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지성과 삶의 일치를 향하여
/ 김용주
공부기계, 대학에 들어가다!
중 고등학교 때 나는 이른바 모범생 계열의 학생이었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누리게 되는 혜택이 솔직히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럴수록 친구들 사이에서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 사물함은 종종 반 친구들에 의해 심하게 찌그러져 교실 바닥을 나뒹굴었으니 말이다. 점수와 등수로 학생을 평가하던 고등학교 시절, 나는 입시를 위해 친구들을 포기했고 불편하기만 한 학교생활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기나긴 입시 교육을 마치고 1995년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전교 등수가 나보다 한참 뒤였던 반 친구를 만났는데, 그는 “너처럼 공부해도 나랑 똑같은 곳에 입학한 걸 보니 고등학교 때 너처럼 공부 안 하길 잘했다”며 비웃었다. 그의 빈정거림에 번번이 짜증이 났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 친구와 같은 종착역에 내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이젠 모든 게 끝났으니 털어 버리자고 마음을 추슬렀다.
처음엔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이 신기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느슨해졌다. 여전히 주기율표를 외우고 물리학과 각종 역학들을 배워야 하는 수업은 지루하기만 했다. 나는 공부에 지친 새내기였고 공부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과 거의 매일 포켓볼을 치고 맥주를 마시다가 밤늦게야 집에 들어가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그 생활도 조금씩 지겨워졌다. 시간은 넘쳐나는데 딱히 할 일은 없고 친구들과 어울려도 공허한 마음만 커지는 게, 은퇴한 노인이 된 기분이었다. 내 인생의 종착역은 대학이었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기독교 세계관을 접하다
10 년도 넘은 과거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건, 대학을 처음 들어갔을 때의 혼란했던 상태를 독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어서다. 지금도 여전히 시행착오와 혼란, 그리고 무력감을 경험하지만 내 삶에서 그때만큼 혼란스러웠던 시기는 없었다. 대학 공부에 열심을 내거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여력이 없었던 내가 다시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기독교 세계관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공 허함을 달래 줄 무언가를 찾고 있던 차에 교회 목사님이 한 캠퍼스 선교단체를 권해 주셨다. 그곳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처음 접했고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신앙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서 머리에 금빛 고리를 달고, 성가대가 주일마다 걸치는 하얀 옷을 입고, 하루 종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줄 알았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조차도 나에겐 다분히 형이상학적이고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망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신학과 철학 책들을 공부한 후 기독교를 버리고 교회를 떠나신 나의 아버지의 영향으로 지적 성실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나는, 지성의 사용이 오히려 신앙을 견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됨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금 학문 연구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것과 더불어 역사와 교회사, 신학 서적들을 스펀지가 잉크를 빨아들이듯 닥치는 대로 읽어 댔다. 건성으로 읽던 성경은 깊이 연구할수록 매력적인 책으로 다가왔고, 성경의 ‘난제’에 부딪히면 결론이 날 때까지 두문불출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전공 이외의도 다양한 수업을 들었고 그때마다 조금씩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고민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필독서와 참고서적은 물론 복음주의권 책들을 병행해서 읽었고 그것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물론 A+를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종교적 시각을 드러내는 글은 처음부터 평가 절하되기 일쑤였다. 참고서적에 기독교 관련 책들이 포함되는 것 역시 학문적 신뢰도를 낮추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수업 분위기와는 별개로 신앙과 학문의 통합된 관점을 갖는 훈련들이 지금의 내 신앙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철학과 사회학, 인문학 고전들과 전공 분야의 책들을 비롯하여 한국사회의 정치사회적 이슈를 다룬 책들까지 두루 읽었는데, 그때부터 대학생으로서 캠퍼스와 한국교회, 나아가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사회참여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는 이후에 기독매체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기독학생연합회나 기독총학 진출모임, “복음과상황” 독자모임,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전히 캠퍼스에서 학업과 신앙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기독학생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대학교를 전도의 대상이자 영적 전쟁터로만 인식하여 학업보다는 기독공동체 활동에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기독공동체 내에서 인정받는 리더들이었다. 이들은 신앙과 학문을 대립구도로 설정한 후 학업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그것이 신자의 ‘고난’이자 포기해야 할 ‘이기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른 리더들은 지금 함께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짖고 있는데 시험 기간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시험공부를 포기하더라도 기도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의무이자 기쁨이 아니겠는가? 시험 전날 공부를 포기하고 캠퍼스 예배와 아침 기도회에 참석했더니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간증하는 학생들이 실제로 많이 있었다.
삶의 변화를 향해
나는 대학 졸업 때까지 성경은 열 권 정도, 책은 대략 천 권 정도를 읽었다. 부끄럽게도 그때는 자주 나의 독서량을 자랑하고 다녔는데, 지식의 양보다는 인격 성숙과 실천적 삶의 열매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절감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부족한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내게 기독교는 교양 있어 보이게 만드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백화점에서 심사숙고하여 고른 명품 청바지처럼 내가 선택한 종교가 나를 빛내 주길 내심 바랐다. 하나님을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여기지는 않았지만 착하고 바르게 살면 보상을 해주시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기독 지성이 내 안에 싹트면서 신앙은 나를 변화시켰다.
대학 시절, 타일공장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는데 생색내기를 좋아했던 나는 한 집회에서 낮아짐을 훈련하기 위해 공장에 간다고 간증했다. 사실 공장 일은 군복무를 대체하는 것이었고, 사장님이 아버지 친구 분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편한 곳이었다. 하지만 공장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예상치 못한 이질감이 있었다. 대화중에 그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가 나올 때면 최대한 아는 만큼 설명해 주려고 애썼는데, “그래, 너 잘났다”라고 호통 치는 직원들의 비난과 따돌림으로 인해 결국 3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에 나는 공장 이야기만 나오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그들을 비난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어렸고 사회 경험도 없었으며 교만했다. 기독교 세계관을 접하고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당돌하고 어설프고 어리석었는지 인정하게 되었다. 의도하지 않은 변화였다.
시간이 흘러 다시 군복무를 위해 행정직 공무원의 행정 보조로 일할 때였다. 여느 때처럼 한 공무원이 잔심부름을 시키려고 날 불렀다. 다른 일들로 정신이 없던 나는 죄송하지만 다른 급한 일이 있다고 말했는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내 얼굴을 향해 던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날아오는 신발을 한 손으로 잡아냈고, 신발을 가져가 무릎을 굽힌 채 태연히 그의 발 앞에 내려놓고는 조용히 사무실을 나왔다. 신기하게도 그날 나는 그의 모욕적인 행동에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들은 나를 예전보다 더 잘 대해 주었고 신발을 집어 던진 사람을 제외한 직원들과 더욱 친해졌다.
공장에서 악동이었던 내가 이제는 겸손한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날 이전에는 한 번도 나에게 악한 마음을 품은 사람을 조건 없이 용서해 본 적이 없었다. 겉으론 참았어도 마음으로 살인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날 ‘신발 사건’을 계기로 내 마음의 변화를 체감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직장과 소명
CCM 가수를 꿈꾸기도 하고 미디어 비평에 흠뻑 빠져 신문방송학과로 전과 계획을 세우기도 하던 나는, 지금 자동차 연구소에서 부품 설계 업무를 하고 있다. 지금도 종종 지인들은 내게 설계가 적성에 맞느냐고 묻는다. 전공이 싫었던 건 아닌데 졸업을 앞두고는 기독교 단체 주변을 기웃거렸었다.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그런 일이 더 신앙적이고 가치 있어 보였나 보다. 마지막까지 전공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채 졸업반이 된 후, 문득 4년 동안 공부한 전공을 살리지 않겠다고 결정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부모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으면서 4년간 써먹지도 않을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전공 살리기는 대학원 생활을 거쳐 자동차 연구소에서 설계를 하고 있는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가능성 있어 보이는 일들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말로 논리를 세우는 일들을 곧잘 했던 것 같다. 창피하지만 때로는 실행해 보거나 경험해 보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도 마치 겪어 본 양 과장을 하기도 했다. 난 가끔 내가 공대생이 아니었다면 더욱 허풍이 세져 과장법에 능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내 본성이 그랬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소한 것들을 꼼꼼히 챙기고 책임감 있게 마무리 짓는 데는 서툰 사람이었다. 지금 나는 자동차를 구성하는 2만 개의 부품 가운데 한 시스템을 설계하면서 지성적 성실함에 대해 배워 가고 있다. 특히 말단 연구원 자리에 있으면서도 마치 CEO라도 된 것처럼, 큰 방향을 설정하고는 사소한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내 모습을 날마다 직시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직업이 소명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내 직업은 공학에 호감을 느껴 전공으로 선택한 데 대한 책임으로 시작한 것이었고 솔직히 아직도 확신은 없다.
전공과 신앙에 있어 좀더 거창한 통합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두 가지 고민이 있는데, 첫째는 앞서 말한 신앙과 전공, 신앙과 업무의 통합 문제다. 효율성과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서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신앙과 업무를 아우르는 적용점을 찾기란 참 어렵다. 가끔은 전공 분야에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채 의욕만 앞세우는 기독교인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신앙적인 잣대로 자신들의 분야와 조직을 성급하게 비판하면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이제야 조금 설계에 익숙해진 경력 5년차의 설계자이니 말이다.
둘째는 환경 문제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 문제다. 소형차의 가격을 낮추기 위한 부품의 원가 절감 방안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낸다거나 연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 혹은 부품 업체에서 제조 공정상 폐기물이나 폐수들을 줄일 수 있는 재질과 공법 연구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 만일 부품 설계자가 아닌 차종 프로젝트 기획자라면 단품을 넘어 좀더 거시적인 영역에서 이런 방향들을 추진해 갈 수 있을 듯하다.
윤리적 문제
기 독 지성을 이야기하면서 첨언하고 싶은 부분은 윤리적인 문제다. 석사 논문을 마칠 즈음 최종 발표를 앞두고 나는 논문에서 제안한 방법의 효율성 여부를 판단하는 압축률에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류가 수정된 방법은 그간 발표된 논문보다 압축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발표가 한 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교수님께 사실대로 말하면 졸업을 못할 게 뻔했고, 만약 이 논문 주제로 개선된 결과를 얻을 수 없다면 다음 학기 졸업도 기약할 수 없었다. 이미 직장은 최종 면접까지 합격한 터라 더 죽을 맛이었다. 간혹 논문에 수치를 조금씩 고치는 경우를 봐오던 터라 대충 임기응변으로 이 상황을 넘기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추후에 발견된다 해도 석사 논문에서 발견된 수치 오류를 누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까 싶기도 했다.
그날 저녁, 문득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멍하게 한참을 있었다. 석사 2년을 공부하고도 중요한 시기에 결과를 속여 가면서까지 졸업하려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결국 교수님에게 사실대로 말씀드렸고 일주일간 압축률을 개선하지 못하면 논문 발표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개선 방법을 고심한 지 사흘 째 되던 날 새벽에 손쉽게 개선이 되었다! 사흘 만에 개선할 수 있었던 것을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평생 죄 의식에 눌려 지냈을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윤리적인 문제도 있다. 직장에서 다른 팀과 적대 관계에 있거나 경쟁에 놓이는 경우, 그 팀의 직무 유기를 부각시키거나 우리 팀의 성과를 과대 포장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업무분장에 있어서도 나와 우리 팀의 책임을 축소하고 다른 팀을 최대한 이용해야 업무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다. 동료 간에는 어떠한가. 고과를 높게 받기 위해 연구 성과를 먼저 보고하려고 애쓰거나 아예 후배 사원의 기술이나 보고서를 가로채기도 한다.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는 개인에서부터 팀간의 알력 다툼을 넘어 노조문제나 협력 업체에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문제와 같은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에까지 나아간다. 일보다 사람을 중시하고 성공보다 동료들과의 지속적인 관계에 힘쓰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직장에서는 인정받지 않으면 쉽게 도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과 사회의 윤리적 문제들을 깊이 사유하고 작은 일부터 신앙적 양심에 걸맞은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시대의 대학생들에게
아 직도 신앙적으로 갈 길이 먼 내가 이 책을 읽을 대학생 독자들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건 어떤 결론을 내기보다는 함께 고민해 볼 것을 제안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디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몇 가지의 조언 아닌 조언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1. 관심 분야의 도서 목록을 만들라. 전공에 상관없이 호감이 가는 분야의 도서 목록을 만들라. 어떤 분야든 입문서와 개론서 그리고 참고서적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2. 두꺼운 책을 많이 읽어라. 군복무 중에 틈틈이 책을 읽던 내게 총무과장님이 했던 말이다. 나이가 들면 두꺼운 책을 볼 시간도, 그럴 능력도 떨어지게 되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으라고 권하셨다. 정말 맞는 말이다.
3. 책을 읽고 요약하고 자기 생각을 메모하라. 대학 이전까지 책 읽는 습관이 안 들어 있던 나는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남지 않아 고생을 했었다. 각 장별로 요약하고 그에 대한 자기 생각을 A4 한 장 정도로 정리해 두면 한 권의 책을 머릿속에 넣어둘 수 있다.
4. 실천적 지성을 훈련하라. 지적 탁월함을 좇다 보면 자신의 인격이나 실천성과는 무관하게 유희적인 차원에 머무르게 되는 수가 많다. 노엄 촘스키나 제레미 리프킨 같은 실천적 지식인을 본으로 삼으라. 또한 지식을 자랑하기에 앞서 주변에 가까운 이들부터 어려운 이들에게 작은 것부터 몸으로 섬기는 것에 더욱 열심을 내자.
5. 진로를 정하면 최소 2년은 매진하라. 나는 회사에 들어간 첫날부터 후회가 밀려왔다. 다른 일이 더 좋아 보였고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그러나 1, 2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업무에 대해 명확히 알기 어렵다. 업무가 익숙해져서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는데도 후회가 된다면 그땐 즉시 다른 길을 모색하라.
6. 코람데오를 기억하라. 내가 결정한 모든 일들이 그분 앞에서 이루어짐을 직시하라. (끝)
**이 글은 <공부하는 그리스도인-도널드 오피츠/IVP> '부록3'에 실린 원고입니다.
김용주
대 학원에서 CAD 분야를 전공했고 학부시절 IVF, 한양대기독학생연합, 복상독자모임 활동을 했다. 지금은 현대기아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선행차량의 부품 설계 업무를 하고 있으며 그동안 <복음과상황>에 '도발적인 캠퍼스보기', '기독교세계관 운동에 대한 소고' 등을 연재한 바 있다.