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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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가장 절실한 건 늦잠이다. 하지만 성하가 날 가만놔두지 않는다. 애들의 심장이나 뇌에 알람시계가 들어가 있는지 7시반이면 어김없이 척척 일어나서 나를 깨운다. "성하야 아직 아침이 아니야. 좀더 자자"라고 구라를 쳐보지만 방안 어두운 커텐의 틈새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아빠 거짓말 하지마. 밖은 밝거든!!!"

대학생 때부터 직장 초반까지 나는 크고 작은 교계 이슈에 참여했다. 특히 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 문제로 몇몇 지방교회와 광림교회, 소망교회, CCC 선교단체의 시위도 나가고 게시판에서 논쟁도 많이 했다. 처음엔 학생들만 집에서 만든 피켓을 들고 나갔다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기윤실이 합류했고 그것을 가지고도 왈가왈부하다가 기윤실에서 교회개혁실천연대가 떨어져나왔다.

다시 지난 날의 잘잘못을 가리려는 것도, 나도 한때 나가서 피켓도 들었노라 생색을 내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니다. 내 '명함'으로는 썩소를 날릴 법한 더 훌륭한 분들이 주변에 넘쳐난다. 정작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이거다. 세습반대 이슈는 크게 번졌고 우리도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내가 참여했던 모든 단체의 세습이 이루어졌다. 내 생각에 사랑의교회도 정상적으로 새로운 교회당을 지을 것 같다.

레미제라블을 보며 가장 나를 자극했던 인물은 자베르다. 그도 낮은 신분 출신이며 나름 신앙심 돋는 인물이다. (내 입장에서는) 황당하게도 신의 이름으로 혁명 세력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어한다. 결국 혁명을 꿈꾸던 청년 시위대는 모두 죽는다. 시민들은 잠시 그들의 선동에 마음이 동하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 집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 혁명이 일상과 만나면 동력을 잃는다.

아마도 자베르는 수많은 혁명 세력을 경험하고 그들의 논리나 그들의 비참한 삶의 실체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베르는 한번도 그들의 진영논리에 동화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직업이 신이 주신 소명인 것처럼 움직였다. 아우슈비치에서 유대인을 불태운 교도관들, 이라크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미군병,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이스라엘 군인들, 세습이나 건축을 추진하는 교회들의 교역자들.

세상에서 거대화된 조직, 위계질서가 갖춰져 있는, 마치 컨베이어벨트 위를 흘러가는 부품들처럼 자동으로 흘러가는 프로세스를 갖는 많은 거대 구조는 쉽게 '악'으로 향한다. 그것이 '악'한 이유는 언제나 소수약자를 무시하는 방향의 효율성을 내부적 가치로 삼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소수이자 약자를 편드는 이들의 목소리는 이미 효율적으로 잘 굴러가는 구조 속에 묻히기 쉽다. '구조'는 언제나 '개별 양심'을 이긴다. 내 짧은 경험이 그렇다.

레미제라블이 고전이 된 건 은혜를 배신하고 도둑질한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쥐어주는 한 신부의 마음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만들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떤 자기합리화나 홍보, 미사여구 등을 붙이지 않아도 타인의 마음을 녹인다. 신부의 사랑이 장발장에게, 장발장의 사랑이 자베르에게 전달되고 자베르는 자기 가치관의 흔들림을 참지 못하고 자살한다.

내가 관심있게 본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혁명의 실존적 주체는 신부요, 장발장의 값없는 용서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바꾸어 말한다면 그만큼 진영의 논리, 혁명의 저항으로는 악한 구조를 넘어서기가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대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가 체 게바라같은 급진적인 정서를 갖지 못한 한계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인간적으로 신부의 용서는 보편 인간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장발장은 감옥으로 돌아가고 자베르는 혁명을 꿈꾸는 청년들 손에 피값을 치루어야 한다. 그게 정의이고 개혁이고 법치이다. 그것을 거스르는 레미제라블은 불편한 정서 속에 사람의 마음을 들쑤셔놓는다. (물론 소설의 배경에는 가난, 사회계급, 로맨스 등의 문제가 얽혀있지만) 눈을 크게 뜨고 굵은 라인으로 바라보는 이 소설의 키워드는 '불편할 정도로 값없는 용서'다. 끈질기게 나를 쫓던 적군마저도 돌이키게 만드는.

가끔 성하에게 구라를 치면서도 나는 커텐의 작은 틈을 비집고 새어나온 햇빛을 감지한다. 어둠을 몰아내고자 애쓰지 않아도 조그만 구멍으로 빛이 틈을 내면 어둠은 반전된다. 나는 일어나야 하고 아침밥을 준비하고 성하와 재밌는 아침시간을 보내야한다. 내가 아침이 아니라고 우겨도 소용이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인생에도 참 많은 자베르들이 있었다. 그들을 두둔하거나 그들이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나에게 적이었던, 나를 괴롭혔던 개인이나 큰 구조속의 무리들에게 나는 신부나 장발장 같은 존재였던가. 자베르가 자베르인 건 내가 그리스도의 빛이 아니기 때문은 아니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4-15)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요일2:8-11)
2013/01/29 22:13 2013/01/29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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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7 장발장, 혹은 레미제라블이라고도 하는 서바나 영상을 본 페친들이 무리에게 이르되 너희가 대선 이후에 이것을 보면 다 울리라 이는 기록된 바 너희 마음이 다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라

28 그러나 영상을 다본 후에도 멘붕이 쇠하지는 않으리라

29 제이언니가 대답하되 나는 마음이 돌같은 자라 절대 울지 아니하리이다

30 페친 중 하나가 이르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영화관이 밝아지기 전에 네가 세번 울리라

31 제이언니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성전환 수술을 할지언정 절대 울지 않겠나이다 하고 주위의 몇몇 마초 페친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14:66 주위가 어두워지고 제이언니는 썩소를 날리며 서바나 영상을 주시하는데

67 삼십분이 채 되기 전에 흐느낀지라

68 정신을 가다듬고 혼자말로 이르되 내가 왜 우는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69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울더라

70 스스로를 질책하며 심히 괴로워하며 다시 이르기를 내가 미쳤구나 이제 다시는 울지 않으리라 하였으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물이 목젖을 타고 내려감을 깨닫더라

71 화면이 어두워져 아무 것도 안보이고 때로 길거리를 보여주는 영상에서조차 울되 이미 정줄을 놓은 후였더라

72 정신을 차리니 주변이 밝아지고 페친들이 자기에게 한 말 곧 네가 세번 울리라 함이 기억나서 그 일을 생각하고 또 울었더라

 

(레미제라복음 14장)

 

2013/01/29 22:12 2013/01/29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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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들, 특히 나를 포함한 내 주위 개신교 남성들은 감정표현 없는 글쓰기의 달인들이다.

어찌나 이치에 맞는 말들만 쓰시는지...(나도 스스로는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쓰는 편이지만.-_-;;;)

솔직히 진리, 교리로 대변되는 몇 개의 키워드들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문장을 생성해서

한편의 단문으로 만들어주는 교계용 어플이 있나 싶을 정도다.

혹은 빅브라더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데 특히 남성은 글로 감정표현을 하는지 여부를

매순간 감시하고 행여 감탄사라도 보이기만 해도 잡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나라 남성의 SNS 글쓰기 스타일도 어떤 면에서는 참. 연구대상이다.^^

2013/01/29 22:11 2013/01/29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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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 티베트 속담

애정하는 페친(이진오 목사님)님의 담벼락에 올라온 이 티베트 속담이라는 말을 아침부터 묵상 중이다. 쉽게 말해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 없으니 너무 걱정말라는 말이다. 나름 위로가 된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걱정은 '하는' 행위가 아니다. 걱정은 증상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내가 적극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걱정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스치듯 본 간판이나 무심결에 받은 전화, 부모의 말 한마디, 회사에서 전달된 공지, 친구의 행동... 이런 것이 내 머리 속을 복잡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현상, 증상이다.

이러한 걱정은, 심리학이 줄곳 떠들어대서 이제는 희화화되는 우리의 과거와 연관되어 있다. 부모와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고 자라면 서 주위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이들은 외부 자극에 대해 취약하지 않다. 반대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서 항시 내가 주도적으로 내 정서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다짐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쉽게 말해 후천적으로 환경에 잘 훈련된 사람들도 스트레스를 비교적 잘 이겨낸다.

이 두 극단을 제외하고나면 대체로 과거에 어떤 스트레스에 취약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일반인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타인보다 걱정을 많이 하게되는 영역이 있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은 뭘 그리 걱정하냐고 걱정도 팔자라고, 과민반응하는 나를 대수롭지 않게 대하지만 유독 나는 그 걱정에서 벗어나지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내면이 무너지는 날이 온다. 반대로 티베트의 속담에 기대어 걱정을 내 주도적 행위로 인식하고 걱정을 차단하려고 들면 상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 생활이 가능해진다. 매순간 자기 체면을 건다. 속은 썩어들어가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식은 땀이 나는 날도 있지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걱정이 생겼을 때 그 걱정거리에 침잠하는 것은 당연히 정신적으로 좋지 않다. 걱정거리에 돌직구를 날려 걱정하는 것은 늪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외부 자극에 평소와 달리 불안하고 걱정이 되는 경우에 내가 그것에 유달리 취약하게 느끼는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 따라서, 내 생각에 걱정을 해결하는 바른 방법은 그 이슈에 내가 평소같지 않은 '그 원인'에 돌직구를 날리는 것이다.

질병은 취약해진 몸상태로 인해 생기는 것이지 질병에 유독 집중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리적인 해결은 척척인 사람들이 마음은 미봉책을 자주 쓰려고 한다. 따라서 내 입장에서 티베트 속담은 당의정과 같다. 달콤한 힐링 속에 쓰디쓴 고통만 반복될 여지를 남긴다. 내 생각은 그렇다.
2013/01/29 22:09 2013/01/2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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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단문모음/단상
머리속 어딘가로 치워둔 일들은 해결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나를 괴롭힌다. 괴롭힌다는 말이 적절하지 않은 건 내가 의식적으로 그 일들을 꺼내지 않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롭힌다는 표현을 쓰는 건 무의식 중에, 길을 가다가 불쑥, 혹은 몇년 만에 관련된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늪에 빠진 듯 허우적대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이틀동안 좀 그랬다. 나는 자주 무의식과 대면하길 기대하는데 이번엔 몇년간 묵혀둔 감정들을 처리하느라 하루가 좀 침울했다. 어떤 면에서 늪에 빠진 듯이 가라앉는 이 감정은 타인의 죽음과 연관된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런 정서 속에 방황하는 내 입장에서 언제나 글쓰기는 내게 치유다. 예전엔 내 글쓰기가 누군가를 계몽한다고 믿었다. 고로 모든 사람이 공감할만한 좋은 글을 쓰려는 것이 내 삶의 한 축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계몽된다기 보다는 자기 생각의 강화를 위해 멘토를 찾고 기사와 책을 읽는다. 이미 어떤 seed 같은 게 그 사람에게 이미 뿌려진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다. 다만 지금의 글쓰기는 내 정서와 내 이성과의 교감이며 매순간 나도 모르게 나를 흔드는이 이상한 정서들을 말과 글로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 크다. 그런 의미에서 머리속 어딘가로 치워둔 많은 것들은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면의 정직한 글쓰기가 요구된다.

이틀동안 속앓이를 하다가 속된 말로 멘붕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 나는 참 유쾌한 사람인데, 개그감을 회복하기는 쉽지가 않다. 물론 개그감이 원래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과는 끝장토론을 할 준비까지는 되었다.
2013/01/29 22:09 2013/01/2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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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많은 연애드라마를 보고 적지도 많지도 않은 연애를 해보았지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상대가 열심히 말을 하는데

갑자기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진다거나 뽀샵처리가 된 영상이

소리없이 흘러가는 느낌 같은 걸 경험한 적은 없었다.

 

오늘. 성하를 재우느라 누워있는데 그가 쉴새없이 내게 이야기를 했다.

찰진 두 볼살과 긴 속눈썹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정겨운 톤으로

쫑알쫑알 조그만 입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순간 입모양만 보이고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갑자기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라

나는 막 하하하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젠장, 또 우는거냐)

 

"아빠 내 말 듣고 있어?"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웃었다.

난, 이 아이 참 사랑하는 거 같아.ㅠㅠ

 

2013/01/29 00:05 2013/01/2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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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0일, 그간 사랑의교회 예배당 건축의 문제점을 지적해 온 '사랑의교회 건축, 어떻게 된 것인가?' 카페에는 옥한흠 목사의 아들인 옥성호 본부장이 사랑의교회 목사와 장로들에게 보냈다는 메일이 공개되었고 23일에 <뉴스앤조이>는 이와 관련해서 '아들의 격노, "아버지 옥한흠 목사를 이용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그 메일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 기사를 내보냈다. 관련 기사와 메일 전문을 읽어 보면 고 옥한흠 목사가 사랑의교회 건축을 지지했다는 교회 측 설명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구구절절 설명하였고 교회 목사와 장로들에게는 사진과 동영상이 함께 전달된 것으로 전해졌다. 만일 이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사랑의교회 측은 이와 관련해서 어느 정도 해명이 필요하게 될 것 같다.
 
이 문제는 즉각 인터넷 사이트에서 회자되었고 지금까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도 의견이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메일의 내용은 이렇다. 옥한흠 목사가 원하고 찬성해서 건축을 추진했다는 교회 측 주장과는 달리 옥한흠 목사는 교회 신축과 함께 잃어 가는 사랑의교회의 명예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했다는 것이다. 또한 2009년 예배 시간에 상영된, 교회 건축을 독려했던 옥한흠 목사의 동영상은 사실 옥 목사가 오정현 목사의 거듭된 부탁에도 거절하다가 교회가 둘로 쪼개질 수 있다는 오 목사의 말에 괴로워하며 힘들게 찍었던 것이며 그 영상조차도 옥 목사의 우려의 목소리가 삭제된 채 방영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옥성호 본부장의 입장은, 교회에 실망한 교인들이 떠나가고 공공 도로 점유로 사회가 교회를 비판하며 사역 헌금들이 공사 대금으로 들어가는 것도 모자라 상상을 초월하는 은행 대출금의 이자를 내는 현 상황에서 건축은 중단되어야 하며 옥한흠 목사는 결코 '이런' 건축을 찬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옥한흠 목사는 생전에 인터뷰나 설교 등을 통해 자신이 강남에서 시작한 사랑의교회가 규모의 교회, 맘몬의 교회가 될까 봐 매순간 노심초사했다. 교회의 세속화를 늘 염려하며 행여 교회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 그것이 자신의 죄라며 괴로워했다. 교회 건축에 원론적으로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은퇴 후 자신의 후임인 오정현 목사가 건축을 결정했을 때에도 그 결정이 사실상 자신이 교회를 너무 키웠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여겨 그것마저 회개의 제목으로 삼았다. 옥성호 본부장도 자신의 책에서 옥한흠 목사가 생전에 교회의 규모에 대해 우려했고 교인 수가 많아지는 현상을 반기지 않았음을 언급했다.
 
"은퇴 후 저(옥한흠)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너무 키워 버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는 너무 비대해져 버리면 그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목회가 교회론과 제자훈련이 엇박자를 이룬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것은, 양이 많아져 버리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확률이 그만큼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제가 은퇴할 때 사랑의교회가 주일 출석 장년 교인 수 2만 3000명, 전체 등록 교인 수 5만 명, 벌써 너무 커져 버렸습니다. 지금 사랑의교회는 어찌 보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제자훈련의 선두주자로서 교회론으로 볼 때, 그 정신을 잃어버릴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또, 교회론의 본질에서도 위선자적인 입장에 빠질 수 있어 고민이 됩니다(옥성호, <아버지, 옥한흠> 143쪽 인용)."
 
이에 반해 오정현 목사는 교회 내의 늘어나는 교인들을 가지고 끙끙거려 온 옥 목사와는 달리 예배당 건축이라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행보는 사랑의교회의 또 다른 욕망이다. 사실 오정현 목사는 그간 사랑의교회에서 억압되어 온 교인들의 '이드(id)'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도 교회 내 성도들의 절반 이상이 오정현 목사를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해석한다면 사랑의교회 성도들은 그간 '초자아(superego)' 역할을 감당한 옥한흠 목사 아래서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왔던 건 아닐까. 내가 전해 듣기로 몇몇 성도들이 '우리 교회는 능력(돈)도 있는데 건물도 높게 올리고 구질구질한 공간들을 대기업 교육장처럼 깔끔하게 단장하면 안 되겠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교회 신축 문제 이전부터 이런 조짐은 있었다. 새벽 기도의 기복성을 경계한 옥한흠 목사와는 달리 오정현 목사는 부임 직후부터 '특새(특별 새벽기도회)'를 무슨 대형 집회처럼 열었고 그곳에 온 사람들의 복을 빌어 줬다. 지방에서도 사랑의교회 '특새'에 참석해서 자신의 작은 교회에서는 받지 못했던 하나님의 복을 받아보겠다며 심야 버스를 타고 올라오던 까닭에 한동안 예배당은 타 교회 성도들로 넘쳐났다. 아마 그때부터 사랑의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자교회의 엄청난 스케일에 스스로도 놀라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이러한 총동원 형태의 집회 스타일에 익숙해지면서 사랑의교회 성도들은 이전에는 억눌러 왔던 메가처치의 '규모적' 감동을 영적인 코드로 욕망하게 된 것은 아닐까.
 
옥성호 집사가 보낸 메일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아버지의 명예'는, 내가 해석하기로는 일개 가족주의적 아버지의 명예의 회복, 혹은 옹호가 아니다. 그것은 옥한흠 목사가 끝까지 분투하고 지키려 했던 규모의 신, 맘몬 신을 하나님과 함께 섬기고 있는 '강남' 지역 교인들의 '제자도'였다. 어떤 의미에서 오정현 목사는 그간 옥한흠 목사가 힘들게 지켜 내고자 했던 사랑의교회의 금욕적 제자도를 '영 단번'에 풀어 줬다. 건축 결정에 우려감을 표한 교인들도 있었겠지만, 내심 눌려왔던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분출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 이들도 많았으리라.
 
옥한흠 목사는 암이라는 지병을 얻어 가면서까지 교회의 세속화·맘몬화를 막으려고 노력했고, 다행히도 강남에 있는 교회 중에 '복음주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랑의교회를 만들어 냈다. 이를 두고 청어람 양희송 대표는 사랑의교회가 강남의 핵심부에 자리 잡고 있지만 소망교회, 광림교회 등과 비교해 볼 때 쉽게 동일시되지 않는 "강남에 있지만 강남에 속하지 않는" 어떤 독특한 지점이 있었다고 말한다(양희송 대표도 2009년에 쓴 자신의 글에서 사랑의교회 신축에 대해 우려감을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사랑의교회는, 스스로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건 간에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복음주의 진영의 어떤 본이 되었고 실제로 교회의 금전 규모로 봐도 여러 기독교 핵심 사업의 중심에 설 만한 위치였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옥한흠 목사 체제가 끝나고 오정현 목사 체제가 되면서 한국 복음주의의 중요한 축이 급속도로 무너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기우일까.
 
사실 지역 교회로서, 강남지역 메가처치 교회로서의 사랑의교회에 나는 관심이 없다. 교회 건축을 결정했던 몇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 교회는 강남에 넘쳐난다. 그런 교회들을 다 문제 삼자면 끝도 없다. 문제는 옥한흠 목사로 인해 형성된 한국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의 사랑의교회의 위치와 그 대표성을 넘겨받은 오정현 목사가 복음주의의 소중한 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 퇴행의 방향으로 치닫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단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복음주의권의 많은 중간 지도자급 사역자들이 이런 상황들을 그냥 지켜보거나 감내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 안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어진 '구조'는 일단 덮어 놓고 긍정하는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수혜자들이라 그런 것인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떠도는 풍문이 아닌, 문제의 메일 내용과 기사들을 다 읽고 나서도 옥성호-오정현 간의 세력 다툼 격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몇몇 기독교인들의 지적 수준이 의심스럽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아닌 것마저 포용하려는 그 관대한 종교성을 따라갈 수가 없다. 어쭙잖은 지식으로 포스트모던 담론 놀이나 영적인 언어, 현학적 분석으로 사태를 흐리지 말고 그냥 큰 예배당이 좋다고 말하자. 차라리 한국교회도 좀 잘 먹고 잘살고, 어디 가도 안 구질구질하고 세련되게 이른바 중산층의 종교답게 규모도 좀 갖추어지길 은근히 바랐다고 말하자. 제발 이제라도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그렇게 고백해 달라.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생각이 이제는 좀 바뀌었다. 솔직히 나는 '제자훈련'으로 대변되는 옥한흠 목사의 신학적, 목회적 한계를 논할 정도로 한국 복음주의가 고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보는 책들은 웬만한 사람들은 한 번에 이해조차 못할 정도로 현학적이고 고답적인 수준이지만 교회 안에서 영적 지도자들의 잘못된 사역 방향을 보며 그 현상을 학문적, 신학적으로 연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솔직히 한동안 그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가 그 짓거리만 20년 동안 하는 걸 지켜봤다. 시간은 많은 걸 다시 보게끔 만든다. 남편의 감언이설로 결혼을 승낙한 아내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남편의 일상을 통해 그 말의 진정성을 돌아보는 것과 같다. 한국 복음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그 고상함 안에 진정성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순복음교회나 미국의 수정교회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우리 얘기다. 그리고 이게 자유주의 신학이니 알미니안이니 가톨릭이니 죄다 비판하며 내가 그토록 지켜내고자 했던 복음주의의 '진정성'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앞으로도 우리는 제2의 오정현 목사가 나타나면 또다시 묵묵히 일상을 살아내며 책상머리에서 그 신학적, 학문적 의미를 연구할 것이다. 한국의 복음주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오정현 목사님과 사랑의교회, 그리고 관련된 많은 교계의 동역자분들은 지금이라도 옥한흠 목사의 교회론으로 돌이키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로 지금의 방향은 내가 애정을 갖고 뿌리를 계승하고 싶었던 '그' 복음주의가 아니다. 오정현 목사가 대표성을 갖는 사랑의교회와 그 축을 중심으로 뻗어 있는 한국 개신교가 여전히 복음주의라면. 이제부터 나는 더 이상 복음주의자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내 신앙고백이다.
 
2013/01/24 21:10 2013/01/2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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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말한 대로 완전한 깨달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 내가 존경하고 미국의 역사가 자랑하는 조나단 에드워즈도 내가 보기에는 목회자로서는 한쪽이 비어 있었다고 본다. 현실에서 생존의 싸움을 하고 있는 성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의 잣대를 가지고 나무라고 정죄하는 데 열을 올리는 목회자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빠의 소신이다. 나는 로버트 슐러의 목회 철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세미나에 참석해서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목회 균형을 잡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릭 워렌이나 빌 하이벨스를 나는 존경한다. 내가 꿈도 꾸지 못하던 사역을 할 뿐 아니라, 오늘의 문화에 젖어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획기적인 프론티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목사가 청바지를 입고 설교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그들의 용기를 높이 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책을 보아 그 배경에 로버트 슐러가 숨어있다고 나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다. 놀라울 정도로 로버트의 좋은 점들을 목회의 밑거름이 되게 만드는 재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립 얀시도 마찬가지다. 내가 부탁하는 것은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52쪽)

 

아버지는 가톨릭에 대해 일반적인 개신교 목회자와는 달리 매우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테레사 수녀처럼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큰 교회에 '어느 정도' 화목한 가정까지 남들 보기에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죄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90쪽)

 

2007년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평양 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맡은 아버지는 그날 수술후 당신의 몸 속에 남아 있는 한 개의 폐마저 터져나갈 듯이 '주여 살려 주시옵소소!'라는 메시지를 간절하게 외쳤습니다. 그 설교는 가장 큰 죄인인 나부터 용서해달라는 외침이었습니다. 교인들을 잘못 가르친 목사, 나부터 살려 달라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오로지 비주류의 목사만이 할 수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이 옥한흠 목사가 죄를 지었나이다.
주여! 죄를 회개하오니 살려주시옵소서!
한국 교회가 타락한 것이 이 목사에게 있습니다.
아버지시여!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옥한흠 목사가 죄를 지었나이다.

주여! 죄를 회개하오니 살려 주시옵소서!
한국교회가 타락한 것이 이 목사에게 있습니다.
아버지시여!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
한국교회가 세계 제일의 교회가 되고 새벽예배가 많은 것은
목숨을 아까지 않고 충성하는 목자와 평신도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입으로만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면서
주여주여 설교하는 목회자들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모두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입니다.
거짓 목회자들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주여 살려주시옵소서!

 

- 2007년도 한국 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회 설교 중에서

 

 

그 날 집회 후 아버지의 설교를 향해 일부 사람들의 노골적인 불평이 이곳 저곳에서 들려왔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죄인인 나를 용서해 달라는 아버지의 메시지는 기독교 주류의 메시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주류의 쓴 소리는 언제 어디서나 주류를 불쾌하게 만드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115쪽)

 

그로부터 무려 이십 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느끼던 아버지의 그 당혹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라지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의 목회 전반에 대한 깊은 고민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 고민의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바로 아버지가 지향하고 붙잡은 자신의 교회론과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오는 교회의 현실이 서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로서 교회는 커졌고 사람들은 많아졌을지 몰라도 자신이 믿고 붙잡고 가던 ‘교회론’에 걸맞은 결과를 교회 속에서 이루지 못했다는 자책감 말입니다. (137-8쪽)

 

“은퇴 후 저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너무 키워버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는 너무 비대해져 버리면 그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목회가 교회론과 제자훈련이 엇박자를 이룬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것은, 양이 많아져 버리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확률이 그만큼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제가 은퇴할 때 사랑의 교회가 주일 출석 장년 교인수 이만 삼천 명, 전체 등록 교인수 오만 명, 벌써 너무 커져 버렸습니다. 지금 사랑의교회는 어찌보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제자훈련의 선두주자로서 교회론으로 볼 때, 그 정신을 잃어버릴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또, 교회론의 본질에서도 위선자적인 입장에 빠질 수 있어 고민이 됩니다.” (143쪽)

 

아버지가 목회를 하시며 내내 교회가 커지는 고민 속에서 하나의 돌파구로 붙잡은 길은 목숨을 건 설교 준비였습니다. 아버지에게 나날이 늘어나는 성도가 주는 내적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길, 그나마 많은 성도들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설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45쪽)

 

“흔히들 나를 보고 매주마다 수만 명의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느냐고 하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설교가 나에게 보람은 안겨주었을지 모르지만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설교의 부담감 때문이었다. 설교에 실망하고 돌아가는 숨은 군중들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강대상에 서고 싶지 않을 때가 없지 않았다." (146쪽)

 

아버지는 어쩌면 단 한번도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제대로 전달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은퇴할 당시 어느 방송에서 고백했듯이 자신의 부족한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의 설교를 통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데 대하여 성도들에게 미안해하고 하나님 앞에 송구해 했습니다. (148쪽)

 

아버지는 목사로서도 또 인간으로서도 고독했습니다. 무엇보다 설교자라는 점을 숙명적으로 지고 사는 사람으로서 은혜에 대한 갈급함은 그를 필연적으로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고독은 아버지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였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알지 못해 그 큰 은혜를 사람에게서 제대로 선포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사람들과 어울려 놀 여유를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무겁고 크며 거룩한 존재일수록 설교는 그에게 엄중하며 생명을 다루는 문제였습니다. 항상 자신은 능력이 뛰어나지 않다고 말하던 아버지는 하나님과 단 둘이 대면하는 인간적 고독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채찍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지키기 위해 찾은 답이 어떤 의미로 아버지에게는 ‘고독’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이런 목회자의 고독을 ‘날마다 죽는 목회자’라고 표현하곤 했습니다. (150쪽)

 

인공호흡기를 낀 아버지는 어제 간신히 손에 들린 펜으로 이렇게 쓰셨습니다. “성도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아마도 아버지의 진심은 이것이었을 듯 합니다. “성도들에게 미안하다.”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성도들에게 미안해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깊이 더 넓게 보여주지 못하는 설교자로서 미안함 뿐 아니라, 자신의 교회론과는 달리 너무도 커버린 교회 때문에 또한 성도들에게 미안해했습니다. 아버지의 이 미안함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의 관심을 받고 있는 사랑의교회 건축 과정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교회론에 걸맞게 좀더 제대로 목회했다면 결코 더 큰 겨교회 건물을 지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더 큰 교회 건물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가 된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했습니다. (159쪽)

2013/01/23 23:30 2013/01/2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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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로 옥성호 집사님이 쓴 글을 보면서 대선 이후로도 잘 버텨냈던 멘붕이 왔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인이라는 게... 참 부끄러울 때가 많습디다. 매번 나라도 사과하고 교회 일은 내 일처럼 용서를 구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글을 쓰고 블로그를 하고 SNS를 했습니다.

그런 저이지만, 다른 분들은 어찌 생각하실지 몰라도 저는 고 옥한흠 목사님에 대해서는 한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땅에서 태어나 기독교인이 된 후로, 이 개신교 바닥 깊숙이 들어와서 실망하게된 분들도 많았지만 (이만열 교수님과 더불어) 옥한흠 목사님은 제가 여전히 존경하는 분입니다. 사실 그분의 지병은 목회를 통해 얻었다고 추정할 만큼 옥 목사님은 사랑의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며 자신을 괴롭혔고 급기야 암이라는 병을 얻어 돌아가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노무현 대통령보다 옥한흠 목사님이 더 그립습니다.

그 후임으로 오신 목사님이 지금의 사랑의교회를 멋지게 리모델링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건축을 추진하면서 행했던 일들에 대해 저는 2년전부터 대략 알고 있었습니다. 사적인 자리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분노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헌데 그 분은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 제가 몸담고 있는 복음주의라는 범주의 많은 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자입니다.

그분이 발행하는 한 기독교 잡지는 정말 탁월합니다. 그 분의 추천사가 들어간 출판사는 제가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참 많은 도움을 받은 곳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제 종교생활 영역 안에서 무소부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외면하고 지냈습니다. 워낙 꼭대기에 계신 분이라 실제로 마주칠 일도 없고 이름만 무소부재할 뿐 제가 속한 복음주의 단체나 교회 안에서는 사실 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2년을 버티다가 오늘 옥 목사님의 아들인 옥성호 집사님이 쓴 공개글을 읽고 말았습니다. 2년전에 들은 내용과 일치하였지요. 처음 그 얘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 뒤척이다가 끝내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났습니다. 지금은 눈물은 안 나지만 손가락은 심하게 떨리는군요. 참, 사람으로 태어나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데... 그런 생각만 계속 드네요.

어쩌면 제가 그 일을 잊은 건, 혹은 없던 일처럼 보내려고 했던 건 그 분의 이름이 들어간 매체, 기독교 단체들이 많고 그 안에 있는 분들과의 친분을 유지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간간이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농담처럼 던지곤 했지요. 그래야 했고, 그러고 싶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옥성호 집사님이 아버지에 대한 책을 냈을 때, 저도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고 그 책의 상당 부분을 타이핑해두었습니다. 그걸 다듬어서 글을 쓸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가 불거지면서 글 쓰려던 마음을 접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제가 타이핑한 옥한흠 목사님의 행적들을 읽으며 저는 또한번 마음이 괴롭습니다.

글을 쓰는 와중에 페친분과 댓글을 주고 받다가 "오정현 목사 같은 이가 지도자되는 복음주의가 기독교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에게 던진 말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로. 오늘부로 저는 오정현 목사의 영향력 아래있는 어떤 기독교 집단과도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것이 한국 복음주의를 아우른다면 저는 한국 복음주의를 버릴 것입니다.

한국 복음주의권은 저같은 사람이 버린다고 사라질 교파가 아닙니다. 게다가 훌륭한 신앙인들이 참 많이 속해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지도자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저는 더는 못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http://cafe.daum.net/howsarang/8Xq5/1833

2013/01/23 22:08 2013/01/23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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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자 감히 투표장을 기웃거린다는 이유로 흑인들이 죽을 때까지 맞는 사건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린치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1882년부터 1968년 사이 3,446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린치(맞아죽음)를 당했다. 그 가운데 159명은 여성이었다.

단지 죽이는 게 끝이 아니었다. 분노한 백인들은 린치를 당해 죽은 시신을 화형하거나 나무에 매다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흑인들은 신고조차도 두려운 일이었다. 범행에 가담한 이들을 법정으로 부르는 일도 없었다.

루이스 알렌은 두 명의 흑인 린치 사건을 다룬 시 'Strange Fruit'을 1936년 잡지 <뉴욕 티처>를 통해 처음 공개했다. 어느 정도 반응을 얻자 참상을 알리기 위해 시를 띄울 만한 노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빌리 홀리데이는 'Strange Fruit'을 부르며 애써 슬픔을 밖으로 터뜨리지 않았다. 남의 일인 것처럼 읊조리듯 담담하게 소화했다.

'Strange Fruit'은 빌리 홀리데이의 싱글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다. 그토록 열띤 호응을  얻었지만 정작 노래가 끝날 때마다 빌리 홀리데이는 언제나 침울해했다고 동료들은 회고한다. 그녀는 클럽의 인기스타가 되었지만 도약은 어려웠다.

도시 사람들은 틀을 깨는 그녀의 신선한 노래에 감동했지만 그래봐야 그녀를 노래하는 노예 정도로만 취급할 뿐이었다. 청중의 주문은 이런 식이었다. "그 흑인 열매인지 뭔지 대롱대롱 매달렸다는 그 노래 한 번 불러봐." 고급 호텔 공연이 잡혀 있을 때, 흑인인 그녀는 정문으로 출입할 수 없었다. 그게 호출을 받아 미국 전역을 오가며 노래하던 인기 가수의 삶이었다."

- 이민희, <왜 그 이야기는 음악이 되었을까> 중에서
2013/01/22 23:29 2013/01/22 2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