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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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쉽지도 빠르지도 않다. 그러니 웃으며 기다려라."
- 밥 말리.


"트렌치타운은 자메이카의 불안정한 정치가 고스란히 드러나던 현장이었다. 자메이카는 오랜 영국의 식민지로 살아왔다. 마침내 독립을 얻지만 사회주의 노선의 인민공화당과 친미 성향의 자메이카 노동당이 첨예하게 대립해 피바람이 불었다. 그가 사는 트렌치타운에서도 연일 시위가 있었다. 시위에 참여했다가 죽거나 사라지는 사람도 있었다.

밥 말리의 노래는 수많은 자메이카인을 위로했다. 그의 노래는 어지러운 정계를 비판하고 소박한 민중의 삶을 대변했다. 그러면서 곧 아프리카 대륙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간다. 1973년 밥 말리가 "I Shot The Sheriff."를 발표한 후 미국의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이 원곡을 해석해 빌보드 1위를 기록하면서부터다. 원래 제목은 "나는 경찰을 쏘았다"였지만 정부의 간섭으로 제목을 바꾸게 됐다.

그는 노래를 통해 권력을 비난했고 대다수의 약자들이 그의 노래를 지지했다. 밥 말리는 평화를 노래했지만 그가 노래하는 현장은 평화롭지 못했다. 그는 떠나야 했다. 1976년 그의 매니저와 아내가 총상을 입으면서다. 눈 앞에서 삶의 위협을 느끼고 망명을 택한 밥 말리는 영국으로 간다.

정부는 내쫓다시피 했던 밥 말리를 다시 부른다. 자메이카 양측 정당의 무력단체 대표들이 마침내 휴전을 약속하는 평화협상을 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선언하기 위해 밥 말리를 상징 인사롤 초빙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고국의 부름을 받고 돌아온다. 밥 말리의 복귀와 함께 자메이카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공연이 기획된다. 돌아온 밥 말리는 '사랑과 평화의 콘서트' 현장으로 달려갔다.

밥 말리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생일 2월 6일은 자메이카의 국경일로 지정됐다."

- 이민희, <왜 그 이야기는 음악이 되었을까> 중에서
2013/01/22 23:28 2013/01/22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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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페친 김진형 간사님의 글 덕분에 머뭇거리다가 조금 써본다. 도서정가제에 대해 원론적으로 찬성한다. 단지 알라딘의 입지를 고려해볼 때 한기호님처럼 주범이자 응징의 대상으로 알라딘을 지목한 부분에 대해 좀 과하다고 판단한다.

 

알라딘을 제외하면 교보나 반디앤루니스는 오프서점을 보유하고 있는 온-오프 2종서점이다. 예스24는 현재 온라인 점유율이 1위이고. 이와 달리, 알라딘은 여러가지 재밌는 시도들을 많이 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대중에게 책읽는 법을 알려주려는' 의도가 있음에 호감을 표하지만) 정작 대중이 알라딘을 선택하는 이유는 여러 조합으로 낮아지는 도서의 가격 때문이다.
 
이벤트와 구간에 대한 할인, 쿠폰, 증정품, 등등으로 물리적으로 고객이 이익을 얻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알라딘에서 책을 산다. 그러고나서 고객은 마치 가격과 상관없이 '알라딘이 개념있는 온라인 서점'이라서 좋아한다고 종종 말한다.(나도 그중 하나다) 만일 알라딘에서 오프라인 서점과 동일한 가격으로 책을 판다면 당연히 오프매장을 보유한 곳, 물량이 많은 곳, 규모가 큰 곳(혹은 많은 분들이 기대하듯 동네 서점)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도서정가제의 흐름은 사실 출판사-온라인서점 간의 권력의 변화에 기인하기도 한다. 애플은 아이튠즈로 음반사보다 더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아마존은 개별 출판사보다 더 큰 힘을 행사함과 더불어 이제는 직접 전자책을 출판하는 출판-유통업체로 거듭나려하고 있다. 아마존의 방향을 거의 그대로 따라가는 알라딘의 경우도 이런 흐름을 탈 것이고 이는 결국 출판사들의 파이를 가져가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출판사들은 그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할인과 광고를 위한 비용을 부담하며 불편한 상생을 해왔는데 지켜보다 보니까 이제 좀있으면 자신들의 밥그릇까지 가져갈 참이다. 게다가 고도로 단련된 '심미안'들인 우리를 배제한 채 어디서 '장사치' 같은 것들이 책을 시장경제의 상품처럼 취급하고 있냐는 대외적인 명분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출판사들도 10%할인에 맞춰서 가격들을 책정하고 있는 편이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허접 쓰레기 같은 책들을 10% 이상의 할인율로 별도 부스를 만들어 팔아왔다. 출판사 이벤트로 반값 할인 부스들이 쏠쏠히 보였다. 알라딘이 악마라서가 아니라 그간 그런 관행들이 있어왔던 셈이다. (하지만 관행을 깨면 가장 불리한 곳은 알라딘이 될 것이다.)
 
내가 하고픈 말은 알라딘은 자신의 스탠스에서 할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 순수하고 알흠다운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악마 수준은 아니라는 거다. 시장에서 위태로워지는 자리에서 경쟁사에 비해 불리한 방향에 대해, 아무 문제제기 없이 순수하고 깨끗하게 주저 앉기를 기대하는건가. 게다가 난 그정도로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업계의 방향이 순수하지만은 않다고 본다.
 
물론 정말 도서정가제 반대가 고객도 좋고 출판사도 좋다면 모르겠지만 출판사들이 쌍수들고 환영하는 분위기는, 그간의 곪아왔던 출판시장의 문제가 터진 것이다. 알라딘 같은 서적 유통업계는 반대를 주장하고 무턱대고 고객 서명을 받기보다 출판사들의 고충과 어려움에 귀기울이는 모습을 먼저 보였어야 옳다.

 

나야 순수 고객 입장에서는 양질의 책을 보다 저렴하게 공급받는 게 좋다. 개인적으로는 뽀대나는 하드커버가 아니더라도 문고판의 저렴한 편집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가격 경쟁으로 인해 허접한 책들이 저렴하게 유통되는 미래를 맞고 싶지도 않다. 도서정가제 논란은 이 두 지점의 양 극단 중 한쪽으로만 가야함을 전제한다.

 

 

[알라딘] 도서정가제법 강화에 반대합니다
http://www.aladin.co.kr/campaign.aspx?pn=130116_book

 

 [SisaIN] 절박한 질문 '책은 상품인가?'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953

 

 [한기호] 출판유통질서 파괴의 주범 알라딘을 즉각 응징하자
 http://blog.naver.com/khhan21/110157031726

2013/01/21 22:06 2013/01/21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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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성하와 놀다보면 "아빠, 그냥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줘"라고 말할 때가 있다. 과자를 많이 먹거나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나는 즉시 물러선다. "어.. 그래" 사실 나는 상하의 놀이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몹쓸 모범생 기질 때문에 정해진 룰을 성하에게 강요할 때가 종종 있다.

 

원치않게 정형적인 방식을 부드럽게 강요하다보면 눈치가 9단인 다섯살의 아이는 그 제약을 감지하고 아빠에게 항의한다. 아빠는 이게 바른 방법이라고, 혹은 더 재밌는 방법이라고, 혹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아이를 교정하며 그렇게 아이는 위축되고 재량은 줄어든다. 외부세계에 주어진 룰부터 찾으려고 하며 눈치를 보며 불안해한다.

 

결국 아이는 놀이에 주도권을 잃게 되고 아빠가 노는 걸 지켜보다가 정작 본인은 흥미를 잃고 만다. 아빠주도형 놀이의 탄생이랄까. 이 모든 것을 나는 드러나지 않게 체화시키길 기대하며 은근히 아이에게 강요하는 편이다. 난 그렇게 커왔기 때문에 아들에게도 그렇게 내 DNA를 전수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주장을 분명히 해주는 성하가 신기하고 고맙다. 그는 조용히 마치 혼자말을 하듯 내게 말을 한다. "내가 하고싶은대로 하게 해줘" 주의깊게 듣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을 정도의 소리로. 오늘도 나는 한걸음 물러서서 대답한다. "아, 미안. 네가 해바바"

2013/01/21 00:05 2013/01/2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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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어제 아내가 준비한 모임이 잘 끝난 모임이다.
내심 내 일처럼 기쁘기도 했지만... (전환)
어제도 산더미같은 일거리를 초인적인 힘으로
처리하고 성하 픽업해와서 밥 해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나니 아내가 자정이 넘어서 집에 왔다.
모임 참석자들 몇 그룹을 집까지 태워주고 왔단다.

 

오늘은 어제의 피로와 긴장이 풀린 아내 떡.실.신.
성하는 사슴과 같은 눈망울로 놀이터에서 눈사람
을 만들자고 조르고. 나는 나대로 휘곤휘곤.

 

하지만 한번 똘마니는 영원한 똘마니가 아니던가.
따라 나가서 열심히 눈사람 만드는 거 방관+도움.
(그래도 오늘은 루돌프 사슴은 안 했다. 날이 풀려서
눈이 많이 녹았더라. 씨바... 날씨 겁나 고마우이.)

 

아내는 저녁에 잠시 일어나서 간단히 요기하고
다시 떡실신.ㅠㅠㅠㅠ
성하도 장호삼촌네서 너무 열심히 놀았던지 잠시
짜증작렬하다가 어느 순간엔가 코골고 자는 중.
...

 

아... 이제서야 우리집은 평화가 찾아왔건만.
나도 미친듯이 피곤하고 졸립다... 안돼...ㅠㅠ
일단 일어나서 책상에 앉았는데 거 되게 졸립네. 쩝.

 

엄마들이 집에서 자기개발 못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빨래나 마저 널고 자야겠다.

2013/01/21 00:04 2013/01/2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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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가 2월부터 10만원대 전자책(e북) 전용 단말기 출시와 함께 회원제 e북 서비스 ‘샘(sam)’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일단 칼라 e-ink 단말기 실패 이후 변화를 위한 발빠른 행보가 고무적이다. 특히 이제까지 교보가 내놓은 전자책 시장 상품들 중 단연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전자책 소비자들의 상당수가 소설, 에세이류에 집중되고 있고 그런 책들은 소장용이 아니기 때문에 가격의 매력이 있는 회원제가 전자책 시장의 파이를 키울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을까. 어느 정도 괜찮은 서비스라고 생각하나, 여기에도 몇가지의 우려감이 있다.

첫째는 10만원대의 단말기가 흑백일 거란 추측. 당연히 태블릿을 쓰는 이들이 칼라 서적을 일단 보고나면 태블릿을 '더' 선호하게 될 것 같다. 결국 '샘'이란 서비스는 태블릿에서 앱으로도 제공되어야만 그 기대대로 시장에 먹힐 것이다.

 

둘째는 소장 욕구다. 사람들이 도서관만 이용하지 않고 책을 구입하는 이유는 특정한 책은 읽고 나서도 보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책에 대한 애정일 수도 있고 논문이나 칼럼을 쓸 때 참조를 위해서 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필요할 때마다 책을 대여해야 하는 게 문제가 될 수 있다. 결국 회원제로 운영할 때 한번 구입한 전자책은 종신토록 보유할 수 있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이 두가지가 잘 해결된다면 회원제 전자책 서비스는 (아마존 같은 공룡 온라인 업체가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전자책 시장의 표준 서비스가 될 수도 있으리라 조심스럽게 예견해본다.

2013/01/18 23:27 2013/01/18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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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보지 않을 때 아이는 말썽을 일으킨다. 야단이라도 맞아가며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처지, 특히 제일 사랑받고 싶은 엄마의 마음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느낌은 아이에게는 아주 견디기 힘든 일이다. 자기가 죽어도 엄마는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의 속내를 언제까지 외면하고 있을 것인가. 아이는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33쪽)

아이만 치료하는 일이 얼마나 소용없는 일인지 치료자들은 잘 알고 있다. 아이보다 엄머가 마음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엄마들은 자신은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클리닉에 데려오는 일만 할 뿐이다. (40쪽)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만 집안일을 전혀 분담하지 않고 남편이 총각 시절과 다름없이 생활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를 만났다. 그 부인은 "남편이 취미로 하는 골프 연습이나 자기 계발을 위한 영어 학원 수강을 말리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남편을 배려하는 좋은 아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편에게 아빠 역할을 즐길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남편의 의사를 묻지 않고 그렇게 미리 알아서 다 해주는 것이 좋은 아내의 자세라 여긴 것이다. 회식이나 업무상 미팅으로 늦게까지 술마시는 것도 남편의 일 중 하나니, 주말에는 쉴 수 있게 배려한다. 그러고는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자녀 교육 문제까지 혼자 도맡아 처리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71쪽)

우리는 그들보다 더욱 복잡하다. 여성은 학교교육을 받는 동안에는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하며 성취하는 개인으로 지낸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을 포함하고 살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다. 결혼 후 제일 힘든 점이 개인으로 자유롭게 살다가 갑자기 남편과 시집 식구를 포함하여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당하다고 몸부림치고 부부 싸움도 많이 한다. 하지만 차츰 모르는 사이에 자기 행동 단위를 넓혀 머릿속에 자녀와 남편, 그리고 시집 식구들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뒷전으로 밀어놓는다. 그러면 부부싸움은 줄어들지 몰라도 마음속에 갈등이 자라게 될 것이다. (74쪽)

그 부인은 아이를 겨우 재우고 노곤하게 잠든 사람을 깨워 ㅈ사랑 나누기를 청하는 남편이 귀찮다고 했다. '내가 피곤한 걸 몰라서 저러나'하는 원망까지 든단다. 직장에서 돌아와 얼마 안 되는 시간에 집안일은 물론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공부시킨 후 재우고, 겨우 쉬는 그 귀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부인이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하는 동안 남편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골프연습장에 다녀오고 TV를 보고 인터넷을 한단다. 집에 일을 들고 들어오는 때도 있다고 한다. 그 부인은 남편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다 하게 놔둔다. 아이에게 남편은 아빠가 아니라는 듯 책임을 면제해준다. 잠깐 놀아주는 것으로 아이에게 아빠는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엄마는 혼자 부모 노릇 다 하느라 피곤하다. 그렇게 모든 할 일을 다 하면서 일에 지쳐 잔소리하고 짜증내는 엄마가 된다. (83쪽)

엄마들은 "아이가 원해서 학원에 보내요"라고 한다. 언제부터 아이들이 원했을까. 동맹이라도 한 듯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니 친구 사귀려면 학원에 갈 수밖에 없다. 엄마 마음대로 원하지 않은 짧은 머리를 만들어놓고, 화내는 아이를 달래며 장난감을 사주는 엄마는 "네가 원하는 삶(머리 길이)을 살지 않고 엄마 말대로 살면(짦은 머리) 유산(장난감)을 물려줄게"라고 하는 셈이다. 아이들은 그 장난감(유산)의 유혹으로 자기 의지를 꺾는다. (88쪽)

아이가 성도착 문제로 치유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엄마가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며 치료를 주저했다. 신경정신과 치료 기록이 남는 것도 꺼림칙하고, 번듯한 집안이라는 평판을 잃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덮어두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 건강한 성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본인뿐만 아니라 배우자가 될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들 수 있고 심하면 성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일이라 문제가 심각한데도 외면한다. 가정 안에서 아버지나 오빠, 삼촌에게 성추행을 당한 아이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도 적합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엄마가 많다. 누가 알까 두려워 덮어두려고만 한다. 그러면 아이는 자신의 처지를 충분히 느끼고, 분노하고, 슬퍼하지 못하게 된다. 미해결 사건이 평생을 좀먹고 과거가 자신을 좀먹게 두니 비참한 어둠 속에서 살게 된다. (135쪽)

어린 시절에 받은 피해를 오해려 자신의 수치로 여기며 살게 되면 어린이 되어서도 억울한 처사에 순발력있게 대응할 수 없다. 고통을 당해도 무감각하든지 혼란스러워한다. 그래도 체면이 그렇게 중요한지 묻고 싶다. 아이의 인생보다 체면이 중요한가? 아이의 삶보다 귀한 체면이란 없다. (136쪽)

자녀의 반에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가 있으면 엄마는 "그 애와 놀지말라"는 말만 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가 바로 그 문제 아이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139쪽)

엄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자녀는 잘 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이 엄마의 마음을 얼마나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지 깜짝 놀라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부모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눈치 보고 귀를 쫑긋 세우고 살았으니 당연하다. 자녀가 엄마의 마음을 간파해서 "결국 돈 얘기하는 거 아니야"라 한다. "친구들과 좋게 지내라"는 말을 듣고도 "걔와 경쟁해야 하잖아"라고 말한다. 선생님을 존경하라"는 엄마의 당부에 "알았어. 선생님한테 잘 보일게" 대답한다. 아이들의 눈이 너무 정확해서 부끄럽고 마음이 아플 지경이다. (153쪽)

엄마들이 많이 하는 말 가운데 '이 정도는 기본'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기본이라는 말이 무섭다. 공부나 생활 태도 등 각 엄마마다 나름의 기준을 정해놓기 마련인데, 이 기준에 이르지 못했을 때 아이는 가차없이 정죄 받고, 기본도 못하는 아이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리고 당장 생사회복에 지장을 경험하게 된다. 엄마의 실망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 아이에게 매질이나 언어폭력보다 덜 두려울 것 같은가. 아니다. 경직된 엄마의 기준에 어긋났을 때 엄마가 보이는 작은 반응도 아이에게는 굉장한 위력으로 다가온다. (161쪽)

이제 자신의 느낌을 찾기 위해 기억 저편의 어린 시절 접어두었던 역사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잘못했을 때는 "넌 원치 않는 딸이었다"는 뼈아픈 말도 들어봤을 것이다. 반면 잘하면 잘하는 대로 "네가 아들이었으면 좋았을텐데"라는 기막힌 말도 들었다. 이렇게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없게 만들었으니,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무시하고 내 삶이 귀한 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못하고 뒷전에 밀려나 있어도 불만이라 느낄 줄 모른다. 자신의 느낌도 무시해서 내세우질 않는다. 이런 것을 우리사회에서는 겸양의 미덕으로 쳐주기 때문에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183쪽)

막상 아이들은 엄마 앞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 우리가 생각하는 어머니 상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이들이 받은 상처는 언제나, 자신을 더 없이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엄마와 연결되어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어머니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란 걸 우리는 안다. 현실이 각박하고 먹고 살기에 너무 바쁘고 어머니 자신이 참고 살아내야 할 삶이 힘들었기 때문이란 것 역시 안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191쪽)

가족은 서로 속일 수가 없다. 특히 자녀는 부모를 속속들이 보아왔기 때문에 속일 수 없다. 나는 아들이 작문 시간에 쓴 한 구절의 글에서 그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엄마는 나를 어른이 되어 알기 시작했지만, 나는 엄마를 태어나서부터 평생 알고 있다!" 자녀는 이렇게 엄마를 알고 있는데 정작 엄마는 아이를 모르고 있다. 간혹 엄마들이 "우리 애를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라고 푸념하는 모습을 본다. 특히 하나 이상 자녀를 키우는 집 엄마들은 둘째를 향해 "언니는 안 그랬는데", "형은 다른데"라는 말을 곧잘 한다. 하지만 아이가 처한 상황을 알았다면, 왜 그 렇게 다른지 알 수 있을 텐데 알려 들지 않는다. (204쪽)

사람들은 "다 지나간 옛일을 지금 끄집어내면 뭐하느냐?"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덮어두고 묻어두고 있으면 영영 아무 느낌 없이 살게 된다. 내가 무엇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 왜 슬픈지, 어떤 이유로 괴로운지 모른 채 불만스럽고 슬프고 괴롭게 사는 것이다. (222쪽)

그니처럼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에게서 문제가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 처음에는 어머니를 원망한다. 어머니에게 그런 마음을 표현하는 경우 "이제와서 어쩌라는 거냐" 하는 분도 있고 "몰라서 그런 것이니 미안하다" 하는 분도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머리로 알기만 한다고 해서 상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느꼈던 그 시절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자기 아픔을 될 수 있는 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우선이다. 물론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기억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모든 아이들은 어머니의 보호와 사랑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우호적으로 기억하려 한다. 어머니 역시 모든 것이 아이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사랑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237쪽)
2013/01/18 23:26 2013/01/18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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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사람들을 '욕망-억압 모델'로 이해하려는 편이다.
아내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크고, 최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레 관심이 가는 방향이기도 하다.

진보-보수, 자본가-노동자, 기독인-비기독인 등 다양한 차연이
가능하겠지만 한 사람의 인생사 속에서 축적된 욕망과 좌절,
억압과 분출의 서사... 그 또한 참 중요한 부분이란 생각이 든다.
사회학적으로도.
가끔 페북을 보면서도 사람들의 욕망-억압의 다양한 표현들을
접한다. 무엇보다 나는 내 모습을 본다.

나는 한번 포스팅한 글이나 댓글은 어지간하면 잘 지우지 않는다.
...귀찮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를 욕망-억압 모델로 관찰하다보면,
내가 실수로, 혹은 무의식 중에 썼다가 지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글들이 있다. 라깡은 말실수나 반복에 의미부여를 하던데.
참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요즘 나는 지우고 싶은 글이나 말이 생기면 그냥 지우기보다는
그 글을 없던 걸로 하고 싶어하는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편이다.
의외로. 그 짧은 시간의 짧은 돌아봄 속에서 얻는 게 쏠쏠하다.

어차피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 없듯,
한번 포스팅은 영원한 포스팅이 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
그리고 가끔 글들로 내 욕망과 억압을 반추한다. 요즘, 좀 그렇다...

사족.
현대기술이 내 흔적을 반복적으로 copy하는 이유도 있다.
내가 인터넷 어딘가에 끄적이는 낙서들이 메타 사이트에서
한두번의 검색만 거치면 지웠던 글도 먹지를 대고 배껴내듯
...나타난다.

 

2013/01/18 22:05 2013/01/18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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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떤 분에게 약속 확인 문자 보내는데 말미에 "확인사살...^^"이라고 썼다. 쓰고보니 무시무시한 말. 사실 우리가 쓰는 말 중 군사용어들이 참 많다. 하다못해 평화주의자를 자청하는 기독인들도 성경에 나와있다며 전쟁, 전투, 싸움 등등 쉽게 군사적인 용어들을 남발한다.

 

그러고 보면 엔터테이닝 같은 축구도 전쟁이고 나가수도 가수왕들의 전쟁이고 수퍼스타K 같은 서바이벌 프로도 전쟁이다. 그것 뿐이랴, 회사 생활도, 자녀교육도 죄다 전쟁이다. 뭐 다 갖다붙이면 일상의 소소한 일들부터 큰 결정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존 자체가 전쟁이고 타자와의 피터지는 싸움이다.

 

나는 말과 삶의 일치를 꿈꾸는 편이지만 삶의 형편들이 말로 터져나옴과 동시에 말의 오염이 삶을 오염시키기도 한다고 믿는 편이다. 내가 삶 일체를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순간 내 모든 감정과 감각기관, 세포 하나하나가 긴장하기 마련이다. 약속 확인 하나조차 사살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2013/01/18 22:04 2013/01/18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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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펑크락'이 유형했던 시기가 있었다. 국내에서도 삐삐밴드나 이후 일부 아이돌 그룹들이 펑크락을 구사했는데. 펑크락은 맥락이 중요하다.

1.

한동안 록음악은 스튜디오 녹음기술, 전자기기 등의 발전과 더불어 그 사운드 스케일이 풍성해지다 못해 점점 난해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개인 테크닉의 절정인 기타 속주나 곡의 복잡함으로 달려간 프로그레시브록, 사운드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오케스트라 수준의 편곡들은 점점 대중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어느 순간 록밴드 자신들도 장르적 식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모던, 얼터너티브에 이어 펑크록이 90년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는 앞서말한대로 이전세대의 난해한 음악, 기교적인 연주의 식상함에서 비롯되었다. 연주의 대가들이 제대로 칠 수 있는 독주... 부분도 과감히 '연주하지 않고' 단순 코드만 심플하게 퉁퉁 퉁겨내고 보컬도 기교를 버리고 무성의하게 노래를 불러댔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 코드 진행, 단순 연주, 무성의한 보컬로 록음악을 펑크, 펑키 스타일로 변질시켰지만 그 이면에는 록의 이전 역사에 대한 '저항', 새로운 시도에 대한 갈급함이 숨겨져 있었다.

재밌게도 이런 장르적 변화로 인해 록음악계는 이제 '개나 소나' 밴드를 하게 되었다. 이전 장르에서 록음악은, 고수들 실력의 향연이었다면 펑크는 기타만 칠 줄 알면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단순함'이 록음악의 외연을 키웠다. 문제는 저항의 의미로 실력을 보여주지 않던 이들과 원래 실력이 없어서 단순 연주밖에 못하는 이들의 혼재된 상황. 하지만 후자는 펑크의 유행이 다하자 자연스레 록계에서 사라져갔다.

2.
나는 개인적으로 경구류의 단문이나 알맹이 없이 글쓰기 자체를 논하는 글들이 불편하다. 경구의 경우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거나 반대로 동의되지 않는 수많은 반론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은 이것들이 대체로 '펑크록'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펑크록이 감동을 주는 건, 그 대상이 록음악이라는 무림의 고수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떤 의도된 단순 코드는 그들(고수)이기 때문에 감동을 주는 것이지 '그들'이 아닌 이들이 연주하는 단순코드들은 그냥 '하수'들의 그렇고 그런 연주들에 불과하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습작을 하는 많은 이들이 경구 쓰기에 치중하거나 글쓰기론을 설파하는 것에 자주 아쉬움 내지는 유감스러운 마음이 든다.

베스트셀러 작가나 학계가 인정하는 고수, 아니면 '아브라함 링컨'(오늘은 초류향이라고 하려다 참음) 같은 위인이 아닌데 너무나도 당연하거나 혹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단문들을 쓰는 사람들에게 나는 좀더 열심히 자기 생각을 풀어쓰는데 시간과 정성을 들이기를 권하고 싶다. 차라리 문법이나 논리가 잘 안 맞더라도 성실하게 자신의 정서나 논리를 서술해간 글들이 나는 '사랑스럽다'. 그런 글들에는 그 '질'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정말 애정이 간다.

20년을 감옥에서 복역한 신영복 교수의 '나는 걷고싶다'라는 단 한마디의 말이 영혼 깊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박범신 같은 작가가 기고한 짧은 칼럼으로도 그 이상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듯. 경구 한두줄의 힘은, 오랜 기간동안 성실함으로 갈고 닦아진 글과 삶의 궤적이 보장되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내가 펑크록을 바라보는 씁쓸함의 이유이기도 하다.
2013/01/14 22:03 2013/01/1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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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주의적 시각이 갖는 부정의(injsutice), 몰역사성, 탈정치성은 차치하더라도 '성 역할'이라는 말은 있지만 '계급역할', '인종 역할'이라는 말은 없다는 점에서 '역할'이 얼마나 정치적인 담론인지 알 수 있다. 최소한 공식적인 사회 담론에서 "사람은 자신의 계급적, 인종적, 장애, 연령 등의 위치에 따라 평생 그에 맞는 역할(직업)을 해야한다. 흑인은 청소부 역할만을 해야 하고, 시각 장애인은 안마사라는 직업만을 가져야 하며, 가난한 사람은 그 위치에 맞는 심리, 행동,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라는 말은 발화될 수 없다.

 

 이에 비해 성별에 따른 역할론은 자연스럽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사회는 성 역할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집단에 대해서 심리적, 문화적,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혐오와 적의, 처벌을 행사한다.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계급, 장애, 연령, 인종, 종교, 지역, 국적 등으로 인한 분엽(차별)은 부정하며 극복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반면, 젠더는 그렇지 않다. 계급이나 인종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사회적 제도이고 피해지만, 젠더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산, 재생산 노동을 모두 감당하는 여성의 노동력은 한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삶을 가능케 하는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향상될수록 이 노동은 남성과 분담되기보다는, 여성들 사이의 계급, 인종, 나이 등의 위계에 따라 여성들 내부에서 '전가'된다.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 여성들 역시 공장 노동과 같은 전통적인 제조업부터, 음식 서비스 산업, 가사 노동자, 아내, 농업 노동자, 한국의 심각한 저출산 문제의 해결자, 성 산업에 이르기까지 기존 국내 여성들이 담당해왔던 저임금, 비공식, 비가시화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별 구분보다 자본과 학력, 기술 등 개인이 가진 자원에 따라 젠더 범주가 '유연'해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신자유주의 상황에서 가부장제의 쇠퇴는 여셩의 지위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2013/01/14 01:16 2013/01/14 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