 수많은 처세법들과 그것들을 상세하게 정리한 서적들을 만난다. 이른바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대변되는 마인드 컨트롤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최악의 사건이 오더라도 긍정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하면된다는 믿음을 잃지 말기를 종용한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은 실제로 심리학적으로도 개인의 역량을 발휘하는데 도움이 되며 자수성가한 다수의 개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꿈을 이루고자 하는 긍정적 사고+불굴의 노력이 결실을 이루게 되었다는 류의 말을 자주 언급한다.

 

나도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매사에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으로 어떤 일이나 삶 전반을 바라보기 보다는, (많은 심리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떤 일이든 노력하면 성취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개개인의 능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그렇게 노력하여 소위 '성공한', '자수성가한' 이들이 원래 자신이 속했던 열등 집단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분명 이들의 피나는 헌신과 노력, 열정은 개인적 차원에서 칭찬할 만한 무엇이 되겠지만 자신의 예를 통해 자신이 속한 집단을 질책하는 방식 - 이를 테면 '나도 XX해봐서 아는데 죽도록 힘쓰면 이룰 수 있다, 불평불만만 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더 노력해라' - 으로 변하면 그것이야말로 더 큰 폭력이 될 수 있다.

며느리의 위치에서 성실히 수행하여 인정받은 여성은 시어머니가 되어서는 며느리의 위치에 불만을 품은 여성을 억압하고,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여 CEO에 올라선 사람은 노조운동을 하며 회사를 비난하는 사원들에게 손가락질한다. 장애를 극복한 이들, 흑인이면서 헐리우드에 스타가 된 배우, 육아와 직장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은 수퍼 비지니스 우먼. 이들은 존재만으로도 억압받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나는 구조에 불만을 품지 말고 저렇게 뼈를 깎는 노력을 덜 해서 지금 이 처지가 되었다는 윤리적 자학에 빠지게 만든다.

어메리칸 드림처럼, 사실상 차별받는 집단 속에서 성공하는 개인이 나올 확률은 극히 적다. 허나 매체나 사회는 이런 이들을 대서특필하고 긍정적 사고를 통한 개인의 노력에 매진할 것을 권한다. 이러한 푸닥거리 이면에는 불평등한 체제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보수집단의 욕망이 숨어있지만 말이다. 고로 성공한 몇몇 개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구조적인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첨병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자신의 성공에 스스로 놀라며 누구나 나처럼 하면 된다는 계몽을 시도하지만 노력해도 그를 쫓아 계급적 도약을 하지 못하는 다수의 차별받는 이들에게는 좌절감에 더불어 죄책감까지 떠앉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자수성가한 이들에 대한 집중적 조명과 칭송보다는 그가 그 과정에서 겪게된 차별과 불평등한 상황들을 더 드러내는 방향으로 관점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공담을 조중동같은 보수 매체에 넘겨주기 보다는 좀더 그 성공의 내러티브(스토리)를 풀어내어 차별받는 더 많은 개개인들이 행복해지지 못하는 중간 장벽들을 거대담론이 아닌 삶의 미시적 차원에서 조명해야 하며, 이러한 작업은 사회구조적 측면, 거대담론적 사회비평과는 사뭇 다른 층위의 조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작업이야말로 성공지향적이고 처세술이 판치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피부에 와닿는 공감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믿는다.

2012/05/03 01:03 2012/05/03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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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저스'를 봤다. 흥미로운 영화임에 분명하다. 이 영화는 각 만화의 주인공들을 불러서 종합선물세트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별개로 보더라도 이 영화는 가장 '포스트모던한' 헐리웃 블록버스터가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어벤저스가 최첨단 시대에 외계인이나 신화를 스토리의 메인 모티브로 삼은 부분이 인상적이다. 기술문명과 신화가 통합(synthesis)되는 영화 속 내러티브는 갈등을 넘어 이제는 공존을 이야기한다. (첨단을 달리는 '아이언맨'과 구시대 히어로 '캡틴아메리카', 그리고 신화속에나 나올법한 천둥의 신 '토르'가 서로 소통하며 갈등을 풀어간다.)


하지만 그 소통과 공존 사이에서 구영웅주의와 신영웅주의의 충돌을 야기한다. 이른바 수정-자경주의로 일컫는 흐름을 말하는데 구영웅주의가 사명감이 투철하고 대의를 위하여 헌신하는 캐릭터였다면, 신영웅주의는 자신의 한계 속에서 힘을 발휘하는, 그러면서도 매순간 복합적 권력구도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때로는 대의를 저버리거나 위기에 빠진 시민을 구하지 않는-'왓치맨'의 코미디언처럼 도리어 공격하기도 하는-불완전한 존재로 그려진다. 어벤저스에서도 구영웅으로 대변되는 '캡틴 아메리카'와 신영웅으로 대변되는 '스타크'(아이언맨)의 관점 차이도 흥미롭게 지켜볼만한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주목할만한 캐릭터는 퓨리 국장이다. 그는 내 생각에 니체가 말한 '초인'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는 지도자로서 강인한 모습,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의 소유자다. 시민들이나 심지어 히어로들에게도 국방부의 비밀 계획에 대해서는 함구하며 친구의 죽음도 전쟁의 동력으로 쓸만큼 전략가와 행동가로 모자람이 없다. 심지어 권력자들이 반대하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강압에도 흔들임없이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행동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해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그의 얼굴에서 히틀러를 본 건 아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그가 불편했던 건 열등한 인간들을 다스릴 '초인'을 기다려온 역사의 실패 때문일까. 혹은 만화속에서조차 마키아밸리즘의 단면을 보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일까. 만약 현실세계에서 무법의 자경단을 만들어내고 시민들을 불법사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감금시키고 권력에 무릎꿇게 만드는 초인이 있다면 그들이 멋있어 보일까. ('배트맨'에서 존 웨인은 악당을 잡기 위해 시민들의 휴대폰 통화를 감시하며 그 기술을 개발한 과학자는 그 일로 그를 떠난다) 그들에게 엄청난 부와 엄청난 군사력, 그리고 정보력을 허락한다면 그들은 만화속 어벤저스처럼 스스로 자정능력을 가진 집단으로 진보할까. 사실상 그저 시민들을 탄압하고 괴롭히다가 결국은 비토 세력으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벤저스나 왓치맨 같은 무법의 자경단들이 현실에서는 반드시 은퇴해야 한다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왓치맨'에서는 히어로들은 시민들의 시위로 공권력을 경찰들에게 이양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2012/04/20 22:40 2012/04/20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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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페미니즘

나의 주장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성은 적이 아니라는, 여성들의 자기 다짐과 남자를 안심시키는 발언들, 그리고 남성과 대립하고 싶지 않은 자기 최면의 배후에, 혹시 '가부장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라는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보자는 것이다. (37)

 

각 분야에서 여성 1호가 된 여성이나 고위직에 오른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바깥일을 하지만 애들 아침밥은 꼭 차려주고 나와요." 그리하여 나처럼 출세도 못했으면서 아침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주눅들게 하고, '나쁜 여자'인 여성운동가의 이미지와 확실한 선을 긋는다. (37-38)

 

마오쩌둥, 마르크스 모두 중산층 지식인이었지만, 언제나 페미니스트만 중산층 지식인인 것이 시비거리가 된다. 이렇게 말하는 남성들도 대개는 중산층 부르주아 '지식인'인 경우가 많은데,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여성운동가 중 일부가 지식인이라는 시살은 못 견뎌한다. (39)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또 내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정신차려야 할'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 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다.(40-41)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구성한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44)

 

한국 현대사의 고통과 비극의 성별적인 두 주체, 정신대 '할머니'와 장기수 '선생님'의 존재는 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전자는 역사의 피해자, 전쟁의 '부산물'이지만 후자는 역사의 치열한 주체이며, 인간의 신념과 의지를 상징한다. 전자는 불쌍한 혹은 수치스런 존재지만, 후자는 존경스럽고 경이로운 존재다. (53)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분류, 분리하는 방식은 聖女와 性女, 정숙한 여성과 순진한 여성, 본처와 애첩, 아내와 애인...은 배타적인 범주 같지만 남성을 위한 여성의 기능이라는 점에서 같다. (55)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유독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출세'시키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변화시켜야 하고(피해자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서도 자녀들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 한다...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62)

 

남편에게 당하는 고문과 국가로부터 당하는 고문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다른 점이 있긴 하다. 국가 기관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 가해자에게 밥을 차려주지는 않아도 되며, 평생 맞는 것도 아니다. 국가 폭력의 가해자들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결국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정은 치외법권 지대이며 아내를 구타하는 남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 (124)

2012/04/10 01:05 2012/04/10 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