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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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Short Notes)
2002. 10. 26. ~ 11. 28.


달리기

어릴 적에 가끔 반복적인 꿈을 꾸곤 했다.

난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진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초등학교 내내 난 달리기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살았다.

가끔 그게 심해지면 달리기를 하는 꿈을 꾸곤 했다.
꿈 속에서는 모두 4명의 아이들이 서있는데, 선생님이 깃발을 올리면
일제히 달리기를 시작했다.

난...
깃발이 올라가면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힘껏 발돋움을 하고 달려나가는데
항상 난 다른 3명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처음 그 꿈을 꾸었을 때는,
너무 당혹스러워서 믿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꿈을 꾸면서는,
'아냐... 내가 맞아, 내가 맞게 달리는 거야...'
하며 달리다가 중도에 포기해 버리곤 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그 꿈을 꾸었을 때는
난 발돋움을 다른 방향으로 했다가
다른 3명이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나는 방향을 바꾸어 그들을 쫓아서 달렸다.

따라 잡을 순 없었지만,
난 어리석게 자신에게 '내가 맞아...내가 맞아'라며
달리는 대신, 방향을 바꾸어 그들에게 돌아서서
그 애들과 경쟁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그 꿈 이후로 이젠,
달리기 하는 꿈을 꾸지 않는다.


postscript) 두려움, 부끄러움이 스스로의 높은 울타리를 만들곤 한다.

그 안에서 관념적인 자기 확신을 아무리 반복해도 소용없다. 현실은 직시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소원..

빛은 어둠을 밝히지 못하고,
사랑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나니,
내 평생 사는 동안에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임을 알았으나,


이후로 다시는..
내게 사랑이 없기를 원합니다.

이후로 다시는..
이러한 감정과, 이러한 생각과, 이러한 결단과,
이러한 절망 가운데에서 희망을 보려는 어리석음이
내 안에서 영원히 소멸되길 원합니다.
내 평생에,

영원히...
영원히...


postscript) 원래 사는 게 다 그렇지...

 

 

 

낙엽...혹은, 박제된 죽음의 찬양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무성하던 잎들에 공급하던 양분을 그치고,
그렇게 단절된 줄기 사이로 말라져 간 잎사귀들은,
끝내.. 붉게 혹은 노랗게 찬란한 색으로 빛을 바래며 생을 마감한다.

 

인간은,
생존의 몸부림 속에 사라져가는 생명의 절규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잎들을 가져가서
기나긴 겨울 내내 박제된 죽음을 찬양한다.

 

세상의 또다른 존재가
말라 비틀어진 우리 자신을 가져다가 박제하여
기나긴 시간동안 그 바랜 색과 모양을 감상하며 찬양한다 생각해 본다.
그것은 심한 악취미일 따름이다.


postscript) 요즘 단풍을 보며 드는 생각...

 

 

 

잘난 티, 잘난 척..

잘난 척 하는 것은,
자기가 습득하지 않은 능력을
마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욕구이다.

잘난 티를 내는 것은,
자기의 노력과 수고로 인해 습득된 능력을
필요 이상으로 타인에게 나타내려는 욕구이다.

전자는 기만적이고,
후자는 유아적이다.


postscript) 난 때때로 알면서도 마치 몰랐던 것처럼,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불안한 외줄타기를 할 때가 있다..

 

 

 

More than walk..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이란 책의 후반에
그 분의 그림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걷고 싶다..."

사실 난 당혹스러웠다. 만일 내가 40년의 감옥 생활에 처해 있었다면
...난 걷는 것 이상의 것들을 소망했을 것이다.

난 뛰고 싶다. 난 날고 싶다.
난 자유롭고 싶다. 난... 난...

감옥을 상상하며 수많은 말들이 입가에 머무르지만
난 그 분의 한 마디에 내 모든 상상의 나래를 접는다.

"나는 걷고 싶다..."

자유의 박탈, 그리고 그 속에서 그의 간절한 바램은 마음껏 걷는 것.
그것은 그 분의 현실이자 진정한 그 분의 이상이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으로 내가 내 마음을 추스리고
힘을 얻는 게 얼마나 속되고 어리석은 행동인지를 알지만
나는 그 분의 한 마디를 떠올리며 내 처지를 반성한다.

아직 나에겐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내가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뛰어갈 수 있지 않은가.
나에게 주어진 조건들이 더 노력할 수 있는 여건이지 않은가.

나에겐 걷는 것을 소망하는 것 이상의 축복이 있지 않은가.
그것에 대한 감사로 내 일그러진 삶을 다시 돌아봐야 하지 않은가.

철저한 절망이 내게 임하기 전까지 난 나다움과 나의 생명을
삶 속에서 표현해야 하지 않겠는가.


postscript) 존재 자체가 우주의 흩날리는 먼지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난 삶 속에서 당신의 형상을 드러내겠습니다.

 

 

 

엿...

시험에 붙으라고
엿을 준다.

정말 엿 같은 세상이다.


postscript) 엿은 잘 녹지 않다가 높은 온도에서 녹아 다른 물질에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떼어 내려고 붙잡고 힘을 쓰면 깨져 버리기도 한다.

지나친 고착화 현상.. 그런 점에서 엿과 세상은 닮았다.

 

 

 

so what?

때론 신앙인들은
자신의 성숙을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신앙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신의 인격이 다듬어지고
삶 속에서 평안을 회복하고
종국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난 묻는다.
'그래서 어쨌다고?'

인격의 성숙은,
구별되는 본질의 필수 조건이자
그 본질이 다듬어지는 과정이자
본질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따름이다.

그 본질은 사랑이며,
신앙은 우리가 수도사로 남길 원치 않는다.
고행은 하나의 과정일 따름이다.


postscript) 달라이라마가 열반보다 윤회가 낫다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시.. 병원으로.

오늘..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실에서 유리병을 집어 던진 후
3개월 동안 병원을 떠나 있었다.

의사는 내가 전보다 더 나빠졌다고 했다.
피 검사와 주사를 처방해줬다.
처음부터 다시 진찰을 하려는 듯 했다.
답답함이 싫어서 자유로운 생활이 그리워서
병원을 떠나왔는데.. 막연한 회상.

난 굳은 몸으로 의사 앞에 앉아서
처방을 기다리고 있다.

환자복을 받았다.
획일화된 무늬, 하얀바탕에 같은 냄새가 나는 옷.
어떤 규범이 존재하진 않지만
간호사의 말과 그의 눈빛 그리고 제스츄어를
받아들이다 보면 어느새
환자들은 같은 말투, 같은 걸음, 같은 생각으로 굳어져 버리고 만다.

오늘..
난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postscript) 졸립다.. 눈을 좀 붙여야겠다.

 

 

 

인간이라는 기계..

A: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B: 아니 지난 번에 산 H8088모델 있잖아, 그게 말썽이야..

A:그래? 광고에선 그게 신의 창조물이라고까지 하잖아.
B: 그래 나도 그 광고보고 샀지, "최악의 환경에서도 최고의 성능을 보여줍니다!"

A: 안 그런가 보군!
B: 처음엔 기계답지 않게 표정에 생기가 넘치고, 항상 일을 할 때마다 최적화된 방법들을 고안하는 내부 method들이 성능이 좋아 솔직히 나도 놀랐지. 근데 웬 걸..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기계가 멈춰버리더라고.

A: 예비 동력전달 장치가 있을 거 아냐?
B: 그렇지. 근데 이 녀석의 합리화 알고리즘이란 게 문제인 거 같아. best practice를 발휘하지 못할 때마다
내부적으로 호출하는 method인 거 같은데, 작업할 당시의 자기 주변 환경의 log file을 만들어서 저장하는데, 나중에 열어보면..

A: 흠.. 그러니까 최고 성능을 보이지 못했던 이유를 기록으로 남기는 거군.
B: 맞아. 근데 H모델이 아니라 M1000으로 같은 환경에서 작업을 시켰더니 아주 잘 하더라고. bug인 듯 한데 주 기억장치에서 log file을 생성할 때마다 자기의 best practice를 낮춰서 저장하더라고. 기계는 그 성능이 자기 것이라고 믿는 거지.

A: 하하. 이런... 마치 생명체처럼 외부에서 상처를 받을 때마다 두려움으로 자신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이겠군.
B: 말도 마. 이 기계는 웃기지도 않아.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주변의 환경과 기계 내부적인 정서가 더 중요하다고 내게 연설까지 해.

A: 하하하. 차라리 A/S 받거나 교환을 하지 그래?
B: 그러려고 작정했었지. 그랬더니 이 기계가 자기는 가치있는 존재니 인격적으로 대해 달라고 하더군.
그리고 자기는 나를 사랑으로 대했는데, 내가 자기를 성능과 효용으로 평가했다고 몰아 세우더군. 어찌나 당혹스럽던지..

A: 하긴 말이 되네. 그래선 안되는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B: 근데 이 기계가 내 뒷통수를 치더군. 오늘 아침에 history관련 자료들을 백업시키다보니 나 모르게 매매를 위한 웹 사이트에 자신의 가격과 위치, trade 조건들을 올려 놓았더군. 사랑이 어쩌니 해서 잔뜩 미안한 마음 갖게 해놓고는, 참 나원.
하도 기가 차서, 요즘 프로그래밍 공부한 실력으로 이 기계의 사랑이라는 method를 찾아 보았더니, 프로세스가 이렇더군. 필요한 존재가 자기를 거부하려 할 때, temp folder에서 생성되었다가 환경이 바뀌면 간단히 Recycle Bin(garbage can)으로 가게 짜여져 있더군. 하여간 누가 만들었는지 참 정교하게 만들어 놨지 뭐야.
망할 놈의 기계같으니.

A: 그러게 Human 제품보다는 Machine 제품이 낫다니까.

 

postscript) 저주받은 정교함.. 그게 인간이다.

 

 

 

난..

난,
말을 해야 할 때 침묵했고
침묵해야 할 때 말하였다.

난,
다가가야 할 때 머물러 있었고,
머물러 있어야 할 때 다가갔다.

난,
죽었을 때 살아있다고 생각했으며,
살아있을 때 죽었다고 생각했다.

난,
내 삶을 비난하고
내 어리석음을 욕하고
내 부주의함에 침 뱉으며
내 영혼에 깊은 상처를 선물했다.

이제 난,
내 삶을 다시 조율한다.
나로 인해 헝클어지지 않을..


postscript) 시간은 돌릴 수 없다.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때마다 무한 루프를 돌다가 다운되는 컴퓨터 같은 나.

 

 

 

요리와 삶

<요리>
어릴 땐 요리하는 걸 좋아했다.

주말엔 어머니와 누나를 앞에 두고
내가 만들 요리의 메뉴를 작성해서
두 사람이 주문하기를 기다리곤 했다.

메뉴는 뭐 이런 식이었다.

1. 매운 떡볶이
2. 간장 떡볶이
3. 치즈 떡볶이

주로 내가 하는 음식은 볶음밥과 떡볶이, 돈까스, 샌드위치, 샐러드..
이런 종류였다.

요리는 간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간을 맞추기 위해 쓰이는 재료에 맞는 양념이 필요한 법이다.

아마추어인 나는 이것 저것 넣는다.
소금도 넣어보고 간장도 넣어보고.
때론 버터와 치즈.. 퓨전이란 이름 아래 적당히 간을 맞추려고
이것 넣었다가 그 맛이 강해지면 다시 다른 것들을 넣고.

결국 나온 음식은 간은 맞으나, 맛을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되고 만다.

<삶>
나름대로는 삶을 잘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간 내가 어떻게 달려왔는지
돌아보면 어지럽기만 한 나의 삶..
때론 이렇게 했다가, 때론 저렇게도 해 봤다가
힘들면 돌아서고 안맞으면 나와 구분짓고
상처받으면 무너지기도 하고, 무너진 삶들을 다시 주워 담고
남은 조각으로 더 강해 보이려고 색칠을 하기도 하고..

되고싶던 내 모습과 변해버린 내 모습.
그 간격을 느끼면 느낄수록 안타까워하며
더 나은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그럴 수록 난 현재의 모습도, 되고 싶던 이상적 모습도 아닌
내가 원치 않던 또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고..

정-반-합으로 더 나은 결론이 도출될 것 같던 나는
그렇게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결국엔 열성인자로 둘러싸인 뮤턴트가 되고 만다.


postscript) 함박 웃음 지으며 그들에게 보여줬던 메뉴판.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나온 이름모를 음식. 나의 삶과 닮았다.

 

 

 

울고 싶은 날..

때로 울고 싶은 날이 있다.
날씨가 화창한 것도 그렇다고 비가 오는 날도 아닌,
적당하게 흐린 그런 날에
마음이 우울하면 어디엔가 내 감정의 찌꺼기들을
쏟아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기곤 한다.

집에서는 큰 소리로 울지 못하기 때문에
방문을 꼭 닫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없이 울곤 했다.

울고 싶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집에 들어와 방문을 닫고
베개 속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으려는 순간..

"삼촌, 뭐해?"

(난.. 살면서 이런 때가 가장 당혹스럽다.)

"으응? 음.. 그냥.. 베개랑 놀아."

"이야, 베개랑 놀면 재밌겠다. 선아두!"

"..."


postscript) 나이가 들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가령, 애들 앞에서 냉수 마시기 같은 것..

 

 

 

시월에 눈내리는 마을..

하늘엔 예쁜 풍선들이 즐비하고..
세트장은 마법이 걸린 듯 눈을 흐려놓고
저마다의 사연들을 마음 속에 담은 채..

'10월에 눈이 오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저마다의 얼굴엔 동화 속 이야기들이 시작된다.
그렇게 간절한 기설제(祈雪祭)는 시작되었다.

사랑을 기다린다는 조규찬은 나와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번 기설제의 컨셉은 그랬다. 사랑을 기다리는 조규찬,
사랑을 잃어버린 이소라, 사랑을 하고있는 이문세..)

첫곡은 "권태기에 즈음하여"..
두 번째로 부른 노랜 "아담과 이브는 사과를 깨물었다"..
자기를 배신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노래 중간엔 그런 가사가 나왔다.
"지금부터 너를 개라고 불러주겠어.."

흥이 가시고 말았다. 매해마다 사람들은 동화같은 바램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괴팍한 그의 곡들에 의아함을 느낀다.
사실, 현실은 냉정한데 말이다. 사람들은 현실보다 솜사탕을 좋아한다.
현실은 아프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자위책이 필요하다.


postscript) 시월에 눈내리는 마을과 한국 교회는 닮은 점이 있다.

2002/12/28 19:08 2002/12/28 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