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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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스를 타려고 줄을 선다. 줄이 길어지면서 일직선이 되지 않은 틈에 비뚤어진 중간 즈음에 누군가가 슬쩍 줄을 선다. 그 뒤로 사람들이 다시 줄을 선다. 이때 나는 심기가 불편하지만 사람들은 그냥 서 있다. 줄이 어느덧 두 줄이 되고 그 줄 사이로 간간이 사람이 들어와서 2.5줄 비슷하게 된다.

솔직히 나는 끼어든 줄보다 끼어든 줄에 아랑곳하지 않는 원래 줄의 사람들이 더 밉다. 잠시 후 버스가 온다. 버스는 줄 앞이 아니라 줄과 4~5미터 뒤에 정차하고 그 지점에서 걸어오던 사람들이 줄과 상관없이 버스에 타기 시작한다. 출입구에 3~4명이 한꺼번에 달려들고... 이쯤되면 처음부터 줄이란 건 없었던 것처럼 혼잡하다.

이게 뭔 미친 짓이란 말인가... 사실 이런 일은 일상적으로 수도 없이 겪는다. 커피주
문을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어떤 아줌마가 눈치를 잠간 보다가 점원에게 뭔가 물어본다. 그러고는 슬쩍 메뉴를 주문한다. 내 차례가 되어서 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뒤에서 먼저 라떼 두잔이요..라고 소리친다. 점원은 그 주문을 접수한다. 점원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니가 빨리 말을 안 해서 그렇지.'라는 듯 나를 쳐다본다.

만원 지하철에서 내릴 즈음 문앞에 있는 나를 굳이 밀쳐내고 먼저 내리는 승객들이 있다. 나를 밀쳐내고 앞서 가면 도대체 얼마나 빨리 나가냐. 씨바... 뭐, 나를 포함해서 다들 스스로가 소중하고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겠지만 공중도덕을 떠나서라도 일상적으로 부딫히는 사람들을 장애물처럼 생각하고 무시하고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자신의 편의를 취하는 생활이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모든 윤리에는 역사적인 문제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선행한다. 허나 우리 개개인도 엘리베이터에서도 출구만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지나가는 아이가 넘어져서 울고 있는 데도 이어폰을 꽂고 지나칠 만큼, 어느새 아주 기본적인 공동체 윤리의식조차 나약해진 건 아닌지.


#2.
유독 우리나라가 공중 도덕이나 이른바 공동체 윤리가 낮은 이유는 여러 방면에서 보는 입장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입시에 '몰빵'된 교육 체제가 문제가 아닌가 싶다.

솔직히 나는 중학교 시절, 성적이 오른 후로 어머니의 지대한 관심을 받으며 오로지 공부만 잘하면 모든 다른 일들은 면제혜택을 누리며 자랐다. 설거지, 청소, 빨래 같은 집안 일은 물론 아르바이트 용돈벌이도 안 했고 하물며 학원 때문에 친척 결혼 같은 집안 경조사에도 간간이 빠져도 문제가 안 됐다. 학교에서는 반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예체능 점수를 담임 선생님이 알아서 관리(?)해줬다.

지금도 내 주변을 보면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대학 입시 전까지 모든 부모는 자녀가 학교 성적이 오르는 일에 집중하고 다른 많은 일들에는 면제의 혜택을 주는 '관행'이 지속되는 느낌이다. 사실 여기에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과도한 사교육으로 인해 지친 자녀들에 대한 불합리함을 공감하고 있어서, 되도록 공부에 찌들어 불쌍한 자녀의 다른 영역은 통제나 훈육하지 않으려는 '배려'로부터 비롯된다.

아이들은 무섭도록 빨리 어른들의 욕망을 알아채고 그 욕망의 선을 따라 자신의 가치관을 모방하고 체화시킨다. 부모의 욕망에 기인한 이런 가치관, 세계관은 당연히 '공동체 안에서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지향하기 보다는 경쟁에 강건한 정신력을 갖추고, 명문대에 진학해서 지금까지 공부한 고생을 통해 남은 여생을 지속적으로 혜택을 누리는 상류층이 되고 싶은 욕구를 반영한다.

그런 욕구로 아이들은 성장기에 체득해야 할 공동체 윤리적 습속을 익히지도 못한 채 공동체성이 전무하고 암기력만 탁월한 미숙한 성인이 된다. 당연히 이들은 스트레스에 취약할 수 밖에 그것이 자연히 공중도덕이 작용해야할 일상적 자리, 버스에서 줄을 서거나 음식을 주문하거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이버 공간에서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한 욕망, 습관이 분출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요즘 세대는 오죽하겠는가. 어른들의 욕망대로 공부를 했지만 예전보다 경쟁은 치열해졌고 일자리는 줄었다. 공부를 잘해도 계급상승의 욕망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은 대다가 공부를 하기 위해 떠안은 빚도 만만찮다. 그런 연유로 그들이 비정규직 직종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그 일을 공동체의 일원의 역할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잠시 떼우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여긴다.
 
결국 이러한 전반적인 구조가 가진 자도 지랄하고 못 가진 자도 지랄하는(죄송) 우리나라의 공동체 윤리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마, 이런 생각이 든다.

2012/08/10 21:48 2012/08/1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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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 글을 디폴트 B급으로 친다. 요즘은 글을 자주 쓰지도 않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줄곳 내 글에 대한 스스로의 아쉬움이 이어졌다. 그것은 이른바 학계, 교계나 주류의 논객들 어디에도 편입되지 못한다는 자격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한때 나는 지식으로 철갑을 두른(칠갑 아니고) 논객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난 왜 신학이나 공부를 더 하지 않고 돈벌이 직딩이 되었나...하는 아쉬움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헌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길이 내게 주어진 것도 아니요 실로 내가 가고싶지도 않은 길이란 생각이 점점 커지면서 사실 교계든 뭐든 논객의 위치에서 이탈된 삶이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글 한편을 쓰고서 퇴고를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의 부족이 내 스스로의 글에 대한 자존감을 떨어뜨렸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창피하기만 한 이십대에 쓴 내 글들. 그래도 그 글들에 대한 특유의 자존심은 5-6번의 퇴고 작업에 기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넘긴 글은 솔직히 다시 읽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겨웠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지금은 좀 낫지만 성하가 태어난 직후에 나에겐 글쓸 짬이 없었다. 성하가 좀 자라고 나서는 직장생활이 더 바빠졌다. 뭔가 쓰고 싶은 글이 생겨도 이제는 초안을 마치기조차 쉽지 않다. 때론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옮겨두지 못해서 아쉽게 잊어버린 것들도 많다.(아.. 그 대단했던 생각들이여.ㅋ) 결국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가뭄에 콩나듯 청탁이 들어왔고 나는 그 글을 쓰면서도 허덕였다. 퇴고는 무슨, 퇴근하고 초안을 쓰기도 버거웠고 그렇게 끝나기가 무섭게 마감 직전의 내 원고는 전자메일을 통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 '초안'이 종이에 찍혀서 내 손에 들어왔다. 처음엔 마음이 많이 상했다. 내 기준에도 못 미치는 글, 조금은 더 매끄러울 수 있는 표현들. 이제야 생각난 더 좋은 예화... 그래도 그렇게라도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게 어디냐 라는 생각을 위안삼고 넘어갔다. 근데 그렇게 생각을 하자 몇 번의 글을 더 썼고 그 이후로는 청탁이 아니더라도 글을 써서 내 손으로 매체에 보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마음에는 그 글들이 B급이라는 평가와 함께.

 

요즘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시대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물론 내 생각도 변한다. 단순히 변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어떤 틀이 생기고 그 틀이 강물처럼 이리저리 길을 찾아 바다에 닿으려는 욕망 같다는 느낌. 결국 나는 글쓰기의 대가가 될 마음이 아닌데 내 생각이 조금 더 매끄럽고 조금 덜 매끄러우면 어떤가. 지금 나는 내 실존적인 이슈들을 써내려가고 싶을 뿐인데. 결국은 누군가와 공감하고 그 공감을 통해 연대하고 함께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내고 싶을 뿐인데 말이다.

 

물론 내 글이 뛰어나면 더 좋겠지만 내 목표가 어떤 류의 '팬덤'이나 학계에 오래도록 기억될 fine idea가 아닌 다음에야 글이 더 매끄럽기를 바랄 이유가 뭔가 하는 생각 말이다. 결국 무식이 용감이라고 나는 그런 B급 글쓰기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보기에도 조금은 못생긴 내 글들을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사실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2012/07/24 18:40 2012/07/2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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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3학년? 5학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아이큐가 118이라는 소문이 반에 돌았다. 당시에 동네 학군이 높았던지 평균 아이큐가 128 정도였고 나는 그보다 10이 낮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내가 너무 창피해해서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 선생님에게 물어보셨는데 선생님은 부인하시면서도 끝내 아이큐를 알려주지는 않으셨다. 때문에 선생님은 원칙이라고 했지만 어머니와 나는 더욱더 내 아이큐가 118이라는 의구심을 키워갔다.

그땐 아이큐가 무슨 내 CPU사양이라도 되는 듯 그 숫자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였고, 나는 점점 천재, 영재의 성공스토리보다 99%노력을 강조했던 에디슨이나 둔재들의 성공 사례들에 희망을 얹고 그들과 나를 동일시하곤 했다.

문제는 머리가 나쁘면 열심히라도 공부를 해야 하는데 시험 때마다 나는 내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죄책감과 더불어 난 왜 날때부터 똑똑하지 못한가...하는 원망감. 악순환이었다.

중3, 고1 때인가. 학교에서 아이큐 검사를 다시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솔직히 점수를 올릴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기세였다. 문제는 악마도 만날 수 없고, 아이큐 검사의 해답지도 구할 수 없다는 것.ㅠㅠ 당시에 내가 한 최선의 치팅은 섹션별로 시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다른 섹션을 다 풀고 시간이 남으면 되돌아가서 못푼 섹션의 문제를 더 풀었던 정도?

그리고 다시 점수는 공개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고 어머니는 내가 아이큐가 낮다고 그간 자학해온 아픈 사연을 설명하셨다. 선생님은 이례적으로 내 아이큐를 알려주었다. 148. 학교마치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어머니가 외친 숫자였다. 어머니의 흥분에는 넌 바보가 아니었어...라는 복음과도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난 그때 알았다. 아이큐는 날 규정하지 않는다는 걸. 솔직히 유년기와 사춘기 시기에 작은 단점마저 심각한 스트레스를 주던 바로 그 시기에 아이들이 내 지능을 갖고 놀린 부분은 5-6년 동안 내게 심한 트라우마가 되어왔다. 고정된 118의 지능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나는 자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머니의 심부름을 까먹고도 그것으로 어머니에게 혼남과는 별개로 나는 내 지능에 대해 자책과 원망감에 휩싸이곤 했고, 공부가 인생의 전부같았던 그 시절.. 나를 참 많이도 괴롭혔다. 난 반 상위권이었지만 전교 상위권이 아닌 이유를 118에서 찾았고 그것은 성적을 더 올리지 못하는 장애물이 됨과 동시에 지능의 한계를 넘어서라는 도덕적 명령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도 못함을 의미했다.

148. 기쁘기 보단, 왠지 허무 개그같은 느낌의 숫자. 118에 기인한 나의 수많은 낮과 밤의 고민과 의문, 학교와 가정, 세세한 기억하나에서조차 그 원인을 찾던 118은, 알고보니 내 숫자가 아니었다? 이건 뭔 어른들의 개장난이야...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대체로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숫자나 딱지를 붙이는 걸 싫어한다. 지인들의 출신 대학도 잘 모른다. 그것들이 그 생동감 있는 독특한 한 개인을 설명할 수 없다는 걸 뼈속까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어떤 숫자나 딱지가 한 사람에게 얼마나 악영향을 줄 수 있는지도 안다. 누구 말마따나 나도 다 (당)해봐서 알겠다. 고로, 안 해봐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덧글.
이상은 아이큐 퍼기 깔대기였다.^^

2012/07/20 21:46 2012/07/20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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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크게 2가지로 요약된다. 난놈이 혼자 달려가는 방법. 빌 게이츠가 말하듯 똑똑한 한넘이 어리버리한 여럿을 끌어주는 식. 창의성을 지속 독려하면 한번의 성공으로도 조직이 발전을 이끈다는 점에서 나름 강점이 있다.

‎2. 두번째. 조직원 모두가 공감하고 행동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발적 변화를 이끄는 방법이다. 모두가 바라는 이상적인 방식임에 분명하다. 이는 속도보다는 '함께'가 중요한데, 수직적 조직에서 소통의 문제를 경험한 이들에게 보다 절실한 부분이다.

‎3. 요즘 내가 고민하는 조직은 이른바 exemplar solving 그룹이다. 이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기인한다. 과학사에서 혁명은 난제들을 푸는 exemplar의 확장에 있다고 보았다. 즉 문제 해결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4. 혼자서 탁월한 견해를 제시하고 대중을 계몽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엘리트주의,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낳는다.(혼자 행동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처한 상황 위치에서 규모에 맞는 대안을 찾는 것, 이를 하나둘 실행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2/07/20 21:45 2012/07/2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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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는 확실히 뜨거운 매체다. 말 실수하거나 뜨거운 이슈에 위험한 입장 표명을 하면 반나절 안에 퍼져서 이미 자신도 모르는 제3자가 자신의 글을 욕하고 있는 상황을 맞게 되기 십상이다. SNS 속도의 강점이 고스란히 맹점으로 자리잡는 순간이다.

당사자가 정신을 차리고 해명을 하더라도 시작된 논란은 정리되지 않는다. 이미 몇 다리를 건너간 '내 글'은 이미 내 글이 아니며 그저 논란거리에 불과하므로 내 글에 내가 직접 해명을 한다 해도 동일한 루트로의 전달이 보장되지 않는다.

대안은?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내 경험상 이상적 대안은 없다. 조심스러운 나의 의견은 이것이다. 자신의 SNS 영향도를 축소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 자신의 생각을 널리 전하려는 그래서 유명해지려는 욕구가 사실상 익명의... 방대한 네트워크로 자신을 밀어넣지 않았던가.

SNS의 가장 큰 문제는 한 개인이 안면없는 친구들과 수백명씩 엮여 있으면서 그들을 오랜 친구에게 대하듯 허물없는 말과 주장을 쏟아낸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고 유통된다. 설령 자신이 글을 지워도 지인을 통해, 혹은 메타 사이트들이 꼬박꼬박 저장해두고 있다.

나는 하루에 최소 3-4명의 사람들에 대한 뒷담화를 듣는다. 대체로는 무시하지만 때로 맞장구를 치며 은근 뒷담화를 즐길 때도 있다. 나는 비슷한 경로로 나에 대한 뒷담화를 어떤 사람들은 즐길 것이라고 예상한다. SNS는 그런 뒷담화의 기하급수적 확장이 가능한 공간이다.

나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예민한 편이라 내가 포용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는 관계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거나 적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전까지는 선을 그으려고 노력한다. '대중'의 사랑, 인기를 받으려는 욕망에는 그만한 댓가 - 대중의 비난과 험담을 견뎌야 하는 - 따르게 마련이다.

마치 몰랐다는 듯 극도의 분노에 휩싸이거나 극도의 우울함에 빠지거나 계정을 삭제하고 자신만의 동굴에 숨는다. 혹은 마지막 한마디까지 해명하고자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고 그 극단의 종지부에는 호불호가 갈린 절반의 친구들과 비난섞인 교제를 지속하게 된다. 그렇다. 대중성을 감당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라. 그리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 SNS의 나를 축소하라.
2012/07/20 18:39 2012/07/20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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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의 생각.
"플래너를 쓰면서 느끼는 건 시간관리를 하기엔 좋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깊어지는 관계, 고민의 흔적, 그 시기의 중요한 메모들은 정리하여 다시 펼쳐보기가 쉽지 않더라는 점이다. 일기말고 한 개인의 이력, 내러티브를 담을 수 있는 기록 방법은 없을까."
 
#2. 7habits.
그간 나는 누구보다 7habits 방식으로 시간관리를 잘 훈련해왔다고 자부한다.(아.. 깔대기를 참을 수가 없구나) 그리고, 작년 한 해 동안은 GTD방식으로 직장에서 뇌에 무리가 갈 정도로 과열된 메모리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두 가지 시간관리 방식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줬고 지금도 실무적으로 혹은 특정 영역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 방식들의 한계를 본다.

 

*주: 데이빗 알렌은 우리의 뇌를 컴퓨터의 메모리에 비유한다.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각 프로그램마다 일정량의 메모리를 확보하게 되고 따라서 실행한 프로그램 수가 늘어날 수록 메모리 부족으로 컴퓨터는 느려지게 된다. 데이빗 알렌은우선순위에서 밀린다고 판단하여 우리가 빨리 해치우지 않고 미루는 사소한 많은 일들이 우리 뇌의 메모리를 잡아먹고 그것을 언젠가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더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메모리 폭주에 비유했다.

 

#3. 크로노스 vs. 카이로스
'관계중심 시간경영'이란 책에서 저자는 시간관리에 있어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구분한다. 우리는 머리로는 시계시간(크로노스) 대비 사건시간(카이로스)을 더 의미있게 받아들이지만 실제 삶에서 시계 시간의 관리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통찰이 그것이다. 결국 시계 시간에 집중된 시간관리는 일정을 관리하고 목표를 성취하는 데에는 유용할 지 모르지만 한 개인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미있는 정보들을 캐치하기가 쉽지 않다.

 

#4.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몇 년 전부터 우리 교회는 '아브라함 학교'라는 독특한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과정은 성경 속 아브라함 이야기를 명제가 아닌 서사(narrative)적 흐름으로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중요한 건 삶의 어떤 원리나 법칙(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방법, 구원의 원리와 같은)을 연역적으로 추출하는 것이 아닌 내 삶의 서사, 즉 유년시절부터 청년, 중년에 이르는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 속에서 어떤 선굵은 방향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트렌드이기도 한 스토리텔링, 내러티브 중심의 관점과도 일치한다.
 
#5. 카이로스 플래너? 내러티브 플래너?
나는 요즘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카이로스 지향적인' 시간 관리 방법을 익혀나가는 중이다. 이러한 트렌드는 앞서 말한대로 내러티브, 스토리텔링과 같은 현재 우리 세대의 지적 관심과도 일맥상통하지만 이러한 서사적 방식으로 우리의 시간을 돌아보고 관리(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인생의 방향성을 따져보는)하는 프레임으로 플래너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아마 소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일기를 쓸 것이다. 하지만 일기는 너무 자기고백적이고 비밀스럽다. 내러티브는 보다 사건 기록에 치우치고 조금은 건조한 기록이다.

 

#6. 노트 중독자의 변명.
아무튼, 나는 또 노트를 샀고 이러한 나만의 시간관리 방식(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많은 주변의 지적 자극으로인해 시작된)으로 스스로를 잘 훈련한다면 좀더 건강한 노년을 맞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나는 노트에 하루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2012/07/11 22:48 2012/07/11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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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 생각이 든다.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나 관계, 사랑, 신뢰와 같은 것들은 시간이 조금은 지나야 그 핵심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결국 현재로서는 그 궤적을 잘 기록해두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
('12. 7/6)

#2.
요즘 책이 손에 안 잡힌다. 활자울렁증 같기도 하고. 근본적으로는 일상적 자각없는 담론들을 많이 목격해서 그런지. 성추행 목사,아내를 구타하는 남편,자기 화를 아이에게 쏟아내는 부모. 수신제가가 안되는 주댕이들에 대한 분노를 넘어선 서글픔이랄까
('12. 7/9)

#3.
플래너를 쓰면서 느끼는 건 시간관리를 하기엔 좋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깊어지는 관계, 고민의 흔적, 그 시기의 중요한 메모들은 정리하여 다시 펼쳐보기가 쉽지 않더라는 점이다. 일기말고 한 개인의 이력, 내러티브를 담을 수 있는 기록 방법은 없을까
('12. 7/9)

#4.
어제 아내에게 요즘 내가 뉴스타파도 안 보고 심지어 나꼼수도 올라오자마자 바로 듣지 않고 묵혀둔다고 불만을 내비쳤다. 나는 (독학의 혜안으로) 현재 진보의 폭로 이슈들이 장기화되면서 나를 포함한 대중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다는 얘길 했다.
('12. 7/10)

#5.
가끔 스스로가 정말 특별하고 독특하다고(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굳게 믿는 사람을 만난다. 반대로 모든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며 섣불리 타인을 자신의 사고 안에 가두려는 사람도 만난다. 가끔은 양손에 넣고 흔들어 둘로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든다.
('12. 7/10)

2012/07/10 21:44 2012/07/10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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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1'이 완결편이었다면 그 주제는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3부작을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매트릭스를 벗어날 수 없다' 내지는
'우리는 기계문명과 상생해야 한다'가 될 것이다.

때때로 나는 인터넷 중독, 스마트폰 중독과 같은
말들 속에 내포된 IT에 대한 정서적 반감, 아날로그적
... 감성에 대한 지나친 향수 등이 불편하다.
실제로 사람들은 각기 다양한 이유로 인터넷에 접속한다.
'접속' 자체를 게임이나 killing time으로 여기는 것은
전자신호를 '0'과 '1' 그 자체로 치부하려는 것만큼 어리석다.

CD를 그렇게 비난하던 LP 매니아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많은 예술가들도 이제는 컴퓨터로
자신의 창작물 작업을 한다.
수백년된 악기의 소리를 완벽하게 재현하거나
환상적인 photo들도 디지털 작업을 거친다.
물론 직장생활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자료와 보고서
노하우들은 디지털 문서이다.

가끔 IT를 감성적으로 배척하고 비판하는
일반적인 시각은 IT를 필요악으로 설정하는 것 같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컴퓨터에 앉아서 '버리는 시간'
을 모으면 휴머니즘이 되살아나리라는 기대감.

난 그 기대감도 하나의 허구라고 본다.
Homo Faber...
인간의 정체성에는 도구가 항상 자신의 몸처럼
존재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사람들은 IT가 인간을 인간성을 삼킬 것처럼 떨지만
IT 뒤에 숨어서 IT의 해악을 조종하는 것 또한
인간의 멘탈 그 자체가 아니던가.

인문학적 감성, 아날로그적 감성을
어떻게 기술문명 '안에서' 구현할지를 고민하는 게
나는 더 정직하고 건강한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포드주의를 넘어 IT혁명기 깊숙한 시간을 지나는
우리 세대는 여전히 자크 엘룰이 말하는
'기술 사회'의 해악을 원론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들 중 다수는 아이폰과 맥북으로 소통하고
전자책에 대해 고민하고 클라우드 컴퓨팅을 활용한다.
디지털로 터치된 음원, 포토샵 처리된 사진.
식당, 기차, 비행기, 호텔 예약에서부터 여행 사진을
공유하는 모든 과정 과정마다 IT는 스며들어있다.

나는 지금이, IT의 첨단 도구를 구현한 인간이
이제는 기능보다 더 고차원적 상상력을 발휘할
시점이라고 생각하며 이미 패러다임은 그렇게 변해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수는 여전히 그 패러다임의 변화를
'변절'로 여기는 듯 하다.
2012/07/10 21:44 2012/07/10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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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페북에 유철형님 글을 공유했더니 일본에 있는 전태호라는 페친님이 제게 댓글을 쓰셨더군요. 저도 고민하던 문제라 좀더 다루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글을 좀 써봤습니다. (편집자 주)


'전태호' 님을 인용 - 저는 링크하신 글도 그렇고 말씀하신 것도 그렇고 군이나 양을 붙이는게 왜 촌스러운 것이며 왜 권위적인 것인지 이해가 안가는데요? 촌스러운 거야 개인이 그리 느낄 수 있다 치더라도 이게 일제군국주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던가요? 정작 일본에서는 친한친구끼리도 쓰는 말인걸요. 동급생학생은 물론이고 자기보다 나이많은 사람에게도 친근감의 표시로 씁니다. 일본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문제가 된다면 ~씨도 쓰면 안되겠군요. 이것도 일본 신문기사등에서 쓰고 있는 말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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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그런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구요.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아 위의 글에 대해 제 생각을 조금 풀어서 쓰겠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누군가가 저에게 용주군. 이라고 할 때 그는 저보다 연하일리는 없 습니다. 왜냐면 군, 양은 자신보다 연배가 어린 경우에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주야. 라고 하지 않고 용주군. 이라고 했을 때에는 필시 저와 친분이 깊지 않은 관계임을 암시합니다. 결국 용주야.라고 이름을 부를 때는 하대를 의미하나 친분이 있을 경우에 사용되는 호칭이고 용주군.이라고 부를 때는 하대하나 친분이 적절하지 않을 때 사용한다고 봅니다. 결국 OO군은 거리감이 있는 연하의 대상에게 나름 '정중한 하대'의 의미로 사용되는 듯 합니다. 삼촌뻘되는 어른이나 결혼식 주례처럼 선생으로 모시는 분들이 용주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이런 용례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한동안 저는 학교 후배들에게 OO군, OO양이라는 표현을 익살스럽게 쓰기도 했는데 불쾌해하는 친구들이 꽤 되더군요. (그 때 제가 받은 인상은 그들도 이제 나이를 어느정도 먹었는데 선후배 관계를 연상시키는 '하대', 그것도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고 거리감을 주는 표현을 굳이 고수하는 것에 대한 불만 같았습니다.)

 

직장에서 용주군, 혹은 용주양. 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정중한 하대의 의미입니다. 결국 직장 내에서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피고용인 간에도 서열이 있다는 의미겠지요. 보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저는 피고용인 간에는 일의 경중이 있고 그에 따른 급여차이와 직책이 다르지만 모두가 평등하다는 전제를 두는 편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원에게는 OO사원님, 대리에게는 OO대리님이라고 부르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저와 함께 일하는 조수는 이름을 부르는 편이지만 공적인 자리나 공문서, 메일 등에서는 OO연구원이라고 호칭합니다. 물론 OO씨라고도 칭합니다만 그것은 적어도 저에겐 사내에서 친밀함의 표현이지 회의석상이나 문서상에서 표하지는 않는 호칭입니다.

 

그런 연유로 변호사님들이 직장 내에서 김양, 혹은 OO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중한 하대의 의미일 것이고 특히 전자는 우리나라에서 커피 심부름이나 하는 시다급 '여'직원을 지칭할 때가 많아 왔으므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도 굳이 공적인 관계에서 정중한 '하대'를 이미 기득권자인 변호사가 티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상대가 변호사님이라고 호칭한다면 그는 김비서 내지는 김사무관, 김보좌관, 김대리 등과 같은 직책을 부르는 게 적절해보이고 개인적으로는 공적 자리에서는 '님'을 붙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현실과 괴리감이 크고 그런 방식 자체가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이 학생을 OO군이라고 부를 경우 그것은 정중한 하대란 의미로 봤을 때 일면 공감할 부분도 있겠습니다. '야이 새꺄'가 호명방식인 토종 교수님들도 많이 봤으므로 어느정도 예의를 갖추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럴 경우 지도교수-학생 간은 도제 제도를 상기하게 만드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대학교, 연구실 내에서 지도교수-학생 간의 관계가 고객-서비스(지식)제공자 혹은 협업을 하는 준직장의 구도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나 하는 마음이 생길 때가 더러 있습니다. 이건 뭐 저의 오만불손한 생각일 수 있겠습니다만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OO군이라고 표현한다는 부분은 좀 걸립니다. 이러한 '정중한 하대'는 그 학생이 교수의 라인 아래 있는 제자임을 공적으로 거명하는 행위이므로 그렇게까지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이를테면 우스개소리로 하는 유라인, 규라인처럼 '김교수의 아이들'이라는 올가미를 학계에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용주학생이라고 말하는 것 보다 용주군이라는 말이 좀더 정치적으로 들립니다. 교수-학생은 상태를 설명하는 것 같지만 교수님-OO군은 다분히 '상태가 변할 것 같지 않은 위계질서'를 전제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느끼는 호칭의 어감에 따른 이야기이므로 군이나 양이 뭐 그리 대수냐, 난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라고 하신다면 그것 자체를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지강유철님의 글에 공감하고 그 글을 인용한 대목에서 저는 위와 같은 생각을 자연스레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지강유철님의 원글을 함께 남기면서 마치렵니다.


교수님들, 아직도 홍길동 군입니까?

/지강유철

 

몇 년 전까지 판사 변호사(검사는 모르겠고)님들께서 사무실 여직원을 김 양, 서 양 이렇게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처음 그 소릴 듣고 웃었습니다. 21세기에 일제시대 잔재인 미혼의 여자를 양으로, 미혼의 남자를 군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앞에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웃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결혼식장에 가면 신랑을 군으로, 신부를 양이란 쓴 입간판을 세워놓고, 순서지에도 그렇게 써 있습니다. 그것도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신랑 신부와 주례사이에, 또는 신랑 신부와 하객 사이에 권력관계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결혼식장에서 그런 입간판이나 순서지, 또는 주례님의 말씀에 피식 웃습니다. 물론 이 웃음은 앞의 웃음과 다른 의미의 웃음입니다. 굳이 표현을 달자면 애교스런 웃음?

 

결혼하지 않은 남성을 군,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양으로 부르는 사례 중에 제일 고약한 경우는 교수님들이 책의 서문에서 자기 제자들을 그렇게 부를 때입니다. 오늘 제가 책을 읽을 때 가장 큰 즐거움을 선사하는 대목 중 하나인 서문(번역의 경우 역자후기)을 보다가 짜증이 확 몰려왔습니다. 나이도 저보다 세살 뿐이 안 많은, 그런니까 아직 연령으로 볼 때 쉰내가 나지않고, 보수꼴통 노털로 불리기엔 너무 이른 50대 교수님께서 자신의 책에 도움을 준 조교뻘 쯤 돼 보이는 박사과정 학생을 XX군이라 호칭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들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제자를 향해 XX군이라 불러야 자신의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머리 큰 제자를 xx군으로 부르는 습성엔 보수 중도 좌파에 구분이 없더군요. 70-80대 명예교수님들이 그러는 거야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40-50대 교수님들이 그렇게 부르면 확 깹니다. 21세기에 XX군이라...이거 너무 칙칙하고 촌스럽지 않습니까? 제자를 군으로 부르는 모든 교수님들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일제군국주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이런 호칭은 인권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2012/06/01 18:38 2012/06/0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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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회자되고 있는 J목사는 사실 복음주의권에서 김동호 목사와 더불어 차세대 대중설교자로 명성이 높았던 사람이다. 물론 소수가 이미 J목사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지만, 실제로 J목사는 우리 진영에서 사이비나 이단시되는 또라이 목사가 아니다.

그는 주류였고 '장'의 중심에 있었으며, 그를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적절히 흡수도 하면서 사실상 복음주의권은 청년부를 팽창시키는 그의 대중 설교를 적극적으로 소비해왔다.
 
지금 다수가 행하는 그에 대한 비판은 그가 속한 교계 진영에 발을 담그고 있는 우리의 근본적인 회개와 각성이 우선하지 않는 한 섣불리 행해져서는 안 될 비판들이다. 특히 비개신교, 비복음주의권에서 보기에 우리는 J목사의 진영 안에 속한 자들임을 깨닫는다면 어떤 면에서 그를 또라이나 범죄자로 손가락질하며 선을 긋는 게 더 비겁하고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처음에는 그의 사역을 막는 형태가 가능할지는 몰라도 그가 공적으로 피해자와 교회에 공개적으로 죄를 구하고 근신한 후 종국에는 다시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도록 만드는 일에 '우리 진영'은 힘써야 한다. 나는 그것이 내가 아는 '예수 공동체'의 차별성이라 믿는다.

2012. 5. 22.



#2.
어제 CAP 미팅 때 'RAEW 기법'이란 걸 사용했는데 다들 생소하여 모든 사람이 적극적으로 떠들어댔음에도 불구하고 노말캡미팅(..걍캡)으로 마쳤다. 아무리 좋은 도구가 있어도 수행하는 개개인이 체화되지 않은 도구는 의미가 없다. 특히 구조나 시스템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 구조를 이용하는 개인의 역량, 수준, 시점 등을 명확히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차피 '도구를 집어드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2. 5. 18.



#3.
스승의 날.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정말 인간 관계 가운데 배운 스승이 별로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성적 농담이나 해대고 학생들에게 장풍이나 쏴댔지...기억에 남는 좋은 선생님은 없다. (물론 한 두 명 정도 노말했다고 기억나는 분들은 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책으로 만난 유명한 저자들이나 강의를 통해 접한 지식 전달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들을 나의 스승이라고 말하고픈 욕구가 있었지만, 살면서 지식이라는 게 중요하지만 관계성이 없는 지식전달자와 피전달자와의 사이가 이제는 그리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머리가 굵어진 후로는 내 성격이 모난 구석이 있고 나 혼자 잘난 척하고 살아서 그런지 지금까지 스승이라 부를 법한 분은 정말 손꼽는다. 왜 나는 정작 멘토같은 스승이 필요한 나이에는 배움의 열정을 혼자서 책이나 보면서 지냈을까. 후회가 되는 대목이다. 오늘은 한두 사람의 스승에게 문자를 보냈다. 스승의 날. 노년의 지혜를 멀리하고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의 배움을 등한시한 내 가벼움을 반성해본다.

2012. 5. 15.

2012/05/22 21:42 2012/05/22 2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