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기숙영 간사.


나는 그 사람을 복상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기숙영 간사님은 98년도에 복상에 쓴 내 글에 대한 반론을 썼고 나는 그에 대한 재반론을 쓴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지강유철 전도사님의 제안으로 복상 독자모임을 하게 되었고 처음 모임 공지에 기숙영 간사님과 내가 지강유철 전도사님 댁으로 찾아갔다. 그렇게 기숙영 간사님과는 처음 만나게 되었다. 기숙영 간사님은 처음 나를 만나서는 내 글에 대한 좋은 말들을 해 주셨다. 사실 나는 기분은 좋았으나 당시에 나는 글을 많이 써보지 않은 터라 인사치레이거니 하며 그냥 흘려 들었다.

그 이후로 담임 목사직 세습 문제로 복상도 뜨거웠고 독자 모임도 제법 많은 숫자가 모였었다. 독자 모임을 하는 동안 자주는 아니었지만 나는 기숙영 간사와 몇몇 지인과 친해져서 몇 번 정도 따로 만나서 함께 놀기도 했다. 당시 기숙영 간사님은 사랑의교회에서 선교부 간사로 섬기고 있었고 복상독자모임을 하던 시기에 연애와 결혼을 해서 한 번은 그녀의 신혼집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었다. 사실 자주 만났다거나 이야기를 많이 한 편은 아니지만 내게 기숙영 간사님은 청년 시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겐 각별한 생각이 드는 분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 내가 학부 학생 때에 기숙영 간사님을 만났고, 다행히 그 분은 나를 좋은 후배로 본 것 같았다. 하루는 모임을 끝나고 나가는 참이었는데 그 분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러고는 주먹을 내게 내밀면서 "꼭 주고 싶으니 그냥 받아. 책 사서 많이 읽고 훌륭한 청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내 손에 돈을 쥐어 주었다. (액수는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학생인 나로서는 큰 돈이었다.) 나는 극구 말렸으나 결국은 그 돈을 받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표현하면 사람들은 오바라고 여기겠지만, 나는 그 때 나에 대해 참 많이 생각했다. 마치 정말 무가치해보이는 내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은혜처럼 그녀의 호의도 그렇게 느껴졌다. 내 생각에 기숙영 간사님이 그 당시에 무슨 그런 돈의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복학 시절에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더 여유 없이 사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고 나는 기숙영 간사님이 굳이 내게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 큰 무게감을 느꼈다. 물론 나는 왜 그렇게 이 일에 큰 의미를 두는지 안다. 그 시기의 나를, 내 마음 속을, 내 내면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그녀에게 부끄러웠다.

난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복상을 위시한 교계를 기웃거리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책도 읽고 공부도 해왔고 또한 지금은 직장 생활을 하느라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배운 것들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글로든 행동으로든 무언가 큰 짐을 진 사람처럼 노력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난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기숙영 간사님의 행동에 기인한 영향이 내 안에는 참 크다는 사실을. 잘난 척하기 좋아했던 나의 철없던 그 시절에, 나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내게 애정을 갖고 나에게 기대감을 가졌던 선배로서의 기숙영 간사님에 대한 자리가 내 안에는 참 크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로 인해 내겐 은혜를 입은 사람이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느끼는 그 정서가 심장에 박혀 있다.

이후로 나는 기숙영 간사님의 소식들을 간간이 접했다. 반갑기는 하지만 소식을 들으면 갑자기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그렇게 넘기다가 연락이 뜸해진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사실 내 인맥들이 다 그렇다. 물리적으로 점점 멀어져가고 있고 나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 들이고 있다. 아니 사실, 요즘은 고치려고 노력 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가 목표, 성취, 이름값, 영향력, 리더십과 같은 것들에 참 많이도 치중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어땠을까. 내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오랜 시간동안 그의 주변을 맴돌던 제자들이 생각난다. 예수님이 죽기 전까지 그의 의중을 몰랐던,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던 제자들과 그들을 사랑한 예수.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준 예수는 도대체 어떤 분일까 하는 생각. 나이가 들수록 더 그 무게감이 커지고 있다.

때때로 나는 내 글에 호감을 갖는 사람들을 만난다. 모든 이들이 다 내 글에 공감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혹여 내 글에 도움을 받은 이들이 있다면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사실은 기숙영 간사라고. 부족하나마 내 손에서 쓰여진 글은 그와  같은 선배들이 베푼 후배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이다.

2008/03/12 00:00 2008/03/12 00:00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후배와 간혹 대화를 하다보면 자꾸 가르치려는 내 대화의 방식을 발견합니다. 뭔가를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자만심 때문이기도 하겠고, 그런 인격이 덜 된 마음이 아니더라도 되도록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서 때때로 후배가 한 마디만 던져도 두세 마디를 앞서 이야기를 해놓고 후회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나이 이십대에 멋모르고 너무 많은 말들을 뱉어낸 적이 많았다면, 삼십대에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도움이 될만한 말들만을 삼가해서 전하려고 노력하는 데에도 사실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최근에는 후배와 대화하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갑자기 후배의 나이를 떠올려보니 나이 서른. 만으로 스물아홉. 성인이 된 지 10년이고 나와의 나이 차이는 3년. 내가 이 친구의 인생에 뭐그리 자신할 것이 있다고 또다시 조금 아는 이야기들에 불쑥 불쑥 말을 막고 이리저리 입담을 풀어놓는 내 모습이 보였습니다. 혼이 나간 채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저는 제 모습을 이제서야 살펴봅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한 번 말하고 두 번 들으라는 옛말이 좀처럼 체화되지 않습니다. 책 한 권을 읽어도 여전히 어린 아이들이 또래 아이들에게 장난감 자랑하듯 제 지식을 뽐내고 싶어합니다.

성년을 맞이하던 날. 나는 스스로에게 이제는 나보다 어린 이에게서도 배우고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내가 옳은 일은 주장하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장년의 나이에 삿대질하며 '너 몇 살이야?' 추태를 부리던 어른들을 보며, 나이 헛먹었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던 나에게서도 때로는 동일하게 후배들에게 잔소리를 펼치고 싶은 나쁜 마음을 발견합니다.
배움이 체화되면 분명 가르침의 의무를 져야함이 바른 이치이겠으나, 때로는 후배들에게서도, 배움이 모자란 이들에게서도, 경험이 부족하거나 불필요해보이는 잡담을 하는 이들 속에서도, 겸손의 미덕으로 귀담아 듣고 낮은 마음으로 그 생각의 근본을 받아들일 준비가 항시 되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십대에 품었던 그 마음을 곱씹으면서 말이지요.
2008/01/08 19:22 2008/01/08 19:2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가끔 난 네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네 모습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언제나 밝고 다정다감했던 너의 낙천적인 성격.
사람들의 고민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진지하게 돌아보던 너의 모습은
항상 도전이 되곤 했다.

무엇보다 난 너의 열정이 부러울 때가 있다.
좌충우돌하긴 했지만,
항상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너의 도발적인 행동이
때론 불안정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이미 나에겐 사라져버린 모습이라
더더욱 귀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난 너와는 다른 내 모습을 본다.
어린 왕자와 같은 순수함도
삶에 대한 열정도
이젠 내 안에서 찾기 힘든 무엇이 되어 버렸다.
항상 무언가를 재어 보고,
어떤 일이든 일단은 냉소적으로 반응하고,
사람들을 대할 때
내 선입관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인 경우가 잦다.

하지만,
이제 난 너에게 없는 것들이 생겼다.

힘들 때마다 자주 사라져버리고
쉽게 포기했던 너와 달리
난 긴 시간동안 참아내고
시작한 일은 마무리를 짓는 집요함이 생겼다.

낙천적이고 밝은 모습은 없지만
슬픔을 광대같은 웃음으로 포장하지 않고
힘겨움과 고통을 피하려는
나약함의 그늘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지만
권위에 굴종하지 않고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함부로 말하지 않는 만큼 내 말에 책임을 지게 되었다.

난 네가 그리울 정도로
많이 어두워졌고 그만큼 나약해졌지만
그런 만큼 거짓과 잦은 포기에서 멀어지고 있다.

(2004년 어느날.)

2007/07/24 19:12 2007/07/24 19:1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내 인생에 많은 선생이 있다.
지금도 연락이 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그 시점 이후로는 완전히 관계가 단절된 분들도 있다.
군복무를 병무청에서 했는데
그 때 총무과장님이 내겐 그런 분이다.

지나고 보면 참 공무원들에 대한 안좋은 감정이 많았다.
문서수발을 하던 나는 짬이 날 때마다 책읽기를 즐겼는데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고
그것을 가지고도 트집 잡는 이들이 있었다.
군대생활 쉽게 한다는 둥, 그렇게 할 일이 없냐며
노가다나 개인 심부름을 악착같이 시키는 등
괴롭히는 이들에도 여러 부류가 있었다.

그 와중에 총무과장님이 새로 전근을 왔다.
다른 과장보다는 직급이 높았으나 아직 과장을 하던 때였다.
한 며칠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보시다가
어느날 나를 불렀다.
나는 근무 시간에는 정도껏 봐라, 너 군대 생활 맞냐 하며
또 나를 괴롭힐 것이라 예상했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 반감이 이 때에도 있었던 듯..^^)

과장님이 입을 열었다.
"네 나이 때는 되도록 두꺼운 책을, 그리고 되도록 고전을 봐라.
내 나이가 되면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아.
지금은 나도 너 보는 정도의 책은 쉽게 보지만 두꺼운 책들은 이젠 볼 시간도 능력도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냐?"
과장님은 잠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다시 원복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 일 봐"

이후로도 과장님은 나를 가끔씩 부르셔서
짧게 짧게 말들을 많이 해주었다. 경상도 분들 특유의 방식으로..
난 병무청에서 2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한 분량의 책들이 500페이지가 넘는 책들로
읽으면서도 고통스러운 인문학 고전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과장님의 조언이 떠오르곤 했다.
내가 대학생이라면
교양서로 추천된 인문한 고전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그 때 생겼다.

한 번은 내가 젊은 혈기로 인해 정말 난감한 경우에 처했을 때도
그 분은 친히 내 편을 들어주었고, 그 문제로 나에게 특별히 충고하지 않았다.
군복무 기간동안 그 분에 관한 이야기는 몇 개가 더 있는데 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워낙 무뚝뚝한 분이었고 또 금방 과가 바뀌어서 잊고 지냈는데
오늘 회사에서 짬을 내서 책을 읽다가 문득 책 페이지를 세는데 그 분 생각이 났다.
책 두께를 보면 생각나는 분, 내 지식의 기저를 만드는 동기를 부여한 분..
2007/06/16 19:11 2007/06/16 19:11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난 좌파가 아니다. 물론 나는 좌파 이론에서 동의하지 않는 내용들이 있기 때문에 좌파가 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나는 좌파가 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좌파로서의 삶을 감당할 수 없다는 한계에서 온 것이었다.

난 자본주의를 부정할 수 없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본의 막강한 힘을 가지고 내 바로 앞까지 침투한 햄버거만큼이나 달콤한 것이었다. 난 버거킹의 와퍼나 스타벅스의 모카커피를 좋아한다. 아웃백의 스테이크 만큼이나 피자헛의 피자를 즐긴다.

나에게서는 좌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기지촌 지식인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만 삶의 위안을 삼을 뿐이다. 하지만, 중도우파로 자리를 잡은 나는 이제 조금씩 나의 삶을 정리해 나가려고 한다. 비판의식 못지않게 실천적 삶 또한 중요하다. 내가 신자유주의와 다국적 기업의 자본을 부정하지 못하듯이 난 여전히 삶에서 돈 냄새가 물씬 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좌파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그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 조금씩 그 노력을 더 해갈 것이다. 그게 내가 맥도날드 햄버거에서 포장마차 호떡으로 기호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이유다.

포장마차에서 장사하는 분들은 이미 삶의 질고의 끝에 선 분들이 많다. 내가 당일에 사먹은 호떡과 오뎅의 수가 그분들의 생계에 실제적으로 절실한 수입이 된다. 요즘 자주가는 포장마차는 내 어머니 나이 정도이신 분이 장사를 하신다. 패스트푸드 점에서는 어떻게든 싸게 먹기 위해 할인카드를 챙기고 쿠폰을 모았다. 더 내는게 아까웠다. 하지만, 포장마차는 다르다. 배가 부른데도 한 개를 더 입에 넣고 되도록이면 넉넉히 드리고 싶어진다. 살이 찔 것 같다.**
2007/04/08 18:46 2007/04/08 18:46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1. 항상 변화를 시도하라.
잘 정리된 기존의 방법을 너무 오래 고수하지 말자.

2. 자기만의 색깔을 내라.
남들이 결코 따라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 기호, 말하기, 혹은 글쓰기 스타일을 겸비하자.

3. 작은 것에서도 항상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라.
타인의 단점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옛말을 기억하자.
또한 책을 많이 읽되, 읽고 깨달은 대로 꼭 실천하자.

4.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상을 흔들자.
세상은 보수적이며 악한 방향을 향할 때가 많음을 기억하여
기저는 유지시키되 기회를 얻을 때마다 방향을 틀어주자.

5. 일은 프로답게 하라.
하나의 일을 처리하더라도 일관성과 끈기, 마무리에 힘쓰라.
자신의 말을 쉽게 번복하거나 계획했던 일들을 쉽게 포기하고
책임 맡은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는 모습을 단 한 순간이라도 보이지 말자.

6. 목적에 맞게 행동하라.
input과 output, need와 seed를 분명히 파악하여
매사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말자.

7. 연합하여 일을 도모하라.
삶의 상당 부분은 일 중심, 과업 중심이 아닌 관계 중심임을 깨닫고
함께 같은 방향으로 삶을 도모하자.

8. 사회 참여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실천에 노력하라.
아웃사이더 기질과 비판적 시각에 만족하지 말고,
바닥부터 뛰어든다는 마음으로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

9. 사치품과 명품을 피하라.
'썩어질 밀알' 운운하면서 누릴 것들을 다 누리다가 하나님 앞에 서지 말자.

10. 소중한 사람들에게 시간 쏟는 것을 미루지 말자.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익숙함으로 경홀히 대하기 쉽다.
마음만 먹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있을 때 잘하자.

11.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매순간이 마지막 순간이라 여기고
돌아보면 부끄럽거나 후회스러운 일들을 피하자.
훗날에 사람들이 기억할 모습의 자취를 하루하루 남기자. 

2006/01/24 19:01 2006/01/24 19:01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나의 사명>

삶에서 모자라는 것은,
무릎을 꿇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겸손을 위한 훈련으로 알겠다.

삶에서 넘쳐나는 것은,
잘 나누어주라고, 감사함을 배울 줄 알기위해
때때로 주어지는 선물로 알겠다.

삶에서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을 극복하거나 혹은 인정함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을 돌아보는 거울로 알겠다.

삶에서 행복한 것은,
그것이 비록 잠시 주어진 것일지라도
기쁘게 누리고
그로인해 살아야 할 의미를 되새기는 스승으로 알겠다.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뒤따라올 사람들을 위해 곧은 길을 내겠다.


2004. 8. 10.

- 신입사원 교육 중에 적은 나의 사명
2004/08/10 18:52 2004/08/10 18:52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단상(Short Notes)
2002. 12. 26. ~ 2003. 1. 6.


공포의 외인구단 1: 마동탁과 오혜성

"공포의 외인구단"은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만화다.

마동탁.
그는 천재적인 감각을 타고 났으며,
치밀한데다가 노력파이기도 하다.
엄지와의 결혼을 위해 100타석 연속 안타라는
'선물'을 내걸고 혼신의 힘을 다해 목표를 달성하고
결혼이라는 목표 또한 얻게 된다.
그러나 이내 얻은 것에 대한 가치를 잃고
또다시 다른 목표에 자신의 정신을 집중한다.

오혜성.
그는 관계 중심적이다.
물론 타고난 운동신경이 있지만,
계획하고 노력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엄지를 만난 순간 사랑하게 되고
그에겐 그녀가 신이며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
그의 신앙이 된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면 뭐든지 한다.'...
그에게 있어 목표는 그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한
도구일 뿐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야구.
마동탁에게 야구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다다르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의 대상이지만,
오혜성에게 야구는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인 도구적 가치에 불과하다.

사랑.
마동탁에게 사랑은 소유의 대상이며
일단 달성하고 나면 그 소중함은 사라진다.
오혜성에게 사랑은 삶의 본질이며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다른 모든 것은 무가치하다.

엽서.
고등학교 때 즈음.
까맣게 이 만화를 잊고 지내다 팬시점에서
공포의 외인구단 엽서를 봤다.
오혜성이 입술에 장미를 물고 있는
눈은 초점이 흐려진 그림자 처리가 되어있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의
스케치 밑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오혜성, 사랑의 정신병자."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

postscript) 마동탁의 기질을 가진 나는 이 엽서가 내 뼈 속 깊은 곳에 각인되어

MBTI의 저주로부터 나를 건져내었다.

 

 

 

who am i.

태어날 때부터 각인된 유전자의 조합?
나면서 겪은 경험들의 집합체?
혹은 그것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판단자?
행동하는 대로 규정지을 수 있는 의지적 자아?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
몸부림치는 죄인?
일관된 사고의 체계를 가진 비일관적 행동양식의 피조물?
본능을 억압하는 동물?
엄한 윤리적 잣대를 세상에 들이대는 심판관?

postscript) 나라고 생각하는 그대, 대답해보라!

 

 

 

크리스마스 묵상 2

분주한 도시의 일상을 뒤로한 채
이튿날 아침에 그 분을 찾고 싶다.

처음 이 세상에 오시던
그 저녁을 기억하시는지.

건조하고 추웠던 그 밤과
말구유 속의 냄새도.

처음으로 아버지 곁을 떠나
낯선 죄의 땅에 두 발을 내딛던
그 구속사의 시작점을.

무엇보다 난..
알고 싶다.
아니 알고 있지만, 내 입으로 묻고 싶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냐고.
나 같은 사람에게
당신의 임재가 과연 가치있는 일이었냐고.

postscript) 찬양받기에 합당하는 말.. 정확한 표현이다.

 

 

 

내 속엔...

습한 기운이 느껴지면
내 속에 나를 지탱하던 10마리의 구렁이들이
몸을 비틀며 나를 뒤흔들어 놓는다.

10마리의 구렁이들은 제각기
자신의 독특한 생각과 몸짓과 행동으로
내 안에서 자기들을 표현하고
나는 혼란 속에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통제력과 자제력을 잃곤 한다.

이젠..
그 10마리 중에 적어도 일곱은..
목을 비틀어 숨을 끊어놓고 싶다.

나에게도 생존본능이 있다.
다중인격을 가지고 습한 환경이 찾아올 때마다
몸부림치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는 것보다는
살인이란 죄명을 쓰고 평생을 사는 것이 유익하다.

postscript) 내가 누군가의 목을 비틀 위인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나의 비참이다.

 

 

 

한 해를 마감하며..

내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린 한 해였다.
노력했지만 힘든 일도 많았고,

그 만큼 올 한 해를 두고는
감사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다.

한 해가 시작되면서
난 눈과 귀를 막은 채
한 곳만을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그렇게 정해진 길로만 가기를 고집했다.

결국 내 삶의 중요한 순간들이 그랬듯이
내가 고집하던 길은 뒤집혔고
나에겐 불안정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지금 난 한 해를 마감하며
그 불안정하고 힘든 시간들을
감사한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 멋대로 발길질을 하며
이리저리 발 닿는대로 맘 내키는대로
계획하며 달려갔던 내 삶에
날선 검이 내 심장 깊은 곳에 들어왔다.

난 그 검에 의해 고정되었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

곧 안정이 찾아 올 것이다. 곧..

postscript) 곧 새 삶이 시작된다..

 

 

 

깊은 한 숨.

깊은 한 숨을 쉬고.
두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세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네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다섯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여섯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일곱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
....
일천 번째 깊은 한 숨을 쉬고 나면.

구멍난 풍선처럼.
조용히 표면에 가라앉아.
작은 숨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싶다.

 

 

 

christmas eve

 

밤새 술을 마셨다.

그러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All I need is..

<Love>
아이엠샘(I am Sam)이란 영화에서
가장 여운이 남는 장면.
그 중 하나가 딸이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하는 비틀즈의 가사..
"All I need is love."

<Pain>
다른 하나는,
여자 변호사가 발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방 사이에 접은 종이로 쳐놓은 벽.
그 안에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하는 샘..

<All I need is..>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상처받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상처를 딛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Desire>
결국 누구에게나 삶의 마지막이 찾아오며
나에게도 동일한 시간이 올 것이다.
그 이후에 우리는 서로 명확하게 보고 듣고
말하고 살아갈 것을 믿지만.
이미 내 안에 심겨진 소중한 것들을
난 힘들더라도 보존하고 키워가야 한다.

<Real Life>
결국 종이로 접은 벽을 허무는 것은
순전한 사랑을 하고 있는 상처받은 "샘"이 아니라
상처를 삭이고 지친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에 익숙하지만 변화를 소망하는
"여변호사"다.

postscript) 세상을 바꿀 순 없다. 단지 내가 세상에 맞춰지기 늦은 것 뿐이다..

 

 

 

Love is...(3)

 

사랑은
삶은 달걀을 먹는 것과 같다.

삼키려고 애쓰면
가슴이 져미면서
목이 매여 눈물이 난다.

postscript) 나는 삶은 달걀이 싫다.

 

 

 

새해 아침

사람들은 반복적인 일출과 일몰을
'날'이라 말하고
그 반복들을 모아다가
적당히 가른 후에
모자라는 날들을
어떤 때는 더하고 어떤 때는 뺀 후에..

한 해를 만든 후.
집안의 정치를 위해 제사장같은 가부장에게
그 권력을 넘겨주어 친히 제사를 지내도록
권하여 한 해의 시작일에 찬란한 제사로 조직원의
단결을 도모한다.

어찌보면 마지막 날이나 새 해 첫 날이나
똑같은 하루인데, 역시 인간은 창조물 속에서
어거지 창조를 이루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


좀더 까탈스런 반응을 보이려다
시대의 요구에 영합하는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 나는,
어거지 나눔으로 시작된 새해의 첫 날에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고
살아갈 날들을 짚어보는
묵상의 시간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삶은 살수록 지겹고,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 노동의 힘든 시간 이후에 찾아오는 쉼이
더 행복하게 느껴지듯.
그 노동의 댓가가 눈 앞에 펼쳐질 때 얻게 되는
삶의 가치가 크듯.

영화 속 대사처럼 "삶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행복한 순간보다는 자주 찾아오는
고통들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postscript) 왜, 재수 없어요?

 

 

 

살면서 여러가지 공포가 있었지만
"늪"이란 녀석은 참 무서운 구석이 있다.

외부의 힘이 아니면
벗어날 수 없다는 공포에 더하여,
벗어나려고 노력하면
더 빨리 가라 앉는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두려움은 바로
노력과 빠져드는 속도의 반비례 관계에 있다.

그 아름다운 곡선에서 나는 섬뜩함은 느낀다.

 

postscript) 난 '이런 류'가 싫다.

 

 

 

죽음 2

죽음은 소멸이다.
소멸은 또 하나의 커다란 공포다.

소멸의 섬뜩함은
당사자와 상대방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당사자에겐
더 이상 자신이라 여기는
부단히 사고하는 유일한 존재의 소멸에
대한 공포이며,

상대방에겐
더 이상 어떤 외적인 자극을 주어도
반응하지 않는 당사자의 소멸에
대한 공포이다.

비존재과 무반응.
이 두 가지는 인간의 비참함의 본질이다.


postscript) 죽음이 늪보다 덜 공포스런 이유는 죽음 자체가 비본질이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음 자체가 비존재다.

 

 

 

투명한 방에 갇히다!

잘 몰랐었다.
처음엔 그냥 쳐다보고 있었다.
주변은 아주 가까웠고 손에 잡힐 듯 했다.

난 투명한 벽 너머로 많은 것들을
여과없이 볼 수 있었고,
결국 상황 파악이 끝나면 뛰어들겠다 다짐했다.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주변은 아주 가까웠고 손에 잡힐 듯 했다.

벗어나려 몸을 움직인 나는
벽에 이마를 부딪혔다. 이 벽을 허물리라.
주변은 아주 가까웠고 손에 잡힐 듯 했다.

결국 난 알게 되었다.
내가 투명한 방에 갇혀 있었음을.
주변은 아주 가까웠고 손에 잡힐 듯 했다.


postscript) 갇힌 사람이 처음 해야 할 일은 마음의 평정을 찾고

계속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2003/01/06 19:10 2003/01/06 19:10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단상(Short Notes)
2002. 10. 26. ~ 11. 28.


달리기

어릴 적에 가끔 반복적인 꿈을 꾸곤 했다.

난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진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초등학교 내내 난 달리기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살았다.

가끔 그게 심해지면 달리기를 하는 꿈을 꾸곤 했다.
꿈 속에서는 모두 4명의 아이들이 서있는데, 선생님이 깃발을 올리면
일제히 달리기를 시작했다.

난...
깃발이 올라가면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힘껏 발돋움을 하고 달려나가는데
항상 난 다른 3명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처음 그 꿈을 꾸었을 때는,
너무 당혹스러워서 믿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꿈을 꾸면서는,
'아냐... 내가 맞아, 내가 맞게 달리는 거야...'
하며 달리다가 중도에 포기해 버리곤 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그 꿈을 꾸었을 때는
난 발돋움을 다른 방향으로 했다가
다른 3명이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나는 방향을 바꾸어 그들을 쫓아서 달렸다.

따라 잡을 순 없었지만,
난 어리석게 자신에게 '내가 맞아...내가 맞아'라며
달리는 대신, 방향을 바꾸어 그들에게 돌아서서
그 애들과 경쟁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그 꿈 이후로 이젠,
달리기 하는 꿈을 꾸지 않는다.


postscript) 두려움, 부끄러움이 스스로의 높은 울타리를 만들곤 한다.

그 안에서 관념적인 자기 확신을 아무리 반복해도 소용없다. 현실은 직시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소원..

빛은 어둠을 밝히지 못하고,
사랑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나니,
내 평생 사는 동안에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임을 알았으나,


이후로 다시는..
내게 사랑이 없기를 원합니다.

이후로 다시는..
이러한 감정과, 이러한 생각과, 이러한 결단과,
이러한 절망 가운데에서 희망을 보려는 어리석음이
내 안에서 영원히 소멸되길 원합니다.
내 평생에,

영원히...
영원히...


postscript) 원래 사는 게 다 그렇지...

 

 

 

낙엽...혹은, 박제된 죽음의 찬양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무성하던 잎들에 공급하던 양분을 그치고,
그렇게 단절된 줄기 사이로 말라져 간 잎사귀들은,
끝내.. 붉게 혹은 노랗게 찬란한 색으로 빛을 바래며 생을 마감한다.

 

인간은,
생존의 몸부림 속에 사라져가는 생명의 절규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잎들을 가져가서
기나긴 겨울 내내 박제된 죽음을 찬양한다.

 

세상의 또다른 존재가
말라 비틀어진 우리 자신을 가져다가 박제하여
기나긴 시간동안 그 바랜 색과 모양을 감상하며 찬양한다 생각해 본다.
그것은 심한 악취미일 따름이다.


postscript) 요즘 단풍을 보며 드는 생각...

 

 

 

잘난 티, 잘난 척..

잘난 척 하는 것은,
자기가 습득하지 않은 능력을
마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욕구이다.

잘난 티를 내는 것은,
자기의 노력과 수고로 인해 습득된 능력을
필요 이상으로 타인에게 나타내려는 욕구이다.

전자는 기만적이고,
후자는 유아적이다.


postscript) 난 때때로 알면서도 마치 몰랐던 것처럼,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불안한 외줄타기를 할 때가 있다..

 

 

 

More than walk..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이란 책의 후반에
그 분의 그림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걷고 싶다..."

사실 난 당혹스러웠다. 만일 내가 40년의 감옥 생활에 처해 있었다면
...난 걷는 것 이상의 것들을 소망했을 것이다.

난 뛰고 싶다. 난 날고 싶다.
난 자유롭고 싶다. 난... 난...

감옥을 상상하며 수많은 말들이 입가에 머무르지만
난 그 분의 한 마디에 내 모든 상상의 나래를 접는다.

"나는 걷고 싶다..."

자유의 박탈, 그리고 그 속에서 그의 간절한 바램은 마음껏 걷는 것.
그것은 그 분의 현실이자 진정한 그 분의 이상이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으로 내가 내 마음을 추스리고
힘을 얻는 게 얼마나 속되고 어리석은 행동인지를 알지만
나는 그 분의 한 마디를 떠올리며 내 처지를 반성한다.

아직 나에겐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내가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뛰어갈 수 있지 않은가.
나에게 주어진 조건들이 더 노력할 수 있는 여건이지 않은가.

나에겐 걷는 것을 소망하는 것 이상의 축복이 있지 않은가.
그것에 대한 감사로 내 일그러진 삶을 다시 돌아봐야 하지 않은가.

철저한 절망이 내게 임하기 전까지 난 나다움과 나의 생명을
삶 속에서 표현해야 하지 않겠는가.


postscript) 존재 자체가 우주의 흩날리는 먼지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난 삶 속에서 당신의 형상을 드러내겠습니다.

 

 

 

엿...

시험에 붙으라고
엿을 준다.

정말 엿 같은 세상이다.


postscript) 엿은 잘 녹지 않다가 높은 온도에서 녹아 다른 물질에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떼어 내려고 붙잡고 힘을 쓰면 깨져 버리기도 한다.

지나친 고착화 현상.. 그런 점에서 엿과 세상은 닮았다.

 

 

 

so what?

때론 신앙인들은
자신의 성숙을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신앙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신의 인격이 다듬어지고
삶 속에서 평안을 회복하고
종국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난 묻는다.
'그래서 어쨌다고?'

인격의 성숙은,
구별되는 본질의 필수 조건이자
그 본질이 다듬어지는 과정이자
본질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따름이다.

그 본질은 사랑이며,
신앙은 우리가 수도사로 남길 원치 않는다.
고행은 하나의 과정일 따름이다.


postscript) 달라이라마가 열반보다 윤회가 낫다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시.. 병원으로.

오늘..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실에서 유리병을 집어 던진 후
3개월 동안 병원을 떠나 있었다.

의사는 내가 전보다 더 나빠졌다고 했다.
피 검사와 주사를 처방해줬다.
처음부터 다시 진찰을 하려는 듯 했다.
답답함이 싫어서 자유로운 생활이 그리워서
병원을 떠나왔는데.. 막연한 회상.

난 굳은 몸으로 의사 앞에 앉아서
처방을 기다리고 있다.

환자복을 받았다.
획일화된 무늬, 하얀바탕에 같은 냄새가 나는 옷.
어떤 규범이 존재하진 않지만
간호사의 말과 그의 눈빛 그리고 제스츄어를
받아들이다 보면 어느새
환자들은 같은 말투, 같은 걸음, 같은 생각으로 굳어져 버리고 만다.

오늘..
난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postscript) 졸립다.. 눈을 좀 붙여야겠다.

 

 

 

인간이라는 기계..

A: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B: 아니 지난 번에 산 H8088모델 있잖아, 그게 말썽이야..

A:그래? 광고에선 그게 신의 창조물이라고까지 하잖아.
B: 그래 나도 그 광고보고 샀지, "최악의 환경에서도 최고의 성능을 보여줍니다!"

A: 안 그런가 보군!
B: 처음엔 기계답지 않게 표정에 생기가 넘치고, 항상 일을 할 때마다 최적화된 방법들을 고안하는 내부 method들이 성능이 좋아 솔직히 나도 놀랐지. 근데 웬 걸..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기계가 멈춰버리더라고.

A: 예비 동력전달 장치가 있을 거 아냐?
B: 그렇지. 근데 이 녀석의 합리화 알고리즘이란 게 문제인 거 같아. best practice를 발휘하지 못할 때마다
내부적으로 호출하는 method인 거 같은데, 작업할 당시의 자기 주변 환경의 log file을 만들어서 저장하는데, 나중에 열어보면..

A: 흠.. 그러니까 최고 성능을 보이지 못했던 이유를 기록으로 남기는 거군.
B: 맞아. 근데 H모델이 아니라 M1000으로 같은 환경에서 작업을 시켰더니 아주 잘 하더라고. bug인 듯 한데 주 기억장치에서 log file을 생성할 때마다 자기의 best practice를 낮춰서 저장하더라고. 기계는 그 성능이 자기 것이라고 믿는 거지.

A: 하하. 이런... 마치 생명체처럼 외부에서 상처를 받을 때마다 두려움으로 자신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이겠군.
B: 말도 마. 이 기계는 웃기지도 않아.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주변의 환경과 기계 내부적인 정서가 더 중요하다고 내게 연설까지 해.

A: 하하하. 차라리 A/S 받거나 교환을 하지 그래?
B: 그러려고 작정했었지. 그랬더니 이 기계가 자기는 가치있는 존재니 인격적으로 대해 달라고 하더군.
그리고 자기는 나를 사랑으로 대했는데, 내가 자기를 성능과 효용으로 평가했다고 몰아 세우더군. 어찌나 당혹스럽던지..

A: 하긴 말이 되네. 그래선 안되는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B: 근데 이 기계가 내 뒷통수를 치더군. 오늘 아침에 history관련 자료들을 백업시키다보니 나 모르게 매매를 위한 웹 사이트에 자신의 가격과 위치, trade 조건들을 올려 놓았더군. 사랑이 어쩌니 해서 잔뜩 미안한 마음 갖게 해놓고는, 참 나원.
하도 기가 차서, 요즘 프로그래밍 공부한 실력으로 이 기계의 사랑이라는 method를 찾아 보았더니, 프로세스가 이렇더군. 필요한 존재가 자기를 거부하려 할 때, temp folder에서 생성되었다가 환경이 바뀌면 간단히 Recycle Bin(garbage can)으로 가게 짜여져 있더군. 하여간 누가 만들었는지 참 정교하게 만들어 놨지 뭐야.
망할 놈의 기계같으니.

A: 그러게 Human 제품보다는 Machine 제품이 낫다니까.

 

postscript) 저주받은 정교함.. 그게 인간이다.

 

 

 

난..

난,
말을 해야 할 때 침묵했고
침묵해야 할 때 말하였다.

난,
다가가야 할 때 머물러 있었고,
머물러 있어야 할 때 다가갔다.

난,
죽었을 때 살아있다고 생각했으며,
살아있을 때 죽었다고 생각했다.

난,
내 삶을 비난하고
내 어리석음을 욕하고
내 부주의함에 침 뱉으며
내 영혼에 깊은 상처를 선물했다.

이제 난,
내 삶을 다시 조율한다.
나로 인해 헝클어지지 않을..


postscript) 시간은 돌릴 수 없다.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때마다 무한 루프를 돌다가 다운되는 컴퓨터 같은 나.

 

 

 

요리와 삶

<요리>
어릴 땐 요리하는 걸 좋아했다.

주말엔 어머니와 누나를 앞에 두고
내가 만들 요리의 메뉴를 작성해서
두 사람이 주문하기를 기다리곤 했다.

메뉴는 뭐 이런 식이었다.

1. 매운 떡볶이
2. 간장 떡볶이
3. 치즈 떡볶이

주로 내가 하는 음식은 볶음밥과 떡볶이, 돈까스, 샌드위치, 샐러드..
이런 종류였다.

요리는 간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간을 맞추기 위해 쓰이는 재료에 맞는 양념이 필요한 법이다.

아마추어인 나는 이것 저것 넣는다.
소금도 넣어보고 간장도 넣어보고.
때론 버터와 치즈.. 퓨전이란 이름 아래 적당히 간을 맞추려고
이것 넣었다가 그 맛이 강해지면 다시 다른 것들을 넣고.

결국 나온 음식은 간은 맞으나, 맛을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되고 만다.

<삶>
나름대로는 삶을 잘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간 내가 어떻게 달려왔는지
돌아보면 어지럽기만 한 나의 삶..
때론 이렇게 했다가, 때론 저렇게도 해 봤다가
힘들면 돌아서고 안맞으면 나와 구분짓고
상처받으면 무너지기도 하고, 무너진 삶들을 다시 주워 담고
남은 조각으로 더 강해 보이려고 색칠을 하기도 하고..

되고싶던 내 모습과 변해버린 내 모습.
그 간격을 느끼면 느낄수록 안타까워하며
더 나은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그럴 수록 난 현재의 모습도, 되고 싶던 이상적 모습도 아닌
내가 원치 않던 또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고..

정-반-합으로 더 나은 결론이 도출될 것 같던 나는
그렇게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결국엔 열성인자로 둘러싸인 뮤턴트가 되고 만다.


postscript) 함박 웃음 지으며 그들에게 보여줬던 메뉴판.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나온 이름모를 음식. 나의 삶과 닮았다.

 

 

 

울고 싶은 날..

때로 울고 싶은 날이 있다.
날씨가 화창한 것도 그렇다고 비가 오는 날도 아닌,
적당하게 흐린 그런 날에
마음이 우울하면 어디엔가 내 감정의 찌꺼기들을
쏟아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기곤 한다.

집에서는 큰 소리로 울지 못하기 때문에
방문을 꼭 닫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없이 울곤 했다.

울고 싶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집에 들어와 방문을 닫고
베개 속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으려는 순간..

"삼촌, 뭐해?"

(난.. 살면서 이런 때가 가장 당혹스럽다.)

"으응? 음.. 그냥.. 베개랑 놀아."

"이야, 베개랑 놀면 재밌겠다. 선아두!"

"..."


postscript) 나이가 들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가령, 애들 앞에서 냉수 마시기 같은 것..

 

 

 

시월에 눈내리는 마을..

하늘엔 예쁜 풍선들이 즐비하고..
세트장은 마법이 걸린 듯 눈을 흐려놓고
저마다의 사연들을 마음 속에 담은 채..

'10월에 눈이 오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저마다의 얼굴엔 동화 속 이야기들이 시작된다.
그렇게 간절한 기설제(祈雪祭)는 시작되었다.

사랑을 기다린다는 조규찬은 나와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번 기설제의 컨셉은 그랬다. 사랑을 기다리는 조규찬,
사랑을 잃어버린 이소라, 사랑을 하고있는 이문세..)

첫곡은 "권태기에 즈음하여"..
두 번째로 부른 노랜 "아담과 이브는 사과를 깨물었다"..
자기를 배신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노래 중간엔 그런 가사가 나왔다.
"지금부터 너를 개라고 불러주겠어.."

흥이 가시고 말았다. 매해마다 사람들은 동화같은 바램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괴팍한 그의 곡들에 의아함을 느낀다.
사실, 현실은 냉정한데 말이다. 사람들은 현실보다 솜사탕을 좋아한다.
현실은 아프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자위책이 필요하다.


postscript) 시월에 눈내리는 마을과 한국 교회는 닮은 점이 있다.

2002/12/28 19:08 2002/12/28 19:08
Posted
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단상(Short Notes)
2002. 12. 2. ~ 12. 17.


일몰과 황혼..그리고 묵상

일몰(日沒)의 시간이 찾아들고
어느 덧 황혼(黃昏)이 깃들다.

나른한 마음으로 눈부신 색감(色感)을,
차분하게 선 채로 그 온기를 느낀다.

이쯤에서 나의 생이 마감되길
그래서 기나긴 잠을 자고
그 깊은 잠을 통하여
지난 시간들을 망각하고
되찾은 평안으로 새로운 생이 시작되길.

오후의 황혼을 묵상하며
나는 오늘도 간절히 기도한다.

 

postscript) 아침이 되면 난 또다시 '다른' 모습으로 아무일 없었던 듯..

그렇게 전의(戰意)를 불태우다.

 

 

 

storehouse of my heart..

며칠 째 계속되는 정리.
후일에 다시 열었을 때 알아보기 쉽도록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난 이런 이런 사람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어딜 먼저 보겠지.
그럼 이건 여기에 두는게 낫겠지?'
'아니야 이건 이 자리에 있는 게 더 나아..'

한참을 여기저기 자리를 정리해둔다.
걸레질을 마치고 다 닦은 걸레를 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잠시 그 안을 멍하니 살펴본다.
차창에 비치는 햇살을 맞으며.

'휴.. 이제 다 끝났다.'

자물쇠를 문고리에 채운다.
"철컥!"

이제 내 마음의 기나긴 수면이 시작된다.

 

 

 

heartache

여러 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진 실다발을 만든다.
심장에는 블랙 홀과 같은 큰 구멍이 있고

그 주위의 신경에다 이 실다발을 연결한다.
그 중의 몇 다발은 뇌의 신경에도 연결한다.

그리고 나서,
심장 속으로 빨려들고 있는 홀 안쪽에서
그 실다발을 잡아당긴다.

그때 느껴지는 통증.
그 깊은 곳으로부터 전해지는 아픔.

...
그것이 "heartache"이다.


postscript) 가끔 알 수 없는 통증이 오면 설명이 필요하다.

 

 

 

거짓말..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왜 나는..
반복되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왜 나는..
매 순간 그 분의 십자가를 애써 외면하는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왜 나는..
예수의 하향적인 삶 속에 나를 던지지 못하는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왜 나는..
마땅히 있어야 할 매일의 회개가 없는가.

나는 하나니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왜 나는..
복음을 멸시하는가.

왜 나는..
하나님을 거스르며
매 순간 세상의 법도에 순종하며
매 순간 나의 평안과 안락을 위하며
하늘의 부르심과 땅의 탄원을 외면하며
곧은 모가지를 꼿꼿이 세우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칭함을 즐기는가.

오늘도 내 입에서 울려퍼지는 거짓이여,
매 순간 마음이 아닌 신경에서 반사적으로
아무런 고민없이도 부르짖을 수 있는 말이여.

'아멘..'


postscript) 갈수록 커져가는 경건의 껍데기들.. 역겨운 삶이다.

 

 

 

크리스마스 묵상 1

해가 지면 어두워지는 자연의 섭리를 깨고
자연에서 인공을 축출하여
네온사인으로 거리를 뒤덮고

Santa라는 인물의 빨간 이미지를 상품화하며
온정(溫情)의 탈을 쓰고
도시인들에게 맘몬적 능력을 과시한다.

크리스마스의 "크리스"라는 발음 뒤편으로
크라이스트(그리스도)는 주격을 상실하고
사람들은 그런 방법으로 외로움을 잊으려는 듯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다.

광기..

죄인들의 광기가 춤추는 그 날에,
번제로 드리기 위해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 의미를 알고도 모든 것을 잊고
12월의 맘몬신에게 춤추는 사람들 때문에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려야 했던 고통을 묵상해 보았는가.


postscript) 이해할 수 없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랑과 구원..

 

 

 

얼음땡 1

어릴 때 남자애들 끼리는 야구, 축구를 했다.
여자애들이랑 가끔 놀게 되면 했던 게임이 "얼음땡"이다.

술래가 있고 나머지 애들은 술래에게 잡히면 안된다.
잡히기 일보직전에 "얼음!"이라고 말하면 움직이면 안된다.
이때는 술래가 잡아도 죽지 않으나 다른 친구가 와서 "땡!"이라고
말하며 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 이것이 얼음땡..


요즘 갑자기 얼음땡 생각이 났다.

내 감정을 추스리기 힘들 때
혹은 굳게 닫아놓은 마음의 문에 틈이 생길 때
애써 높게 쳐올리던 울타리가
한 순간에 허물어짐을 느낄 때

술래가 기어이 내 앞에 왔을 때의 조바심.
당혹스러움, 견디기 힘든 느낌이 오버랩 되면서
내 머리 속에 절실히 떠오르는 단어는 "얼음!"이었다.

내가 원치 않는 것들이
일순간에 모조리
차갑고 단단하게 굳어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차갑게 굳어버리기에는
여전히 내 심장 속에서 펌프질 하며 솟는
감정의 열기는 강하기만 하다.

얼음..
얼음..
제발 얼음..
이젠 제발 얼음..

 

postscript) 눈물을 흘려도 뺨의 느낌은 뜨겁다. 빌어먹을..

 

 

 

얼음땡 2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 날은 어쩌다 보니 함께 얼음땡을 하게 되었다.

술래는 뛰고 아이들은 도망을 다녔다.
술래가 그 아이를 쫓게 되자 그 아이는 도망치다가
이윽고 "얼음!"이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땡!"을 해주지 않았다.

어처구니 없는 얼음땡의 룰에 의해
그 아이는 우스운 포즈로 굳어진 상태에 있어야 했다.

이후로 그 아이는 얼음땡을 하지 않았다.

 

postscript) 거부 당하기 전에 거부하는 것.

상처받기 전에 상처 주는 것. 그건 약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선택이다.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다. 자기 보호본능은 사람의 유전자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어서 쉽사리 변화하지 않는다. 나도, 그리고 당신도..

 

 

 

팀 버튼의 "가위손" 1

창백한 얼굴에
날카로운 가위가 손가락인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안아 주다가
그녀의 몸에 상처를 낸다.
긴장하면 원치 않게 손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야만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비극적인 운명을
그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눈이 내리지 않는 마을에서
얼음을 가위질하여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영화의 화면은 온통 차갑고 어둡고 날카롭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간절함을 불러 일으키는

슬픈 사랑 이야기...

 

postscript) 소중한 사람에게 다가서려 할 때마다, 날카롭게 갈린 손으로 찔러 상처를 줄 뿐이다.

 

 

 

계몽주의의 몰락

이성과 합리성. 계몽주의.
그 순진하기 짝이 없는 토대는 인간의 사악함이
교화시킨다고 해서 제거되지 않는다는 쓰디쓴 교훈을
가져다 주었다.

나의 선택은 나의 무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원래 나는 이기적인 게 아니라 어리석은 거라고.
벌거벗겨 놓으면 조소의 대상이 될
나의 내면을 나는 "멍청이 얼굴"의 가면과 옷으로
해결하려 했었다.

나의 삶의 여정. 나의 선택.
사실 몰랐던 게 아니다. 다 알고 있었다.
그건 나의 합리적 선택이자 내 본질적인 욕망의 이기(利己)였다.

무지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정교한 스토리. 프로세스. 히스토리...
받아 들여야 한다. 나의 내면의 더러움들을.


postscript) 누군가 그랬다. 10원에서 1원을 빼면 그게 구원이라고.

나도 구원이 필요하다. 이제 은행에서는 9원을 줄 수 없다.

 

 

 

팀 버튼의 "가위손" 2

신은...
완벽한 형태의 인간을 완성한 후에야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인간은...
이리저리 금속으로 끼워넣은
불완전한 형태의 생명체에
생기부터 불어넣고 작동이 되는지를
테스트하면서 자신의 형상을 완성시켜간다.

신의 창조물은 너무 완벽한
자신을 창조자와 동일시하며
세상을 자신의 이기심에 맞추려 애쓰지만

가위손은 중간단계의 창조물이라
창조자에게 부여받은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에 심한 제한을 받는다.

생명체는,
조금만 부족해도 비참해지고,
너무 완벽하면 변질된다.

 

postscript) 난, 팀 버튼이 좋다!

 

 

 

from E.

여기 숨어 있었군.
오래 버틴 것 같은데.
그래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더군.

넌,
요즘 딴 사람 행세를 하고 있더군.
마치 수도사처럼..

근처에서 최근 몇 년간의
네 얘길 전해들었지.
너의 온유함과 고고함에 관하여.
힘들지 않았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오랫동안 다른 사람 행세를 하기가.
꽤 근질근질 했을텐데..

다시 뒤집어 주지.
예전의 너처럼
말하고 춤추고 행동하도록..

sincerely,
from Extrovert.

 

postscript) 난, MBTI가 싫다.

 

 

 

"죄송합니다.."

주일에는 보령에 다녀왔다. 교회개혁연대에서 담임직 목회세습
반대 침묵시위가 있다고 토요일 저녁에 연락이 왔다.

교회 문제로 시위에 나서게 되면 그 날은 하루종일 우울했다.
답은 간단치 않기 때문에. 답을 알아도 상처만 남는다.

광림교회에서 느꼈던 느낌은 없었다. 교역자의 세련된 액션도
없었고, 카메라를 피해 구타를 하고는 빠지는 깔끔한 전략도
없었다. 깍둑머리를 한 사내들이 뒤에서 부산히 눈동자를 굴리며
목사의 지시를 받던 그 현기증 나던 시위 때와는 달리, 이 곳은
300명 규모의 중소 교회로 14년간의 임기를 마친 목사가 은퇴와
함께 자신의 아들을 담임 목사로 임명하게 됐고, 반발한 몇몇
장로들과 성도들을 교회 밖으로 내친 것이었다.

목사를 교회의 머리로 생각하던 순진한 성도들의 신앙은 광신
으로 돌변했고, 세습반대를 주장하던 성도들은 교회에서 쫓겨나
은퇴예배를 드리지 못한 채 밖에 서서 세습반대 시위를 했다.
박득훈 목사님의 인도로 함께 교회를 위해 기도를 했고, 하나님이
바른 길을 인도하시도록 중보했다. 상처받은 성도들이 교회와
목사를 원망치 않도록 위로의 기도도 했다. 그리고 목사나 다른
교인 개개인을 미워하지 않도록 중보했다.

약간의 몸싸움이 있었고, 홍보물을 나눠주다가 구석으로 끌려가
교회 사람들에게 멱살을 잡혔다. 그분들 하시는 말씀이,

"너 얼마받고 이 일을 하는 거야? 도대체 얼마를 받았어?"

"..."

교회에서 내침을 당한 교인들은 눈물로 기도했다. 난 그들만큼
절실하지 않다. 직장으로 진정서가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집으로
협박전화가 걸려오지도 않는다. 길거리를 걸을 때 안전을 걱정할
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기도는 간절하지 않았다.


시위를 마치고 쫓겨난 교인들과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시위 내내
눈을 붉히시던 여자 집사님 한 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다른 분
들은 모두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분은 달랐다. 울먹이시면서도 작지만 분명한 소리가 날
전율케 했다.

"죄송합니다.."


'이 분이 진짜다.' 순간 든 생각이었다. 이 분이 정말 이 교회의
몸된 성도라는 생각. 사랑없는 나머지는 울리는 꽹가리에 불과했다.
나 또한 교회 속의 꽹가리였다.

그렇다. 내 마음이 혼란스럽고 힘이 든 것은, 추운 날씨에 4시간
동안 피켓 시위를 했던 몸 때문도, 몸싸움으로 잡혔던 멱살 때문도
아니었다. 나를 증오의 눈으로 쳐다봤던 사람들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보령의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이 고통도 결국은
교회라는 내 가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각과 행동

생각없는 행동은
무능력하고

행동없는 생각은
무기력하다.

 

postscript) 많이 듣던 얘기, 압축해봤다..

2002/12/17 19:09 2002/12/17 1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