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추천사를 읽다가 이렇게 뭉클하긴 처음이다...
"연애지침서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공략 대상으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 방법을 설파하느라 여념이 없다. 성공적인 연애를 위해 구사할 전략들을 나열하고,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흉내내기,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모방, 사랑을 가장한 목표 달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리 루티 교수가 말하듯이 사랑은 요령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수많은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의 어린 날의 경험들, 노동 조건, 삶의 조건, 살아보고 싶은 삶의 모습, 욕망과 소망, 그리고 또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디테일들, 웃는 모습, 찡그리는 모습, 손의 느낌, 걷는 모습, 잠든 모습.
이 시대에, 이 고독하고 우울한 시대에 우리가 사랑하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와는 마음을 나누고, 의미있는 관계를 맺고 , 그에게 만큼은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신비롭다고 할 만한 최초의 매혹에 끌리는 경험. 자신을 사랑하듯 남을 사랑해보는 경험. 너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 말하고 그것을 간절히 꿈꿔보는 경험. 상실과 결핍, 방황 끝에 충만함을 맛보는 경험. 한 사람을 통해 세계를 맛보는 경험. 한 사람을 사랑한 덕에 세계가 달라지는 경험. 온전히 이해받아 보는 경험. 자신을 벗어나보는 경험. 다른 사람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보는 경험.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경험...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이런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들여다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우리에겐 무엇이 빠져 있는가. 사랑은 우리 삶에 일어난 시끌벅적한 사건이다. 조금은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사건이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생겨나지 않았을, 불가능했을 어떤 세계가 태어나는 사건이다."
- 정혜윤, <하버드 사랑학 수업> 추천사 중에서.
2012년 12월 27일
가끔 진보진영 사람들이 오해하는 (혹은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마치 진보와 보수의 싸움을 20:80, 혹은 1:99로 분리해서 1%의 기득권층과의 대결이라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 말도 딱히 틀린 건 아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조사결과 1위가 박정희이고 2위가 노무현이였다. (혹 반대일수도 있다) 지금도 박근혜는 나라 국민의 절반이 그녀를 지지한다. 1%의 기득권층, 그녀의 집권으로 인해 실질적 혜택을 보는 이들 외에도 50배에 준하는 지지자가 내 주변에 절반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이해하는 그분들의 논리는 이렇다. "정치나 경제와 같은 나라의 큰 일은 해본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국가가 말리는 일을 굳이 왜 하고 사냐. 나는 평생을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착실하게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내가 스스로에 떳떳하고 나라가 부강해지면 그게 애국이요 바른 정치 아니겠냐."
"맨날 공부도 안하고 일도 안 하고 거리에 나가서 기물이나 부수고 경찰에 대항하고 국가나 기업을 위태롭게 만드는 게 더 위험하다. 동남아시아와 남미의 못사는 나라들을 봐라. 우리는 항상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끊임없는 수출과 교류를 통해 유지되는 나라다. 자원은 없고 인구가 많으니 한사람 한사람이 경쟁력을 쌓으려고 노력이나 할 것이지 왜 되지도 않는 국가 권력에 맞서려고 하느냐..."
사실 상 50%에 육박하는 보수편향적 국민들의 논리는 머리 속에서 명제나 수학, 말재주로 설득되는 류의 것이 아니다. 그 논리는 그들의 삶이자 일상이며 신념이며 철학이다. 그들에게 보수를 냉소하고 "개새끼, 씹새끼" 비난할 때 국민의 절반은 정서적으로 마치 자신의 삶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은 주로 젊은 세대보다는 나이든 세대들일 것이다.)
이 50%의 국민들은 기득권층이 뭔가를 베풀지 않아도 국가의 존재, 대기업의 존재, 판검사, 의사, 국회의원등 그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 그저 그 자리에 존재만 해도 자부심을 느끼는 부류다. 기득권층은 매체와 스포츠, 오락 사업에 적절한 정치적 암시만 줘도 그들은 자식들에게까지 보수적 가치관을 대물림한다. 자식이 국가에 의해 희생되거나 가족이 기업에서 해고 또는 질병을 얻거나,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극도의 빈곤과 소외를 경험하지 않는 한.
한때 나는 논리에 미쳐 있었다. 텍스트는 걸리면 무조건 해체시키는 게 논객의 자질? 실력이라 여기던 청년기를 보냈다. 말빨, 글빨 좋은 사람들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매순간 주어진 텍스트는 검증하고 해체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은 고된 일상을 몸뚱이로 살아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논리를 내세울 때 '분노의 대가리굴리기(논리)'로만 반응하는 것에 회의감을 갖곤 한다.
내 부모세대와 내 직장 선후배, 내 교회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그 50%의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래. 나는 결코 1%와의 논리 싸움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게 내 요즘의 고민이다.
2012년 12월 17일
광화문대첩으로 시끄러웠던 오늘.
나는 부산 부모님 집에 내려가서 그간 어머니가 사용하지 못하던 컴퓨터와 TV, 휴대폰 등을 설치했다. 신혼 때 인터넷용으로 조립해드린 컴퓨터가 드디어 맛이 갔다. 집에와서 미리 배송한 컴퓨터를 설치하고 TV 설정도 고치고 휴대폰도 업데이트에 어머니가 원하시는 앱들을 깔아드렸더니 얼추 하루가 간다. 페북과 인터넷 뉴스에서는 마지막 선거 유세로 뜨거운 오늘. 어머니의 IT기기 설치기사로 하루를 보낸 게 나는 나름 흡족하다. 저녁 아내와 통화했더니 '설치기사님, 설치 다 했으면 내일 빨리 본사로 복귀하라'고 농담을 막 던졌다.ㅋㅋ 왠지 훈훈한 밤이다.
p.s) 나도 그랬지만 오늘은 아내도 광화문에 많이 가고 싶었을텐데 주말을 육아로 소진한 아내에게 감사를. (어제오늘 상당히 멘붕일텐데.ㅋㅋㅋㅋ)
2012년 12월 15일
이를테면 초기에는 일상적으로 paperless의 삶이 다소 불편했는데 (태블릿으로 보기, 찾기, 관리) 한 1년 정도 지나고 보니 충분히 그 가능성 타진에 검증이 된 터.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책들을 다 전자문서화 하고 있다. 박스단위로 나간 책들은 전자책으로 척척척 변환되고 만난 사람들의 명함도 스캔본으로 에버노트에 강의나 회의는 녹음파일로 정리되고 있다. 다소 의외인 것은 초기에 기대했던 ePub 형식의 전자책은 1년간 써보니 참 불편한 부분이 많다. 특히 라이센스 문제로 인한 보안정책이 개인의 편리성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고나 할까. 결국 종이책 값+스캔 비용을 더 주더라도 스캔북의 형태로 책을 받는 것이 더 유익해보인다. 그나저나 누가(환경론자 오어 썸원) 계산 좀 해주면 좋겠다. 아이패드를 생산하여 문서를 전자화해서 볼 때와 종이책을 생산할 때 얼마나 생태계 측면에서 환경 오염의 차이가 나는지 말이다. 혹은 아이패드 몇년을 써야 생태계를 더 망치는 선택이 되지 않는지 같은 것... 그런 게 나오면 개념소비자들은 자기 디지털기기의 교체 주기에 대한 경각심을 더 갖지 않을지.
2012년 1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