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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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며칠 아내가 내 눈치를 본다. 다친 길고양이들을 병원치료하고 보살피느라 비용도 많이 들었고 시간도 많이 쓰고 있다. 어제는 자려고 들어가는데 한마디 했다.

"미안. 내가 무슨 이효리도 아닌데..."

어제는 흘려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 빵터졌다.ㅋㅋㅋ
사실 지난주에 나도 일도 많고 약속도 많아서 주말 내내 아이보랴 집안일하랴 피곤했다. 고양이들 이야기를 해도 솔직히 귀에 안 들어왔다. 날은 덥기만 하고 일 하나 끝나면 마냥 눕고 싶고.

#2.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를 읽으면서 새삼 진보운동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다. 진보정신의 핵심은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과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 처리는 그 집단이 그저 진보 이데올로기...를 수행하는 '보수집단'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에 이 문제가 불거지면 극우세력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선거에 패하게 된다. 이건 마치 좌파들이 득세하면 북한이 쳐들어온다, 신자유주의 경쟁에서 뒤쳐지게 된다는 우파의 논리와 묘하게 닮았다.

#3.
아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마트에서 죽어가는 앵무새들, 길을 걷다가 발견한 다리 부러진 고양이들, 그것을 지나치지 못하고 달려들어 돌보고 병원에 가서 치료하고 회복시켜서 입양시키려는 노력들.

그 와중에도 세상의 많은 길고양이들은 여전히 다리를 절고 돌아다니고 로드킬을 당하며 굶어죽기도 한다. 앵무새들과 다른 애완동물들은 마트의 한 구석에서 존재감 없이 박스 속에서 숨을 거둔다.

사실 이 미물들을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이 나라, 혹은 제3세계의 아이들을 후원하는 일, 홀트나 기타 여러 NGO, 국민TV나 뉴스타파 같은 진보매체의 운동들에 물질과 시간을 들여 참여하는 일.

#4.
자기계발서를 읽어보면 시간사용에 대한 기본적인 법칙은 '중요한 일'을 먼저 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사소한 일은 미룬다. 더 큰 일을 위해 사소한 일들은 버린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정서가 일상적으로 진보주의 안에서조차 발견된다.

어느 순간 잃어버린 진보 패거리 속의 진보 정신이랄까. 나또한 이 사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략으로서의 이율배반, 적과 싸우기 위해 적의 전략에 동화되는,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조금만 참으면 이루어진다고 '장미빛 미래'의 약속.

#5.
이 모든 일들을 하면서 정작 자신은 전혀 즐겁지 않은 아내. 게다가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나에게 미안해하는 아내를 보며 나는 우울하지만 버티며 살아가는 진보정신의 현현을 본다. 더 큰 것을 위해 미물의 희생을 당연시하지 않는 그 마음을 지지한다는 말이다.

물론 미안함과 더불어 무관심에 때론 서운해하는 아내를 보며 더 자상하게 관심을 가져주지 못하는 내 모습이 또한 미안할 때가 있다. 집에서 아내의 빈자리를 매우기 위해 물리적으로 소진되는 내 일상 때문에 나또한 정작 아내의 삶에 관심과 공감을 표할 여력이 없다.

아내가 열심히 그 일을 할 수 있게 내가 돕는 것. 아내의 부재를 우리 가정이 느끼지 않도록 돕는 것. 아내가 미안함 없이 작은 생명들을 향한 도움을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현재로선, 그게 내가 아내를 지지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게 진정 진보적인 삶이라고 믿는다.
2013/09/13 23:25 2013/09/13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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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아버지 칠순에 낭독한 내 글을 정작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아버지가 본인이 가부장적이었다거나 '어머니에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고 했다. 아내는 당일에 아버지에게 들으시면 감동하실 거라고 말했지만 슬프게도 아버지는 내 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아버지와는 사실 말하지 않음으로 이해된 어떤 부자의 정이 있었다. 이를테면 오해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버지에게 언어를 사용하여 그 오해를 해결했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을 그렇게 평가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막내 작은 아버지 환갑 때도 술에 취해서는 "용주가 쓴 글은... 그건 아니고"라고 흘리듯 이야기했다. 그건 아니다. 휴가 때 내려가서도 아버지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원래 말을 잘 안 하시지만, 식사 시간에 혼자만의 일장연설을 한시간씩 쏟아내는 당신의 성격 상 전혀 언어화된 자기를 표하지 않는다는 건 나름의 의미,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한번도 자신의 삶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긴 잘못에 사과를 한 적이 없다. 부모 자식간 그 흔한 빈말로도 "미안하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물론 그것은 평생 아버지의 이슈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나는 아버지와는 다른 삶, 다른 존재로, 혹은 반면교사의 미덕처럼 여겨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아버지와 갈등이 없었던 건 아버지가 나름대로 채워온 나-아버지의 관계의 망상을 그냥 두었기 때문이고 이제는 그 망상을 내가 언어로 규정지었기에(깨뜨렸기) 아버지는 나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소극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그 받아들이지 못함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후회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나는 언제고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의 삶을 내가 바라보는 시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느꼈다. 물론 아버지가 내 언어를 흔쾌히 받아들여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아내와 더불어 거의 확신에 찬 기대감. 물론 속이 상한다. 그닥 살가운 경험은 없지만 아버지는 세상에서 마음의 문을 닫고 그나마 애정을 쏟은 단 하나의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들, 나였기에. 나도 그것을 알고 있고. 이제 그 희미한 연결고리가 너덜너덜해진 느낌이다.

부자 간의 정서적 고리가 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기질에 의해 서로를 밀어내고 자신을 지켜간다. 피치못하게 너무 강한 에너지로 다가오는 타자에 대해서는 잘라내거나 그것에 압도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와 나 사이의 너덜너덜함은 서로가 한쪽에 압도되는 것보다 건강하다.부-자.
2013/09/13 23:23 2013/09/13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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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나는 예전엔 말을 잘 했는데 요즘은 말을 잘 못한다는 얘길했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말을 잘 한 적이 별로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말은 많고 잘 하는데ㅋㅋㅋ 강의에 대한 부담감이 큰 편이다.  차라리 글을 쓰는 건 괜찮은데 강의는 극도로 긴장하고 일주일 전부터 아내를 괴롭히고 주변에 설레발을 치고... 답잖게 과하게 징징댄다. (요즘은 이 상황 자체를 좀 즐기는 것 같기도..)

 

사실 나는 이런 류의 강의 공포증의 원인을 내 성격 때문으로 생각했다. 소심하기도 하고 다수가 모여있는 자리에서 무언가를 말해야 할 때 다소 긴장이 심한. 그런데 이 불안함, 어색함을 개선해야겠다고 내 심리상태를 곰곰이 따져본 결과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글을 쓸 때는 상당히 감정적으로 편한 상태다. 오히려 쉼을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글을 쓴다는 건 내 생각들의 구석구석을 다 끄집어내어 그것을 논리정연하게, 혹은 시간 순으로 혹은 내가 강조할 이슈를 위해 재구성이 가능하다. 내가 모든 걸 보고 있고 내가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으니 그 상황 자체가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셈이다.

 

글과 달리 말은 즉흥적이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때로 말을 많이 하다보면 말실수나 무의식 중에 생각한 바가 툭 튀어나올 수 있다. 나를 이해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상황에 대해 여러 기제를 동원하여 설명? 해명? 할 수 있지만 내가 넣고 빼고 할 수 없이 던져지는 말들에 대해서는...

 

프란시스 쉐퍼 사상의 가장 큰 성찰점은 '자신의 가치관대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고 가정할 때 생기는 결과들을 고려해보자'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강의를 하다가 말실수를 하거나 논점을 이탈하거나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글은 내 논리정연한 완성품을 드러낼 수 있지만 말은 완벽하지 않을 수 있는 여지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 또는 긴장.

 

그 불안함의 이면. 그 끝까지 내려가보면 나는 청중의 기대, 청중의 평가에 신경이 곤두서 있음을 느낀다. 물론 나는 포퓰리즘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내 BEST PRACTICE를 보여주지 못해서 생기는 타인의 평가에 대해 무의식 중에도 상당한 불안해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의 불안함은 내가 후천적으로 습득한 반골 기질과 선천적 혹은 자라온 배경에서 익숙해진 모범생 기질 사이의 갈등과도 연관이 있다. 나는 다분히 어떤 기성 세대나 조직 입장에서 보면 '불편한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그들이 내 생각들을 공감해주기를 기대한다. 그 공감 도구로 상당히 다듬어진 날을 쓰기를 원하는데 내게 그 도구는 글인 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말은 생각보다 사용하기가 참 까다로운 도구인 셈이다.

 

사실 강의를 불편해하는 배경에는 강의가 반복될수록 깨닫게 되는 명확한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단순하게 접근하면 소심한 성격 탓이라면 강의를 많이 할수록 더 나아져야 하는데 나는 매번 강의 직전까지 왜 이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할까 하는 의구심 말이다. 이 의구심을 계속 파다보니 흘러흘러 여기까지 왔다.-_-;;;;

 

흥미롭게도 이런 생각을 끝까지 주구장창 하다보면 쉐퍼의 유명한 논점과 만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오해받으면 어쩔건데. 사람들이 내 생각을 아주 정교하게 전달받지 못해서 나를 오해하고 내 강의를 폄하하면 어쩔건데... 그러면 나는 살 수 없나. 타인에게 공감을 받지 못하면, 그것도 내 반골기질의 생각들을 타인에게 제대로 어필하지 못하면 내 인생은 멈추나...' 뭐 이런 막장 묵상...^^

2013/09/13 23:22 2013/09/13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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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 정리를 하다가 선교단체와 교회에서
내가 인도했던 소그룹 메일리스트를 발견했다.
나도 참 많은 소그룹을 거쳐왔구나.
솔직히 나는 소그룹을 곧잘 운영해왔다.

한때, 내가 속했던 선교단체의 아는 분이
지성은 상당히 발달했으나 사회성, 공동체성
이 부족한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들을
아웃사이더로 내몰지 말고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그 부류에 나를 끼워넣은 적이 있는데...

솔직히 날 지성그룹에 넣어주신 건 감사했으나
돌아보건대 내가 조직의 아웃사이더이긴 했지만
단 한번도 소그룹에서 아웃사이더였거나
맡은 소그룹을 말아먹은 적은 없었다...ㅡ,,ㅡ+

헌데 오늘 메일을 읽다보니,
그때는 그렇게 좋았던 소그룹 멤버들과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일주소에 수많은 이름들이 걸려 있는데
딱히 지속적으로 교제를 나누는 이들이... 없다...

당시에는 제2의 가족이라도 된 것 마냥
절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기도를 하고
함께 무언가를 고민하던 지인들은,
설령 그것이 어떤 조직이 원해서 임의로 나누고
일정 기간동안 운영했던 그룹이었다 하더라도
내 가치관에 따른다면 나는 이들과 여전히
절절한 관계여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저 그 당시에 잘 굴러간
십여개의 소그룹의 흔적들만 있을 뿐.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마치 초등학교 아이처럼 조직이 임의로 나누고
시간이 지나면 흩어버리는 시공간 속에서
잠시잠간 웃고 떠들다가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미숙함이 여전히 나를 따라다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SNS는 단절되었던 친구들을
굳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찾아내어주고 친구를
맺어주고 다시 대화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지만
내가 내 인간관계를 자랑할만한 처지는 아닌 듯 하다.

나는 커서 뭐가 될까.
나는 커서 무슨 일을 이룰까.
나는 커서 어떤 친구들과 함께 할까.
조금만 있으면 불혹이 될 나이에
불안정한 내 인격을 마주할 때마다 기분이 언짢다.
2013/07/13 23:12 2013/07/13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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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페북에 팥빙수 사진이 많이 올라온다.
여러 모양의 팥빙수를 보다보니 떠오른 잡생각.
보통 팥빙수는 팥과 아이스크림 그리고
몇몇 데코레이션을 위한 재료들이 얼음 위에
올라간다. 우리집 팥빙수는 이렇게 많은 걸
얹어줘요...라고 쥔장이 말하려는 것 같다.

한번은 갈은 얼음 아래쪽에 팥과 아이스크림을
넣은 사진을 봤다. 겉으로 보기엔 바닥이
짙은 갈아놓은 얼음산 같이 밋밋했다.
... 과연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맛있을까.
이런 얘길 꺼내면 대개는 후자가 포장은 별로
지만 진정한 앙꼬들이 푸짐하여 더 맛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럴 확률이 높다.

팥앙금과 아이스크림이 얼음 위에 있냐 아래에 있냐
하는 문제는 팥빙수의 철학이다.
전자는 재료를 홍보한다. 나 이만큼 올라가 있으니
당연히 섞으면 맛날 것이 아니겠냐...라는 의도다.
후자는 맛을 홍보한다. 팥빙수를 시켰는데
얼음 아래 깔린 재료들은 보이지 않아도 섞으면
이것은 '팥빙수'의 맛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의미.

보여주는 것에서 자신감을 찾는가 보여주지 않고도
자신감을 내비치는가.
혹은,
보고서 믿는가, 보지 않고도 믿는가...의 문제다.
팥빙수의 팥의 위치에서 옳고 그름을 가늠할 수 없다.
그저 시각과 미각의 다양한 기호들이 있을 뿐.
하물며 한 사람과 한 집단의 스타일도 그러하지 않겠나.
2013/07/13 23:12 2013/07/13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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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지 않는 삶의 행복"이라.
페친중 한분이 쓴 표현이 유독 맘에 들었다.
솔직히 나는 살짝살짝 주목받는 삶이 좋다.
비중은 적지만 존재감이 있는 삶이 좋다.
하지만 모 아니면 도를 고르라면 나는
"주목받지 않는 삶의 행복"을 선택할 것이다.

얼마전 온라인 매체에서 내 홈페이지를
링크를 걸어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보통은 어떤 요청을 거절하지 않는 편인데
... 이번에는 정중히 거절했다.
불과 5-6년전만 해도 내 블로그의 URL을
내가 출몰하는 많은 사이트에 걸어댔을 것이다.

불과 몇년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SNS의 비약적인 확장과 더불어
인터넷을 대하는, 혹은 정보의 유통 자체를
바라보는 내 관점이 바뀌었다.
쉽게 말해 너무 많이 대중에게 노출될수록
구설수에 오르내릴 확률, 어떤 사건에 휘말릴 때
내가 진정성을 가지고 해명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내가 가장 주목했던 건 타블로 사건이었다.
가장 최근에는 작년 대선 때 보수진영의
조직적인 SNS 활동을 보며 그 생각을 굳혔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사적 영역의 노출이 빈번한 SNS에 뛰어든
많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도 감당할 수 없는 주목을 받다가
어떤 계기로 문제가 될 때 그 문제를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풀 수 없게 될 것이다.

아홉번을 행가레를 당하다가 한번의 패대기로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면 디지털 세대에 한번 "쓰여진 글"은,
아울러 한번 "이슈가 된 사건"은
마치 주홍글씨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주목받지 않는 삶의 행복", 나아가
"주목받지 않을 인간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머지않아...
2013/07/04 23:11 2013/07/04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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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형마트를 안 다닌지가 수개월이 지났다. 필요한 음식만 농협에서 구입하고 필요한 것들은 소소하게 주문하는 식으로 지내는데... 별 불편함을 모르겠다. 무엇보다 자주 지적되는 불필요한 큰 사이즈의 물건들을 구입하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

이번주에 읽어야 하는 책과 읽을 책이 이미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부터 온라인 서점에다가 할인율이 높은 조합으로 책들을 세팅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책읽기가 중요하긴 하나 과잉독서가 내 삶을 바꾸고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과도한 독서는 내 삶 자체를 구속한다.

더군다나 독서량과 도서구입량의 비례가 깨진지는 벌써 몇년째이니만큼 사놓고 언젠가 읽겠거니 하며 산 책들을 이제는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해서 오늘부로 스스로에게 다짐해보았다. "읽을 만큼만 책사기" 대형마트를 끊은 건 왠지 그래야할 것 같은 영역이어서였지만 도서구입은 왠지 어색하기만 하다.

솔직히 좋은 책을 사지 않는 것보다는 의무감으로라도 사서 어서 읽어버리는 것이 미덕 같기도 했다. 결국 그런 압박은 내 삶을 조금씩 조금씩 상아탑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미시적 반성. 오늘 드디어 결단한 "읽을 만큼만 책사기"는 오전내내 곱씹어보건대 내 일상에 긍정적인 신호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남는 돈으로 치맥을 더 먹지만 않는다면...-_-;;;
2013/06/20 23:03 2013/06/20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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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푸코의 '감금사회'의 표현처럼 시민들은 알아서 자체검열을 하고 공권력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었다.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부정해도 그것을 인지하고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더라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양과 같이 흩어졌고 양과 같이 유순해졌다. 스포츠를 즐기고 주말 쇼프로와 일일 드라마, 놀이동산에서 잠시 현실의 시름을 잊고 다시 거대 기계의 한 부속품으로 사회의 미시적 공간에 기어들어가 적절히 '기능'하다가 조금 맛나다고 소문난 집에서 연료를 보충하고 조금 일찍 기능을 멈추고 쉬는 행위에 일희일비하며 돌아와서 또다른 부속품이 될 자녀들에게 나같은 부속품이라도 되려면 경쟁에서 뒤지면 안된다고 전심으로 훈육한다.

거대기계는 그렇게 쉼없이 굴러가고 우리 삶의 목표는 이 거대기계가 멈추지 않게 만드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다. 스스로가 인지하건 인지하지 않건 간에... 놀랄만한 이슈들 앞에서 무력감을 넘어 피로감마저 느껴지는 현실이 새삼 섬뜩하게 다가온다.

#2.
흥미로운 지점은 이런 것이라고 본다. 한국사회에서 많은 정치사회적 이슈들을 대할 때 역사적으로 전쟁 중이 아닌 시기에는, 조용히 튀지 않고 사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나름 살만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소수를 대변하려고 들 때, '조용히 살면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다수를 계몽(enlightenment)하거나 참여(engagement)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벌어지면 관성에 길들여진 다수의 대중은 도리어 이러한 과격한 변화의 방향에 반대세력이 된다.

결국 대중은 침묵한다기보다는 체제유지세력이자 개혁에 반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공권력의 통제가 점점 개인의 시민윤리로 둔갑하고 무의식 중에 체화되는 현대의 규율체제 속에서는 더욱더 그렇게 될 것이다.

진리논쟁이 한창이던 모던사회에서는 진보는 옳고그름의 틀에서 항시 지적 승리를 거둬왔겠지만 포스트모던 담론에서 명약관화한 상황에서조차 옳고그름을 논할 때 논점을 이탈하는 수많은 노이즈들을 해결해야하는 부담이 더해졌다. 그 노이즈들을 털어내면 이미 이슈는 이슈가 아니게 된다.

진보담론에서 과거의 자잘한 승리경험에 기반한 프레임으로 사회문제를 접근하고 전략을 짤 때 나는 더욱더 대중과 멀어지고 고립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MB산성처럼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대중을 대하는 극단의 사건들이 생기지 않는 한 대중은 진보의 편이 될 확률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페북에서 북적이는 논란과 달리 거리, 사무실 풍경의 극단적 대비를 체감하며... '우리'로 상정되는 어떤 규모의 사람들이 늪에 빠졌음을 직감한다.
2013/06/18 23:10 2013/06/18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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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몇몇 페친들의 글들은 주요 업데이트만 받아보도록 설정해두었다. 내 성격상 친구를 끊는다는 게 참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이라 친구아닌 상태가 되기 보다는 페친분들의 잦은 포스팅에 잠시 눈을 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2.
이런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이런거다. 어릴 때 사촌형이 웅변학원엘 다녔다. 정신없이 히히덕거리면서 웃다가도 친척 어른들이 "OO야 웅변 한번 해봐"라고 말하면 그 형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여 이미 외워둔 2분 정도 분량의 글을 힘주어 말했다. 그의 힘있는 목소리는 항상 똑같이 끝났다.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어른들은 다들 대견한 듯 박수를 보냈다.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라고 들릴 만큼 확신에 찬 강한 어조의 글인데 나 스스로가 도저히 공감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 나는 그 글들을 보면서 한동안 괴로웠다. 처음엔 댓글을 달아보기도 했지만 워낙 그 주제에 대해 힘차게 외치는 분위기라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페북이라는 플랫폼은 like-centric이지 토론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갠적으로도 스트레스를 풀려고 들어와서 도리어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더.라...

 

3.
사실 오늘 내가 하고픈 이야기의 핵심은 두번째 이유인데, 무엇보다 타인의 사사로운 행위들을 너무 상습적으로 '까는' 글들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자 불편해졌다. 물론. 매체에서도 개똥녀니 OO녀, OO남 등 기괴한 행동을 하는 이들의 사진을 찍어서 공유하고 종국에는 신상을 털기까지 하는 분위기를 내 주변에서도 느끼는 스릴감이 있긴 한데...

 

솔직히 나도 뒷담화 많이 깐다. 하지만 페북에서 소소하게 마주하는 불특정 다수의 기이한 행위에 대해서는, 글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입장 바꿔 보자면 이는 내 헛짓거리에 대한 스스로의 변명, 혹은 배려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가 매순간을 긴장하며 실수 없이 살 수는 없으므로. 누군가에게는 상처주는 말도 하고 길거리에서 타인과 큰 소리로 떠들기도 했을 것이고 타팀의 누군가는 내 전화 한통, 회의 때 말투 하나에도 불편함을 느꼈을 수 있다.

 

누군가는 그 날(진상짓을 한 날)이 우울증에 허덕여서 걷기조차 힘들었던 날이었을 수 있다. 나를 세게 밀치고 지나간 아저씨는 부모가 급하게 수술실로 들어갔다고 전화를 받고 달려가던 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극단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때로 우리는 나 답지 않게 짜증에 뚜껑이 열리거나 심하게 피곤하여 어떤 부탁도 거절하는 날이 있다.

 

4.
한국은 서비스업종의 천국이다. 아니 인구밀도에 있어서 천국이지만 그 때문에 그 업종 종사자에겐 사실상 지옥이다. 요즘 진보언론에서 자주 회자되는 정신노동자, 백화점이나 식당, 텔레마케팅 업무를 보는 많은 이들. 그들이 한달에 대면해야 할 사람들의 수는 몇 명일까.

 

 '나'는 내 딴에는 참 소중하게 다뤄주면 좋을 존재이지만 그런 수많은 '고갱님'을 상대하는 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명인 이들의 진상 행동을 우리는 굳이 지적질하고 SNS에서 사례집처럼 전파해야만 할까. 고객을 호구로 보는 많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개별 사례들을 모아보면 그들의 노동강도와 급여, 사회적 지위를 돌아볼 수 있다.

 

택배, 음식 배달, 전화응대, 인터넷 장애 수리 등등 하루에 할당량과 건수로 쪼임을 당하는 이들의 일상에서 그 숫자를 '개별 인격'으로 대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지 못한다. '그래,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착하게 살아야지, 기본은 지켜야지, 괴물은 되지 말아야지... 내 상식에 맞춰서 그를 판단한다.

 

5.
서로가 서로에게 기본은 하라고 요구하지만 그 기본이 서로가 정해놓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건드릴 경우 우리는 SNS에서 상대를 까고, 인터넷을 신고를 하고 신상을 털고, 당사자를 '괴물'로 만든다. 때로 나도 누군가에 의해 괴물이 되고 당신도 누군가에 의해 '개새끼'가 된다.

 

살면서 내가 깨달은 건, 내가 정한 정말 관대한 최소한의 룰을 깨는 다수의 사람들에 대해 매사에 지적질을 하고 그것을 이슈로 삼는 것이 참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한 대로 나도 일년에 수십번 넘게 내가 정한 기준대로 못 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의 - 최소 한 몇 년 간의 발자취가 - 어떤 '악한 방향'으로 계속 달려가는 이들에 대해 우리가 더 자주 이야기하고 문제삼아야 하는 게 아닐지. 쉽게 말해 '검증된 놈'을 까야지 길거리나 가게에서 만난 잘 모르는 사회적 약자들의 사소한 진상짓에다가 감정 해소를 해대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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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언니들은 마음에 준비도 되지 않은 나에게 엄청난 속도와 논리로 보험상품을 설명한다. 어쨌든 그게 그들의 생업이다. 그 사람들의 무례함을 이끄는 힘, 그 냉혹한 사회 구조가 있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오늘도 나는 웃으며 전화를 끊고자 용쓴다... 페친들은 이런 나를 도와주시라.^^

2013/06/10 23:08 2013/06/1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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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언 *'모쿠슈라'(mokulsha)

1.
게일어로 '나의 소중한, 나의 혈육'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 프랭키가 한 대사로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 감독으로 열연한 그는 매번 선수들에게 훈련생 이상의 애정을 쏟고 선수가 잘못되었을 때 심한 자책으로 괴로워하는 캐릭터다.

그의 마지막 선수였던 매기에게 이 모쿠슈라라는 단어가 쓰여진 옷을 입힌다. 그 말뜻을 아는 관중들은 매번 열광하곤 했다. 시합에서 이길 때마다 마치 어린이이가 아빠를 향해 장난치듯 웃음짓는 매기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영화.

그녀가 경기 도중 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어 입원한 상태에서 그녀의 명성을 듣고 뒤늦게 가족들이 들이닥친다. 그 가족들은 일확천금을 꿈꾸고 왔다가 그녀의 몰골과 엄청난 병원비에 실망...하며 돌아선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녀의 곁에는 가족이 아닌 프랭키만이 남는다.

2.
오늘 장윤정의 가족들이 방송에 나와서 10억을 탕진한 게 아니라는 해명을 구구절절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갑자기 이 영화의 매기가 떠올랐다. 물론 장윤정은 다행히도 매기의 처지가 아니고 가족사의 디테일은 알지 못하는지라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판단이 쉽지 않다.

난 그저... 돈이 사람을 망친다는 반응에 대해 돈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망친다는 말을 굳이 하고 싶을 뿐이다. 가난하게 살 때는 문제가 없다가 돈이 많아지면 가족관계에 금이 가고 오히려 불행해진다는 이야기들. 물론 돈이 그 비극적 방향성에 촉매가 될 지언정 그 비극적 서사의 시작은 이미 그 안에 고스란히 있었던 게 아닐까.

매기의 가족이 매기가 가난했을 때에도 행복했던가. 남의 가족사를 건드려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지금 장윤정의 가족은 그녀가 성공하기 전의 가족과 정말 달랐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덜 불행했던 관계가 어떤 이익이 개입할 때 더 불행한 관계로 치닫는다는 생각. 그와 더불어 '모쿠슈라'는 대부분 실질적 혈연, 지연과 무관한 경우가 많더라는, 혹은 오히려 가장 가까운 가족, 친척들이 가까이에서 서로를 괴롭히는 주범이 되기도 하더라는 현실.

3.
그래서 가족주의의 굴레는 자주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개별 인간사에 비극을 가져다준다.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타부시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딸을 겁탈하거나 어머니가 자녀를 돈벌이에 떠밀어도 친척간에 재산다툼으로 남남보다 더한 언사와 폭행을 행사해도... 우리 사회는 '우리가 남이가'라며 가정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을 큰 미덕으로 여긴다.

그 영화가 개봉했을 때 20대 중반의 한 미국강사와 대화하다가 그 영화가 과대평가된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생각보다 재미가 없더란다. 매기를 바라보는 프랭키의 눈빛. 그 자체가 '모쿠슈라'의 현현으로 보였던 내게 그의 수박 겉핥기식 인상비평은... 그의 젊은 나이를 고려하더라도 좀 아쉬웠다.

인생에서 누군가에게 '모쿠슈라'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가족주의의 굴레에 빠진 이 사회에서 정작 해야할 중요한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아침. 조금 우울하지만 굿모닝...
2013/06/02 23:06 2013/06/02 2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