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Short Notes)
2002. 12. 2. ~ 12. 17.
일몰과 황혼..그리고 묵상
일몰(日沒)의 시간이 찾아들고
어느 덧 황혼(黃昏)이 깃들다.
나른한 마음으로 눈부신 색감(色感)을,
차분하게 선 채로 그 온기를 느낀다.
이쯤에서 나의 생이 마감되길
그래서 기나긴 잠을 자고
그 깊은 잠을 통하여
지난 시간들을 망각하고
되찾은 평안으로 새로운 생이 시작되길.
오후의 황혼을 묵상하며
나는 오늘도 간절히 기도한다.
postscript) 아침이 되면 난 또다시 '다른' 모습으로 아무일 없었던 듯..
그렇게 전의(戰意)를 불태우다.
storehouse of my heart..
며칠 째 계속되는 정리.
후일에 다시 열었을 때 알아보기 쉽도록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난 이런 이런 사람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어딜 먼저 보겠지.
그럼 이건 여기에 두는게 낫겠지?'
'아니야 이건 이 자리에 있는 게 더 나아..'
한참을 여기저기 자리를 정리해둔다.
걸레질을 마치고 다 닦은 걸레를 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잠시 그 안을 멍하니 살펴본다.
차창에 비치는 햇살을 맞으며.
'휴.. 이제 다 끝났다.'
자물쇠를 문고리에 채운다.
"철컥!"
이제 내 마음의 기나긴 수면이 시작된다.
heartache
여러 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진 실다발을 만든다.
심장에는 블랙 홀과 같은 큰 구멍이 있고
그 주위의 신경에다 이 실다발을 연결한다.
그 중의 몇 다발은 뇌의 신경에도 연결한다.
그리고 나서,
심장 속으로 빨려들고 있는 홀 안쪽에서
그 실다발을 잡아당긴다.
그때 느껴지는 통증.
그 깊은 곳으로부터 전해지는 아픔.
...
그것이 "heartache"이다.
postscript) 가끔 알 수 없는 통증이 오면 설명이 필요하다.
거짓말..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왜 나는..
반복되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왜 나는..
매 순간 그 분의 십자가를 애써 외면하는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왜 나는..
예수의 하향적인 삶 속에 나를 던지지 못하는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왜 나는..
마땅히 있어야 할 매일의 회개가 없는가.
나는 하나니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왜 나는..
복음을 멸시하는가.
왜 나는..
하나님을 거스르며
매 순간 세상의 법도에 순종하며
매 순간 나의 평안과 안락을 위하며
하늘의 부르심과 땅의 탄원을 외면하며
곧은 모가지를 꼿꼿이 세우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칭함을 즐기는가.
오늘도 내 입에서 울려퍼지는 거짓이여,
매 순간 마음이 아닌 신경에서 반사적으로
아무런 고민없이도 부르짖을 수 있는 말이여.
'아멘..'
postscript) 갈수록 커져가는 경건의 껍데기들.. 역겨운 삶이다.
크리스마스 묵상 1
해가 지면 어두워지는 자연의 섭리를 깨고
자연에서 인공을 축출하여
네온사인으로 거리를 뒤덮고
Santa라는 인물의 빨간 이미지를 상품화하며
온정(溫情)의 탈을 쓰고
도시인들에게 맘몬적 능력을 과시한다.
크리스마스의 "크리스"라는 발음 뒤편으로
크라이스트(그리스도)는 주격을 상실하고
사람들은 그런 방법으로 외로움을 잊으려는 듯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다.
광기..
죄인들의 광기가 춤추는 그 날에,
번제로 드리기 위해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 의미를 알고도 모든 것을 잊고
12월의 맘몬신에게 춤추는 사람들 때문에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려야 했던 고통을 묵상해 보았는가.
postscript) 이해할 수 없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랑과 구원..
얼음땡 1
어릴 때 남자애들 끼리는 야구, 축구를 했다.
여자애들이랑 가끔 놀게 되면 했던 게임이 "얼음땡"이다.
술래가 있고 나머지 애들은 술래에게 잡히면 안된다.
잡히기 일보직전에 "얼음!"이라고 말하면 움직이면 안된다.
이때는 술래가 잡아도 죽지 않으나 다른 친구가 와서 "땡!"이라고
말하며 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 이것이 얼음땡..
요즘 갑자기 얼음땡 생각이 났다.
내 감정을 추스리기 힘들 때
혹은 굳게 닫아놓은 마음의 문에 틈이 생길 때
애써 높게 쳐올리던 울타리가
한 순간에 허물어짐을 느낄 때
술래가 기어이 내 앞에 왔을 때의 조바심.
당혹스러움, 견디기 힘든 느낌이 오버랩 되면서
내 머리 속에 절실히 떠오르는 단어는 "얼음!"이었다.
내가 원치 않는 것들이
일순간에 모조리
차갑고 단단하게 굳어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차갑게 굳어버리기에는
여전히 내 심장 속에서 펌프질 하며 솟는
감정의 열기는 강하기만 하다.
얼음..
얼음..
제발 얼음..
이젠 제발 얼음..
postscript) 눈물을 흘려도 뺨의 느낌은 뜨겁다. 빌어먹을..
얼음땡 2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 날은 어쩌다 보니 함께 얼음땡을 하게 되었다.
술래는 뛰고 아이들은 도망을 다녔다.
술래가 그 아이를 쫓게 되자 그 아이는 도망치다가
이윽고 "얼음!"이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땡!"을 해주지 않았다.
어처구니 없는 얼음땡의 룰에 의해
그 아이는 우스운 포즈로 굳어진 상태에 있어야 했다.
이후로 그 아이는 얼음땡을 하지 않았다.
postscript) 거부 당하기 전에 거부하는 것.
상처받기 전에 상처 주는 것. 그건 약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선택이다.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다. 자기 보호본능은 사람의 유전자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어서 쉽사리 변화하지 않는다. 나도, 그리고 당신도..
팀 버튼의 "가위손" 1
창백한 얼굴에
날카로운 가위가 손가락인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안아 주다가
그녀의 몸에 상처를 낸다.
긴장하면 원치 않게 손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야만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비극적인 운명을
그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눈이 내리지 않는 마을에서
얼음을 가위질하여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영화의 화면은 온통 차갑고 어둡고 날카롭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간절함을 불러 일으키는
슬픈 사랑 이야기...
postscript) 소중한 사람에게 다가서려 할 때마다, 날카롭게 갈린 손으로 찔러 상처를 줄 뿐이다.
계몽주의의 몰락
이성과 합리성. 계몽주의.
그 순진하기 짝이 없는 토대는 인간의 사악함이
교화시킨다고 해서 제거되지 않는다는 쓰디쓴 교훈을
가져다 주었다.
나의 선택은 나의 무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원래 나는 이기적인 게 아니라 어리석은 거라고.
벌거벗겨 놓으면 조소의 대상이 될
나의 내면을 나는 "멍청이 얼굴"의 가면과 옷으로
해결하려 했었다.
나의 삶의 여정. 나의 선택.
사실 몰랐던 게 아니다. 다 알고 있었다.
그건 나의 합리적 선택이자 내 본질적인 욕망의 이기(利己)였다.
무지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정교한 스토리. 프로세스. 히스토리...
받아 들여야 한다. 나의 내면의 더러움들을.
postscript) 누군가 그랬다. 10원에서 1원을 빼면 그게 구원이라고.
나도 구원이 필요하다. 이제 은행에서는 9원을 줄 수 없다.
팀 버튼의 "가위손" 2
신은...
완벽한 형태의 인간을 완성한 후에야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인간은...
이리저리 금속으로 끼워넣은
불완전한 형태의 생명체에
생기부터 불어넣고 작동이 되는지를
테스트하면서 자신의 형상을 완성시켜간다.
신의 창조물은 너무 완벽한
자신을 창조자와 동일시하며
세상을 자신의 이기심에 맞추려 애쓰지만
가위손은 중간단계의 창조물이라
창조자에게 부여받은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에 심한 제한을 받는다.
생명체는,
조금만 부족해도 비참해지고,
너무 완벽하면 변질된다.
postscript) 난, 팀 버튼이 좋다!
from E.
여기 숨어 있었군.
오래 버틴 것 같은데.
그래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더군.
넌,
요즘 딴 사람 행세를 하고 있더군.
마치 수도사처럼..
근처에서 최근 몇 년간의
네 얘길 전해들었지.
너의 온유함과 고고함에 관하여.
힘들지 않았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오랫동안 다른 사람 행세를 하기가.
꽤 근질근질 했을텐데..
다시 뒤집어 주지.
예전의 너처럼
말하고 춤추고 행동하도록..
sincerely,
from Extrovert.
postscript) 난, MBTI가 싫다.
"죄송합니다.."
주일에는 보령에 다녀왔다. 교회개혁연대에서 담임직 목회세습
반대 침묵시위가 있다고 토요일 저녁에 연락이 왔다.
교회 문제로 시위에 나서게 되면 그 날은 하루종일 우울했다.
답은 간단치 않기 때문에. 답을 알아도 상처만 남는다.
광림교회에서 느꼈던 느낌은 없었다. 교역자의 세련된 액션도
없었고, 카메라를 피해 구타를 하고는 빠지는 깔끔한 전략도
없었다. 깍둑머리를 한 사내들이 뒤에서 부산히 눈동자를 굴리며
목사의 지시를 받던 그 현기증 나던 시위 때와는 달리, 이 곳은
300명 규모의 중소 교회로 14년간의 임기를 마친 목사가 은퇴와
함께 자신의 아들을 담임 목사로 임명하게 됐고, 반발한 몇몇
장로들과 성도들을 교회 밖으로 내친 것이었다.
목사를 교회의 머리로 생각하던 순진한 성도들의 신앙은 광신
으로 돌변했고, 세습반대를 주장하던 성도들은 교회에서 쫓겨나
은퇴예배를 드리지 못한 채 밖에 서서 세습반대 시위를 했다.
박득훈 목사님의 인도로 함께 교회를 위해 기도를 했고, 하나님이
바른 길을 인도하시도록 중보했다. 상처받은 성도들이 교회와
목사를 원망치 않도록 위로의 기도도 했다. 그리고 목사나 다른
교인 개개인을 미워하지 않도록 중보했다.
약간의 몸싸움이 있었고, 홍보물을 나눠주다가 구석으로 끌려가
교회 사람들에게 멱살을 잡혔다. 그분들 하시는 말씀이,
"너 얼마받고 이 일을 하는 거야? 도대체 얼마를 받았어?"
"..."
교회에서 내침을 당한 교인들은 눈물로 기도했다. 난 그들만큼
절실하지 않다. 직장으로 진정서가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집으로
협박전화가 걸려오지도 않는다. 길거리를 걸을 때 안전을 걱정할
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기도는 간절하지 않았다.
시위를 마치고 쫓겨난 교인들과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시위 내내
눈을 붉히시던 여자 집사님 한 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다른 분
들은 모두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분은 달랐다. 울먹이시면서도 작지만 분명한 소리가 날
전율케 했다.
"죄송합니다.."
'이 분이 진짜다.' 순간 든 생각이었다. 이 분이 정말 이 교회의
몸된 성도라는 생각. 사랑없는 나머지는 울리는 꽹가리에 불과했다.
나 또한 교회 속의 꽹가리였다.
그렇다. 내 마음이 혼란스럽고 힘이 든 것은, 추운 날씨에 4시간
동안 피켓 시위를 했던 몸 때문도, 몸싸움으로 잡혔던 멱살 때문도
아니었다. 나를 증오의 눈으로 쳐다봤던 사람들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보령의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이 고통도 결국은
교회라는 내 가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각과 행동
생각없는 행동은
무능력하고
행동없는 생각은
무기력하다.
postscript) 많이 듣던 얘기, 압축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