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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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페미니즘
지난해 책을 통해 배운 내 간접 스승은 단연 '정희진'이다.
솔직히 작년 한해는 기독교 배경에서 참 많은 유명한 기독저자들의
책이 나왔지만 나는 그 모든 기독교 대가들과 '정희진' 한명을 견주어
부족하지 않다고 느꼈다.

사실 최근 몇년동안 페미니즘 내지는 성평등에 관한 고민과
그에 따른 내 나름대로의 논리, 입장이 있었다.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나는 내가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공평한 남성'이라 여겼다.

하지만 정희진은 나의 이런 나름의 선을 넘게 만들었고 여성문제에
있어 남성들이 더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겸허한 마음을 안겨줬다.
예전에도 고은광순이나 조한혜정 등 몇몇 여성 저자들의 글과 책을
읽었지만 사실 별로 와 닿지 않았다.
아니 - 깔대기를 들이대자면 - 내 생각보다 더 나아갔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올해에도 사이비 언니로서의 삶을 기대하며
작년에 즐겁게 읽은 책들을 리스트업하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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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은이) | 교양인 | 2005년 11월

2.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 폭력과 여성 인권
정희진 (지은이) | 또하나의문화 | 2001년 8월

3. 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르처 (지은이) | 이프(if) | 2001년 5월

4. 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은이) | 푸른숲 | 2003년 5월

5.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 - 섹스의 심리학
데이비드 버스, 신디 메스턴 (지은이)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9월

6. 내가 사랑한 여자- 공선옥.김미월 산문집
공선옥 | 김미월 (지은이) | 유유 | 2012-07-20


2013년 1월 2일
2013/01/02 01:10 2013/01/02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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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오늘 새벽에 자다가 성하가 잠꼬대 하는 소리에 깼다.

귀엽게 옹알거리기에 귀기울여 들어보니 '추.... 추워...'

눈을 뜨고 일어나 보니 나는 이불을 누에고치처럼 돌돌 말아서 자고 있고

성하는 옆에서 웅크리고 자는 중;;;;;;;;;;;;

히잉. 아빠가 미안하다. 흙흙 ㅠㅠㅠㅠ

(회사 와서도 계속 맘에 걸리네...)


2013년 1월 2일

2013/01/02 00:02 2013/01/0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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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인용들

추천사를 읽다가 이렇게 뭉클하긴 처음이다...
 
"연애지침서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공략 대상으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 방법을 설파하느라 여념이 없다. 성공적인 연애를 위해 구사할 전략들을 나열하고,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흉내내기,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모방, 사랑을 가장한 목표 달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리 루티 교수가 말하듯이 사랑은 요령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수많은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의 어린 날의 경험들, 노동 조건, 삶의 조건, 살아보고 싶은 삶의 모습, 욕망과 소망, 그리고 또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디테일들, 웃는 모습, 찡그리는 모습, 손의 느낌, 걷는 모습, 잠든 모습.
 
이 시대에, 이 고독하고 우울한 시대에 우리가 사랑하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와는 마음을 나누고, 의미있는 관계를 맺고 , 그에게 만큼은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신비롭다고 할 만한 최초의 매혹에 끌리는 경험. 자신을 사랑하듯 남을 사랑해보는 경험. 너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 말하고 그것을 간절히 꿈꿔보는 경험. 상실과 결핍, 방황 끝에 충만함을 맛보는 경험. 한 사람을 통해 세계를 맛보는 경험. 한 사람을 사랑한 덕에 세계가 달라지는 경험. 온전히 이해받아 보는 경험. 자신을 벗어나보는 경험. 다른 사람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보는 경험.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경험...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이런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들여다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우리에겐 무엇이 빠져 있는가. 사랑은 우리 삶에 일어난 시끌벅적한 사건이다. 조금은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사건이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생겨나지 않았을, 불가능했을 어떤 세계가 태어나는 사건이다."
 
- 정혜윤, <하버드 사랑학 수업> 추천사 중에서.

2012년 12월 27일

2012/12/27 23:22 2012/12/27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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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기독교
이천년전 식민지 땅에서 태어난 예수.
나면서부터 제국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갈릴리라는 변두리 시골땅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
제국에 대항하는 자들과 제국에 동조하는 자들 사이에서
그 출신 성분이나 성별, 진영을 가르지 않고
제자를 삼아 새 하늘과 새 땅의 진리를 선포한 사람.
 
함께 이동 중에도 걸음을 멈추고 
질병 가운데 고통받는
 이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인간 대접 받지 못하던 아이들을 가까이 두며
모든 사람들이 아이들 같이 되야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던 순수한 사람.
누구보다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위로한 사람.
 
나는 그가 단 하나의 희망이라고 믿는 기독교인이다.
 
그를 희망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기득권이 되고
여성을 비하하고 아이들과 노인들의 복지를
 
사회적 비용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사회 개독교의 신자다.
예수의 길. 그 순수한 청년이 걸은 길을
걷지 않고 
성경을 읽되 이해조차 못한 채
말로만 고상하고 예배시간에만 헌신된 한국 교회.
이미 그리스도가 잊혀진 그리스도교의 부끄러운 신자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 역설 속에 올해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당신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회개한다고.
당신의 교회가 속한 한국이라는 나라의 시민으로 회개한다고.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당신의 도를 우리가 다시 몸으로 받게 해달라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
제국의 힘에 저항하거나 동조하던 이스라엘 시민들처럼
우리도 세상의 큰 흐름에 때로 저항하고 때로 동조한다.
역사가 때로 우리의 편인 것 같은 날도 있고
적의 편인 것 같은 날도 있다.
하지만 역사가 우리편이라고 생각했던 날들조차
어두운 곳에서는 흐느끼는 슬픔이 있었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뻐하는 나는 예수의 길을 믿는다.
현대의 많은 불가지론자들, 무신론자들 사이에서도
나는 그가 단 하나의 희망이라고 믿는 기독교인이다.
 
이천년전 제국의 압제 속에 중동땅에서 태어난 예수란 청년의 길.
그 시작을 기념하며.
우리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2012년 12월 25일
2012/12/25 21:58 2012/12/25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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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육아일기

성하는 저녁을 먹고나면 대체로
응가를 한다. 그럼 한번에 몰아서
응가 처리도 하고 바로 뒤이어
씻기고 재우면 되서 성하가 응가
마렵다고 하면 혼자말로 "잘됐다"
라고 말하곤 했다.
어제도 성하가 응가마렵다고 하면서
나를 보며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 잘됐지?"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너 땜에 웃는다. 이 귀요미 같으니...!!!
ㅠㅠㅠㅠ

 

2012년 12월 21일

2012/12/21 23:50 2012/12/2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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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가끔 진보진영 사람들이 오해하는 (혹은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마치 진보와 보수의 싸움을 20:80, 혹은 1:99로 분리해서 1%의 기득권층과의 대결이라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 말도 딱히 틀린 건 아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조사결과 1위가 박정희이고 2위가 노무현이였다. (혹 반대일수도 있다) 지금도 박근혜는 나라 국민의 절반이 그녀를 지지한다. 1%의 기득권층, 그녀의 집권으로 인해 실질적 혜택을 보는 이들 외에도 50배에 준하는 지지자가 내 주변에 절반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이해하는 그분들의 논리는 이렇다. "정치나 경제와 같은 나라의 큰 일은 해본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국가가 말리는 일을 굳이 왜 하고 사냐. 나는 평생을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착실하게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내가 스스로에 떳떳하고 나라가 부강해지면 그게 애국이요 바른 정치 아니겠냐."

 

"맨날 공부도 안하고 일도 안 하고 거리에 나가서 기물이나 부수고 경찰에 대항하고 국가나 기업을 위태롭게 만드는 게 더 위험하다. 동남아시아와 남미의 못사는 나라들을 봐라. 우리는 항상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끊임없는 수출과 교류를 통해 유지되는 나라다. 자원은 없고 인구가 많으니 한사람 한사람이 경쟁력을 쌓으려고 노력이나 할 것이지 왜 되지도 않는 국가 권력에 맞서려고 하느냐..."

 

사실 상 50%에 육박하는 보수편향적 국민들의 논리는 머리 속에서 명제나 수학, 말재주로 설득되는 류의 것이 아니다. 그 논리는 그들의 삶이자 일상이며 신념이며 철학이다. 그들에게 보수를 냉소하고 "개새끼, 씹새끼" 비난할 때 국민의 절반은 정서적으로 마치 자신의 삶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은 주로 젊은 세대보다는 나이든 세대들일 것이다.)

 

이 50%의 국민들은 기득권층이 뭔가를 베풀지 않아도 국가의 존재, 대기업의 존재, 판검사, 의사, 국회의원등 그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 그저 그 자리에 존재만 해도 자부심을 느끼는 부류다. 기득권층은 매체와 스포츠, 오락 사업에 적절한 정치적 암시만 줘도 그들은 자식들에게까지 보수적 가치관을 대물림한다. 자식이 국가에 의해 희생되거나 가족이 기업에서 해고 또는 질병을 얻거나,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극도의 빈곤과 소외를 경험하지 않는 한.

 

한때 나는 논리에 미쳐 있었다. 텍스트는 걸리면 무조건 해체시키는 게 논객의 자질? 실력이라 여기던 청년기를 보냈다. 말빨, 글빨 좋은 사람들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매순간 주어진 텍스트는 검증하고 해체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은 고된 일상을 몸뚱이로 살아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논리를 내세울 때 '분노의 대가리굴리기(논리)'로만 반응하는 것에 회의감을 갖곤 한다.

 

내 부모세대와 내 직장 선후배, 내 교회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그 50%의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래. 나는 결코 1%와의 논리 싸움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게 내 요즘의 고민이다.

 

 

2012년 12월 17일

2012/12/17 21:57 2012/12/17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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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대첩으로 시끄러웠던 오늘.


나는 부산 부모님 집에 내려가서 그간 어머니가 사용하지 못하던 컴퓨터와 TV, 휴대폰 등을 설치했다. 신혼 때 인터넷용으로 조립해드린 컴퓨터가 드디어 맛이 갔다. 집에와서 미리 배송한 컴퓨터를 설치하고 TV 설정도 고치고 휴대폰도 업데이트에 어머니가 원하시는 앱들을 깔아드렸더니 얼추 하루가 간다. 페북과 인터넷 뉴스에서는 마지막 선거 유세로 뜨거운 오늘. 어머니의 IT기기 설치기사로 하루를 보낸 게 나는 나름 흡족하다. 저녁 아내와 통화했더니 '설치기사님, 설치 다 했으면 내일 빨리 본사로 복귀하라'고 농담을 막 던졌다.ㅋㅋ 왠지 훈훈한 밤이다.


p.s) 나도 그랬지만 오늘은 아내도 광화문에 많이 가고 싶었을텐데 주말을 육아로 소진한 아내에게 감사를. (어제오늘 상당히 멘붕일텐데.ㅋㅋㅋㅋ)

 

 

2012년 12월 15일

2012/12/15 23:02 2012/12/1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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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이를테면 초기에는 일상적으로 paperless의 삶이 다소 불편했는데 (태블릿으로 보기, 찾기, 관리) 한 1년 정도 지나고 보니 충분히 그 가능성 타진에 검증이 된 터.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책들을 다 전자문서화 하고 있다. 박스단위로 나간 책들은 전자책으로 척척척 변환되고 만난 사람들의 명함도 스캔본으로 에버노트에 강의나 회의는 녹음파일로 정리되고 있다. 다소 의외인 것은 초기에 기대했던 ePub 형식의 전자책은 1년간 써보니 참 불편한 부분이 많다. 특히 라이센스 문제로 인한 보안정책이 개인의 편리성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고나 할까. 결국 종이책 값+스캔 비용을 더 주더라도 스캔북의 형태로 책을 받는 것이 더 유익해보인다. 그나저나 누가(환경론자 오어 썸원) 계산 좀 해주면 좋겠다. 아이패드를 생산하여 문서를 전자화해서 볼 때와 종이책을 생산할 때 얼마나 생태계 측면에서 환경 오염의 차이가 나는지 말이다. 혹은 아이패드 몇년을 써야 생태계를 더 망치는 선택이 되지 않는지 같은 것... 그런 게 나오면 개념소비자들은 자기 디지털기기의 교체 주기에 대한 경각심을 더 갖지 않을지.

2012년 12월 12일

2012/12/12 23:25 2012/12/12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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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컨텐츠/영화평
영화 "26년"을 보는 게 참 괴로웠다. 사실 시대적 아픔은 내 이십대가 더 민감했던 것 같다. 굴곡진 현대사를 배우며 피끓는 분노를 떨쳐버릴 수 없어 잠못 들던 기억도 새삼 떠올랐지만... 그건 마치 아내의 처음 모습을 떠올릴 때처럼 조금은 먼발치에서 보듯 아련하다.

정작 내가 괴로웠던 건 그 하나하나 가족사의 비극이었다. 예전엔 내 부모가 그렇게 죽었을 때 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지를 생각하곤 했는데 요즘은 내가 죽으면 성하가 보내야할 고통의 세월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 속이 지옥과 같다. 그것도 분노로 점철된 성장기를 성하가 감내해야 한다면... 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세상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어서 도래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생기는 저녁이다. 그것을 믿지 않는 이들도 오늘은 함께 기도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광주의 부모와 자녀들에게도 국가와 세상이 주지 못한 평화가 임하길 기도한다.

2012년 12월 3일
2012/12/03 21:56 2012/12/03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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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불과 몇년 전까지 나는 절대적으로 독서량이 나보다 많은 사람들에 대한 자격지심 내지는 열등감 같은 게 있었다. 게다가 교수나 신학자 등등 좀더 학구적인 어떤 직함을 달고 있으면 더더욱 그런 열등감이 가중되곤 했다. 내 기억으로 2008년 정도까지 나는 내 열등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른바 '비전문가'의 설움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은 마치 검의 양날 같아서 내 지식이 비교우위에 속하면 뭔가 상대를 대할 때 여유(이를테면 하수를 대할 때의 어떤 느슨함 같은)가 생기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대체로 내가 부러움을 느꼈던 사람들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학파의 사람들이었다. 어찌나 독서량이 넓고 깊은지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귀를 쫑끗 세우고 그들의 독서편력을, 그 저자와 그 유명한 책 리스트를 어서 섭렵해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던 시절도 있었다. 허나 2004년에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런 욕망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도저히 회사생활을 하면서 공부가 업인 사람들을 쫓아갈 수 없었고 나는 어느 순간 그들과 보조를 맞추려던 노력을 접고 먼발치에서 그들의 지식 달음질을 쳐다봐야만 했다.

7-8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 돌아보면 나는 가끔 내가 왜 그렇게 지식 습득에 연연했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쩌면 그것은 방대한 독서가 세상을 바꾸기는 커녕 한사람 조차 바꾸지 못하더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례로 10년 전에도 특정 저자와 책들을 신봉하던 부류의 사람들은 지금도 비슷한 이야기를 인용하곤 한다. 더 나은 번역과 더 명확한 저자의 이해, 더 넓고 깊어진 지식으로 무장했지만 그 페이스를 벗어난 내 입장에서 그들의 진보는 때론 '고상한 기호', 좀더 나쁘게 말해서 '머리쓰는 취미생활'같아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나는 일정 수준의 독서를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다. 사실상 책을 통해 얻는 것들이 많다. 책을 대하는 내 태도는 그간 자주 양가감정을 수반하곤 했다. 최근에야 책을 대하는 내 태도가 조금은 편안하고도 확고해졌다. 독서는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삶의 가치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독서에 바친다. 자신의 입이 특정 저자의 입이 되고 그 저자의 논리를 십분 이해하는 것에 전율한다. 아쉽게도 나는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이해라 해도 일종의 삶의 낭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로고스의 육화가 아니라 육체의 로고스화. 의외로 육체의 로고스화를 실천하는 이들이 많다.

20대에 나는 스폰지가 잉크를 빨아들이듯 (파형으로서의 교육에 앞서) 주형, 주입 그 자체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비평에 앞서 그 담론 자체에 깊이 침잠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 말이다. 섣부른 반항심으로 정작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헛발질을 하는 것을 경계하고 싶었다. 허나 30대를 지나 40대를 향해 달려가는 시기에도 10, 20대의 뇌처럼 저자의 로고스화를 꿈꾼다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로고스가 자신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할 거라 생각했던 게 아니던가. 삶에서 더 진일보한 걸음을 걷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며 정리된 생각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니던가. 시간이 흘러도 변하는 게 없어서일까... 그 진정성이 훼손되고 있다.

결국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이 그 사람의 어떤 진정성을 대변한다고 볼 때 '독서'라는 행위로 대변되는 지식의 분량은 이제 내겐 그다지 '이슈'가 되지 못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저명한 저자의 컬렉션을 모으고 그것을 독해하는 기호와 애로영화들을 수집하고 여배우들의 특징을 기똥차게 표현하는 두 부류 사람들의 차이를 나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텍스트 안에서만 놀 거라면 둘 다 내가 보기엔 '덕후'일 뿐이다.

2012년 12월 3일
2012/12/03 21:56 2012/12/03 2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