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얼마전 오마이뉴스에 쓴 <아내가 지금껏 이런 일을 해왔단 말인가> 기사 반응을 보면서 느낀 점 몇 가지.
일단 반응이 뜨거웠다. 페북 좋아요 500회를 넘겼고 기사 점수도 <닥치고 정치> 서평 다음으로 높았다. 무엇보다 시민 5명에게 원고료도 받았다. (몇달 전에 기고한 기독매체 원고료는 아직도 무소식인데)
반면, 우는 소릴 자주 했듯 댓글들은 마치 조선일보나 일베에서 볼 법한 내용이 많았다. 정리하자면 여성들은 뭔가 시원함을 느낀 것 같고 반면 남성들은 공감하는 분들도 있었겠지만 뭔가 불편하게 느끼는 부분이 있어보인다.
그 불편함은 이런 게 아닐까. 남성도 '지금도 충분히 고생을 하고있고 힘든데 가부장제의 원흉처럼 취급받는다'는 일종의 역차별 내지는 피해의식 같은 거다. 과거에 가부장제가 어떤 고압적 규율에 의존했다면 지금의 가부장제는 이런 류의 조금 변형된 형태로 유지되는 것도 같다.
각설하고. 나는 남성이지만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스스로 여성성을 확장시키고, 공공연하게 유사페미니스트 내지는 '언니'라고 칭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여성주의 운동가들과 달리 나는 성해방운동의 주체로서 남성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남성이 행위의 주체이자 동반자가 되어야 현실적으로 풀리는 문제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남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와 상황으로 어떤 '설득'을 하고 싶은 거다. 여성동지들 안에서 어떤 포퓰리즘을 일으키고 싶은 게 아니다.-_-;;;; (뭐 그것도 나쁘진 않다만...) 헌데 이 기사를 쓰면서 나는 내가 남성과 점점 불통의 단계로 다가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진.심.으.로.
가끔 나는 두란노아버지학교(기독교에서 하는 자상한 남편 교육 프로그램인데 다분히 가부장적이다)에 대항마로 여성주의관점의 아버지학교와 세미나를 만드는 상상을 한다. (주위에서 부채질도 하고) 근데 요즘은 아내의 협박에 못이겨서 똥씹은 표정을 하고 들어오는 남편들이 떠오를 때가 많다. 이,,,, 이건 아니다 싶다.
결국 오늘 미생 123회 이야기처럼 부모가 모두(성차별없이) 행복해야 자녀가 행복하고 자녀가 행복해야 그들이 다음 세대에 빛을 발할텐데 그 조건으로 볼 때 여성이 불행할 만한 요소가 한국사회에는 너무 많고 그것을 조정하고자 하는 노력은 남성도 행위 주체자로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 글은 남성에게 공감을 주는 부분에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본다.
사실 그런 생각이 있다. 남성-여성, 구도를 보수-진보, 비전라도-전라도, 백인-흑인에 대치시켜도 공감대가 될 만큼 여성문제는 치명적이지만 너~무 시시콜콜, 째째, 미시적, 가정사적이라 글꽤나 쓰는 논객들이 쳐다보지 않는 영역이다. 그도 누군가의 남편일테니 그럴 수도 있고.
그런 대결 혹은 이항 구도를 탈피해야만 가능한 남성-여성 주체적 행위로서의 여성운동을 꿈꾸면서 이 벽을 더 높게 쌓는 건 아무래도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암튼 며칠동안 많이 배웠다. ...벌써 주말이다.^^
*아버지 칠순 기념 모임 낭독글.
제목: [아버지]
아버지가 벌써 칠십 세가 되셨다는 것이 사실 저는 믿기지 않습니다. 솔직히 제가 곧 마흔이 된다는 게 더 믿기지 않지만 말이지요. 아버지는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도 저보다 달리기가 빨랐습니다. 한번은 산책길에 달리기 경주를 했는데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질주를 했고 제 기억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저보다 두배는 빨리 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전해 듣기로도, 젊은 시절, 아버지는 20대1로 싸워서도 지지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1:1로 싸워도 자주 지고 오는 아들이었고, 때로는 깡패에게 옷을 뺐기고 오는 저를 보며 속으로는 참 한심해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한번도 내색한 적은 없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저는 여느 아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살가운 정이 좀 없는 편입니다. 저는 어머니는 여전히 엄마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중고등학교 즈음부터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저희 집안도 전인권씨가 쓴 유명한 책 <남자의 탄생>에서 묘사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모습이 있었습니다. 자주,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고 어머니의 정서적 애인 역할을 하던 아들은 아버지 편이 아닌 엄마편일 경우가 잦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어느정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 아버지들은 우리 자녀들에겐 먼 존재이기만 합니다.
한번은 가족이 부산에 내려갔는데 제 아들이 할아버지를 곧잘 따르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아이가 유독 할아버지를 좋아하더군요. 할아버지가 손자와 손을 잡고 앞서가는 모습을 보는데 아빠인 제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모를 뭉클함이 전해졌습니다. 그래, 저 사람이 내 아버지다.
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가 쓴 시집을 읽다보면 이런 시구가 나옵니다.
"생사기로의 피난길에 동행이 어려워 떨구고 가게된
할머니의 호신용으로 낙점된 일곱살 배기 소년이
아우성 난리통에 온 가족과 생이별한 채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이라는 두메산골에서
홀로 할머니를 보살피며 시련의 한 계절을 겪고 있었다
밤낮으로 총소리 대포소리 요란했던 무서운 6.25 때."
아버지는 성인인 되어서도 심지어 노년에 들어서면서도 스스로를 소년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 중에 버려진 소년인 셈이지요. 재능이 남다르고 그나이에 물동이를 지고 다닐만큼 책임강이 강했던 소년, 냉정한 현실 세계에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려는 진정한 남자, 씩씩한 가장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정작 당신은 평생동안 남모를 아픔과 연약한 정서를 가진 소년의 이미지로 자신을 형상화 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주변사람들, 저를 포함한 가까운 가족들 조차도 자주 아버지가 과거에 사로잡혀서 했던 얘길 반복하거나 설교조의 말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겨웠던 거죠. 올해 제 아들이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내후년에는 일곱살이 됩니다. 저는 제 아들의 이년 후를 상상하며 아버지가 전쟁 중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홀로 남은 일곱살 소년의 공포를 체감합니다. 한참 부모형제 앞에서 재능을 뽐낼 나이에 아버지가 감내해야 했을 책임감, 고독, 외로움들을 다섯 살 아들을 가진 이제는 조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제 기억에 아버지는 평생동안 독서광이셨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첼로와 붓글씨를 배우셨고 스포츠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회사 내의 여러 친선 경기에서 트로피를 휩쓸곤 했습니다. 십년 전부터는 시를 쓰시더니 시인 등단까지 하셨고 얼마 전까지도 아마추어 성악가로서 수차례 연주회를 가져왔습니다. 칠순을 맞은 오늘 이 자리 또한 작은 음악회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대부분의 일정을 계획하고 준비하셨습니다. 대단하신 분이죠?
이렇게 표현하는 게 칠순을 맞은 제 아버지에게 결례가 되지 않을까 조금은 걱정됩니다만 저는 오늘 이 자리를 이렇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 소년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소년이 재주를 뽐내는 장기자랑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모인 여러분이 오늘은 이 소년의 마음의 부모가 되어 그의 재능을 진심으로 칭찬해주고 애정을 담아 기뻐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제 아버지를 기억해주시고 사랑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들, 김용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