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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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12쪽)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낯선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변질되며, 여행하는 관광객의 향유 대상이 된다. 관광객, 또는 소비자는 더이상 면역학적 주제가 아니다. (13쪽)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이질성은 탈경계과정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면역학적으로 조직화된 세계는 특수한 공간구조를 지닌다. 그것은 경계선, 통로, 문턱, 울타리, 참호, 장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보편적 교환과 교류과정을 가로막는다. 오늘날 삶의 모든 영역은 일반적인 난교 상태로 특징지어지며, 이는 면역학적 관점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이질성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16쪽)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폭력 현상으로서 면역학적 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에 해당되지 않는다. (20쪽)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신경성 질환은 바이러스성 폭력과 같이 여전히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면역학적 도식을 따르며, 시스템에 적대적인 특이한 개별자나 이질성을 전제하는 개념으로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24쪽)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다...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28쪽)
 
긍정성의 과잉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31쪽)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attention)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35쪽)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컴퓨터가 인간의 뇌보다 더 빨리 계산할 수 있고 엄청난 데이터를 조금도 토해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컴퓨터에 어떤 종류의 이질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 백치가 보통은 계산기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 기계로 변신한다. (58쪽)

(한병철, "피로 사회" 중에서)

2012/12/01 22:55 2012/12/01 2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