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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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 참 배울게 많다는 생각을 하지만 동시에 책'만' 읽는 사람에게는 참 배울 게 없다는 생각도 한다.

김두식 교수님은 몇년전 예수원이라는 기도원에서 경험한 일을 잡지에다 기고한 바 있는데... 평소 그렇게 기도도 열심히고 입만 열면 잘난 척하던 목사들이 노동시간만 되면 다들 뒷걸음질을 치는 반면 매일 공사판에서 일하던 일반 성도들은 나서서 고된 일들을 자처하는 모습에 대해 은근히 꼬집은 바 있다.

모 편집부에 갔더니 점심시간에 남성 편집부장은 신문보고있고, 여자 직원들이 밥상을 차리더니 밥먹고나서도 그분은 커피마시며 노닥거리고 여성들만 설거지에 뒷정리하더라는 이야기를 주워 들은 적이 있다. 아는 목사님 한분은 하루종일 엄청난 양의 독서를 즐기시지만 정작 아내가 집을 비우면 청소나 설거지도 안 하고 아이들도 방치한채 계속 책만 보다가 식사도 배달음식만 드신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쯤되면 도대체 책을 통한 지식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노동과 공동체적 봉사를 '제거'해주면서까지 이들을 사회적 응석받이로 키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책이 사람들이 경험하지 않은 것들을 대리충족시켜주지만 그 대리경험에만 빠져서 대리경험적 지식들만로 자신을 가득채운 형이상학적인 인간으로 '승화'하면 안 되겠다는 반성도 해본다.

'배워서 남주자'는 모토도 그렇다. 배워서 남주는 건 좋은데 그 지식의 전달, 혹은 '이식'이 마치 게임에 미쳐있는 초등학생들이 스스로 더 높은 레벨에 쉽게 올라가는 법을 공유하는 수준의 낮은 사회성, 실천성을 담보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전문용어나 수많은 저자 이름들 속에서 우리가 피부에 와닿게 배울 점을 찾지 못한다면 그건 한낱 아이큐 자랑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페이스북 노트글. ('11. 12. 6)

2011/12/06 21:34 2011/12/06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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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은 공적 글쓰기와 사적 글쓰기가 공존하는 공간.
사적공간을 침해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예전에 싸이월드도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왠지 불편했다.
어쨌든 페이스북은 대세가 됐고, 본격적으로 이 플랫폼에
정착한 후에 나는 사적/공적 글쓰기 공간 사이의 담이 허물어질때
... 생기는 상당히 흥미로운 모습들을 목격한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찰이기도 하고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언젠가 좀더 풀어내고 싶은 화두...


*페이스북 '11. 10/16
2011/10/16 21:33 2011/10/16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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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엔 '사람이 희망이다' 내지는 '사람이 어쩌고', '리얼 휴머니즘' 등등 연륜있는 이들이 내뱉는 '사람, 인간이 다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는 류의 말을 할 때면 대체로 흘려 들었다.

당연한 얘기 같기도 하고 나이들어 약해지니 지인을 찾는 거 아닌가 하는 얄팍한 냉소도 솔직히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때때로 진심으로 인생의 선배들이 어떤 맥락에서 '사람'을 부각시켰는지를 잠시 멈춰서서 돌아보게 된다.
 
내가 흘려들은,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인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 그들이 살면서 경험한 많은 환경과 그 안에서 무수히 따져본 우선순위들, 말들, 행동들, 삶들 속에서 부여잡은 뜨거운 그리고 유일한 실체임을. 요즘은 참 많이 공감하게 된다.


*페이스북 '11. 10/15.

2011/10/16 21:32 2011/10/1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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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시절 MIS과목 교수님이 본인이 제안한 '제트기 이론'이란 걸 설명한 적이 있다. 일정 속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긴 활주로가 필요한데, 항공모함등에서 출발하는 제트기는 바퀴를 강제적으로 고정시켜놓고 속도를 신속하게 비행할 수준까지 올린 상태에서 풀어주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나 시간을 save하고 바로 이륙시켜주는 점에 착안한 이론이다. 시장점유율이나 소비자 기대치 등등을 설명하면서 고안한 생각이었던 것으로 막연히 기억하는데, 공학적 방법론을 사회경제에 적용한 나름 신선한 접근이었다.


*페이스북 10/15
2011/10/16 21:31 2011/10/16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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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 뛰어난 사진가적 자질 중 하나는 '과감한 프레임' 처리에 있다. 아마추어일수록 직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피사체를 모두 담고 싶어한다. 인물의 전신상, 반신상, 얼굴 전체. 실수로 짤라먹는 게 아니라면 일반인들의 사진 작업은 대충 본인이 대상으로 삼는 피사체의 완전한 복원, 혹은 담아내기를 꿈꾼다. 틀 안에 정보를 모두 담아야 한다는 책임감. 그래서 프레임이란 게 무서운 것 같다. 뒷통수를 자르고 얼굴의 일부만을 프레임에 가득 채운 사진. 혹은 손모양, 이마의 주름,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고자 부모의 상반신을 잘라낸 사진. 이런 과감한 프레임처리는 사진에 새로운 생명을 준다. 고정된 프레임의 탈피, 혹은 해체가 필요한 게 비단 사진에 국한되지는 않으리라. 사고나 판단, 우리의 삶도 그렇다.
2011/10/13 21:31 2011/10/13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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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를 보며. 간간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옹호하는 말을 하면서 상대방을 까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음악의 급이 다르다느니 저런 실력으로 이겼냐느니, 청중 수준이 형편없다는 식의 말이다. 나도 그럴 때가 있긴 하지만 대다수는 농담이다. 실제로 청중들이 다양한 음악들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더 뛰어난' 음악과 '덜 뛰어난' 음악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학교종이 땡땡땡'과 말러 교향곡은 작곡가의 수고나 음악의 완성도 측면에서 분명 다르다. 대형 엔터테인먼트사에서 히트친 음원 샘플들을 수집하며 그것과 유사하게 찍어내고(copy) 안무나 비주얼에 막대한 자본을 쏟아낸 노래와, 순전히 음악으로만 승부하려는 의도로 언더그라운드 싱어송 라이터가 공들여... 만든 노래는 그 '질'을 평가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뛰어난 음악이 반드시 좋은 음악이 된다거나 덜 뛰어난 음악이 나쁜 음악이라는 생각은 불편하다. 음악적 엘리트주의. '아리랑'이 '환상교향곡'보다 더 나쁜 음악이 될 수 없고 신중현의 '미인'이 나훈아의 '무시로'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또한 음악과 자신이 혼연일체가 된 싱어송라이터의 노래가 가사의 의미도 모른채 불러대는 딴따라 가수의 노래보다 좋다고 혹은 옳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이 없는 성악가가 종교음악을 부를 때의 울림이 그런 예일 것이다)

다분히 본인의 음악적 소양이 높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의 가장 큰 실수는 예술에 옳고 그름의 좋고 나쁨의 절대적 잣대를 본인이 정하는 것이다. 혹은 비평가들의 냉정한 평가만이 옳다고 믿는다. 물론 이런 전문적 평가들이 자주 예술을 조망하고 그 수준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비평의 잣대로 '이건 쓰레기야'라고 말한다면 그건 정말 불행한 일이라고 본다.

그래 참 불행한 일이다. 누군가에겐 새벽녘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신경이 거슬리는 무엇이 돠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생명의 아름다움이 노래가락으로 승화하는 신비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천박하기 그지없는 트로트 한 곡조가 또다른 누군가에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유연함, 공감.. 우리에겐 자주 그런 것이 필요하다.
2011/10/13 21:30 2011/10/1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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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년이 바뀔때마다 반 친구들과 헤어지게 된다는 게 그렇게 싫었다. 때론 친구들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 중학교 때 어떤 친구는 '서울대에서 만나자'라고 인사했었다. 그리고 대입을 치르고 내게 전화했다. '너도 붙었냐고' -키우던 강아지를 다른 집에 보내기도 했다.

그 순간순간마다 매번 나는 가슴이 철렁했고 슬픔에 울컥했으며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 슬픔을 극복하지 못했다. 물론 난 내색을 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헤어지기 아쉽다고 오버하는 친구들 중엔 내가 너무 냉정하다고 서운해하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다.

유년기 시절, 이별의 기억들은 나의 복잡한 심정과 어설픈 행동들을 고착화시켰고 어느덧 하나의 거대한 그러나 다소 막연한 정서를 만들어냈다. 고독, 외로움, 거절감, 영원히 볼 수 없음에 대한 아련함..

성인이 되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그렇게 나이가 들면서는 이별을 경험할 때마다 그런 정서가 지나치게 반복되어 점점 그 정서를 '인지'는 하되 체감하지는 못하는 시기가 왔다. 정말 나는 이제 '그렇게'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서 해댄 거의 광기어린 연락과 집착, 혹은 무정하게 이별을 고하고는 돌아서던 길. 터벅터벅 의미없고 괴롭기만한 인생을 곱씹으며 어디론가 낯선 공간으로 숨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던 가슴앓이.

...그런 것들이 사라졌다. 스위치를 켰다 끄는 것처럼 일순간에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 찾아보니 어디에 뒀는지 모르게 잃어버린 여권지갑처럼. 내 안의 나름 심각했던 이별의 트라우마들을 잃어버렸다. 그저 윤리적 행동양식의 흔적만 남은 채로. '그래, 그 사람 떠나는데 밥 한번은 먹어야지.'

그렇게 어느덧 시간이 지나는 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었다. 뭔가 심오한 고민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그냥 그렇게 난 식어버렸다.

 


*facebook 노트: 2011년 9월 21일 수요일 오후 2:20 작성

2011/09/25 21:23 2011/09/25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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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교육감의 2억 전달 건 관련하여, 일부 진보진영의 우려감과 당시의 정황을 고려한 감싸기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후보 단일화와 당선 이후 2억을 전달해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진보진영에서는 '관행' 내지는 현실적으로 눈감아줘야 하는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게 솔직히 불편한 마음이다.

만일 '곽노현'이 아니고 '정형근'이나 '오세훈'이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후보단일화를 추진하면서 2억을 나눠주고 그것이 선거의 대가성이 없는 돈이었다고 말했다면 과연 진보진영에서는 문제삼지 않았을까. 결국 이것이 진영논리가 되어 나는 착한 편이고, 착한 편의 마키아밸리즘적 정치 행보는 때때로 배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건 현실 정치를 이전투구의 장으로 만드는 격이 아니겠나 싶기도 하다.

나는 곽교육감의 정치 성향과 그의 교육 정책을 지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사태로 더 마음이 아프고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심정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답답한 건, 진보보수 사이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곽후보의 감싸기와 까기로 일관하는 두 극단적 반응에 심한 무기력함을 느낀다.

이 사건은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경선을 포기한 후보에게 당선 후 당선자가 위로금(이 됐건 대가성이 됐건, 어려움에 처한 이에 대한 배려가 됐건 간에)을 직접 금전적으로 보상하게 만든 경선 시스템의 불합리함에 있다. 그렇다면 그 불합리함, 부정행동에 대한 자성과 그 시스템의 개정에 여당, 야당, 시민단체, 국민이 모두 집중하고 적극적으로 고민하여 개선책을 찾고자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일개 교육감 한명의 부정행위에 여야가 이전투구식 입장표명을 해대기에 앞서, 최소한 그 부분을 먼저 이야기해야하지 않냔 말이다. 그 구조의 문제를 다루면서 곽후보의 2억 전달의 선의나 억울함을 정상참작하며 그 배경도 따져보고, 반대 입장에서 위법행위에 대한 객관적 평가도 해야 하지 않을는지. 한편으로는 진보측에서도 마치 자신이 교육감 경선에 나서면 현실정치의 관행과는 상관없이 독야청청할 것처럼 곽교육감을 비난하는 것도 탐탁치만은 않다.

곽 교육감도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그에 대한 원론적 비판을 거둘 셈인가. 진보 진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조금이라도 먼지가 묻으면 야쿠자처럼 할복하는 문화를 강요하는 건 아닌지. 선거에 있어 여야 후보 모두가 공정하게 부정함 없이 당선되는 중립적 구조에 대한 고민 없이 이런 진영논쟁의 진흙탕 싸움에 이제는 현기증을 느낄 정도다.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내가 생각하는 곽 교육감 사건에 대한 생각은 이러하다.

 

*facebook 작성: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오후 5:27

2011/08/31 21:19 2011/08/3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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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사회 관련해서 자끄 엘룰 등을 언급하며 기술에 비판적인 이들 가운데에는 서울공화국에 살면서, 자동차를 몰고 노트북과 스마트폰, 타블릿 PC를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적극적으로 기술의 진보를 흡수한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일상영역에서 기술 발전과 적극 동행하는 현실 대비 기술문명에 대한 이상적 비판 사이의 간극이 생기는 것이다. 이럴 경우 실상 당사자들은 언행의 불일치, 더 나아가서 자신은 비판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지적 우월감을 행사한다는 비난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언젠가부터 일상과 괴리된 비판에 자신이 없어졌다. 한동안 거대도시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고가의 가전제품을 쓰지는 않아도 대체로 기술사회의 혜택을 적극 수용하는 나에게 있어, 인생의 상당 시간을 귀농하여 농부였던 엘룰이나 문명을 전적으로 거부했던 니어링 부부, 멕시코 전쟁에 항의하여 오두막 생활에 전념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삶은 피부에 와 닿지 않게 참 멀기만 하다.

내가 기술사회를 비판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들의 삶처럼 일상의 알맹이가 있을 때가 될 것이다.

 

*facebook 작성: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오전 9:11

2011/08/30 21:17 2011/08/3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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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무상급식을 지지하고 투표 자체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오세훈 시장과 무상급식 관련된 진보진영의 반응에는 어느정도 반감이 들었다. 일부 과격한 표현도 그렇고 특정 정치인의 지지여부와 복지정책을 1:1로 연결하는 단순구도가 그러했다.

물론, 무상급식 찬반투표를 오세훈 시장이 자신의 승부수로 던진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보수성향 시민들이 오세훈을 구하기 위해 투표에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영조의 큰 치적은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자기 백성과 정치인 모두 끌어안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진보진영은 때로 좌파우파 논쟁을 상식-비상식 구도로 가져가면서 자주 보수진영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극우 정치인들이 아닌, 보수 성향 국민들을 그런 선악 구도로 몰고 가는 부분이.. 내심 불편하다. 김두식 교수님의 말처럼 SNS 안에서 진보 과잉 현상이 겨우 찻잔 속 폭풍에 불과하겠지만, 그 과잉 공간 안에서 좀더 예의와 겸손으로, 또한 깊은 묵상으로 채워지면 좋겠다.

나의 선행은 나의 바른 성품에 기인하는 것이지, 타인의 악행으로인해 나의 도덕성이 높아진다고 생각치 않는다.


*facebook 작성: 2011년 8월 24일 수요일 오후 8:40

2011/08/24 20:35 2011/08/24 2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