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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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위의 생각이지만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말한 '패러다임 시프트'가 참 현실적인 이론이란 생각을 했다.

이른바 '신학 혁명의 구조'라고 패러디 해도 될만큼 역사적 논쟁들에 있어, 두 개 이상의 양립하는 이론들이 충돌할 때 실제로 그 이론들의 흥망을 설명해주는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서 말이다. 포퍼의 견해처럼 진위를 따져서 어느 하나가 바늘에 풍선이 터지듯 펑 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이론이 양립하며 나름의 세를 유지하다가 어느 한 이론이 점점 소멸되어간다.

이 과정에서 기존 이론은 그것을 고수하기 위한 입장에서 보수적 권위를 내세우고 새로 등장한 이론은... 기존 이론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풀이(Problem Solving)를 단행한다. 따라서 두 개의 이론은 마치 다른 문제를 풀고 있는(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두 이론은 한동안 평행선을 달리며 라이트와 파이퍼도 현재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지금은 파이퍼와 라이트의 이론의 중첩기라 할만 하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시기에는 어느 한 입장을 버리지 않도록 더글라스 무처럼 양 이론을 포용하는 입장(수정된 개혁주의적 입장)도 등장한다! 풍요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파이퍼가 '칭의논쟁'에서 휘청거리지도 않는 라이트에게 너무 깊이 결정타를 날리려다 빗맞추었다고 느낀다. 그가 바로 그 '파이퍼'라는 점에서 조금은 걱정스럽다.



*관련기사

[CTK] 톰 라이트, 적인가 동지인가
http://www.christianitytoday.co.kr/inews/inews.html?oo_id=469&oo_day=20110906185705&code=200-015&mode=view

[21세기 신학자들] (41) 더글러스 무 미국 위튼대학교 교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321960
2011/10/06 21:27 2011/10/0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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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버스를 탔다. 안으로 들어가서 여성분 앞에 섰는데 가슴이 많이 패인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정말 의식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고, 엄밀히 말하면 그녀의 가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골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내 시선을 마주치고서 즉시 불쾌한 표정을 짓고는, 놀라서 그 다음 행동을 고민하는 듯 했다.

멍하게 있던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직감했고 - 엄밀히 말하자면 내 시선이 그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직감했고 - 뒷걸음치며 과하게 고개를 돌려서 다른 쪽을 바라봤다. 급한 뒷걸음질로 나는 뒤에 서 있던 남자와 부딫혔고 그는 '아이씨~'하며 짜증스런 소리를 내뱉었다. 난 뒷사람에게 목례로 사과하고 붉어진 얼굴과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난 시선이 그쪽에 머물러 있었지만 정말 보지 않았다. 아니 '의식하며' 본 게 아니었다. 사실 그 좁은 공간에서 그녀쪽을 보지 않으려면 과하게 고개를 획 돌리고 있어야 했었다. 생각을 하다보니 그렇게 오버해야 했나 싶기도 하고 내가 그녀 쪽 어디를 봤더라고 날 째려보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감도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상상하는 나의 한심한 모습을 떠올리니 이번엔 내가 도리어 화가 났다.

'뭐냐.. 옷은 왜 그렇게 파지게 입고, 사실 난 당신 옷에 관심도 없었는데 지금 날 싸이코 변태 아저씨 취급하는 거냐.' 머리속에서 별 생각이 다 났다. 흥미롭게도, 나는 오해를 받자마자 그녀를 미워했고 내 행동이 당사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에 대해 인식 속에서조차 침묵했다. 내 동기가 중요할 뿐 그녀가 받은 불쾌감, 위협감, 그런 것들은 사실상 사소한 문제처럼 느껴졌다.

거의 99%의 남성들이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을 때 '주관적인 모멸감'을 느끼면 성희롱이라는 대목에서 흥분한다. 논리적이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명수인 '남성들'의 잣대에서 '여자 사람'의 개별적 성향에 따라 절대적 기준없이 사과해야 하거나 안 해도 되는 상황, 처벌을 받거나 처벌받지 않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질 못하는 것이다. 해서 남성들은 '주관적 모멸감'에 대한 처벌에 대해 윤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교통법규 같은 규칙으로 인식한다. "IF 불쾌하다고 하면 THEN 당장 사과한다"... 의도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버스안 그녀가 불쾌해 했다는 점을 공감하지 못하는 나처럼.

또한 다수의 남자들은 성희롱 문제 해결 혹은 예방을 위해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대하면 된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한마디로 직장 동료가 아닌 단란주점에서 부르면 나올 법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더듬거나 추태를 부리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진일보한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슴이 파인 옷을 입은 남성의 가슴팍에 시선을 고정하고 멍때리고 앉았으면 동일한 문제가 됐을까.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같은 의미에서 남성 특유의 동료의식을 버리고 여성을 여성으로 대해야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닐까. 이는 성 불평등과는 다르다. 농담을 던지며 가볍게 몸을 두드리는 게 남성들에게 허락되고 그것이 우정의 한 표현이라고 여성에게도 그렇게 하고 그것의 의도를 존중해달라는 남성들을 우리는 가감없이 '변태'라고 부를 수 있다. 같은 파진 옷과 타이즈를 입고 있어도 그 몸매를 주시한다면, 남성과는 달리 여성은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런거다. 성적 평등과 성적 구별은 엄연히 다르며 그걸 놓친다면 당신은 억울해하면 분노하는 '성추행 변태 아저씨'가 될 것이다.

아내는 종종 나를 '게이'로 분류할 정도로 여성적이라고 평가하지만 나도 때때로 마초적 성향이나 가부장적 정서에 깊이 매몰되어 있음을 의식할 때가 많다. 버스 안에서의 사건이 이를테면 그렇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그녀였다면 어땠을까. 한껏 멋내려고 차려입고 버스에 앉았는데 어디서 거구의 아저씨가 앞으로 다가와 내 몸을 눈으로 훑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떤 게 있었을까. 모든 걸 떠나서 일단 불쾌하고 한편으로 무섭지 않았을까. 만일 왜 쳐다보냐고 소리질렀을 때 그 무시무시한 남자가 '내가 언제 쳐다봤냐'고 '난 그냥 멍때리고 있었다'고 도리어 화냈다면 어땠을까. 그를 이해하고 공감했을까. ...혹은 경찰에 신고했을까.
2011/10/05 01:03 2011/10/05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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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관련 토론에 대한 IVP의 입장 (페이스북 글)

/신현기 대표

 

 

지강유철 선생님의 뉴스앤조이 글을 통해 소셜 공간에서 벌어진 토론을 지켜보면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출판사로서는 가급적 개입하지 않고 독자들의 생각을 더 듣고 배우고 싶었습니다. IVP가 더 들어야 할 쓴 소리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매우 좋은 관점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출판사는 독자들로부터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토론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독자들끼리 서로 상처를 입는 모습은 저희에 대한 비판보다도 훨씬 저희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이라도 저희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1. 지강유철 선생님의 IVP에 대한 비판(토착과 참여를 강조하는)을 달게 듣습니다. 저희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고 극복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은 저희의 능력 부족과 게으름에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지강유철 선생님뿐 아니라 소셜 토론을 통해 나타난 여러 독자 분들의 애정 어린 혹은 따끔한 질책을 겸허히 듣습니다. IVP 살림을 오랫동안 책임 맡아 온 저의 생각은 동료 간사들에게 보낸 다음 글로 대신 피력합니다.

 

“나는 지강유철 님의 비판을 남에게 하는 비판으로 읽지 않는다. 기대했던, 크게 보면 같은 진영이어야 할 출판사에 대한 "자아비판"적 성격을 갖는다고 읽는다. 그랬기에 그가 글의 탄탄함이나 사실여부에 신경을 덜 썼을 것이라고. 그래도 ‘진정성’만을 읽어내는 것이 내겐 더 다급하다. 과거 우리의 아픔을 되새겨 볼 때, 소위 "우리 편" 안에서의 자아비판에 대하여도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한다.”

2. “IVP, 존 스토트만큼만 되어라”라는 지강유철 선생님의 일갈이 있었습니다. 어디 존 스토트뿐이겠습니까? 책 만드는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책의 내용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공적 개인적) 삶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을 늘 갖고 있습니다.

3. 많이 궁금해 하실 제목 선택 문제입니다. 독자들로선 당연히 자신의 관점을 들어 출판사의 선택에 대해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비판은 출판사에게 약이 됩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제목 문제로 저희에게 직접 문의하셨다면 벌써 소상히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저자의 글을 정확하게 옮기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제목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아무리 대가의 제목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책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제목은 우리 상황과 독자들을 고려하여 만드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래서 제목 짓기야 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출판사도 원제를 자기들 마음대로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의 제목을 직역한다면, ‘급진적/철저한/근본적 제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제자도’를 선택했습니다. 무조건 많이만 팔겠다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 제자도’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독자일수록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분들도 머리말 네 쪽만 읽으면 radical에 대한 저자의 뜻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존 스토트가 말하는 radical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을 이 책으로부터 배제시키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닐 것입니다.

 

‘급진적 제자도’도 좋지만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고 “날것 그대로” 제.자.도. 석 자를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더 강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관점의 차이는 있습니다. 죽음을 코앞에 둔 존 스토트가 제자도를 말한다면 과연 무엇을 말할지에 대한 궁금증 유발형 제목이 급진적 제자도라는 완성형 제목보다 더 흡인력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더구나 radical을 과연 ‘급진적’으로 번역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저희 역시 본문 안에서 그렇게 번역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이 책은 원제가 The Radical Disciple이니 사실 몇몇 분들이 주장하시는 ‘급진적 제자도’ 자체도 ‘존경하는’ 그 분의 제목을 그대로 직역한 것은 아닙니다.

 

4. 지금까지 말한 입장을 조기에 밝히는 것이 뭐가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이번 지강유철 선생님의 IVP 비판은 사실과 다른 면을 단정하여 논거로 삼았다는데 문제가 있었고, 그것을 저희가 나서서 바로잡는 단순한 행위마저도 마치 저희가 지강유철 선생님의 애정 어린 비판에 대해 자기변명을 늘어놓는 것처럼 비쳐질까봐 선뜻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지강유철 선생님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그 논거로 삼은 사항들의 진위 여부를 말씀드려야 더욱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강유철 선생님은 IVP가 좌파 혐오증, 보수지향성, 상술, 심지어 윗선이나 데스크의 입김 때문에 제목을 세탁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은 저희 역시 혐오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살았느냐고 물으시면, 저희는 쥐구멍을 찾을 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IVP 구성원들은 어찌 감히 OOO와 IVP를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목에서 IVP 지체들은 P스럽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의 잣대로 작동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로 친한 관계인 이웃 출판사를 보기가 민망해졌습니다. 찾아가서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우스워졌습니다. 물론 IVP 구성원 가운데 철없는 누군가 개인적으로 그런 말을 할 가능성마저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만, 85년부터 IVP에서 일해 온 저는 한 번도 그러한 태도를 지니거나 정책에 반영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지강유철 선생님은 자신의 글 가운데 살짝 ‘가정’을 끼워 넣기는 했지만, 그런 글쓰기는 적지 않은 독자들에게 부정확한 것을 사실로 믿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농부는 쌀로 말하고, 요리사는 음식으로 말하고, 출판사는 책으로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낳아놓은 자식이 칠팔백 종이 되니 독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비판과 오해를 견디기 싫어 일일이 반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번에도 지강유철 선생님이 애정을 담아 말씀하신 것이니 경청하고 반성하며 결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왜곡된 사실로 인해 지강유철 선생님이 진짜 말하고 싶은 뜻에도 누가 되고, 토론 과정에서 독자들끼리도 마음을 상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부족한 글이나마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판단착오가 있다면 가르쳐주십시오.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날카롭고 거센 토론은 계속하시되, 서로 마음이 상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독자, 필자, 출판사가 공히 참여할 수 있는 진짜 ‘제대로 된’ 출판 비평과 도서 비평이 자리 잡을 수 있으면 하는 희망도 있습니다.

2011/10/05 00:27 2011/10/05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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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스토트의 마지막 책 <제자도>. 그러나 책의 원제목은 '급진적 제자도'이다. 책의 서문에서 존 스토트가 제목을 왜 '급진적 제자도'라고 했는지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이 빠진 책의 제목에서 한국 IVP의 현주소를 본다. (자료 제공 한국 IVP)

누추한 제 서재의 책을 출판사별로 진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책을 빨리 찾기 위한 조치였지만 얼마쯤 지나니 그보다는 좋아하는 출판사 책이 늘어나는 걸 더 뿌듯해 하고 있더군요. 덕분에 한길사·까치·창작과비평사·문학과지성사·서광사·나남 같은 일반 출판사, IVP·홍성사·크리스천다이제스트·여수룬·나비·한국신학연구소·생활성서사 등의 기독 출판사 책들이 서재의 좋은 자리를 꿰차게 되었지요.

 

그제 서재를 둘러보다 웬만한 기독 백화점보다 IVP 책이 더 많지 싶어 놀랐습니다. 주요 저자 40명의 책 가운데 130여 권이나 가지고 있더군요. 2000년대 초반까지는 IVP 책이 한 권씩 늘어날 때마다 고마움과 긍지도 커졌습니다. 그러나 책은 좋아하지만 실천에 둔감한 지식인들이 점차 싫어지다 보니 좋아하는 출판사의 책이 늘어나도 별 감흥이 없더군요. IVP가 만든 책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번역 위주의 출판을 언제까지 계속하겠다는 것인지 답답했기 때문입니다.

 

장기려 선생은 "사랑의 동기가 아니거든 언행을 삼가라"는 말을 좋아했고 늘 이 원칙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분을 무척이나 존경하지만 저는 아직도 사랑의 동기가 아님에도 비판에 열을 올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IVP의 잘못을 꼬집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사랑의 동기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아직도 IVP의 책을 배제한 신앙생활을 상상치 못합니다. 가끔 IVP에 실망할 때가 없지 않지만 IVP가 더 좋은 출판사가 되길 희망하는 마음이 더 크거든요.

 

언제부턴가 IVP 신간에 눈에 거슬릴 정도로 추천사들이 많아졌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의 작품일 경우에는 추천사가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꽤 알려진 저자의 책에까지 추천사가 넘쳐 나면 속이 더부룩해집니다. 170여 쪽뿐이 안 되는 존 스토트의 마지막 책 <제자도>를 펼치니 15개나 되는 추천사가 날 좀 읽어 달라고 아우성이더군요. 이렇게 하는 것이 <제자도>의 격을 높이고 판매에 도움이 될까 싶더군요.

 

대체적으로 상품 홍보는 제품 인지도가 떨어지거나 상품의 질에 자신이 없을 때 열을 올리게 됩니다. 한 기독교 월간지의 지난해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 크리스천이 가장 선호하는 저자는 존 스토트입니다. 원서 <제자도>에 나오는 9개 추천사야 어쩔 수 없겠지만 한국 추천사를 6개나 추가한 것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됩니다. 당사자들에겐 송구한 이야기입니다만 '급진적 제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대다수 국내 추천자들의 추천사를 읽어야 하는 일은 좀 괴로웠습니다.

 

제가 존 스토트를 처음 만났던 1993년에 그분은 일흔셋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이번 책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책을 구입했습니다. 실제로 2000년 3월 4일, 정성욱 교수의 존 스토트 인터뷰 기사를 읽으니 <복음주의의 기본진리>가 자신의 마지막 책이 될 것이라 예상했더군요. 하지만 존 스토트는 11년을 더 살았고, <제자도>를 쓰면서는 이런 글을 남겼지요. "88세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놓으면서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이 고별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급진적 제자>입니다. 한국 IVP가 책 제목을 <제자도>로 바꾼 것은 의외였습니다. 아니 충격이었습니다. <제자도>는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비롯한 여러 책들에서 핵심만을 추려 다시 쓴 책입니다. 그분의 마지막 작품인데다 가격까지 착하기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하더라도 IVP 재정에 큰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만큼은 존 스토트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기품 있게 만들어 주길 바랬습니다. 지금 판매되고 있는 <제자도>를 볼품없게 찍었다는 뜻이 아니라 책 제목을 꼭 그렇게 바꾸어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어느 출판사도 존 스토트에 관한 한 IVP의 전문성을 따라올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제자도>서문에서 존 스토트는 이 책 제목을 왜 '급진적 제자'로 했는지 분명히 했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편집자라도 '개신교계의 교황'이란 소리까지 들은 그분의 책 제목을 멋대로 바꾸긴 힘들었을 것입니다. 보수적 기독교는 '급진적'이란 단어를 좌파 용어라 생각해서 싫어하고, IVP는 독자들의 이런 경향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급진적 제자>를 포기하고 <제자도>란 제목을 선택했다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판단이든 상업적 고려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런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IVP는 다른 저자도 아닌 존 스토트의 책 제목을 세탁한 것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 사태를 책 제목에서 '급진적'이란 단어 하나 뺀 것을 놓고 웬 호들갑이냐고 그럴 수 없는 이유입니다. '급진적'이란 단어가 빠진 존 스토트의 마지막 책에서 한국 IVP의 현주소를 읽습니다.

 

존 스토트는 50권이 넘는 자신의 저서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았습니다. '다른 어느 책보다도 영혼과 마음을 쏟아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책임>을 더 주목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문서선교회(CLC)에서 번역한 초판과 개정판은 물론 IVP가 새로 번역한 판본들까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과 함께 제가 가장 자주 참고하는 존 스토트의 책이기도 합니다.

 

제 신앙에 끼친 영향을 이야기하려면 <변론자 그리스도>와 <균형잡힌 기독교>, 그리고 BST시리즈 중 사도행전, 에베소서, 디모데후서, 로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책임>을 가장 의미 있는 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가 복음주의권 신학자나 목회자의 치명적 약점인 반지성주의와 현대사회에 대한 무관심에 함몰되지 않은 저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책임>은 복음주의가 세상에 내어놓은 그 어떤 책보다 의미 있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스토트가 '런던 현대 기독교 강의'가 주관한 새 천년 기념 강연을 토대로 쓴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이번 추석에 새로 읽었습니다. 존 스토트는 이 책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종교 다원론자들로부터 엄청난 반대와 비난에 휩싸일 것을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복음주의자들보다 현대 세계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인물 아닙니까.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를 다시 읽다 보니 추석을 뜨겁게 달궜던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무모함이 오버랩되더군요. 혹독한 반대에 직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과 같은 분은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라고 한 존 스토트나, 검찰의 발표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을 박명기 교수에 주었다고 스스로 자백한 곽노현이나, 무모함으로 치자면 난형난제입니다.

 

<복음과상황> 발행인 김회권 목사가 예리하게 꼬집은 것처럼 존 스토트는 '미국 주류 백인 중산층 기독교의 외식에 도전하고 자유주의적인 급진 윤리를 주창하다가 닭장차에 갇혀 잡혀가던 하비 콕스'만큼 영국 백인 중산층과 긴장 관계를 형성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신과 동시대를 산 영국의 버트란드 러셀처럼 '반핵운동을 하다가 구류되고 투옥되는 고난을 자초'하지도 않았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에게 열려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구티에레즈 신부나 보프 신부 등 좀 더 급진적인 복음 전파에 주력했던 사제들과의 연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위르겐 몰트만처럼 '로잔언약 5항의 정신을 발휘해서 한국의 박정희 유신 독재를 비판하는 신앙 성명 한두 줄'도 발표한 일이 없습니다. 본회퍼의 예언자적 영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영국의 제국주의적 이라크 침략이나 1980년대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 대하여 예언자적 탄핵'이 존 스토트의 입을 통해 전 세계로 전파를 타지 못한 것은 아쉽습니다.

 

하지만 한계를 드러낸 존 스토트의 급진적인 제자도 타령을 하고 있을 여유가 제겐 없습니다. 그분의 급진적 제자도에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지만 제 기독교적 지성의 절반을 형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 IVP의 문제에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는 것이 더 시급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IVP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40명의 주요 저자와 그들의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 한국 저자가 4명이니 외국 저자의 비율이 90퍼센트나 됩니다. 반면에 IVP와 함께 기독 출판사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하나인 홍성사의 국내 저자 비율은 70퍼센트에 육박합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 IVP 구성원들은 '어찌 감히 홍성사와 IVP를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일지 모르겠습니다. 수준이라는 것이 글의 완성도나 수준 높은 번역 등으로 제한된다면 말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IVP 지체들은 'P스럽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의 잣대로 작동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년 나이의 IVP가 아직도 외국 지식의 대리점이고 소매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런 평가에 대해 'P스럽다'는 기준이 어떻게 적용하는지 궁금합니다. 수준이 낮고 글이 안 돼서 한국 저자의 책들을 내기 곤란하다는 변명은 자신들이 얼마나 사대주의에 함몰되어 있는지를 보여 줄 뿐입니다. 그 기준을 버리지 않는 한 이 땅의 아픔과 문제들은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IVP는 수준 높은 저자를 발굴, 육성하기 위해 좀 더 과감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행착오 없이 어떻게 이 땅의 기독 출판문화가 성숙해질 수 있겠습니까.

 

IVP가 단순히 하나의 출판사가 아니라 한국기독학생회의 정신을 따라 문서 사역을 하는 기관이라 하더라도, 30년 넘도록 아직도 번역에 목을 매고 있다는 현실은 어떤 변명과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존 스토트는 그가 1974년에 만든 국제 랭햄 파트너십에 속한 프로그램인 랭햄 문서 사역에 그의 모든 인세 수입을 기부했습니다. 제3세계의 목회자, 신학생, 신학교 도서관에 복음주의적인 책들을 보급하기 위해서였지요. 랭햄 문서 사역은 제3세계들이 '자국어로 된 기독교 서적의 저술과 출판을 육성'시키는 일이 자신들의 중요한 존재 이유란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번역이 아니라 자국어로 된 기독교 서적의 중요성을 간파한 것이지요.

 

한국 IVP는 랭햄 문서 사역의 이런 정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국제기독학생회 역시 이런 기조 위에 서 있는 것 아닌가요? 이런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지 못한다면 최근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한국기독학생회의 젊은 학생들은 데이트, 사랑, 결혼, 이혼 등의 문제들마저도 여전히 번역서에서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데이트나 결혼과 같이 사적이고 섬세하고 그 지역의 문화가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는 이런 문제를, 언어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가치 체계가 다른 외국 서적에 의존하는 것이 제 눈엔 코미디로 보입니다. 저는 IVF나 IVP가 이런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기를 촉구합니다. 외국 서적은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데이트나 결혼과 같은 문제의 진단에서 무기력하고 처방에서도 문제 해결은커녕 또 다른 부작용을 낳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정치나 사회참여와 같은 문제를 들여다보면 번역 위주의 출판문화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 분명해집니다. 한국기독학생회가 이 땅의 민주화의 기로에 서 있던 1991~1992년 당시 '6개대 사태'로 휘청거렸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그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원인이 저는 번역 위주의 출판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의 절박했던 민주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 때문에 IVF가 큰 홍역을 치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번역 위주의 출판문화에 깃든 사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신앙과 삶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서양 기독교가 설정한 아젠다에 국한하지 않고 지금 이 땅에서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는 문제들에까지 확장하는 일에 서툴렀기 때문에 6개대 사태가 그런 결론밖에 도출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태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면 문제의 해결 또한 현재의 모습과는 달라질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6개대 사태와 관련해서 저는 이제까지 한기연 쪽 주장에 더 많이 익숙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기 위해 IVF 서울지방간사회가 1991년 11월에 발행한 두 권의 자료집인 <IVF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자료집 Ⅰ-IVF 사회참여 교육지침과 그 비판>과 <IVF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자료집 Ⅱ-6개대 사태 설명과 문건 모음>을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또한 IVF 이사장을 오랫동안 역임한 김영철 목사님께서 쓰시고 IVP출판사가 낸 <지성사회 복음화 50년>의 해당 부분도 정독했습니다. 김영철 목사님의 책은 '내가 본 IVF 50년의 발자취'란 부제가 붙어 있긴 하지만 6개대 사태 관련 대목에서 객관성을 크게 결여한 서술을 읽으며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당시 제출되었던 문건들을 공정하게 소개하는 것은 역사 서술에서 기본인 것 같은데 이분이 과연 최소한 서울지방간사회가 낸 두 권의 자료집은 정독하셨는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당시 IVF 학생들에게 6개대 사태의 핵심적 원인 가운데 하나는 당시 고직한 총무의 해임이었습니다만 <지성사회 복음화 50년>은 그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짧은 지면에서 이 부분을 더 논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존 스토트의 마지막 작품에서 '급진적'이 빠진 부분을 보면서 자꾸 시선이 6개대 사태로 이동함을 느낍니다. 당시 급진적인 제자도 원칙에 충실하게 문제를 풀지 못했던 아픈 역사가 아직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IVF나 IVP의 발목을 잡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 IVP가 우선 존 스토트 만큼이라도 급진적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분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성경적인 균형의 문제가 출판에서도 적용되길 기대합니다. 존 스토트로 밥을 먹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IVP라면 최소한 그 기준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맞겠다 싶습니다. 존 스토트를 지적 및 영적 스승 정도로 생각하는 한국기독학생회 역시 학생들을 리더로 세울 때 사역을 마칠 때까지 이성 교제는 안 된다는 기준 등의 근본주의적인 보수성 또한 극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최근에 잘 아는 모 대학의 리더가 이성 교제와 리더 중 택일하라는 요구 앞에서 끝내 '남친'과 한국기독학생회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6개대 사퇴 때 기록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주초의 문제와 노동가요 등에 대해 한국기독학생회 간사회가 얼마나 과민 반응을 보였는지를 보는 일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때보단 이러한 문화적 보수성과 인권 의식이 많이 개선되었을 것이라 믿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IVF 출신이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이 땅의 지성과 문화에 소중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알 만한 소설가나 영화감독 중에 한국기독학생회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이 많아지면 좋겠고, 양심수들이 갇힌 감옥이나 노동자들의 노동 현장에서, 그리고 성적 소수자나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IVP가 만든 책으로 인권 신장에 중요한 지침으로 삼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VP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지강유철 / 100주년기념교회 부설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장기려, 그 사람> 저자

2011/10/01 00:26 2011/10/0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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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엉뚱하고도 냉정하게 들릴법한 이야기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에서..)

전업주부의 가치는 얼마일까.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무상으로 일하는 아내의 비용을 산정해보자는 말이다. 아내가 아니고 어떤 여성을 고용했다 치자. 나는 아들이 있다고 치고. 집에 상주하면서 육아를 한다면, 아이의 세끼 식사와 목욕, 산책 같은 것을 시켜준다. 내 경우, 아침은 상관없지만 저녁은 차려주고 방청소와 내 옷 빨래, 장보기 등등을 저녁 10시까지 수행하고 잔다면 비용은 얼마가 들까. 일당 10만원? 15만원? 20? 일단 10만원으로 잡고 주말은 전혀 사람을 쓰지 않고 내가 모든 일을 한다고 치면 10만원X20일=200만원이 든다.

게다가 잠자리도 같이 한다. 이 대목에서 남편들은 '잠자리는 함께 즐기는 것'이라고 화를 낼 수 있다. 좋다. 좀 애매하긴 하지만 내가 원할 때 잠자리를 권하는 것과 동의했으나 상대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표현할 경우만 카운트하자. 이 비용은 어떨까. 아저씨들 단란주점 2차 비용 정도로 산정하면 될까. 나는 시세를 잘 모르니 대략 매달 100만원 정도 든다고 치자.

내가 생판 모르는 여성을 고용해서 내 아내 수준의 '일거리'를 요청한다면 최소 300만원 이상은 매달 지급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관리비, 생활비 등등이 따로 나가야 하고 주말에 출근을 하거나 일이 있어서 하루이틀 더 써야 한다면 아마 월 350~400만원 선의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고비용의 인력을 실비로 사용하면서 돈벌어다 준다고 생색도 내고 육아를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게 하고 (직장에서 임신했다고 알아서 눈치주고 해고시키기도 하지만) 집에서 니가 하는게 뭐냐고 호통치기 일쑤이나 바로 그 만만한 아내가 하는 노동은 최소 월 300만원 이상의 노동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게다가 남자에게 직장그만두고 같은 일을 시킨다면, 그는아마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눈치를 보거나 심한 굴욕감에 그보다 적은 보수를 받는다 해도 분명 직장생활을 선택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런거다. 고비용의 노동을 거의 무상으로 공급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남들이 특히 남성들이 꺼려하는 저계급의 일을 한다는 점에서 '아내라는 직업'은 통계치가 이야기하듯 여성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남성들이 하도 그 얘기를 못알아듣는 거 같아서 '남성들의 언어'로 한번 계산해봤다.

그리고 내가 제안하고 싶은 건 이거다. 월급을 받으면 급여로 아내에게 합당한 비용을 지불해라. 그 후에 교육비, 생활비 등 가정에 필요한 돈을 논의하자. 분명 당신은 자동차를 사거나 아이패드, 갤럭시탭을 지를 때 아내에게 돈을 빌리거나 아내에게 고비용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주말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야 취미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2011/09/28 01:02 2011/09/28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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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으로 말해 이 영화는 음악 영화의 최고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틈이 많다. <아마데우스>나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마틴 스코세지의 <더 블루스> 등등을 떠올렸다면 이 영화는 기대 이하가 될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더 콘서트> 다분히 상업적인 영화다.

하지만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너무 좋아한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호감을 키웠고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잘 짜여진 느낌이라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바이올리 협주곡 전곡을 13분에 압축하여 펼치는 편집도 나름 괜찮았다. (물론, 30년 동안 한번도 맞춰보지 않은 곡을 솔리스트의 '비상'에 힘입어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것은 심한 과장이다.)

소련 시절 자신이 세운 솔리스트가 감옥에서 죽게 되고, 단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며 자신은 볼쇼이 극장의 청소부로 전락하게 된 주인공 안드레이. 그 오랜 후회와 고통 그리고 답답했던 시간을 일소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그는 그 무모한 작업에 뛰어든다. 30년간 연주조차 하지 못했던 단원들을 모아서 감옥에서 죽어간 솔리스트의 딸과 바로 '그 곡'을 지휘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협연을 하려는 안느-마리 자케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협연에 참여하게 되고 여러차례 우여곡절 끝에 포기하려 마음 먹지만 자신의 부모를 알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최종 결정을 번복하고 바이올린 협연에 나선다.

30년전 부러뜨린 지휘봉을 테입으로 감고 나오는 부분이나 지휘봉을 부러뜨린 바로 그 소련 간부의 도움으로 다시 공연장에 서게 되는 설정, 가망이 없어보이는 일을 꾸미는데도 자신의 일을 뒤로 한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안드레이의 아내, 매 순간 그의 의지를 북돋워주는 오랜 친구들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참 훈훈했다.

인간은 참 흥미로운 존재다. 얼짱 몸짱의 솔리스트(멜라니 로랑은 정말 바이올린 솔리스트라고 보기엔 너무나 완벽한 미모를 자랑한다)에, 디즈니랜드에서나 가능할 법한 해피엔딩 등등 여러모로 상업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영화의 중간중간 나는 유쾌했고 때때로 감동했다. 내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7점도 주기 어려운 이 영화를 나는 참 재미있게 보았다. 그래서 유럽 및 미국개봉에서도 평단 및 관객들의 환호를 얻어낸 게 아니겠나. 냉전시대의 비극을 시종일관 위트있게 풀어낸 것도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추천한다.

 

2011/09/14 21:31 2011/09/14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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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이긴다>를 다 읽었다. 논쟁 지향적인 성향이 내재해 있어서 그런지 책 읽는 속도가 평소대비 두세배는 되었던 듯 하다. 다 읽고 보니 사실 얘기할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 개인적으로 기대보다는 (논쟁할만한) 내용 자체는 많지 않았기 때문이랄까. 이 책은 천국, 지옥, 진노하는 하나님 이런 개념 때문에 교회의 문지방을 넘지 못했던 semi-christian에게 큰 울림을 줄 책이라 확신하지만 성경을 비교적 깊이있게 공부한 학자풍의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보수적 신학도들에게는 약간의 실망감을 줄 수도 있으리라 사료된다. (그런 의미로 나는 이 책에 대한 논쟁은 '깊이'보다는 '입장'에 기인하리라고 예상한다. 나또한 그런 부분에서 글을 쓰려고 한다.)

총평. 기존에 많은 이들이 이 책에서 생길 법한 논란거리들에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관계로 내가 굳이 동어반복의 글을 쓸 필요는 없겠다. 더 잘 쓸 자신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김영봉 목사님의 추천 서문과 의견이 일치한다. 교계의 배경 때문인지 내가 약간 더 보수적인(비판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특히 그가 신학자가 아니라 설교자라는 점, 이 책이 현대 기독교의 내세주의적 사고에 균형을 준다는 점, 그리고 지나치게 정죄하는 교회 분위기를 쇄신한다는 점에서 크게 김영봉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한다.

조금 불편한 부분은 그의 성경해석이 다소 가볍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과장된 해석이 보이면 그의 논리적 큰 흐름에 상관없이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아마도 이런 부분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은 '사랑이 절대 이기지 못한다'로 목소리 높일 것이다. 두번째로 불편한 부분은 신앙의 균형점인데 제자도로서의 예수의 희생, 헌신이 배제된 채 '나를 위한 하나님'이란 측면에서 사탕발림의 메시지만 풀어낸 게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도 든다. (곧 포이에마에서 복음주의진영의 비판서 '하나님이 이긴다'도 번역 출간한단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 내가 랍벨이 말하는 큰 형의 모습은 아닌가 되돌아보게 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내 신앙적 입장에서는 회심 이후의 고난에 대한 균형이 다소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최근 고인이 된 존 스토트 신부님이 '더' 좋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되는 각각의 이슈마다, 필요 이상으로 균형 잡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그의 성실함이 '더' 좋다.

마지막으로 그의 확신에 차서 말하는 '스타일'이다. 난 겸손한 사람이 좋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마음이 커지는 게 개인적으로도 참 우려스럽지만,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설교자들, 웅변가들에 일단 점수를 후하게 주지 못하는 게 요즘 내 솔직한 심정이다. 사족이긴 하나, 기독교 내부에서 자기 PR에 유능하고 자신과 반대성향의 집단에 지나치게 과격한 이들은 이제 부담스럽다. (사족으로, 예수님도 욕을 하셨다지만 예수에게 배울 게 욕밖에 없는 건 아니잖나. 욕의 제자도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조폭에게서도 그 제자도를 실현할 수 있잖나.) 좋은 방향성을 가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랍벨의 이런 확신에 차고 단호한 태도가 조금은 아쉽다. 특히 논란의 중심에서, 지옥의 존재 부정이나 보편적 구원론으로 치달을 수 있는 그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너무 '하이웨이 스타'처럼 내달리는 것 같아 간간이 혼자서 '워-워-'를 되내인다. 때때로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도올 김용옥을 떠올렸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 분노하며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할 것 같은 칼빈주의자들을 더 자주 그려보았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이란 설교에 감동하며 회개하고 '이 벌레같은 날위해'라는 가사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대다수의 개혁주의 성도들에게 이 책은 치명적으로 불온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니! 성경에 명시한 지옥을 상상할 수 없다니. 불신자들의 구원에 대해 열린 태도라니. 김영봉 목사님에 따르면 실제로 이 책의 여파로 인해, 2011년 6월 15일, 남침례교 연차 회의에서는 '지옥에서의 영원하고도 의식적인 징벌을 믿는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고 한다!

내 주변에도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복음을 인간(편의를 위한) 복음으로 추락시켰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핵심교리를 버렸다는 비판을 할 '구름같이 허다한' '칼빈의 후예들'이 몇몇 떠오른다. 그들은 교리를 잣대로 랍벨의 책을 대충읽고 쓰레기통에 쳐넣을 것이다. 혹은 조목조목 오류를 짚어내면서 정통 교리를 사수하려는 정의감에 불타오를 것이다. 솔직히 나는 교회의 성도들, 그 개별적인 삶을 돌아보고 고민하지 않는 목사, 신학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가 더 걱정스럽다. 교리를 떠받들고 자기 성도는 '벌레'같이 보는 목회자가 두럽다. 의심에 찬 성도들을 이교도 취급하고 그들의 회의감을 제대로 해결해주지도 못하면서 교회에서 떨어져나가도 예정설이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설교하는 기성 교회 목사님들이 두렵다.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지, 생각보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짧게 마무리하자면, 그들보다 랍벨이 낫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끝)
2011/09/07 21:30 2011/09/0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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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개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3시간 안에 무엇이든 배달하는 정체 불명의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알게 된 국정원 요원들은 그를 이용하여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고위층 간부의 애인을 데려오려 하고 그로 인해 이 남자는 남한과 북한의 요원들의 포로가 되어 이용당하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김훈의 에세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남한 요원과 북한 요원에게 번갈아가며 잡혔을 때마다 묻는 질문이 '너는 어느 쪽이야, 북이야 남이야?'였다. 남자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표면적 정보는 전혀 없다. (그 대목에서는 김기덕의 전작 '나쁜 남자'의 깡패 주인공과 닮았다.)

하지만 영화는 남자의 행동과 내면 연기를 통해 그를 유추할 수 있게 만든다. 휴전선 근처에서 이산가족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어주는 이 남자에게 분명 나름의 사연이 있어 보인다. 그는 자신이 죽이려던 북한 고위층 간부가 흐느끼며 자신의 애인 인옥을 죽기전에 한번만 보고 싶다고 하자 그를 죽이지 않고 인옥을 만나게 해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는 오열하는 할아버지의 영상을 담아 마지막 휴전선 넘기를 감행하여 북에 있는 할머니에게 그 영상을 보여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람, 편지, 영상 그 어떤 것이든 남북을 가르며 전달한다. 그의 인생 동력은 '사랑'이며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그는 일신의 돌봄 없이 남북 요원 사이의 이전투구의 장에 자신을 던진다.

 

영화의 플롯은 대체로 '레옹'과 많이 닮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프로페셔널 해결사에게 어느날 찾아온 사랑은 그의 자기관리를 허물고 그 감정의 흔들림 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위험한 상황 속으로 내달린다는 점에서 그 감정선이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시나리오는 그에 더하여 남북한 분단 상황 가운데 처한 주인공의 고뇌와 복수가 우리의 피부에 와닿게 느껴진다.

특히 탈북한 고위 간부의 암살에 대한 위협과 불안, 그리고 정보를 캐내려는 남한 요원의 시선으로 인한 압박으로 자신의 애인에게 집착하고 그녀를 꺼내준 남자에게 강한 질투심을 보이는 장면들이 미시적 측면에서도 개연성 있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는 김기덕 사단의 화려한 재기와 배우로서 윤계상의 약진도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마음은 무겁지만 여러 면에서 풍성했던 점에서 나름 유쾌한 영화라 평하고 싶다.

2011/09/01 21:29 2011/09/01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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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집단의 종단연구를 통해 나의 노년을 상상하다!

이 책은 사실 좀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후반에도 언급하겠지만 이 책이 나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책 소개에 나오듯 '하버드대 공부벌레들의 인생보고서'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 책에 언급되는 종단연구의 대상은 하버드대생 뿐만 아니라 이너시티 집단(서민 남성) 및 터너 여성집단(여성 엘리트)를 포함한다. 하버드만을 강조하는 책 홍보 문구와 달리, 사실 저자는 이 세 부류 집단의 종단연구를 통해 행복한 노년에 대한 일반론 혹은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고 싶었던 셈이다.

 

둘째로 이 책의 소개글에 언급된 행복한 노년을 보장하는 조건들 가운데 으뜸은 ‘고난에 대처하는 자세(성숙한 방어기제)’였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47세 무렵까지 형성돼 있는 인간관계라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인간관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인맥'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저자는 '하버드 졸업생들이 대학생활을 통해 일찍부터 정신사회적 경험을 쌓았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건강한 노년을 맞은 것은 아니었다'라고 일축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간관계라기보다는 '사회활동의 폭'(290쪽)이라고 구체화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나는 한달 가까이 이 책을 읽으며 내 삶과 노년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기회를 가졌다. 단지 이 책이 2004년에도 <10년 일찍 늙는 법 10년 늦게 늙는 법>이란 제목으로 출판된 당시에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 의아할 따름이다. 이 책은 '국민 정신과의사' 이시형 박사의 감수와 홍보에 의해 재탄생한 듯 하다. 그러면서 소개문구들도 하버드나 어떤 구체적인 숫자와 지침들('47세 이전 인간관계'와 같이)을 골라 넣음으로써 독자의 호감도를 높인 것 같다.

 

책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은 이 정도였고... 대체로 나는 이 책을 의미있게 읽었다. 특히 72년에 걸쳐 성인의 발달과 성장에 관한 최장기 전향적 종단연구라는 부분에서 이 책은 이미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나이가 40세에 가까워 가면서 이런 책들이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사실 나는 내 나이 40세를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다. 대학입학, 서른, 아들을 낳는 일... 이런 것들은 자주 상상했지만, 혹은 차라리 죽음에 대해서는 묵상해 보았지만 50세, 60세, 70세... 노년에 대해서는 고민해본 적도 없고 그리 달갑지도 않았다. 어쩌면 재미없는 말년의 삶을 상상하는 게 끔찍하여 생각을 회피해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노년의 행복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약간은 '긍정의 힘'의 노인버전 같기도 했지만(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다루었다), 실제로 연구 결과 '성숙한 방어기제'가 노년의 행복 조건 중 비중이 높다. 오히려 상당히 비중이 높을 것 같던 부모의 학대, 기질, 사회적 유대관계와 같은 부분은 50대 이후가 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술담배, 안정적 결혼생활, 운동, 교육의 정도가 성공적인 노화를 예측하는 지표가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한편으로 치워둔 나의 노년에 대한 닫아두었던 마음을 조금은 열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보다 적극적으로 나의 노년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준비라는 게... 노후 준비 적금, 연금, 그런 류가 아니다. 그런 금전적인 부분의 준비가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지금 내가 생각하는 소신과 성품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한걸음 한걸음씩 노년을 위해 내딛어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이 책을 통해 얻어졌다. 사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나도 늙는 것이 두렵다. 주변에 본이 될만한 노년을 맞이한 분들이 적다는 것도 그 이유일 수 있겠다. 좋은 노인이 되기 위해 두려움을 걷어내고 좀더 솔직하게 내 마음을 들여다봐야겠다. 그리고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

2011/06/27 21:26 2011/06/27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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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계에서 아끼는 글쟁이로는 단연 필립 얀시를 꼽는다. 그의 위트와 깊이 있는 묵상 그리고 항상 그를 에워싸고 있는 듯한, 대상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은 다른 저자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마력임에 분명하다. 필립 얀시와는 조금 다르지만 나는 교계의 또다른 글쟁이로 도널드 밀러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마존 베스트셀러인 <재즈처럼 하나님은>을 출판한 이래 '이 바닥'에서 꽤 유명해진 사람이다.

이번에 국내에 번역된 <천년동안 백만마일>은 IVP에서 번역했을 정도니 그 인지도를 무시할 수 없으리라. 본서는 저자가 자신의 베스트셀러작인 <재즈처럼 하나님을>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을 받으면서부터 비롯된다. 처음에 나는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런 그의 시도가 식상한 내용으로 끝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널드 밀러는 이미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3권의 책을 냈고, 이번엔 다시 그의 책 중 하나를 영화화하는 것으로 책을 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식상할거란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나는 또 그의 입담과 재치 속에 숨겨진 삶과 묵상의 깊이에 푹 빠졌다. 책을 읽다가 때론 사람들을 의식하지도 않고 크게 웃기도 했고 때론 그의 삶에 내 삶을 포개놓고 정직하게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도널드 밀러. 그는 책을 한 권 쓸 때마다 영혼도 성장하는 듯 한 느낌을 받는다. 이번에도 그는 책을 썼다기 보다는 그의 삶 자체가 진일보하였음을 증명했다. 그는 그의 책을 통해 시종일관 자신의 깨달음이나 생각을 구체적인 일상과 삶으로 살아내는 일에 관심을 둔다. 나는 그런 그의 삶의 태도와 글쓰기의 방식이 좋다. 계속 그의 멋진 글들을 보게 되길 꿈꿔본다. (끝)
2011/02/21 21:24 2011/02/21 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