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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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 : 일단 청부론, 청빈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깨끗한 부자는 가능한가, 크리스찬은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시작해 볼까요.


동언 : 질문이 영 맘에 들지 않는데요. (웃음)


상국 : 부자와 깨끗함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깨끗한 부자’와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서로 정의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만.
 

용 주 : CBS에서 있었던 청부론 관련 토론을 보면서 느낀건데, 가난과 부에 대해 다른 용례로 쓰이는 말들을 주고 받으면서 방향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강한 김목사님이 토론의 주도권을 쥐게 된 거죠. 토론회 이야기는 차후에 더 하기로 하구요. 서로가 생각하는 부와 가난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봐요. 물론, 그러면 청부론, 청빈론 사이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들은 해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구요.
 

상국 : 단순히 돈이 많이 있을 수는 있을 거 같아요.
 

용주 : 원론적으로는 돈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상국 : 축재과정을 무시한다면.. 돈이 많은 것을 문제삼고 싶진 않은데요.
 

용주 : 그러면 책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해보도록 하지요. 김동호 목사님이 “부와 가난은 은사다”라고 하시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상국 : 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난이 은사같진 않아요. 자발적 가난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은사라고 표현할 수 있을 지 모르겠는데 그냥 가난은 은사로 취급될 수 없는 문제로 보여지는데요.
 

동언 : 부와 가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말인가요?
 

용 주 : 김동호 목사님은 가난과 부가 은사라는 논리를 방언을 예로 드시더군요. 방언은 은사인데 나는 방언을 받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안 주시더라. 방언은 받는 사람도 있고 못받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은사인 거다. 크리스찬으로 부를 얻는 사람도 있고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중요한 건 부가 축복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순복음교회의 이른바 “삼박자 구원론”을 의식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구요. CBS에서 그 문제를 놓고 토론도 하셨잖아요. 그리고 가난에 대해서는 가난하게 사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것도 은사이기 때문에 기독인 모두가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동언 : 저는 가난하게 살게된 게 목적의식적으로 청빈하고 검소하고 수도사적인 삶을 살겠다고 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열심히 살아도 마이너스인 사람이 많은 게 현실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상 국 : 깨끗한 부자라는 걸 쓰시게 된 것은 상황적 맥락이 아닐까요? 부자를 옹호하기 위해보다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성도들이 부자되기를 좋아하고, 돈을 번다는 것이 인기가 있는 것이기에,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돈을 벌 수 있고 쓸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쓰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동언 :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길 수 있는 욕망에 대해서는 일단 긍정하고 보는 게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이상적이라 하더라도 성경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상국 : 그러면 다 못 입고 못 사는 걸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잘 되길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고생해서 가난하게 살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기초인 것 같아요.
 

용 주 : 동의하는 부분도 있는데요. <깨끗한 부자>에는 김목사님의 개인적인 예화들이 꽤 있거든요. 김목사님 개인적으로는 금전 사용의 바른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책에서 가난이 은사다라고 말한 부분에는 문제의 소지가 많다고 생각해요. 물론 여기에서는 가난이란 말을 구분지을 필요가 있구요. 저는 자신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데 근검절약하는 삶을 사는, 이른 바 “청빈”은 개인의 인격적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실제로 김목사님이 가난을 은사라고 표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면, 치료비가 없어서 병원을 못 가서 불치의 병이 아님에도 죽게 된 부모 혹은 자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심한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분들이 주변에 많은 게 현실이구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은사라고 김목사님이 표현하신 것이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의 신앙적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상황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봐요. 자본주의 사회,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것이 우리가 노력해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해져 있는 체제로 인정해야 하니까 자연히 가진 자의 윤리적 행동 지침으로 책이 흘러가는 것이지요.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최소한 어느 정도 도우라는 식의.
 

동언 :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교회성도 중에 돈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담임목사님이 모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할 것 같은데..
 

용 주 : 그럴 수도 있죠. 아무튼 그래서 전 가난을 좀 구분 지었으면 좋겠어요. 청빈과 구별되는 가난은 구조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적 재난이라고 생각해요.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오는 상황적 재난이라는 거죠. 은사가 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김목사님의 자기 고백에서 드러나는데요. 저는 그것이 선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김목사님은 당신의 입으로 자신은 무난하게 목회했고, 새 교회를 개척하면서도 재정적 문제가 별로 없었지만 떳떳하고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그것은 김 목사님이 선택하신 일이라고 봐요. 김목사님이 만약에 수도권에 교회가 넘쳐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골로 가서 목회를 하셨다면 그런 부가 주어지지 않았겠죠. 자신의 여건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부는 은사가 될 수 없다는 거죠. 은사는 주권적인 것이어야 하니까요.
 

상 국 : 전 두 책의 오해의 소지를 좀 줄였으면 하는 생각이거든요. 두 분의 공통점은 극단적 금욕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잖아요. 김교수님의 책도 그렇고 극단적 금욕주의는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제 생각에 두 분의 차이는 김목사님은 부자들과 함께 목회를 하시는 분이고, 김교수님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분이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두 분 모두 부가 쌓여서 필요 이상으로 향락하고 사치하는 부는 틀렸다라고 말하고 있구요. 오히려 필요한 만큼만 갖고 나머지는 나누어줘야 한다는 관점이라는 거죠.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통하는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초반 동기 문제는 명확하게 차이가 있는데 실제 방법론상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보이고. 김목사님은 내 부는 정당하다라고 안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예화나 세부항목들을 보면 사치, 향락하는 부자를 길러낼 것 같진 않잖아요. 동기에 대해서는 이만큼 떼었으면 만족한다, 라는 것이 문제가 될 순 있다고 봐요. 하지만, 부자가 돼서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 두 분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동언 : 제가 책을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그런데, 김영봉 교수님은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인이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요?
 

용 주 : 저는 기독인이 부자가 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앞서서 부자에 대한 개념도 구분을 지어야 오해의 소지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부자를 소득이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 소유가 많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로 나눌 수 있다고 봐요. 그런 경우에 고지론적인 의미에서의 부자는 가능해요. 기 독인으로서 기업의 사장이나 회장이 될 수 있겠지요. 억대 연봉을 받는다는 것 자체로 정죄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몰론, 과정을 봐야하겠지요. 그리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부의 축적과정이 깨끗하다는 게 문제의 소지가 많긴 해도 원론적으로 소득은 많을 수 있다고 가정하자는 거지요. 반면 소유가 많은 기독인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에요. 김목사님 책에서 소유지향적 인간과 존재지향적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부자가 존재지향적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소득이 높은 사람이 존재지향적일 순 있겠지만 소유가 많은 사람은 이미 소유지향적인 사람이라고 봐야한다는 거죠. 저는 원론적으로는 기독인이 소유가 많다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김영봉 교수님의 책과 김동호 목사님의 책을 서로 비교를 좀 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데요. 두 분의 텍스트 자체는 분명 다른 부분이 존재하지만 컨텍스트에서는 만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텍스트 자체로 본다면 김목사님은 지침서 정도의 가벼운 책인 반면, 김교수님은 좀 구체적인 학술서의 분위기가 나요. 저는 김목사님이 저축의 문제나, 원로목사제도에 반대하는 부분, 노후에 대해 목회자들의 예와 그에 대한 주장에는 대체로 동의해요. 책에도 나오지만 한경직 목사님이 깨끗한 빈손이 되실 수 있었던 건 교회가 그만한 대우를 해 주었기 때문이잖아요. 목회자들에게 노후에 교회에서 생활을 책임져 주는, 그런 것들을 바라지 말라는 이야기나 한국 교회의 전반적 행태인 기복신앙을 의식하여 부가 복이 아니라고 말한 부분은 좋게 생각한다는 거죠. 반면에 동의할 수 없는 내용도 있어요. 이를테면, 78쪽에 쓰여있는 ‘성경은 헌금과 구제가 기독인으로서의 최소요구’라는 부분이 그렇구요. 80쪽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수입의 1/10은 십일조로, 1/10은 구제로 내고 나면 나머지 돈에 대해서는 깨끗한 자기 소유이니까 자유하라는 부분 말이지요. 책에서 김목사님은 사모님과 자신이 가난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절제가 몸에 베여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이러한 말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에요.
 

동 언 : 한 80만원이 소득인 사람에게 8만원은 헌금하고 8만원은 구제하고 나머지 64만원으로 살아라, 이렇게 적용해도 되는건가요? 1억 가진 사람에게 1천만원 헌금하고, 1천만원 구제하고 나머진 내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요.
 

상 국 : 실례를 김목사님에게 갖다 대면 그렇게 말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깨끗한 부자가 오해의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어요. 부자 아닌 사람이 오히려 감동적인 예화로 많이 나오는데, 부자 얘기는 별로 나오지 않는 부분도 그렇고. 관심은 부자들에게 있다는 생각인데. 부자들은 정말 돈 쓰지 않잖아요, 사치하는데에만 쓰지 말고 적어도 이만큼은 이웃을 위해 써라, 고 말씀하신 것 같아요.
 

동언 : 저는 오히려 그 부분이 아쉽거든요. 김 목사님은 부자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인지..인식의 한계 아닌가 싶은데요.
 

상 국 : 계산법으로 보면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더 좋은 제안을 하는 것 같아요. 필요한 만큼을 쓰고 나머지는 나누는 데 써야 한다고 말하거든요. 가난한 사람에게는 어차피 생계비가 정해져 있으니 그 나머지는 이웃과 나눠야 한다는 계산법이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동언 : 두 책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계산을 하는지 궁금한데요. 그런 차이가 나는 건..
 

용 주 : <깨끗한 부자>에서 김목사님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소득의 1/7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 것으로 자유한 마음으로 써도 된다는 부분은 다분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구요. 그에 대해 김교수님은 자신의 책에서 청부론자들이 말한 1/7의 나머지 부분도 소유가 하나님임을 기억하고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되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에서 김교수님은 자신이 부양하고 있는 식구들의 한 달 생활비를 계산해서 결과적으로 자기 소득보다 마이너스인 사람은 오히려 채워줘야 한다고 제안하는데 이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동언형제 말처럼 수입이 50만원인데 할머니와 자녀들을 데리고 있는 사람이 십일조로 5만원, 구제헌금으로 5만원을 내고 나머지 40만원으로 식구를 부양해야 하는가, 혹은 두 부부가 사는데 월급이 1000만원인 사람이 200만원을 헌금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자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잖아요. 김교수님은 청부론의 이런 문제들을 걸러내신 것 같아요. 김목사님의 예화들을 볼 때 김목사님이 부자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쓰신 것 같진 않지만 규장 책들에서 보이는 명료한 지침들은 오히려 더 많은 의혹과 문제를 양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 그리고 좀 벗어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깨끗한 부자>를 보면서 느낀 점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중상층 이상이라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이었어요. 한국 기독교의 주류는 최소 중산층 이상이고 그런 이유로 부자의 윤리 지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김교수님은 청부론에 대한 비판적이고 보완적인 입지에서 책을 쓰셨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시간적인 차이도 감안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구요.

동언 : 김동호 목사님을 보면서는 현실적으로 가진 자의 종교가 된 마당에 어떤 최선의 방법이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성경이 지향하는 바를 이상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원색적으로 선지자처럼 선포해야 되지 않은가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저는.
 

태 종 : 김목사님의 문제의식은, 대부분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재물관리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고려하여 본다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거 아닌가요? 사실 교회 입장에서는 십일조 헌금조차 내기 힘들어하는 게 현실이니까..
 

상국 : 그렇죠. 부자가 오히려 십일조 안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동 언 :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과연 ‘깨끗한 부자’를 보고 회심을 할까요? 기본적인 내용을 가지고 책으로 쓰고도 꽤 팔린 것 같은데요. 저는 이 책이 김목사님에 대한 감탄사로 귀결되는 한국 교회의 상황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상 국 : 저도 좀 그런 부분이 있었는데요. <깨끗한 부자>에서 불편했던 점은, 불공평한 사회를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적 자선 등으로 덮어 놓겠다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 말이죠.
 

용주 : 김동호 목사님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회상은 이상적인 미국사회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상 국 : 그런 느낌이 강하죠. 가난의 문제를 자선으로 해결 할 수는 없잖아요. 이런 식의 해결책은 점점 더 부의 불균형이 심해져서 사회적인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획일적인 공산주의를 싫어한다면 미리미리 부의 재분배에 힘쓰고 가난한 사람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반면에,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보면서는 초반부에 우린 다 가난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균형을 잡아가시는 것 같더라구요. 돈 벌기 위해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서, 회사를 운영한다 라는… 기본적인 사람들의 부에 대한 관심, 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부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웃에게 쓰고 어떻게 환원할 것인가라는 관심을 가지고 부를 운용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김영봉 교수님의 접근이 사회를 좀 더 아름답게 만들고, 기독교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용 주 : 청부론 관련해서 CBS 토론회가 있었는데 어떻게 보셨나요? 관련된 이야기도 같이 해보지요. 제가 본 느낌을 말하자면, “깨끗한 부자”라는 말도 구분을 좀 지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깨끗함’을 이야기할 때 저는 개인 윤리와 기업 윤리로 나누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토론회에서 김목사님과 김남호 사장님이 이야기하는 부자는 기업윤리에 관한 이야기로 보였거든요. 저는 인격적 완성과 이웃사랑을 목표로 삼고 있는 개인과 이윤을 내는 것이 목표인 기업은 분명 구분 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얼마는 사회에 환원하고, 얼마는 신앙공동체에 환언한다는 식의 논리는 기업윤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제는 이것을 개인윤리로 생각하면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생기더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깨끗함, 공정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리가 있다고 봐요. 김교수님이 자신의 책에서 언급했듯이 현대 사회에서 내가 공정한 경쟁에서 노력하여 얻은 소유에 대해 전적으로 공정하고 깨끗한 과정을 거쳤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거죠.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은 하루 8시간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도 하루 20시간을 공부해도 대학에 떨어지는 머리 나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머리 좋은 사람에게 그 경쟁은 공정했고 그가 번 돈에 얼마를 환원하면 깨끗한 삶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거죠. 나아가서 백인사회에서 성장한 사람과 흑인사회에서 성장한 사람, 선진국에서 자란 사람과 아프리카 오지에서 자란 사람, 부유한 가정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과 가난해서 교육은 고사하고 병원도 못 가서 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공정한 경쟁으로 부를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이고, 단순히 그가 번 돈의 과정이 공정하다는 것으로 그 돈이 순수하게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동 언 : 저는 성서의 기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과연 이웃실천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당연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8/10이 내 것이야 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주어진 것이라는 고백이 되어지는 신앙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교회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사회주의 하자는 거냐는 공격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용 주 : 저는 그런 식의 대응에 아주 짜증나요. 부의 재분배를 얘기하면 무조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로 몰아세우는 논리 말이죠. 부의 재분배나 기회 균등을 얘기하면 “빨갱이”로 몰아 세우는 그런 방식에는 환멸감이 들어요. 토론하지 말자는 얘기잖아요.
 

동언 : 근데 사실 기독교가 좀 사회주의적이지 않나..
 

상국 : 그렇죠, 그런 색채가 있다고 봐요.
 

동언 : 적어도 자본주의에서 가질 수 있는 소유욕에 대해서는 부자청년의 비유에서처럼 근심하며 돌아서는 청년에 대해 김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가 궁금하군요.
 

용 주 : 그 내용이 두 책 모두에 나오는데요. 김교수님은 김동호 목사님이 언급한 욥의 경우는 성경을 통틀어 부자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몇 안 되는 사례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대부분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부자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고 제자가 되려면 자신의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가 성경 전반적인 메시지라고 말하고 있어요. 반면 김동호 목사님의 경우에는 청빈론자들이 인용하는 부자 청년의 비유가 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지를 펴시더군요. 그 청년의 중심이 물질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라고 한 것일 뿐 다른 이에게는 재산 말고 명예나 자녀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동 언 : 저는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가 오히려 그런 맥락에서 소위 중산층, 기독 중산층이 욕망에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금전적 소유욕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부자 청년은 단순히 2000년 전의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 전반적으로 적용할 만한 문제라는 생각이구요. 많은 기독인들이 말로는 절제하면서 산다지만 결국은 부자청년의 근심을 늘 안고 사는 것이 아닐까요?

용 주 : 토론회에서는 김동호 목사님이 논리적으로 잘 말씀하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준비를 충실히 하셨다는 느낌이 든 반면, 고세훈 교수님은, 토론 자체로만 본다면 정말 실망스러웠습니다. 토론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씀도 많이 하였고 그로 인해 뜬구름 잡는 식의 거시적인 이야기로 흘러가다가 김동호 목사님에게 인신공격적인 표현을 하실 때는 마음이 정말 안 좋았습니다. 김목사님 입장에서 보더라도 <깨끗한 부자>에서 쓰였던 바르지 못한 표현들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들은 절충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그런 작업이 토론회에서 잘 되지 않은 것 같아요.
 

동언 : 김동호 목사님 책의 원래 제목은 <신앙과 부>였다는 말도 있던데요.
 

상국 : 규장에서 제목을 바꾸는 경우가 있어요. 아주 선정적으로. (모두 웃음)
 

용 주 : 저는 고 교수님이 부가 동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개인의 영적 생활에 영향을 준다는 논지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김목사님이 세부적인 원칙들이나, 기준을 정해서 그것을 지켜가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을 가리켜서 율법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에요. 저는 실제로 김목사님이 동안 교회에서 그런 정관을 지속적인 토론과 연구를 거쳐서 만들어 가는 것에 큰 호응을 하고 있거든요. 그거 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고 교수님 생각처럼 절대적인 잣대로 낮아짐을 이야기한다면, 동적인 영성에 대한 주의환기가 된다 할지라도 기준 자체가 없다면 개선 여부를 판단할 잣대가 없고 그것은 오히려 상황을 고착화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고 봐요.
 

상 국 : 대부분의 교회는 일단 기복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고세훈 교수님 쪽이 김동호 목사님 쪽의 좀 깨끗해 보자는 주장을, 너희도 똑같다라는 주장으로 몰아 붙인 상황이 됐어요. 지금 상황에서라면 같이 가는 게 현명하다고 보이는데. 기복신앙을 꺾은 다음에 우리가 이것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해 보자고 나오는 편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구요. 그렇자 않더라도 넌 틀리고 나는 옳다는 측면이 아니라 당신이 말하는 부분은 이런 단점이 있다는 등의 개선점을 찾아가며 같이 가는 게 바람직하지 않았나,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교회현실을 반영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자인 김영봉 교수나 비판적 서평을 썼던 김종희 대표가 나왔다면 좀더 좋은 토론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용 주 : 동의해요. 저는 사실 토론을 보면서는 김동호 목사님이 <깨끗한 부자>보다는 <깨끗한 교회>란 책을 전병욱 목사님이 교회 성공신화적인 얘기를 하듯 쓰셨으면 아주 훌륭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모두 웃음) 물론 그랬으면 규장에서 책이 나오진 않았겠지만.
 

동언 : 자기 교회얘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단순하진 않을 것 같은데.
 

용 주 :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토론회에서 김남호 사장님과 김동호 목사님은 우리가 가난해진 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펴시던데 그거 잘못 짚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김남호 사장님은 대뜸 “그러면 얼마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라거나 “부자가 가난해진다고 가난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그 분은 가난해짐, 청빈한 것을 마치 기업의 회장이 사직을 하고 청소부를 해야 하는가, 뭐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여기에서 부의 개념에 오해가 생긴 거 같아요. 사장이 소득이 많을 수는 있지만, 소유가 많은 게 문제인 거죠. 이 분은 기업 윤리와 개인 윤리를 동일시 하는데 개인은 적법한 경쟁을 통한 이윤추구가 목적이 아니라는 걸 잊은 거죠.
 

상 국 : 사실 저는 토론회를 보면서 내심 “바늘귀”가 의심스러웠어요. 부자들 거 다 뺏어서 혁명하자는 얘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책을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책 내용은 단순히 가난하자는 얘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요.
동언 : 덕분에 규장 책만 더 많이 팔렸을 것 같은데요. 뭐라고 썼길래 하는 마음으로..
 

용주 : 저는 규장 책은 그렇지 않아도 잘 팔린다고 볼 때 일반 성도들이 <깨끗한 부자>에 뭐라고 써있길래 하며 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는 현상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동언 : 토론하면서 드는 생각은 김목사님이 한국 교회에 대해 그렇게 느끼고 쓰신 거라면 교회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 교회의 윤리가..
 

상국 : 김목사님의 윤리보다 떨어진다고 봐야 해요. 전반적인 한국 교회의 현실이..
 

용 주 : 이제 대충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은데요. 종합적으로 얘길 하자면, 김목사님의 책에는 오해의 소지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CBS 토론회에 기대를 많이 했던 거거든요. 토론회 초반에 김동호 목사님이 용어의 정의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건 맞는 말이에요. 용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쓰면서 논리적인 비약이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토론 자체가 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고세훈 교수님이 인신공격적인 발언을 한 것 같고. 저는 여기에서는 좀 걱정이 되거든요. 실제로 김동호 목사님이 계신 숭의 교회는 한국교회로 봐서는 정말 파격적인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요. 그러한 과정에서 김동호 목사님은 내외로 힘들어 하신다고 들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토론회에서는 서로 절충하고 협력하는 계기가 되어도 모자랄 판국에 어느 정도 실질적인 개혁의 모양새를 만들어 가는 김목사님을 마치 기복신앙이나 삼박자 구원론과 도매급으로 넘기면서 적으로 만드는 태도는 정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일로 상처를 받으신 것 같구요. 특별히 고 교수님의 경우 개혁연대 계신 분인데, 그렇잖아도 개혁연대가 강경한 느낌을 준다는 교계 보수적 기독인들의 비판을 많이 받고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좀더 사려 깊게 행동하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동 언 : ‘깨끗한 부자’에 대한 비판적 글이나 토론이 나오는 것은 긍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용주 형제 말처럼 김 목사님의 책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통해 얻는 것이 더 많을 수 있을 것 같구요. 오히려 안타까운 것은, 김목사님이 하시는 개혁의 작업들이 있는데 그것을 충실히 감당하기도 벅찬 상황에 비판에 일일이 대응하려고 토론에 나와서 오히려 손해 본 것은 아닌지 하는 안쓰러움도 생기네요.**


 

** 복상 서울 독자모임은 앞으로 잡지의 모니터링과 병행하여 관심 분야와 이슈가 되는 분야에 관련된 토론을 모임에 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복상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복음과상황> 서울 독자토론모임: 청부론 vs 청빈론 토론

정리: 임정은 자매/ 사진: 권경우 형제

 
2003/01/01 08:17 2003/01/01 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