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처럼 글쓰기, 글처럼 살기”(1)
- ‘소비되는 것들’에 대한 단상
결혼하고, 그러니까 아저씨가 된 이후로 체중이 많이 불었다.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 운동량은 부족하고 피로는 쌓인데다 잦은 회식자리 등의 이유로 한 번 불어난 내 체중은 줄어들 줄을 모른다. 해서 최근에는 식사를 하다가 음식을 남기는 경우가 잦았다. 아내의 조언대로 되도록 육식은 줄이되 채식을 많이 하고, 한 번에 많은 양의 식사를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런 연유로 회사에서 자율 배식으로 먹는 식사는 가져온 만큼을 다 먹지 않고 버리기 일쑤다. 그것도 내심 욕심대로 다 먹지는 않았다는 뿌듯한 마음을 가지면서. 하루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잔반을 국그릇에 담고 있던 중 어릴 적 아버지가 ‘쌀 한 톨도 버리지 말라’고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간혹 내가 남긴 밥그릇 위쪽에 남아 있던 밥풀을 보면서 일장 연설을 늘어 놓으시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남긴 한 톨의 쌀을 만들기 위해 농민들의 한 해 수고가 있었음을 상기시켰고 그럴 때면 나는 죄책감에 숟가락 소리가 심하게 날 정도로 밥그릇을 비우곤 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음식을 배에 버리지 말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는 요즘 세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덧 내 건강을 위한다는 핑계로 아무런 의식 없이 음식을 먹다가도 쉽게 버리게 된 셈이다. 사실 마트에서 얼마의 돈을 주고 쌀 몇 킬로그램을 사면 농민의 노고가 밥을 먹는 내게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지적대로 쌀과 농민의 소외, 쌀과 나와의 소외, 나아가 쌀을 경작한 농민과 쌀밥을 먹고 있는 나와의 소외가 발생하는 것이다. 누군가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그 면전에서 버리기는 어렵다. 그 사람의 수고와 애정이 나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한 끼의 식사조차 물질로, 얼마의 돈을 지불하면 살 수 있는 무엇으로 여기기 때문에 금전적 여유만 있다면 그 물질을 살 수도 있고 필요하면 쉽게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제는 모든 것들이 자동화, 인스턴트화 되어서 쉽게 똑같은 음식들을 공장에서 찍어낼 수도 있다. 그러한 음식들은 포드자동차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누가 만들었는지조차도 불분명하게 흐르는 과정 속에서 기계적인 반복작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음식들은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대량으로 소비되고 대량으로 버려지고 있다. 이러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의 사이클 안에서 보릿고개를 겪은 아버지 세대의 구태의연한 ‘쌀 한 톨의 미학’이 자리잡을 틈이 없음은 자명하다.
비단 음식뿐 아니다. 주어진 모든 사물들의 가치를 금전적 잣대로 바라보는 나는, 물건 귀한 줄을 모르고 산다. 어릴 때는 양말에 구멍이 나면 꿰매 신기 일쑤였고 우산이 고장 나면 수리를 해서 썼다. 솔직히 나이 스물이 넘어서는 옷을 헤질 때까지 입거나 낡아져서 버린 일이 거의 없다. 촌스러워져서 혹은, 스스로 지겹다고 생각되면 쉽게 옷을 버렸다. 중고책방에서 꼼꼼히 살피다가 책을 건지기도 했던 나는 어느새 돈을 벌면서부터는 헌 책이 있더라도 깨끗하고 반질반질한 책을 손에 넣는 것에 쾌감을 느껴 개정판이 나오면 같은 책을 다시 사기도 한다. 그런 책 몇 권 정도 살 형편은 되니까, 옷 몇 벌은 백화점 옷은 아니더라도 시장이나 마트에서 사 입을 형편은 되니까 옷이 멀쩡해도 내가 질리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고 또 비슷한 류의 물건을 '상쾌한 마음으로' 사대곤 한다. 이런저런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니 그 동안 나의 소비행태가 분명하게 보인다. 과한 욕심으로 사고 나서는 마음에도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 쓰지도 않고 버릴 날만을 손꼽고 있는 많은 물품들이 즐비하다.
복상 편집위원인 박총 형이 자주 언급하는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란 책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용품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전달되는지를 소상히 알려준다. 커피, 햄버거, 신발, 신문, 자동차와 컴퓨터까지 그것의 재료가 생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의 부담과 가공과정에 관련된 많은 노동착취, 그리고 그 물건을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들이 소상히 적혀있다. 그런 일련의 전지구적 환경, 노동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물건을 사고, 쓰고 버리는 일련의 나의 일상은 전혀 정상적이지 않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런 일상에서의 윤리관이 없는 채로 사회 참여나 운동, 그리고 복지나 윤리에 관한 말들을 참 많이 내뱉고 산다. 누군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참으로 두렵다. 나의 거창한 생각, 나의 인생, 나의 기도 속에서도 무신경하게 받아들이는 악한 일상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녹 색평론을 정기구독하고 교계에서 실무자로 활동하는 후배가 있다. 비교적 검소하게 사는 그녀는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웃으며 '적게 벌고 적게 쓰는 게 체질에 맞다'는 얘기를 했더란다. 사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사실 난 많이 벌어 적게 쓸 궁리를 했었는데, 그건 결국 따지고 보면 많이 벌어서 적게 쓰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내 속내를 감춘 것이었다. 수입에 여유를 두고 싶은 것은 어느 정도의 물질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내심 감추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이런 내 속내를 쉽게 이기지 못할 성 싶다. 하지만 이제는 노력하고 싶다. 내 미시적인 삶이 정화되지 못한다면 내가 자주 말하는 거시적인 삶의 윤리적 토대는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도 가면을 쓰지 않는, 일관된 삶을 살고 싶다. (끝)
**월간 <복음과상황> '08년 4월호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